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드림/ㅁㅅㅋㅋ
(미사코코)성격리버스-10
백오판다
2018. 5. 23. 18:30
이상해.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오쿠사와 미사키는 문득 제 가슴께를 꾹 짓눌렀다. 먹물을 잔뜩 머금은 붓으로 획을 긋기도 전에 도화지에 실수로 한 방울 떨어트린다면 이런 기분일까.
손에 들렸던 까만 봉투가 부스럭거리며 흔들렸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반짝반짝한 날이었을텐데.
아침 일찍 일어나 어머니의 식사준비를 돕고, 동생과 현실적인 소꿉놀이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시간이 남아 고아원의 봉사활동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잃은 카논을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하구미네에 들러 고로케를 한 가득 사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가 마주친 카오루의 연극 상대 연습이 되기도 했다.
미사키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얀 도화지 위에 퍼진 까만 먹이 점점 그 크기를 늘려가 마음을 잠식한다.
약한 호흡곤란에 기침을 하다 목을 꽉 누르고 누구의 집인지 모를 담벼락에 기대었다.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힘이 빠졌다. 무릎을 굽혀 주저앉았다.
" 아. "
추워.
천천히 봄이 끝나가고 초여름에 가까운 계절이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날씨는 피부마저 끈적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뱉어내는 숨은 차가운 겨울의 한기가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목에 점점 더 힘을 주었다. 이대로 더 머물다간,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버릴텐데. 춥다고 해서 손에 들린 것들까지 춥게 만드는 마법을 부리지 못한다.
초코맛 아이스크림을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릴 동생이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가뿐하게 발에 힘을 줘 일어서려던 미사키는 다시 구멍 뚫린 풍선처럼 주저앉았다. 손아귀의 힘도 저절로 풀렸다. 졸렸다 풀어진 목에 컥컥 거렸다.
정말 이상하네, 힘이 나지 않아.
말 그대로 통제할 수 없는 탈력감이었다. 망연히 모자를 푹 눌러써 하늘을 올려다본 미사키는, 가장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었다.
도심의 밝음에 묻혀져가던 별 사이로 가장 눈부신 빛. 별의 이야기에 대해 겉핡기식으로만 아는 미사키는 저게 북두칠성인지, 사실은 지구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인공위성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저 시선이 빼앗겨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양한 색채로 생동감 있게 반짝이던 세상의 모든 것들이 파렛트에 묻은 물감을 씻어내는 것처럼 사라져간다.
색채가 사라진 잿빛세상은 어쩐지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어서 너는 그렇게 재미없는 얼굴을 했던걸까. 그저 의미없는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무덤덤히 익숙해져 가, 기어코 외로운 얼굴을 미사키는 기억한다.
코코로.
...코코로.
" 코코로. "
그 이름엔 이루말할 수 없는 따스함이 감돌았다. 세 음절 안에 세상 모든 색채가 다 들어있었다.
추위가 걷히고나서야 미사키는 깨달았다.
나의 영웅, 가장 찬란히 빛나는 북두칠성.
오늘은 당신을 보지 못했구나.
마치 제 스스로가 배터리가 된 기분이었다. 낮동안 모든 걸 방출하다가 시간이 지나 방전되어버리는. 그럼에도 신기하게,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를 받아 무릎을 똑바로 폈다.
봉투 속 아이스크림이 다 녹았다. 내일이면 너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간지럽게 다가왔다.
마음 속에 황금 나비가 있는 것 같았다.
.
츠루마키 코코로는 어쩌면 한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을지도 모른다.
착용자의 좀 더 나은 환경을 위한 인형탈을 만들어 제공하는 건 가벼운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답례로 밥을 사겠다고 했을 때도, 정말 답례 차원이라 생각했기에 바로 긴장을 놓아버릴 수 있었다.
바로라고 해도 사실 약속시간 30분 전까지였지만.
당신은 역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서, 몇 시간이나 색다른 코디에 도전하려던 코코로는 혼자 오버한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고, 평소의 빨간 줄무늬 셔츠와 쇼츠 멜빵이라는 평상복을 택했다.
이 정도면 무난하겠지?
그리고 그런 생각은 약속 장소에 나가는 순간 산산조각났다.
1시인 약속시간 10분 전, 도착한 약속 장소엔 언제부턴가 와있었는지 모를 미사키가 기둥에 기대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단추가 두어개 풀어진 얇은 화이트 셔츠, 긴 기장을 자연스럽게 밀어넣은 청색 핫팬츠 아래로 캐주얼한 스니커즈. 말도 안돼. 여객선 파티의 그녀를 생각하자면 후드티 하나 달랑 걸치고 올 줄 알았는데.
무심코 멈춘 발걸음을 인지했는지, 이쪽을 돌아보는 미사키의 모습이 문득 낯설었다. 눈이 마주치고, 단정히 빗어내린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하얀 얼굴이 말간 웃음을 자아낸다.
" 일찍 왔네, 코코로. "
거짓말처럼 생기가 가득 웃음에 담겼다. 몸을 완전히 돌린 미사키의 목에는, 단조로운 검은색 초커가 둘러져 있었다.
조금은, 두꺼운. 이상하게도 그걸 본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악세사리를 꺼려한다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스스로의 심정을 알지 못해, 코코로는 빤히 미사키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복장만으로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어? 심지어 시원하게 맡아지는 워터 향은 그녀를 어른스럽게 보이게 만들었다.
" ... ...당신, 누구? "
" 에. "
곤란히 눈썹을 찡그린 미사키는 곧게 눈을 맞춰왔다.
" 미사키. 오쿠사와 미사키입니다, 코코로씨. "
목소리가 낮고 다정한 울림을 선사했다. 털털한 후드를 입고 있을 때도 생각했지만, 오쿠사와 미사키는 꽤 단정한 얼굴이었다. 꾸민 지금에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눈꼬리가 상냥히 휘어 눈이 접히고 눈웃음을 그려냈을 때 코코로는 제 얼굴 가득 퍼지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신, 행색이 나쁘다.
" 자, 코코로. 배고프지 않아?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다면 지금 말해줘. "
" ... 배가 고프긴 하지만, 특별히 먹고 싶은 건 없네. "
" 응~ 그럼 알아봐둔 파스타집이 있어. 괜찮아? "
괜찮아. 고개를 끄덕인 코코로는 미사키의 자연스러운 에스코트를 따라 나섰다.
벚꽃잎이 잔뜩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 사이를 나란히 걸어, 붐비는 차도를 건너고, 아직 한산한 음식점들을 지나 멈춘 곳은 목조 인테리어의 양식점.
칸막이가 쳐진 창가 구석자리로 안내받아 각각 해물 파스타와 크림 파스타를 시켰다.
얼마 걷지 않은 시간동안 삼켰던 물음들이 목 언저리에서 울렁인다. 마른 목에 물을 한모금 마시고 약간 필사적일 정도로 창밖을 바라보던 코코로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쭉 바라보고 있었던지 금방 눈이 마주쳤다.
저를 담아내는 은청색이 기분 좋게 휘어진다. 그 시선 안속에, 하고싶은 말 잔뜩인 얼굴이 있었다.
그 숨겨지지 않는 얼굴에 코코로는 항복한다.
" ... 오늘의 미사키는, 뭔가 굉장히 분위기가 다르네. 옷도 평소 입던거랑 전혀 다르고. 당신은 편안한 옷을 선호한다고 생각했는데. "
이건, 그러니까, 어쩐지, 데이트 같지 않아?
차마 말하지 못한 말이 어색하게 뒷목을 쓰는 미사키를 보고 들어갔다. 자기를 따라 물을 마시는 모습이 묘하게 걸렸다. 긴장하고 있어?
" 그게, 오늘 코코로와 만나는 걸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더니. 어머니가 그렇게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좀 더 꾸미고 가야하지 않겠니~ 라고. 이 옷도 나름 편안하기도 하고. "
" 아. "
" 동생도 멋지게 차려입은 언니를 보고싶다고 해서, 반짝반짝한 얼굴로 바라보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었어. ...혹시, 많이 이상해? "
" ... 아니, 잘 어울려. 교복이랑 후드만 입은 당신만 봤는데 새로운 당신도 괜찮다고 생각해. "
정말로.
그저 깜빡거리는 시야에 미사키의 손이 목에 두른 초커를 쓸고 지나 책상 위로 내려온 게 들어왔다.
" 그치만, 그 초커는 정말 의외네. "
" ... 어쩐지, 하고싶어져서. "
" 그래도 잘 어울려. "
조금 어색한 몸짓이었다. 뻑뻑하게 굳어있던 몸짓이 풀어져 두 손이 마주 잡는다.
" 코코로도, 정말 귀여워. "
단정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귓가가 발갛다. 생각보다 목이 얇았고 말라서 쇠골이 두드러졌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이쪽을 향하는 미소는 행복해보이기까지 했다.
당신, 정말 오늘 행색이 나빠.
홧홧히 뜨거운 뺨에 손등을 대었다. 이게 그걸까나. 좋은 얼굴로, 좋은 옷차림으로 좋은 말만 해준다는. 그게, 그러니까, 호스트?
" 처음엔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가져오셔서 입었는데, 한참 보시더니 몸 좀 함부러 굴리지 말라며 뺏어가셨어. "
" 어째서? "
" 우응~, 등쪽에 다친 자국이 있어서 그게 보인걸까 싶지만. "
코코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미사키는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은건지, 그녀답게 안 좋은 이야기는 좋은 분위기를 망친다고 생각하는건지 모르겠다.
아직도 당신은 말하지 않는 게 많구나.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의도치 않은 침묵을 버티고 있을 때, 돌연 미사키가 팔을 뻗어 탁자를 두드리는 손가락 사이로 손을 들이밀었다.
" 뭐야? "
" 내 손이 두드리기 더 좋을거야. "
" 응...? "
" 탁자보단 부드러울걸. "
사르르, 올라가는 입꼬리와 다정한 장난기를 담은 눈에 그제야 지나가는 농담인 걸 알아챘다.
그게뭐람. 반쯤 쑥쓰러운 기분으로 미사키의 손바닥을 톡톡 쳤다. 얼굴에 기분 좋은 웃음이 번진다. 간지러운지 살착 움츠러 들던 손이 조심스레 제 손가락을 잡아왔다.
" 이제야 웃어주는구나, 코코로. "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잡아오는 손길엔 아주 약간의 힘이 들어가, 제 손바닥을 느리게 쓸어내는 손끝.
코코로는 어쩐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미사키는 손바닥에 은밀히 단어를 한 자 한 자 쓴다. 무엇을 쓰는지 코코로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저를 향하는 은청색엔 많은 게 들어 있었다.
" 오늘... 하늘이 아주 맑아. 날씨도 기분 좋은 정도로 따뜻해. 떨어진 벚꽃잎이 예쁘고, 피어난 꽃들이 향기로워. 사람들은 생기가 가득하고, 그들이 짓는 웃음은 마음이 따듯해져. 그렇게 소중한 것들로 가득한 세상은 색색으로 반짝이고 있어. "
그건 어쩌면 모든 노래가락이었나.
" 그치만 가끔, 정말 가끔 그게 전부 의미가 없어질 때가 있어. 똑같이 모든 게 아름답게 반짝이는데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때가 있었어. 예전엔 그래도 계속 뛰기만 했는데. "
팔을 당겨, 제 손마저 끌고가 오쿠사와 미사키는 그림같은 미소로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손등에 입을 맞췄다. 닿아온 입술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도록 뜨거웠다.
" 지금은 코코로를 보면 마법같이 모두 괜찮아져. "
고마워.
스러질듯 아주 작았으나 손에 잡힐듯 선명한 음색이었다. 단조로운 말에 진심이 가득 담겼다. 이름모를 감정들에 파묻혀서 이 자리를 서둘러 피하고 싶은데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드러난 피부가 모두 붉어져, 가슴 한쪽이 뜨거웠다. 결국 잡혀있지 않은 손으로 눈가를 가린 코코로는 절로 앓는 소리를 냈다. 당신 진짜 오늘 행색 너무 나쁘단 말야. 시선만 올려 이쪽을 향하는 눈엔 그녀가 말했던 것들이 담겨서 찬란하다.
하늘, 날씨, 벚꽃, 화려하게 핀 꽃, 사람들, 웃음, 세상 모든 것. 그 눈은 모든 게 특별하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착각하지마, 츠루마키 코코로.
미사키의 말마따라 츠루마키 코코로의 세상도 어쩌면 그렇게 반짝일 기미가 있는지도 몰랐다.
이런 날에 하늘이 맑은게 기쁘고, 덥지 않은 날씨에 안심하고, 떨어진 벚꽃잎은 꽤 낭만 있었으며 피어난 꽃들의 향은 늦봄에 취하기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부 당신에게서 빌려온 것들. 내것이 아닌 것들은 모두 당신이 있기에 가치를 발휘한다.
그러니까, 착각하지마.
그런 눈으로, 그런 말로, 그런 분위기로 나를 현혹하지 말아줘. 당신에게 내가 특별하다는 암시를 주지마. 잘못해서 오해해, 착각하게 되어버리면 그보다도 부끄러운게 있을까.
친구사이라기엔 조금 과한 스킨십도 모든 색채들이 넘쳐나는 말을 직접 듣는것도 어쩐지 특별 취급 당하는 것도 모두 당신이기 때문에- 로 함축했다.
그러니까, 이건 그저 아무나라도 좋았던거야. 당신을 웃게 만들었다면 그 누구라도 좋았을 허울 좋은 얘기.
똑똑, 하고 웨이트리스가 들어왔다.
칸막이 너머로 그림자가 비춘 순간 화들짝 손을 때버린 코코로는 멀쩡한 척하며 제 앞에 놓이는 크림 파스타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사랑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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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공책님(@null_note)님이 써주셨습니다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오쿠사와 미사키는 문득 제 가슴께를 꾹 짓눌렀다. 먹물을 잔뜩 머금은 붓으로 획을 긋기도 전에 도화지에 실수로 한 방울 떨어트린다면 이런 기분일까.
손에 들렸던 까만 봉투가 부스럭거리며 흔들렸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반짝반짝한 날이었을텐데.
아침 일찍 일어나 어머니의 식사준비를 돕고, 동생과 현실적인 소꿉놀이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시간이 남아 고아원의 봉사활동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잃은 카논을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하구미네에 들러 고로케를 한 가득 사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가 마주친 카오루의 연극 상대 연습이 되기도 했다.
미사키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얀 도화지 위에 퍼진 까만 먹이 점점 그 크기를 늘려가 마음을 잠식한다.
약한 호흡곤란에 기침을 하다 목을 꽉 누르고 누구의 집인지 모를 담벼락에 기대었다.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힘이 빠졌다. 무릎을 굽혀 주저앉았다.
" 아. "
추워.
천천히 봄이 끝나가고 초여름에 가까운 계절이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날씨는 피부마저 끈적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뱉어내는 숨은 차가운 겨울의 한기가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목에 점점 더 힘을 주었다. 이대로 더 머물다간,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버릴텐데. 춥다고 해서 손에 들린 것들까지 춥게 만드는 마법을 부리지 못한다.
초코맛 아이스크림을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릴 동생이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가뿐하게 발에 힘을 줘 일어서려던 미사키는 다시 구멍 뚫린 풍선처럼 주저앉았다. 손아귀의 힘도 저절로 풀렸다. 졸렸다 풀어진 목에 컥컥 거렸다.
정말 이상하네, 힘이 나지 않아.
말 그대로 통제할 수 없는 탈력감이었다. 망연히 모자를 푹 눌러써 하늘을 올려다본 미사키는, 가장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었다.
도심의 밝음에 묻혀져가던 별 사이로 가장 눈부신 빛. 별의 이야기에 대해 겉핡기식으로만 아는 미사키는 저게 북두칠성인지, 사실은 지구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인공위성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저 시선이 빼앗겨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양한 색채로 생동감 있게 반짝이던 세상의 모든 것들이 파렛트에 묻은 물감을 씻어내는 것처럼 사라져간다.
색채가 사라진 잿빛세상은 어쩐지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어서 너는 그렇게 재미없는 얼굴을 했던걸까. 그저 의미없는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무덤덤히 익숙해져 가, 기어코 외로운 얼굴을 미사키는 기억한다.
코코로.
...코코로.
" 코코로. "
그 이름엔 이루말할 수 없는 따스함이 감돌았다. 세 음절 안에 세상 모든 색채가 다 들어있었다.
추위가 걷히고나서야 미사키는 깨달았다.
나의 영웅, 가장 찬란히 빛나는 북두칠성.
오늘은 당신을 보지 못했구나.
마치 제 스스로가 배터리가 된 기분이었다. 낮동안 모든 걸 방출하다가 시간이 지나 방전되어버리는. 그럼에도 신기하게,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를 받아 무릎을 똑바로 폈다.
봉투 속 아이스크림이 다 녹았다. 내일이면 너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간지럽게 다가왔다.
마음 속에 황금 나비가 있는 것 같았다.
.
츠루마키 코코로는 어쩌면 한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을지도 모른다.
착용자의 좀 더 나은 환경을 위한 인형탈을 만들어 제공하는 건 가벼운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답례로 밥을 사겠다고 했을 때도, 정말 답례 차원이라 생각했기에 바로 긴장을 놓아버릴 수 있었다.
바로라고 해도 사실 약속시간 30분 전까지였지만.
당신은 역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서, 몇 시간이나 색다른 코디에 도전하려던 코코로는 혼자 오버한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고, 평소의 빨간 줄무늬 셔츠와 쇼츠 멜빵이라는 평상복을 택했다.
이 정도면 무난하겠지?
그리고 그런 생각은 약속 장소에 나가는 순간 산산조각났다.
1시인 약속시간 10분 전, 도착한 약속 장소엔 언제부턴가 와있었는지 모를 미사키가 기둥에 기대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단추가 두어개 풀어진 얇은 화이트 셔츠, 긴 기장을 자연스럽게 밀어넣은 청색 핫팬츠 아래로 캐주얼한 스니커즈. 말도 안돼. 여객선 파티의 그녀를 생각하자면 후드티 하나 달랑 걸치고 올 줄 알았는데.
무심코 멈춘 발걸음을 인지했는지, 이쪽을 돌아보는 미사키의 모습이 문득 낯설었다. 눈이 마주치고, 단정히 빗어내린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하얀 얼굴이 말간 웃음을 자아낸다.
" 일찍 왔네, 코코로. "
거짓말처럼 생기가 가득 웃음에 담겼다. 몸을 완전히 돌린 미사키의 목에는, 단조로운 검은색 초커가 둘러져 있었다.
조금은, 두꺼운. 이상하게도 그걸 본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악세사리를 꺼려한다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스스로의 심정을 알지 못해, 코코로는 빤히 미사키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복장만으로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어? 심지어 시원하게 맡아지는 워터 향은 그녀를 어른스럽게 보이게 만들었다.
" ... ...당신, 누구? "
" 에. "
곤란히 눈썹을 찡그린 미사키는 곧게 눈을 맞춰왔다.
" 미사키. 오쿠사와 미사키입니다, 코코로씨. "
목소리가 낮고 다정한 울림을 선사했다. 털털한 후드를 입고 있을 때도 생각했지만, 오쿠사와 미사키는 꽤 단정한 얼굴이었다. 꾸민 지금에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눈꼬리가 상냥히 휘어 눈이 접히고 눈웃음을 그려냈을 때 코코로는 제 얼굴 가득 퍼지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신, 행색이 나쁘다.
" 자, 코코로. 배고프지 않아?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다면 지금 말해줘. "
" ... 배가 고프긴 하지만, 특별히 먹고 싶은 건 없네. "
" 응~ 그럼 알아봐둔 파스타집이 있어. 괜찮아? "
괜찮아. 고개를 끄덕인 코코로는 미사키의 자연스러운 에스코트를 따라 나섰다.
벚꽃잎이 잔뜩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 사이를 나란히 걸어, 붐비는 차도를 건너고, 아직 한산한 음식점들을 지나 멈춘 곳은 목조 인테리어의 양식점.
칸막이가 쳐진 창가 구석자리로 안내받아 각각 해물 파스타와 크림 파스타를 시켰다.
얼마 걷지 않은 시간동안 삼켰던 물음들이 목 언저리에서 울렁인다. 마른 목에 물을 한모금 마시고 약간 필사적일 정도로 창밖을 바라보던 코코로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쭉 바라보고 있었던지 금방 눈이 마주쳤다.
저를 담아내는 은청색이 기분 좋게 휘어진다. 그 시선 안속에, 하고싶은 말 잔뜩인 얼굴이 있었다.
그 숨겨지지 않는 얼굴에 코코로는 항복한다.
" ... 오늘의 미사키는, 뭔가 굉장히 분위기가 다르네. 옷도 평소 입던거랑 전혀 다르고. 당신은 편안한 옷을 선호한다고 생각했는데. "
이건, 그러니까, 어쩐지, 데이트 같지 않아?
차마 말하지 못한 말이 어색하게 뒷목을 쓰는 미사키를 보고 들어갔다. 자기를 따라 물을 마시는 모습이 묘하게 걸렸다. 긴장하고 있어?
" 그게, 오늘 코코로와 만나는 걸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더니. 어머니가 그렇게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좀 더 꾸미고 가야하지 않겠니~ 라고. 이 옷도 나름 편안하기도 하고. "
" 아. "
" 동생도 멋지게 차려입은 언니를 보고싶다고 해서, 반짝반짝한 얼굴로 바라보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었어. ...혹시, 많이 이상해? "
" ... 아니, 잘 어울려. 교복이랑 후드만 입은 당신만 봤는데 새로운 당신도 괜찮다고 생각해. "
정말로.
그저 깜빡거리는 시야에 미사키의 손이 목에 두른 초커를 쓸고 지나 책상 위로 내려온 게 들어왔다.
" 그치만, 그 초커는 정말 의외네. "
" ... 어쩐지, 하고싶어져서. "
" 그래도 잘 어울려. "
조금 어색한 몸짓이었다. 뻑뻑하게 굳어있던 몸짓이 풀어져 두 손이 마주 잡는다.
" 코코로도, 정말 귀여워. "
단정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귓가가 발갛다. 생각보다 목이 얇았고 말라서 쇠골이 두드러졌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이쪽을 향하는 미소는 행복해보이기까지 했다.
당신, 정말 오늘 행색이 나빠.
홧홧히 뜨거운 뺨에 손등을 대었다. 이게 그걸까나. 좋은 얼굴로, 좋은 옷차림으로 좋은 말만 해준다는. 그게, 그러니까, 호스트?
" 처음엔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가져오셔서 입었는데, 한참 보시더니 몸 좀 함부러 굴리지 말라며 뺏어가셨어. "
" 어째서? "
" 우응~, 등쪽에 다친 자국이 있어서 그게 보인걸까 싶지만. "
코코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미사키는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은건지, 그녀답게 안 좋은 이야기는 좋은 분위기를 망친다고 생각하는건지 모르겠다.
아직도 당신은 말하지 않는 게 많구나.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의도치 않은 침묵을 버티고 있을 때, 돌연 미사키가 팔을 뻗어 탁자를 두드리는 손가락 사이로 손을 들이밀었다.
" 뭐야? "
" 내 손이 두드리기 더 좋을거야. "
" 응...? "
" 탁자보단 부드러울걸. "
사르르, 올라가는 입꼬리와 다정한 장난기를 담은 눈에 그제야 지나가는 농담인 걸 알아챘다.
그게뭐람. 반쯤 쑥쓰러운 기분으로 미사키의 손바닥을 톡톡 쳤다. 얼굴에 기분 좋은 웃음이 번진다. 간지러운지 살착 움츠러 들던 손이 조심스레 제 손가락을 잡아왔다.
" 이제야 웃어주는구나, 코코로. "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잡아오는 손길엔 아주 약간의 힘이 들어가, 제 손바닥을 느리게 쓸어내는 손끝.
코코로는 어쩐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미사키는 손바닥에 은밀히 단어를 한 자 한 자 쓴다. 무엇을 쓰는지 코코로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저를 향하는 은청색엔 많은 게 들어 있었다.
" 오늘... 하늘이 아주 맑아. 날씨도 기분 좋은 정도로 따뜻해. 떨어진 벚꽃잎이 예쁘고, 피어난 꽃들이 향기로워. 사람들은 생기가 가득하고, 그들이 짓는 웃음은 마음이 따듯해져. 그렇게 소중한 것들로 가득한 세상은 색색으로 반짝이고 있어. "
그건 어쩌면 모든 노래가락이었나.
" 그치만 가끔, 정말 가끔 그게 전부 의미가 없어질 때가 있어. 똑같이 모든 게 아름답게 반짝이는데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때가 있었어. 예전엔 그래도 계속 뛰기만 했는데. "
팔을 당겨, 제 손마저 끌고가 오쿠사와 미사키는 그림같은 미소로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손등에 입을 맞췄다. 닿아온 입술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도록 뜨거웠다.
" 지금은 코코로를 보면 마법같이 모두 괜찮아져. "
고마워.
스러질듯 아주 작았으나 손에 잡힐듯 선명한 음색이었다. 단조로운 말에 진심이 가득 담겼다. 이름모를 감정들에 파묻혀서 이 자리를 서둘러 피하고 싶은데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드러난 피부가 모두 붉어져, 가슴 한쪽이 뜨거웠다. 결국 잡혀있지 않은 손으로 눈가를 가린 코코로는 절로 앓는 소리를 냈다. 당신 진짜 오늘 행색 너무 나쁘단 말야. 시선만 올려 이쪽을 향하는 눈엔 그녀가 말했던 것들이 담겨서 찬란하다.
하늘, 날씨, 벚꽃, 화려하게 핀 꽃, 사람들, 웃음, 세상 모든 것. 그 눈은 모든 게 특별하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착각하지마, 츠루마키 코코로.
미사키의 말마따라 츠루마키 코코로의 세상도 어쩌면 그렇게 반짝일 기미가 있는지도 몰랐다.
이런 날에 하늘이 맑은게 기쁘고, 덥지 않은 날씨에 안심하고, 떨어진 벚꽃잎은 꽤 낭만 있었으며 피어난 꽃들의 향은 늦봄에 취하기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부 당신에게서 빌려온 것들. 내것이 아닌 것들은 모두 당신이 있기에 가치를 발휘한다.
그러니까, 착각하지마.
그런 눈으로, 그런 말로, 그런 분위기로 나를 현혹하지 말아줘. 당신에게 내가 특별하다는 암시를 주지마. 잘못해서 오해해, 착각하게 되어버리면 그보다도 부끄러운게 있을까.
친구사이라기엔 조금 과한 스킨십도 모든 색채들이 넘쳐나는 말을 직접 듣는것도 어쩐지 특별 취급 당하는 것도 모두 당신이기 때문에- 로 함축했다.
그러니까, 이건 그저 아무나라도 좋았던거야. 당신을 웃게 만들었다면 그 누구라도 좋았을 허울 좋은 얘기.
똑똑, 하고 웨이트리스가 들어왔다.
칸막이 너머로 그림자가 비춘 순간 화들짝 손을 때버린 코코로는 멀쩡한 척하며 제 앞에 놓이는 크림 파스타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사랑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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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공책님(@null_note)님이 써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