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드림/ㅁㅅㅋㅋ
(미사코코)성격리버스-4
백오판다
2018. 5. 2. 09:38
나를 더 알고 싶다니, 무슨 의미야?
세상 모든 황금을 가득 안고 있다고 생각했던 눈은 바닷가의 노을빛처럼 불그스름한 열망이 깃들어 있었다. 태양빛은 뜨거워. 자칫하면 눈이 멀어버릴지도 몰랐다. 마음이 술렁여, 눈 안에 들어있던 열화가 종이에마저 번진건지 쥐고있던 티켓마저 뜨거운 것 같았다.
놓칠 것처럼 떨리는 손을 붙들었다.
이따금, 아니 꽤 자주 코코로는 그러한 눈으로 자신을 보았다. 그 눈 안에 있는 제 자신이 불타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끔.
그 눈을 가린다면 어떨까. 미사키는 종종 코코로의 눈을 제 손으로 가리고 싶었다. 가벼운 충동이었으며, 몹쓸 생각이기도 했다.
우습게도. 있는지도 몰랐던, 마음 한구석 자리 잡은 욕심은 어느새 몸을 부풀려 어깨를 치며 지나가고 있었지만, 미사키는 그 제스쳐를 모른 채 했다.
세상은 푸르른 봄날처럼 따스했는데, 갑작스러운 여름이었다. 난 오히려, 널 더 알고 싶어졌다.
다른 이의 웃는 얼굴은 따사로운 봄이었고 소중한 사람들과 지내는 시간은 풍족한 가을이었고, 당신은 여름이었다.
코코로, 당신만이 여름을 나타내는 그 모든 것이었다.
.
" ... 아르바이트? "
한참 여객선을 단장하고 있어야할 검은옷 SP에게 통보처럼 들려온 말에 츠루마키 코코로는 이벤트를 짜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선글라스를 낀 검은옷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로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오쿠사와님이 주말 약속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평일로 조정했습니다. "
" 아니, 아르바이트 한다는 소릴 처음, 듣는데? "
조금 기막힌 심정으로 물어보면,
" 인형탈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하루 뒤, 시간 제약 없이 주 3일 카페 아르바이트를 구한 걸로 확인되었습니다. "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 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머리 아파. 코코로는 미사키에게서, 아르바이트의 아-자도 들은 적이 없었다.
... 그러고보면 당연한가. 생각해보면 방과후에 만나는 건 항상 미셸이었다.
미사키에게 이후 무엇을 할 거냐는 단순한 물음도 그 속을 알고 싶다는 생각에 가득 차 물어보지 않았다. 오늘의 전면승부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애프터 신청이었으며, 보통 때라면 교실에서 안녕하는 날이었을테지.
알면 알수록 혼란스러웠다. 웃는인형탈 안에선 무슨 얼굴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째서 그렇게 무리하는거야?
미사키는 밴드 활동날을 제외하고 가장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는 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 교실, 아니 학년 대부분이 곤란한 일이 있다면 미사키를 가장 먼저 찾았다.
작곡도 작사도, 서클날짜 조정과 스테이지의 마련, 심지어 퍼포먼스 준비도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그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분홍 인형탈을 쓰고!
그건 성실하다거나 근면하다는 단어와 멀었고, 헌신이나 희생에 근접했다. 정말로. 어쩌면 이번 파티의 초대도 미사키를 무리시켰던 게 아닐까 생각했더니, 절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쓸어내린 코코로는 기어이 펜을 놓아버렸다.
미사키의 미소가 생각났다. 조금 숨이 막혔다. 흐릿하고, 희미하며, 어렴풋한 동시에 이 세상 모두가 사랑스럽다는 듯 다정한.
" 조정된 아르바이트 날, 언제인거야? "
" 내일 오후 7시부터입니다. "
" ... 알아와줘서 고마워. "
차라리 연기하고 있는거라면 좋겠어.
.
여기일까?
검은옷 사람들이 마련해준 GPS는 상점가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꼭 미행을 하는 것만 같아 가슴 한쪽이 쿡쿡 아팠지만 모두 미사키를 위해서야. 복잡미묘한 호기심이 양심을 짓누르고 승리한 것뿐이지만, 코코로는 그렇게 합리화를 마쳤다.
기실 아침까지 이어졌던 망설임은 조회시간의 대화 이후로 말끔히 사라진지 오래였다.
- 에, 오늘? 오늘은 딱히 별 일 없는데.
알려주고 싶지 않은건지, 정말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코코로는 골목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풍스러운 건물 문 앞까지 와서야 밝히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을까? 같은 생각을 했지만 코코로는, 어쨌든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좋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저것 많은 변명을 다 떨궈내고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오쿠사와 미사키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코코로가 가장 처음 본 것은 깔끔한 인테리어였고, 아기자기한 소품들이었으며 굽이 낮은 구두였다.
그리고 세련된 외안경, 핏이 그대로 살아난 어두운 연미복에 검은 나비 넥타이. 평소 하고 있던 단발과 달리 꽁지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오쿠사와 미사키.
" 어서오세요, 주인ㄴ.... ... "
눈이 마주친 순간 누가 먼저 어색한 얼굴을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미사키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일할 땐 언제나 냉정, 침착. 옷매무새를 빠르게 고친 미사키는 생각지도 못한 것을 본 얼굴을 한 코코로를 살폈다. 당당한 기색을 봐서 실수로 온 것 같지는 않고, 알고 찾아왔다기엔 많이 굳어있다. 사실 어느쪽이든 미사키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떨어지지 않는 시선은 조금 초조해지게끔 만들었다. 많이 이상한가? 답답함에 손을 들어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 숨통이 조금 트이는 느낌에 미사키는 어색한 얼굴을 싹 지웠다.
" 처음 오신건가요, 주인님? "
상냥한 미소, 부드러운 어조, 살짝 달큰한 목소리. 주인님. 퍼뜩 현실로 끌어내려진 코코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정갈히 울리는 낮은 구두굽 소리가 무척 낯설었다. 미사키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 걸어가는 코코로는 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미사키가 토끼귀를 장착하고 있었다면 정말로 동화속 체험이라 착각했으리라. 토끼 귀... 미셸처럼 곰 귀는 어떨까. 고양이, 개, 개구리, 종래엔 뱀의 귀가 있던가를 생각하던 코코로는 작은 방으로 안내받았다. 미사키마저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을 때, 멈춰있던 토끼의 시계는 째깍 돌아갔다.
" ... 깜짝 놀랐네, 코코로가 아닌 줄 알았어. 이런데 오리라고 생각을 못했거든. "
" 나 혹시 못 올 곳 온거야? "
" ... ... 그런 건 아닌데. 내 또래는 이런 컨셉 카페에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어서... 이상하게 생각해. 그래서 코코로를 볼 수 있을 줄 몰랐어. "
" 나,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 "
고마워.
한참이나 지나, 나직이 흘러나온 말에 코코로는 빤히 미사키를 바라보았다.
" 미사키는 그래서 무슨 컨셉이야? "
" 아 음... 집사, 려나. 그래서 카운터 보고 있었어. 평일엔 손님 없지만. "
" 미사키, 나도 손님이야. "
말문이 막힌 듯 우물우물.
곤란한 시선으로 방 안을 살피던 미사키는 이내 포기한 기색으로 힘없이 웃었다. 코코로의 말은 손님처럼 대해달라는 뜻이었다.
" 정말로? "
" 컨셉 카페지? 그렇다면 상시 컨셉인거야. 우린 지금 다른 세상이고, 이 카페 밖을 나가면 화들짝 꿈에서 깨는 것처럼 현실로 돌아오는거지. "
미사키의 눈이 느리게 꿈뻑였다. 어색하게 낮은 채도의 하늘빛이 또륵 굴러갔다. 어떡하면 좋지, 이 애를. 다른 세상란 단어를 혀속에서 굴려보던 미사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네 말이 맞아. 시간도 자유로 정할 수 있고, 시급도 일의 난이도에 비해 많은 아르바이트다. 그치만 미사키는 이 아르바이트에는 즐겁게 웃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하고 있었다.
코코로의 눈엔 또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를 더 알고 싶다던 코코로의 목소리가 노래가락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것도 그 일환인걸까. 미사키는 눈치를 잘 살피는 사람이었고, 그 속에 강렬한 호기심이 들어있는 것도 알아챘다.
그러나 여긴 네가 초대한 여객선도 아니고 날짜도 다르며 네가 생각한 상황도 정반대일텐데.
뜻대로 되어있지 않은 어울림에 안타까움을 느낀다면 이상할까.
" 난 지금, 코코로의 집사인거야. "
미사키는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잘 알았다.
" 그러니까... 따로 붙어있는 설정은, 집사와 주인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이 다음은 애드리브라는 걸로. "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알았다.
코코로와 이런 걸 하게 될 줄 몰랐는데. 계속 소파에 푹 파묻혀 있는 코코로의 앞까지 다가가 등받이에 손을 짚어 구부렸다. 손에 닿은 푹신한 감각이 비현실적이었다. 허리를 숙여, 자칫하면 코끝이 닿을 정도로. 코코로의 숨결은 기묘한 환희와 함께 등줄기를 쭈뼛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다면, 전력을 다하자.
" 주인님. "
이곳이 현실인 것처럼.
상대의 반응이 선명이 닿아온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고 속눈썹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당황한걸까, 찬란한 호박빛이 정처없이 흔들렸다.
미사키는 주인밖에 모르는 집사였고, 그저 아주 가까이서 그 눈을 보고 싶었다.
" 깨워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소파에서 주무시는 건 몸에 좋지 않기에. "
나오는 말들은 연극대본을 읽듯 조금은 무감각하다. 본래라면 이쯤 떨어져야 했지만, 미사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나의 계절을 모두 모아 담아낸 눈은 제 자신마저 그 계절에 있는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아, 그나저나. 이건 위험하려나.
코코로의 눈이 승부욕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계속 보고 있었으니 알 수 있어. 하지만 대체 어디서 저 성정을 건드렸지?
이어지려는 생각을 멈추고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리려던 미사키는 돌연 목을 부드럽게 감싸와 끌어당기는 그녀에, 깨달을 새 없이 몸을 지탱하고 있던 팔에 꾹 힘을 줘 브레이크를 걸었다.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다행이라 생각했더니 머리카락 안쪽으로 손이 파고 들어와 꾹 누른다. 힘에 이길 수도 없이 가볍게 톡- 하고 이마가 부딪힌다. 목 언저리를 달랑거리던 넥타이가 기어코 떨어져 코코로의 무릎 위를 어지럽혔다. 시야가 전부 그녀의 색이었다.
" 흐응... 이런 자세로, 그런 얼굴로. 안 일어났으면 뭘 하려고 했어, 미사키? "
아주 작게 속삭여진 목소리는 꽃잎의 생기를 가득 머금고도 위험한 매력을 품고 있어서, 격정적인 멜로디로 변해 머릿속을 뛰어다닌다. 장난스러운 웃음을 걸친 그녀는 마치 새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천진해 보였다.
그 속에 승리에 취한 우월감을 발견하는 건 무척 쉬워서.
아~ 정말, 위험하다구요 코코로씨.
입속을 마냥 맴도는 경고를 애써 삼킨 미사키는 숨을 살짝 멈췄다.
저기,
" ... 주인님의, 눈이 너무 예쁜 탓입니다. "
이걸로 웃어준다면 좋겠어.
모두를 웃게 하고 싶다는 자신만을 위한 포부는 한껏 비난 받고, 우스꽝스레 과장된 몸짓은 넘치게 비웃음 받았다. 누군가를 위한 행동은 이상한 취급 이상이 되지 않는 날들.
고스란히 기억으로 남은 시간들.
상처라기엔 가볍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기에는 몇 번이고 떠오르는.
미사키의 짙푸른 눈이 침체되었다. 외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은 시리게 얼어붙어 일렁인다. 코코로는, 가면 속 오쿠사와 미사키의 편린을 엿본 기분이었다.
희극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오쿠사와 미사키는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최대한 과장되고, 불규칙한 높낮이로. 대중들에게 발표를 하듯.
" 아, 그 어떤 보석을 가져와도 당신의 눈만큼 반짝이진 못할겁니다. 어떤 빛도 이만큼 찬란하지 못하다고 확신합니다. 꽃과 나무, 맑은 햇살과 유성우. 사막의 빗줄기마저 제겐 당신보다 더 가치있지 못해ㅡ요. "
전력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장대한 찬사를 담담히 읊조리는 목소리에 무엇도 말하지 못한 채로 몸에 힘이 빠져버렸다. 너무하잖아, 정말. 심지어 마지막에 삑사리 났지? 계속 눈을 감은 미사키의 귓가가 붉었다.
당신의 아르바이트, 이렇게 엉망이어도 계속 하게 해주는거야? 푸슬푸슬 작게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을 새 없이.
힘을 주고 있던 손에서부터,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꽁지를 완성시켰던 고무줄이 손이 떨어짐과 동시에 땅으로 떨어진다. 검은 머리카락이 허공을 춤춰, 단정한 단발이 되었다.
코코로의 손아귀에서 자유로워진 미사키는 금방 떨어졌고, 일정 거리 떨어진 미사키는 코코로의 웃음에 자기가 더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제야 코코로는 깨달았다. 둘만이 있던 하나의 세상이 웃음으로 막을 내렸다.
마치 마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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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공책님(@Fox_nullnote)이 이어주셨습니다
세상 모든 황금을 가득 안고 있다고 생각했던 눈은 바닷가의 노을빛처럼 불그스름한 열망이 깃들어 있었다. 태양빛은 뜨거워. 자칫하면 눈이 멀어버릴지도 몰랐다. 마음이 술렁여, 눈 안에 들어있던 열화가 종이에마저 번진건지 쥐고있던 티켓마저 뜨거운 것 같았다.
놓칠 것처럼 떨리는 손을 붙들었다.
이따금, 아니 꽤 자주 코코로는 그러한 눈으로 자신을 보았다. 그 눈 안에 있는 제 자신이 불타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끔.
그 눈을 가린다면 어떨까. 미사키는 종종 코코로의 눈을 제 손으로 가리고 싶었다. 가벼운 충동이었으며, 몹쓸 생각이기도 했다.
우습게도. 있는지도 몰랐던, 마음 한구석 자리 잡은 욕심은 어느새 몸을 부풀려 어깨를 치며 지나가고 있었지만, 미사키는 그 제스쳐를 모른 채 했다.
세상은 푸르른 봄날처럼 따스했는데, 갑작스러운 여름이었다. 난 오히려, 널 더 알고 싶어졌다.
다른 이의 웃는 얼굴은 따사로운 봄이었고 소중한 사람들과 지내는 시간은 풍족한 가을이었고, 당신은 여름이었다.
코코로, 당신만이 여름을 나타내는 그 모든 것이었다.
.
" ... 아르바이트? "
한참 여객선을 단장하고 있어야할 검은옷 SP에게 통보처럼 들려온 말에 츠루마키 코코로는 이벤트를 짜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선글라스를 낀 검은옷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로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오쿠사와님이 주말 약속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평일로 조정했습니다. "
" 아니, 아르바이트 한다는 소릴 처음, 듣는데? "
조금 기막힌 심정으로 물어보면,
" 인형탈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하루 뒤, 시간 제약 없이 주 3일 카페 아르바이트를 구한 걸로 확인되었습니다. "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 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머리 아파. 코코로는 미사키에게서, 아르바이트의 아-자도 들은 적이 없었다.
... 그러고보면 당연한가. 생각해보면 방과후에 만나는 건 항상 미셸이었다.
미사키에게 이후 무엇을 할 거냐는 단순한 물음도 그 속을 알고 싶다는 생각에 가득 차 물어보지 않았다. 오늘의 전면승부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애프터 신청이었으며, 보통 때라면 교실에서 안녕하는 날이었을테지.
알면 알수록 혼란스러웠다. 웃는인형탈 안에선 무슨 얼굴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째서 그렇게 무리하는거야?
미사키는 밴드 활동날을 제외하고 가장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는 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 교실, 아니 학년 대부분이 곤란한 일이 있다면 미사키를 가장 먼저 찾았다.
작곡도 작사도, 서클날짜 조정과 스테이지의 마련, 심지어 퍼포먼스 준비도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그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분홍 인형탈을 쓰고!
그건 성실하다거나 근면하다는 단어와 멀었고, 헌신이나 희생에 근접했다. 정말로. 어쩌면 이번 파티의 초대도 미사키를 무리시켰던 게 아닐까 생각했더니, 절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쓸어내린 코코로는 기어이 펜을 놓아버렸다.
미사키의 미소가 생각났다. 조금 숨이 막혔다. 흐릿하고, 희미하며, 어렴풋한 동시에 이 세상 모두가 사랑스럽다는 듯 다정한.
" 조정된 아르바이트 날, 언제인거야? "
" 내일 오후 7시부터입니다. "
" ... 알아와줘서 고마워. "
차라리 연기하고 있는거라면 좋겠어.
.
여기일까?
검은옷 사람들이 마련해준 GPS는 상점가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꼭 미행을 하는 것만 같아 가슴 한쪽이 쿡쿡 아팠지만 모두 미사키를 위해서야. 복잡미묘한 호기심이 양심을 짓누르고 승리한 것뿐이지만, 코코로는 그렇게 합리화를 마쳤다.
기실 아침까지 이어졌던 망설임은 조회시간의 대화 이후로 말끔히 사라진지 오래였다.
- 에, 오늘? 오늘은 딱히 별 일 없는데.
알려주고 싶지 않은건지, 정말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코코로는 골목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풍스러운 건물 문 앞까지 와서야 밝히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을까? 같은 생각을 했지만 코코로는, 어쨌든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좋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저것 많은 변명을 다 떨궈내고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오쿠사와 미사키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코코로가 가장 처음 본 것은 깔끔한 인테리어였고, 아기자기한 소품들이었으며 굽이 낮은 구두였다.
그리고 세련된 외안경, 핏이 그대로 살아난 어두운 연미복에 검은 나비 넥타이. 평소 하고 있던 단발과 달리 꽁지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오쿠사와 미사키.
" 어서오세요, 주인ㄴ.... ... "
눈이 마주친 순간 누가 먼저 어색한 얼굴을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미사키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일할 땐 언제나 냉정, 침착. 옷매무새를 빠르게 고친 미사키는 생각지도 못한 것을 본 얼굴을 한 코코로를 살폈다. 당당한 기색을 봐서 실수로 온 것 같지는 않고, 알고 찾아왔다기엔 많이 굳어있다. 사실 어느쪽이든 미사키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떨어지지 않는 시선은 조금 초조해지게끔 만들었다. 많이 이상한가? 답답함에 손을 들어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 숨통이 조금 트이는 느낌에 미사키는 어색한 얼굴을 싹 지웠다.
" 처음 오신건가요, 주인님? "
상냥한 미소, 부드러운 어조, 살짝 달큰한 목소리. 주인님. 퍼뜩 현실로 끌어내려진 코코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정갈히 울리는 낮은 구두굽 소리가 무척 낯설었다. 미사키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 걸어가는 코코로는 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미사키가 토끼귀를 장착하고 있었다면 정말로 동화속 체험이라 착각했으리라. 토끼 귀... 미셸처럼 곰 귀는 어떨까. 고양이, 개, 개구리, 종래엔 뱀의 귀가 있던가를 생각하던 코코로는 작은 방으로 안내받았다. 미사키마저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을 때, 멈춰있던 토끼의 시계는 째깍 돌아갔다.
" ... 깜짝 놀랐네, 코코로가 아닌 줄 알았어. 이런데 오리라고 생각을 못했거든. "
" 나 혹시 못 올 곳 온거야? "
" ... ... 그런 건 아닌데. 내 또래는 이런 컨셉 카페에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어서... 이상하게 생각해. 그래서 코코로를 볼 수 있을 줄 몰랐어. "
" 나,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 "
고마워.
한참이나 지나, 나직이 흘러나온 말에 코코로는 빤히 미사키를 바라보았다.
" 미사키는 그래서 무슨 컨셉이야? "
" 아 음... 집사, 려나. 그래서 카운터 보고 있었어. 평일엔 손님 없지만. "
" 미사키, 나도 손님이야. "
말문이 막힌 듯 우물우물.
곤란한 시선으로 방 안을 살피던 미사키는 이내 포기한 기색으로 힘없이 웃었다. 코코로의 말은 손님처럼 대해달라는 뜻이었다.
" 정말로? "
" 컨셉 카페지? 그렇다면 상시 컨셉인거야. 우린 지금 다른 세상이고, 이 카페 밖을 나가면 화들짝 꿈에서 깨는 것처럼 현실로 돌아오는거지. "
미사키의 눈이 느리게 꿈뻑였다. 어색하게 낮은 채도의 하늘빛이 또륵 굴러갔다. 어떡하면 좋지, 이 애를. 다른 세상란 단어를 혀속에서 굴려보던 미사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네 말이 맞아. 시간도 자유로 정할 수 있고, 시급도 일의 난이도에 비해 많은 아르바이트다. 그치만 미사키는 이 아르바이트에는 즐겁게 웃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하고 있었다.
코코로의 눈엔 또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를 더 알고 싶다던 코코로의 목소리가 노래가락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것도 그 일환인걸까. 미사키는 눈치를 잘 살피는 사람이었고, 그 속에 강렬한 호기심이 들어있는 것도 알아챘다.
그러나 여긴 네가 초대한 여객선도 아니고 날짜도 다르며 네가 생각한 상황도 정반대일텐데.
뜻대로 되어있지 않은 어울림에 안타까움을 느낀다면 이상할까.
" 난 지금, 코코로의 집사인거야. "
미사키는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잘 알았다.
" 그러니까... 따로 붙어있는 설정은, 집사와 주인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이 다음은 애드리브라는 걸로. "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알았다.
코코로와 이런 걸 하게 될 줄 몰랐는데. 계속 소파에 푹 파묻혀 있는 코코로의 앞까지 다가가 등받이에 손을 짚어 구부렸다. 손에 닿은 푹신한 감각이 비현실적이었다. 허리를 숙여, 자칫하면 코끝이 닿을 정도로. 코코로의 숨결은 기묘한 환희와 함께 등줄기를 쭈뼛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다면, 전력을 다하자.
" 주인님. "
이곳이 현실인 것처럼.
상대의 반응이 선명이 닿아온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고 속눈썹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당황한걸까, 찬란한 호박빛이 정처없이 흔들렸다.
미사키는 주인밖에 모르는 집사였고, 그저 아주 가까이서 그 눈을 보고 싶었다.
" 깨워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소파에서 주무시는 건 몸에 좋지 않기에. "
나오는 말들은 연극대본을 읽듯 조금은 무감각하다. 본래라면 이쯤 떨어져야 했지만, 미사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나의 계절을 모두 모아 담아낸 눈은 제 자신마저 그 계절에 있는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아, 그나저나. 이건 위험하려나.
코코로의 눈이 승부욕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계속 보고 있었으니 알 수 있어. 하지만 대체 어디서 저 성정을 건드렸지?
이어지려는 생각을 멈추고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리려던 미사키는 돌연 목을 부드럽게 감싸와 끌어당기는 그녀에, 깨달을 새 없이 몸을 지탱하고 있던 팔에 꾹 힘을 줘 브레이크를 걸었다.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다행이라 생각했더니 머리카락 안쪽으로 손이 파고 들어와 꾹 누른다. 힘에 이길 수도 없이 가볍게 톡- 하고 이마가 부딪힌다. 목 언저리를 달랑거리던 넥타이가 기어코 떨어져 코코로의 무릎 위를 어지럽혔다. 시야가 전부 그녀의 색이었다.
" 흐응... 이런 자세로, 그런 얼굴로. 안 일어났으면 뭘 하려고 했어, 미사키? "
아주 작게 속삭여진 목소리는 꽃잎의 생기를 가득 머금고도 위험한 매력을 품고 있어서, 격정적인 멜로디로 변해 머릿속을 뛰어다닌다. 장난스러운 웃음을 걸친 그녀는 마치 새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천진해 보였다.
그 속에 승리에 취한 우월감을 발견하는 건 무척 쉬워서.
아~ 정말, 위험하다구요 코코로씨.
입속을 마냥 맴도는 경고를 애써 삼킨 미사키는 숨을 살짝 멈췄다.
저기,
" ... 주인님의, 눈이 너무 예쁜 탓입니다. "
이걸로 웃어준다면 좋겠어.
모두를 웃게 하고 싶다는 자신만을 위한 포부는 한껏 비난 받고, 우스꽝스레 과장된 몸짓은 넘치게 비웃음 받았다. 누군가를 위한 행동은 이상한 취급 이상이 되지 않는 날들.
고스란히 기억으로 남은 시간들.
상처라기엔 가볍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기에는 몇 번이고 떠오르는.
미사키의 짙푸른 눈이 침체되었다. 외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은 시리게 얼어붙어 일렁인다. 코코로는, 가면 속 오쿠사와 미사키의 편린을 엿본 기분이었다.
희극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오쿠사와 미사키는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최대한 과장되고, 불규칙한 높낮이로. 대중들에게 발표를 하듯.
" 아, 그 어떤 보석을 가져와도 당신의 눈만큼 반짝이진 못할겁니다. 어떤 빛도 이만큼 찬란하지 못하다고 확신합니다. 꽃과 나무, 맑은 햇살과 유성우. 사막의 빗줄기마저 제겐 당신보다 더 가치있지 못해ㅡ요. "
전력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장대한 찬사를 담담히 읊조리는 목소리에 무엇도 말하지 못한 채로 몸에 힘이 빠져버렸다. 너무하잖아, 정말. 심지어 마지막에 삑사리 났지? 계속 눈을 감은 미사키의 귓가가 붉었다.
당신의 아르바이트, 이렇게 엉망이어도 계속 하게 해주는거야? 푸슬푸슬 작게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을 새 없이.
힘을 주고 있던 손에서부터,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꽁지를 완성시켰던 고무줄이 손이 떨어짐과 동시에 땅으로 떨어진다. 검은 머리카락이 허공을 춤춰, 단정한 단발이 되었다.
코코로의 손아귀에서 자유로워진 미사키는 금방 떨어졌고, 일정 거리 떨어진 미사키는 코코로의 웃음에 자기가 더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제야 코코로는 깨달았다. 둘만이 있던 하나의 세상이 웃음으로 막을 내렸다.
마치 마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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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공책님(@Fox_nullnote)이 이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