뱅드림/ㅁㅅㅋㅋ

(미사코코)도피처에서 되돌아보는길 -2

백오판다 2018. 4. 29. 20:37
2.

하로하피를 떠나면 나는 내가 정말 나락으로 떨어지는게 아닌지 그때는 자주 생각했었다.
잿빛세계에 빛을 더해준 내가 좋아하는것을 더 솔직하게 받아들여주게 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귀여운 양모펠트를 동생에게 줘버리고 언제나 적당적당이 최고라며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불안에 떨며 두려웠던것과는 달리 이미 변한 내가 다시 그전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던걸로, 나는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것을 찾을 수 있고 여전히 귀여운것은 나한테 안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방한켠에 장식해둘 수는 있다.
세상이 일변해 잿빛으로 변하는것도 아니었고 여전히 석양은 황홀할 정도로 나를 매혹하고 햇살은 따사롭게 나를 보듬는다.

하로하피가 나를 변하게 한 것은 맞지만 내 전부는 아니었다.
언제 해체될지 모른다고 불안했던 카논씨와 카오루씨가 졸업하던 해에는 울면서 떠나지 말아달라고 매달렸을때는 상상도 못했던 미래의 모습이었다.

"오, 미카엘 오늘은 왠일로 그렇게 격렬한 스크래치를 선보였나? 안좋은일이라도 있었어? 뭐, 난 그런 거친음도 좋지만 최근의 노래에 익숙해진 팬들은 걱정되나 보더라고."

"...그저 지금까지 믿었던게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요. 애지중지하던 어린시절의 추억이 담긴 지금보니 이리저리 기운자국 투성이였다고할까.."

"뭐야. 보기보다 어린애같은 취향이네? 그야. 네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소중히 여겼다는 증거잖아. 낡아서 해져도 다시 꿰메고 솜이 튀어나오면 갈아 넣고. 보물이란 바로 그런것이지. 소중히 여기도록해."

여기 네가 받은 팁이다.
탁 하고 평소보다 무거운 소리가 나는 봉투는 내 상태에대한 걱정이 담겨있는지 많은 액수였다.

저들이 보는 나도 분명 탈이라는 하나의 거짓으로 덮인 속을 알수없는 무언가이지만 분명 이렇게 마음을 쓸 정도로 소중한 존재로 여겨주고 있는 것이겠지.
거기에 허구의 존재라던가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로하피도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코코로가 모아만든 하로하피는 서로의 단점이나 과거의 트라우마로 이리저리 삐쭉삐쭉 튀어나왔지만 다시 추스리고 격려해서 비틀비틀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갔다.
그 과정이 나에겐 무척 소중하고 빛났었지, 멀리 떨어져서 보지 못했다고 소중한 감정을 잊어버릴뻔 했다.

반드시 어리숙했던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이 성장한 지금에서야 보여온 것일지도 모른다.

"...저기 매니저님 저 다음주는 대타를 구해주실 수 있나요?"

"아아? 너 역시 뭔가 나쁜일이 있었던거야?"

"아뇨. 오히려 용기를 받아서 각오가 됐다고 할까요. 생각보다 저는 많은 사람이 아껴줄만큼 가치가 있는 인간인지도 모르겠어요."

"흠.. 넌 한번도 쉰적이 없으니 그정도는 해줘야지. 그런데, 그런말은 쉽게 하지마. 나도 저 사람들도 모두 너를 좋아하는데 그런말을 들으면 충분해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 내가 뭔가 잘못했나 하고 반성한다니까. 네가 원하는건 그게 아니겠지만."

"앗. 죄송해요. 그냥.. 매니저님이랑 팬분들에게 감동한거에요. 그렇네요.. 오해할수도 있구나.."

그럼 내 추측대로라면 나라는 존재와 미셸에게 의지한 코코로는?
나는 내가 코코로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내가 없더라도 코코로는 괜찮으니까 떠났다.
하지만 코코로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였고 오히려 자신때문에 떠났다고 생각했다면.. 내가 아무말도 없이 사라진 이 몇년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다음주 비행기표를 예매하며 마치 금단의 상자를 여는것같은 배덕감을 느꼈다.
만나러가는게 아닌 멀리서 지켜보러가는 잠깐의 방문.
아는 사람의 전화번호도 이사를 갔다면 주소조차 모르니까 만날 가능성은 지극히 낮고 오랜시간이 지난 지금 외모도 많이 바뀌었겠지.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감과 혹시 만나버려서 서서히 잊었다고 생각한 검은 감정이 튀어나오진 않을지 걱정과 정말 내 추측이 맞았다면..하는 불안감이 가슴을 술렁거리게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없어진 후의 하로하피를 알고싶다고 생각했다.



돌아올 생각이 없었던 집의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키가 엄청 자란 동생이 안겨왔다.
내귀의 피어스라던가 운동의 더욱 다져진 복근이라던가를 이것저것 호기심에 차서 살피더니 꼬옥 끌어안고 보고싶었다고 말해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이번 귀국에 의미가 생긴것 같았다.
마주 꼬옥 안아주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내일부터는 발품을 팔아야할테니까 충분히 체력을 회복해둬야한다.

"그런데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뭐니? 영원히 떠날것처럼 말했었는데."

"음.. 여기에 아직 소중한걸 남겨뒀다는게 기억났거든요."

"그래.. 이 먼 거리까지 돌아올 정도라면 정말 중요한것이겠지. 꼭 되찾기를 바랄게."

되찾는다라.. 그걸 생각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이미 버리고 떠난 마당에 누군가가 대신했을 자리를 탐내서는 안된다.
어디까지나 소중하고 중요한 추억이 아직도 그대로인지 확인하고 다시 묻어놓을 생각이다.
운동장에 묻은 타임캡슐처럼 그렇게, 꺼내서 확인하고 추억에 잠긴후에는 다시 다음을 기약하며 안치한다.

버리고 떠난 사람이 흙발로 돌아와봤자 폐밖에 되지 않으니까.



오랜만에 방문한 써클은 전보다 손님이 많은것 같았다.
추억에 잠겨 돌아보니 아직도 활동하는지 포핀파티의 전단지가 있었다.
기념으로 가져가도 나쁘지 않을것 같아서 집어들었다.
선글라스 너머로 비치는 이젠 어른이 된 포핀파티의 멤버는 사진인데도 불구하고 활기가 가득하다.
적어도 이들은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은 모양이다.

"저..저기. 실례지만 혹시.. 미사키..?"

전단지를 구경하며 서있다가 느닷없이 이름을 불렸다.
일단 후드도 덮어쓰고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는데 알아채다니 친했던 친구중에 한명일까? 생각해보니 익숙한 목소리이긴했다.

"어라. 리미? 그렇지. 전단지가 있으면서 왠지 나눠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어딜갔었던거야! 모두 네가 사라졌다고 수소문했었는데.."

리미가 횡설수설하며 화도 냈다가 울기도했다가 안심하기까지는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역시 친한 친구에게는 말을 하고 갔어야했나 후회했지만 그 당시에는 내 감정에도 벅차서 남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럼, 미국에 가서 대학을 다니다 온거야? 대단해..! 하지만 아무말도 안하고 간것은 용서하지못하니까!"

"아니, 나도 그건 잘못했다고 생각한 참이니까.. 그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거든. 정말 다 버리고 갈 생각이었어."

"...응.. 그럼. 지금은? 돌아온거야?"

접하면 안되는 민감한 문제라고 생각했는지 말을 돌려준 리미에게 마음속으로 감사하며 나는 아직 대학을 졸업한것은 아니고 주말동안만 있을거라고 전했다.
리미는 그렇다면 꼭 라이브에 와달라고 티켓을 주었다.
갈지 아닐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주머니에 넣고 써클을 떠났다.

리미를 경유로 하로하피가 써클에서 연습을 하지 않은지 한참이 됐다는걸 알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써클이 아니더라도 더 넓고 장비도 좋은 츠루마키저택이 있으니까 평범함을 추구하던 내가 아니면 거기서 연습을 해도 상과없었겠지.
나는 조금 불안한 예감을 느끼면서 다음 목적지인 상점가로 향했다.

카페에 들어가 아까 받은 티켓을 꺼내서 자세한 일자를 살펴봤다.
내일. 오후 7시부터 시작.. 걸즈밴드파티 라이브?
포핀파티만의 라이브는 아니었던건가..
걸즈밴드파티라면 분명 포핀파티와 하로하피를 포함한 5밴드가 모여 만든 연합같은거였지.
하지만 라이브에 참여하는 밴드수가 4개뿐?

아이돌밴드인 파스파레라던가 본격적인 프로데뷔를 했을 로젤리아중에서 빠진걸까.
뒷면으로 돌려 참가 밴드란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굳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하로하피가..없어? 이런 즐거울거같은 기획에 빠진다고?"

이해할 수 없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아, 그런가? 카논씨라던가  카오루씨가 뭔가 바쁜 일이라도 있었다던가..하는...
이제 막무가내인 코코로를 말릴 나도 없는데?
카논씨나 카오루씨는 억지로라도 하로하피의 일정에 맞추어 약속을 바꾸는 사람들이다.

검은옷의 사람들이라던가, 카논씨가 내가 없어진 자리를 대신해서 말리는 포지션에 들어갔다던가?
아니면 새로운 미셸이 스케쥴을 조정했다던가..

하지만 그렇게 온갖 이유를 붙여도 납득 할 수 없어서 점점 더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불안감이 몰려왔다.
내가 없는 하로하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상점가의 키타자와 정육점은 아직 건재했다.
단골도 많고 시그니처 고로케같은 인기상품도 있으니까 망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쉬는날이었기라도 하면 이제 누구에게 찾아가야했을지 고민했겠지.

새삼 이제와서 메모 하나도 써놓지 않고 전화전호를 다 지워버린 내가 원망스럽다.
뭐, 과거의 나는 미래에 이렇게 돌아올줄은 몰랐겠지.

"안녕하세요. 저, 하구미 있나요?"

"응? 하구미 친구니? 지금 불러줄테니까 잠깐만 기다리렴."

하구미는 찾아오는 친구가 많은 모양인지 부모님은 딱히 의심도 안하고 불러내주었다.
일단 치렁치렁한 금장식이라든가 팔찌, 반지같은 DJ를 할때 멋을 부리는건 안했지만 귀의 피어스라던가 선글라스에 후드는 의심할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경계심이 엹은건 가게를 운영해서일까.

"...어..어라..? 미군? 미군이야!?"

"앗. 하구미. 오랜마..으억!!"

머리를 길러서 순간 못알아볼뻔한 하구미가 나를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나는 내가 꽤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다들 한번 보면 알아채는게 그다지 외형은 변한게 없을 걸까?
키도 자랐고.. 뭐, 꾸미지 않은건 인정한다.

"흐윽..후흑.. 도대체 어딜 갔었던거야? 어엉.. 찾아다녔다고.."

"미안해.. 말하지않고 떠나버려서. 저기, 일단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당장 무릎꿇고 사과해도 모자란것을 알지만 손님들과 하구미의 부모님의 시선이 신경쓰인다.
하구미의 말로 나쁜일이 아닌걸 알았는지 제지하는 기색은 없지만 예의주시되고 있는 느낌?
하긴 온통 어두운색 계열의 옷이니까..

하구미는 내 말에 주변을 둘러보더니 홧 얼굴을 붉히고 내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했다.
확실히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이것에서 느끼다니 하구미에게는 실례지만 남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 미군은 졸업하자마자 어디로 가버렸던거야? 검은옷의 사람들도 이야기해주려 하지 않았고.. 다들 많이 슬퍼했다고.. 미셸도 변해버리고. 모두 웃음을 잃어버렸잔 말이야!"

"...정말 미안해. 그럴 이유가 있었어. 내가 스스로 소중한것을 파괴해버리지 않을까 무서웠거든. 지금도 사실 완전히 돌아온것도 아니고 이번 주말동안만 잠시 방문한거니까."

"..여전히 미군의 말은 너무 어려워서 잘모르겠지만 그렇구나.. 미군은 아직 돌아온게 아니구나.  그럼 하로하피는.. 아직도 활동재계 할 수 없겠네."

순간 내 잘못들었는지 내 귀를 의심했다.
하로하피의 활동재계?
코코로나 하구미도 나와같이 졸업년도이고 취업준비로 바쁘다던가?

하지만 그런 가벼운 느낌의 말은 아닌것같았다.

내가 접해도 되는 문제인지 선뜻 다가가기 힘들었다.
겨우겨우 추스리고 일어난 내가 이 화제 접하면 다시 속절없이 어두운감정에 질질 끌려가는게 아닐지 무서웠다.
나는 책임이라는것에 약한 사람이다.

"하로하피.. 내가 떠나고 활동을 중지한거야? 작사나 작곡은 어차피 코코로의 콧노래나 발상이었고 라이브회장이라던가 연습장소는 검은옷의 사람들이 있고.. 딱히 내가 없어도 상관없잖아."

이때 미셸의 이름은 뺀다.
미셸에 내가 들어가 있었다는것을 끝까지 몰랐던 3인방에게 설명해봤자 알지 못할거란 표면적 이유는 놔두고서라도 바뀌어도 문제가 없었다고 하로하피 멤버의 입에서 직접 듣고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서 조금 나아졌어도 역시 나는 아직 겁쟁이이다.

"...미군 이제 숨길 필요는 없어. 모두 알고 있으니까. 미군이 미셸이었던거지? 미군은 하로하피에 절대 없어서는 안돼는 사람이야."

눈물을 슥 닦은 하구미가 나를 보면서 한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어떻게? 보다 어째서가 앞선다.
그렇게 알아채달라고 말했을때는 아무도 못알아줬으면서 어째서 이제서야 알았다는 말인가.
차라리 계속 몰랐다면 좋았을거란 괜한 원망까지도 떠올랐다.

벌써부터 부글부글 떠오르는 검은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다.
전부 나아졌다고 생각했지만 난 아직 완전히 성숙한 어른이 되진 못한것 같다.
하로하피가 중요한만큼 이 화제는 나를 자극해오는것 같다.
좀 더 조심해야지. 이쯤에서 멈춰야할까?

"...미셸이라니? 난 잘모르겠는데. 하여튼 인형탈이니까 누군가는 들어갔겠지만 그렇다면 누가 들어가든 같은게 아냐? 라이브를 하는데에 아무상관도 없잖아 그런거."

"하지만! 미구.."

"그만하자 하구미. 이런걸 듣고싶어서 온게 아니야. 누가 들어가든 미셸은 미셸이야. 그렇도록 대해온것은 너희잖아? 변할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조금 위화감 정도는 느낄지도 모르지만 폭신폭신한 털이라든가. 겉모습뿐인 퍼포먼스는 누구라도 할 수 있겠지? 아. 전문의 수트액터라면 더 뛰어났을지도."

"그런게 아니란것은 미군도 알잖아! 그래, 라이브회장의 선정이라든가 연습장소는 다 준비되었어. 노래도 코코로가 콧노래를 부를 기분이 아니었지만 프로의 작곡가가 준비해줬고. 미셸에 다른사람이 들어가있는것을 모를만큼 퍼포먼스도 화려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미군이 없어졌는데!"

미군이 없어져서 모두 미소를 잃었는데!
하구미의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돈다.

내가 없어진게 원인이라고?
전부 제대로 준비됐는데 그게 뭐가 문제란거지.
친구가 전학갔다던가 이사라던가.. 잠시 동안은 슬퍼도 곧 잊잖아. 나도 그렇게 잊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없어져서.. 다들 미소를 잃었다고? 하지만.. 미셸이 나란거 아무도 몰랐잖아. 바뀌어도 상관없는거잖아."

"미셸이 바뀐것도 슬프지만 아니야. 미군이 없어진게 미소를 잃게 한거야. 우리가, 미군이 떠나는 이유조차 모를정도로 미군에 대해서 몰랐다는게 문제야!"

그것은.. 내가 필사적으로 숨긴것으로.. 알아채지 못한것은 어쩔 수 없다.
세상을 모두 웃음으로 채우려는 하로하피는 다망하니까.
그 뒤를 받히고 있는 배후자 한명에게 고개를 돌리기에는 시간이 없으니까.

게다가 지금 이렇게 우는 하구미 앞에서도 이유를 말할 생각은 하나도 없으니까.
역시 이것은 내 문제이다.
말해봤자 해결되는것은 없고 말해서 바뀌는게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는 하로하피 내에서는 절대적으로 틀렸었지만 어른이 된 우리 사이에서는 그것이 사실이다.

"여전히 이유는 말 할수 없는데. 절대 모두의 잘못이 아냐. 내가 남을 상처입혀서까지 여기에 남을만큼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거지."

"...미군은. 나를 의지하지 않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어. 그냥. 그냥. 나도 걱정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갑자기 축 처진 하구미는 더이상 나에게 캐물으려는 의미가 없어보였다.
자신이 의지할만한 대상이 아니란것에 우울해하는것 같지만 나는 지금껏 들은 하로하피의 정보들이 계속 내 머릿속을 뒤흔들어서 더이상 위로 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것이 아니더라도 더이상 내가 하구미에게 할 말이 더 있었나라고 물으면 아마 없었을것이다.
냉정한 말이지만 지금까지 하구미가 의지 한 적은 있어도 내가 하구미에게 의지하는 이미지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미군이 떠난 이유 듣지는 않았지만 카논짱선배에게는 말 할 수 있어?"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간 하구미가 종이에 슥슥 숫자를 적어서 내밀었다.
카논씨 이름을 꺼낸거면.. 전화번호인가.
카논씨라면 돌아오기 전에 정한 마지노선에 접하지 않는 빠듯한 선일지도 모른다.

"나, 사실 미군이 돌아오면 이유같은건 묻지 않고 잘돌아왔다고 웃으면서 마중하려고 했어. 그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막상 만나니까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어. 그러니까. 미군이 다시 왔을때는 웃으면서 마중나갈게. 또 와줄거지?"

애써 추스리고 웃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또 올지 아닐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는 말 대신에 끄덕 고개를 한번 숙이고 나왔다.

내가 하로하피 존속에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존재였다는것이 맴돌고, 그렇다면 계속 고통받아도 옆에 머물렀어야했나 고민한다.
화상을 입을 정도로 강렬한 빛에 매혹되는 불나방같은 인생은 멀리서 떨어져보면 지극히 미련하지만 필사적인 나방에게는 목숨을 받칠만큼 매력적이었겠지.

파멸밖에 예견되지 않은 코코로와의 관계에 먼저 발을 뺀건 네가 나로 인해 상처받지 않길 위해서였는데 그것마저도 너에게서 미소를 뺏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했을까.

이미 늦은 답을 찾으러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