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치이로] 너로부터 시작된다.(상)
"...너도, 버려져 버렸니?"
사무소로부터 돌아가는길.
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 속 퇴근러시에 치이고 싶지 않아서 선택한 비가 내리는 뒷골목에는 물에 젖어서 형태가 무너져버린 종이 상자 속 버려진 강아지가 있었다.
볼품 없는 '키워주세요'라고 쓰였을게 분명한 물에 번진 푸른 색으로 덮인 하얀종이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채 빗물만이 가득 찬 먹이통은 이 강아지가 비가 내리기 전부터 이곳에 있었음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장마 시기에 버려진 강아지라니.. 이 강아지를 버린 주인은 정말로 급했던지, 아니면 자신의 눈앞에서만 죽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돌아오지도 않을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는 볼품없이 젖고 뼈의 윤곽이 보일 정도로 매말라 있었다. 살아있는게 기적일지도 모른다.
떠나려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었을텐데.. 빗물로 무너져버린 상자의 구석은 강아지라도 찢고 나올 수 있었을것이다.
"끼잉?"
주인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것 같은 맑은 눈동자가 야치요를 올려다봐온다.
죽음이 곧 근처에 다가온 상황에서도 주인을 의심하지 않다니.. 야치요는 자신만큼 어리석은 존재라고 생각해버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하숙을 그만둔 야치요의 집에서 모두는 떠나버렸다.
부모님도 없고, 마지막 남은 보호자도 없어진 야치요는 어른들의 쉬운 먹잇감이었겠지.. 온갖 법적공방이 끝난 후에는 아무도 없었다.
친척들에게 시달려 날카로워진 기분으로 험한 말을 향한 친구도 결국 사라져버렸다.
야치요는 지금도 아무도 없는 하숙집에서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라면 나를 두고 어디에도 가지 않겠지.."
강아지는 야치요가 쓰다듬자 입을 헤 벌리고 눈을 감고는 기분좋게 혀를 내밀곤 헥헥거리기 시작했다.
붙임성이 좋은 성격.. 뒷골목같이 발견되기 어려운곳이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이 데려갔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부터 이 아이는 자신이 키우기로 결정했다. 강아지라면, 야치요가 버리지 않는 한 계속 옆에 있어 줄 것이다.
마음대로 실망하지도 않고, 재멋대로 기대하지도 않고. 야치요가 주는 사랑을 사랑으로 돌려주겠지.
대학을 졸업하고 모델 일이 아니라면 바쁜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강아지 한마리 정도는 아무 부담도 안될것이고, 이 아이는 얌전하고...
집은... 한사람이라면 너무 넓으니까.
그러니까 야치요는 버려진 강아지를 주워서 이로하라고 이름 붙였다.
누군가에게 버려졌던 지금까지를 잊고, 사랑받고 살아가는 지금부터가 네 삶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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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하마시는 이로하에겐 기쁜 추억과 그만큼의 슬픈추억이 가득한곳이었다.
누군가 이로하의 사정을 안다면 부모님을 따라 해외로 가 새로운 삶을 사는게 좋지 않았겠느냐고 했겠지.
이로하가 아무리 추억을 보듬어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이로하는 중학교때로부터 대학교를 다니는 지금까지도 무덤 앞의 망부석인채로 살고 있었다.
학교, 도서관, 집.
학교, 도서관, 집.
마치 다른 삶의 방법은 모르는가 싶을 정도로 같은 생활의 루트.
살아가는 이유같은건 진작에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 아이가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것을 마음대로 손놓는 일도 할 수 없었다.
이로하는 죽지못해 살고 있었다.
컹컹 개가 짖는 소리가 났다.
더불어 고양이의 절규에도 닮은 울음소리도 났다.
이로하는 가던길을 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우이는 이런걸 그대로 두지 않겠지. 언니인 나도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방해되는 우산을 내팽개친채 달려가서 근처에서 주운 돌맹이를 힘껏 던져 개를 쫓아버렸다.
하지만 발견이 늦었는지 피투성이의 고양이들은 그곳에서 이미 짧은 삶의 끝을 맞이 했다.
이로하는 이번에도 도와줄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언제나 누군가의 죽음을 기리기만 할 뿐이다.
"..냐아...."
"어..? 사, 살아있어?! 아얏!"
푸른빛이 도는 회색의 털이 눈에 띄는 고양이가 숨을 가쁘게 쉬면서도 살아있는것을 보고 이로하는 급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방금까지 적에게 공격당하는 바람에 흥분해 있는 것일까, 고양이는 도움의 손길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물리쳐버렸다.
앞발만으로 반신을 일으켜세운 고양이는 뒷다리를 다쳤는지 엉덩이를 질질 끌고서는 다른 고양이의 시체를 핥기 시작했다.
아마도 동료였겠지.. 이 고양이도, 소중한 존재를 죽음에게 잃어버린것이다.
"..그렇게 핥아봤자. 그 아이는 돌아오지 않아. 네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핥아도 눈을 뜨지 않을거야."
정작 자기자신은 챙기지도 않고 이미 죽어버려서 어떻게도 하지 못 할 빈껍질을 필사적으로 핥는 그 모습에 이로하는 왠지 화가 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로하는 동생이 살아있을적에도, 죽은 후에도 이렇게 화를 낸적이 없었는데.
그게 비록 말을 못하는 동물일지라도. 이런 상처를 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아..그렇구나.
이로하는.. 이 고양이가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자기자신도 내던지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죽어버린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되뇌이고 또 되뇌이며.. 이미 거기 없는 존재에게 사랑을 한다.
이토록 의미도 없고 어리석은 행위가 세상에 또 있을까.
"...우선, 네가 살아야지. 너도 사실 알고 있잖아. 되돌아오지 않을 생명보다 네가 중요한것을. 네가 불행해지는걸 저 고양이들이 바랄리가 없다는걸."
"...샤아악!"
비가내리는 이 날씨에 계속 피를 흘리면 이 고양이도 죽을것이다.
더이상 눈앞에서 누군가 죽는걸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네가 나랑 똑같은 길을 걷는걸 보고 싶지 않다.
이로하는 깨물고 할퀴는 고양이에게 상처를 입으면서도 안아들고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상처를 치료하고 안먹으려는 먹이와 약을 강제로 입을 벌려서라도 삼키게 하고.
이로하는 고양이에게 오래살기를 기원하며 영원을 이름붙였다.
죽음에게 동료를 잃어, 다시 만나려면 죽는 수 밖에 없는 야치요에게는 조금 심술궃은 이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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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하는 총명하고 얌전하고 사랑스러운 강아지였다.
배변훈련이나 간단한 손, 기다려 등. 야치요가 가르치면 금방금방 배워서 칭찬해달라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조금 응석쟁이이긴 하지만 원래 개는 응석부리는게 일이다.
이로하가 온 이후로 야치요는 웃음이 많아졌다.
개구리를 잡으려다가 흙탕물에 빠져서 어리둥절 자신을 쳐다보는 이로하라던가, 산책의 시옷자만 나와도 벌떡 일어나서 안절부절 야치요의 근처를 빙글빙글 도는 이로하라던가, 야치요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현관 바로 앞에서 업드려 잠들어있는 이로하를 보면 야치요는 저절로 웃음짓게 되었다.
"만만세, 라멘세트 2인분 배달이요-!"
장마로 매일 비가 오는 동안,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 바빴는지 한동안 오지 않았던 자칭제자가 오랜만에 방문했다.
야치요는 문을 열어줄까 말까 잠시 고민했지만 열어줄때까지 츠루노는 가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문득, 자신의 옆에 꼭 붙어서는 현관의 문과 야치요를 번갈아 쳐다보는 새 식구를 츠루노에게도 소개하고 싶어졌다.
"오-! 오늘은 일찍 열어줬네~! 혹시 배고팠어?"
"하아.. 가지고 오지 않아도 된다고 몇번을 말해야 들어주는거야? 앗, 이로하."
평소 택배기사나 배달원이 와도 염전히 앉아 기다리던 이로하가 왠지 츠루노에게 가까이 가서는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강아지적으로는 맛있는 냄새인걸까..? 하고 야치요가 고민하는 사이에 츠루노는 배달통을 내려놓더니 야치요가 공들여 폭신폭신하게 만들어놓은 이로하의 털을 엉망진창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왠 강아지야?! 야치요 강아지 키워?"
"어쩌다보니, 키우게 됐어. 그보다 안들어와? 현관에서 계속 이야기할거야?"
"물론 들어가야지! 오늘의 라멘은 회심작이라구? 꼭 50점 이상 받을거니까!"
얌전히 쓰다듬을 즐기는 이로하가 마음에 들었는지 한손엔 배달통, 한팔엔 강아지를 안은채로 츠루노는 신발을 허둥지둥 벗더니 곧장 식탁쪽으로 향했다.
귀여운 강아지가 있어도 만만세의 음식에서는 도망칠 수 없는 모양이다..
"강아지라던가, 키우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저항이 없는 이로하를 품에 안은채 의자에 앉아 츠루노는 의외라는 표정을 일체 숨기지도 않은채로 야치요를 쳐다보았다.
야치요는 이로하가 이대로라면 아무나 좋다고 따라가버리는건 아닌지, 조금 교육을 해야하는게 아닐까라고 고민하던걸 멈추고 맞은편에 앉았다.
이로하는 츠루노에게 안긴채로도 고개를 휙 돌려서 야치요를 보고 있다.
..사람이라면 목근육이 매우 아플것 같았다.
"어쩌다가라고 했잖아. 나라도 버려진 개가 있으면 주워버릴 정도로는 상냥함을 가지고 있어."
"아니아니. 상냥하지 않다던가 매정하다든가의 이야기는 아니고. 이 집에 누구도 들이고 싶어하지 않은거 같았다는 말이야."
내가 잠시 머무는것도 못마땅해하잖아.
평소 자주 생각해왔는지 가볍게 툭 던지듯 츠루노가 말했다.
지금까지 상당히 서운하게 만들어왔던걸까..
"..이로하는 나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아니라면, 도와줄 수 있을 사람도 없었고. 그대로 두고 오면 죽어버렸겠지? 어쩔 수 없잖아."
이로하를 도저히 볼 수 없어 외면하면서 말하는 야치요는 내심 이로하가 어려운 말을 알아들을 수 개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거짓말-. 이렇게 귀여운 강아지라면 누구라도 키우겠다고 나설걸?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아무도 개를 좋아한다고 놀리지 않아."
"츠루노도 의외라고 생각했잖아. 놀리진 않아도 놀라겠지."
"멍!"
갑자기 이로하가 짖었다.
이로하는 때로 바라는게 있으면 짖고는 했다. 그 이외로는 성대에 문제가 생긴건지 수의사에게 상담했을 정도로 조용했다.
"우왓.. 작아도 중형견.. 우렁찬데? 건강해서 다행이네! 야치요가 잘 돌봐줘~?"
츠루노가 싱글벙글 웃으며 그런 이로하를 쓰다듬었다.
츠루노는 이로하를 처음 보니까 이로하가 크게 짖는게 희귀한 일이라는것도 모를것이다. 당연한 대응이겠지.
"멍!"
아무래도 신경써달라는 의미의 짖음은 아닌것 같았다. 하긴 이로하는 야치요가 누군가와 대화 할 때에는 점잖게 기다려주는 착한 멍멍이였다.
"끼잉...."
"배고픈건가? 야치요, 이로하짱 밥 안줬어?"
"이로하는 알아서 적당량 먹으니까 시간 맞춰서 주지 않아도 돼. 놔주면 먹으러 갈거야."
"오.. 똑똑하구나... 음, 아무래도 밥은 아니었나보네."
츠루노가 바닥에 놓아주자마자 이로하는 한달 사이에 부쩍 커버린 몸으로 토도독 야치요에게 걸어와서 앞발을 무릎에 걸쳤다.
이로하의 안아올려달라는 싸인이었다.
이로하는 야치요가 안아주자마자 날름 야치요의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왠지 집요하게 눈 근처를 노려와서 야치요는 이로하를 조금 떼어냈다.
"이로하짱..엄청 응석꾸러기잖아? 야치요가 정말 좋은가 본데? 나 버려져버렸다~. 하지만 야치요가 사랑받고 있어서 다행이야."
양손을 유감이라는듯 까딱이면서도 츠루노는 만면 웃음이었다.
야치요는 왠지 그걸 듣고는..무거웠다고 생각했던게 지금이라면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워진것 같았다.
"사실..외로워서 데려왔어. ..혼자서 이 집은 너무 넓고. 강아지라면 내 곁을 떠나지 않잖아. 내가 험한 말을 하든, 매정하게 대하든 개라면.. 주인을 사랑하겠지?"
말하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츠루노가 어벙벙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아직, 장난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츠루노는 이해심이 많은 아이니까 장난을 쳤다고 해도 화내거나 하지 않는다. 에이~ 장난이었구나 하고 웃어버릴거다. 그러면..그러면?
"멍!"
왠지 그러지 않아도 될것 같았다.
전부 사실이니까.
전부 사실이어도, 그걸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이로하는 떠나지 않는다.
야치요가 무슨 짓을 해도 이로하는 계속 옆에 있으려고 할것이다.. 야치요는 드디어 가족을 얻었던 것이다.
흐르는 눈물을 이로하는 아까처럼 핥았다. 이로하는 어쩌면 야치요가 스스로 눈치채지 못했던 눈물을 닦아주려고 하고 있었던걸지도 모른다.
츠루노는 진지한 표정으로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재촉하려고 다그치지도 않고 가져온 라멘이 불어터지는것도 신경쓰는것 같지 않았다.
"..정말은, 혼자서 있고 싶지 않았어. 할머니도 모두도 떠나버려서. 누구든 언제든 내 옆을 떠나버릴거라고 생각했어. 그렇다면 차라리 혼자인게 나은 일이라고..생각했어."
방울 방울 떨어지는 눈물이 이로하의 털 끝을 적셔간다. 그것이 묘하게도 야치요를 온화하게 만들었다.
이로하가 야치요의 슬픔을 받아들여주는것 같아서 기뻤다.
이미 끝난 일이라면 말로 풀어버리는것도 어려운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이로하가 있으니까 외롭지도 않고. 오히려 즐거울정도. 보시다시피 위로도 할 줄 아는 훌룡한 가족이 생겼거든."
"..그러게. 내가 걱정할 필요도 없었네! 이로하짱은 최강보다 최강인 강아지구나! 다행이야. ....다행이야.."
활짝 웃던 츠루노가 울기 시작했다.
언제나 과장될 정도로 야치요에게 다가서던건 무리하고 있던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과연 자신이 위로 할 자격이 되는지 야치요는 고민했다. 주변이 떠나버리는걸 무서워한 주제에 걱정하며 다가오던 츠루노를 내쳐버린건 자신이였다.
"멍!"
"..알았어. 알았어. 정말.. 사실은 너 전부 이해하고 있는거 아니야? 하아.. 츠루노. 이로하의 덕분도 있지만... 츠루노가 없었다면 외롭다는 생각도 인정하지 않고 이로하를 다른데에 보내버렸을거야."
"멍!"
..정말 다 알아듣는건 아니지? 슬쩍 내려다봐도 이로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듯 고개를 까딱 할 뿐이었다.
"네가 알다싶이 여기저기 인맥정도는 있으니까.. 찾으려고 하면 금방 이로하를 데려갈 사람정도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발견됐겠지. 이렇게 귀엽고 말 잘듣는 강아지가 어디있어."
"그건..흑..내가 아니라 이로하짱이..."
"..갑자기 바빠졌다고 누구누구씨가 찾아오지 않았잖아. 안그래? 솔직히.. 조금 서운했으니까."
츠루노는 드디어 눈물을 멈추는가 싶더니 마침내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야치요는 이로하의 아무생각도 안하는것만 같은 얼굴을 쳐다보며 아이구~ 하곤 이로하를 내려두고 츠루노를 달래러 일어섰다.
오늘밤은 할 이야기가 아주 많을것 같으니 불어버린 라멘을 먹은 후에는 츠루노를 위해 빈방의 침대커버를 벗겨둬야겠다고 생각하며 야치요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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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치요는 까다롭고 심술궃고 손이 많이 가는 고양이였다.
이로하가 쓰다듬으려하면 도망가는 주제에 이로하가 없으면 아무것도 먹지않고, 자는 이로하의 몸 위에 올라가 업드려 잠들어버리고, 시중에서 파는 간식은 전부 걷어차버리면서 이로하가 만든 간식은 몰래 훔쳐먹어버린다.
하지만 이로하가 슬퍼하고 있으면 반드시 다가붙어주는 상냥한 고양이다.
야치요가 온 이후로 이로하는 화낼 일이 많아졌다.
야치요가 쓰레기통을 엎어버린다던지, 야치요가 약을 안먹고 숨긴다던지, 야치요가 휴지를 몽땅 풀어해쳐버린걸 보면 이로하는 이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하는 야치요를 붙잡아 앞에 앉힌채 알아들을리 없는 설교를 시작했다.
"타마키씨, 왠지 요새 자주 다쳐있네."
제일 친하다던가, 베스트 프렌드같은 사람은 없지만 이로하는 만인에게 상냥한편이므로 수업을 같이 듣는 사람 정도는 있다.
미움받기는 어려운 성정이기 때문일것이다. ..다소 이용당하기 쉬운 성격인것은 자각하고 있다.
"응. 고양이를 키우게 됐거든."
"헤에.. 의외네."
이 사람은 그래도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서로서로 혹시 아파서 강의를 빠진다거나. 볼일이 있어서 빠져야할때에 공지사항이나 수업내용을 공유하는 정도의 교류를 하는 상부상조인 관계였다.
이로하에게는 오히려 마음이 편한정도다.
이로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슬퍼하는 사람이나, 걱정된다고 이것저것 캐물어오는 사람들을 상처주지 않으며 떼어내는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그렇게 의외인가?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 꽤 있지 않아?"
"으응.. 그렇지만 타마키씨는 할것 같지 않다고 할까.. 어딘지 금방이라도 떠나버릴것 같으니까, 얽매이는것은 만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어."
이로하는 다른 사람이 이렇게 자신을 보고 있을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시야 안에 들어와도 거슬리지 않지만 신경도 쓰이지 않는 사람.
그것이 자신의 위치이도록 행동해 온 것 같았는데.
"후후, 그럴리가 없잖아. 여행같은거 별로 가본적도 없고.."
다가오지 말아줘. 나도 다가가지 않을테니.
이로하는 언제나 경계의 바깥쪽에 서 있다.
선의 밖은 아니다. 하지만 결코 안쪽도 아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올 수 있는것은 이미 죽어버린 세명뿐이라고 결정하고 있었다.
"..고양이 약을 발라줘야해서 먼저 가볼게. 과제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아, 이야기가 길어졌네. 잘가, 타마키씨."
명백히 화제를 돌리는 이로하에게 상대는 조금 당황한거같았지만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내일부터는 이 자리는 앉지 말자. 창가쪽 구석이라면 이 뙤약볕 때문이라도 모두는 근처를 피할것이다.
도서관에도 들리지 않고 간단히 장을 본 후에 이로하는 집에 돌아왔다.
사실 요리는 오랫동안 하지 않았지만 야치요의 식사를 만드는김에 이로하도 스스로의 식사를 요리하기 시작했다.
먹기 싫어하는데도 야치요의 입을 벌리고 쑤셔넣었었는데 저만 대충 떼워버리는것에 찔리는 부분도 있긴 하다.
뭐 어차피 장을 봐야하니까 그 김에 자신의 식재료도 사는것이다.
"다녀왔어-."
"냐아"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오면 우연히 지나가는척 야치요가 스륵 이로하 앞을 지나치며 야옹 울고 간다.
한두번이라면 우연이겠지만 야치요는 걸을 수 있게 되자마자 똑같은 행동을 계속했다. 이쯤되면 알아차리라고 대놓고 티내고 있는건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다리는 아프지 않았어? 아.. 역시 점심 안먹었네.."
의외로 흘린 피에 비해서 상처는 크지 않았다. 아무래도 야치요는 무리에서 사랑받는 존재였는지 주위에 죽어있던 다른 고양이들이 지켜준 모양이었다.
그 고양이들은 어차피 취미도 없고 사치도 부리지 않아서 쓸데도 없는데 딸을 혼자 둔다는 죄책감에 많은 용돈을 보내주는 부모님의 덕에 장례를 치뤄줄 수 있었다.
야치요는 그날 하루종일 울었다.
이로하는 야치요가 지쳐 잠들때까지 쓰다듬어주었다.
"저녁은 금방 만들테니까. ..먼저 먹어주진 않을거지?"
이로하가 밥을 제대로 챙겨먹을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야치요가 이로하가 밥을 먹지 않으면 자신도 밥을 먹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기운을 차려서 힘도 돌아왔는지 억지로 먹이는것도 일이므로 이로하는 그냥 밥을 챙겨먹기로 했다.
칼로리바도 젤리음료도 통하지 않으니까 이로하는 자신을 위해서라면 한없이 무가치하고 귀찮게 느껴지는 요리를 시작했다.
그러기에 앞서 우선 장을 본 물건들을 정리할때에 이로하는 카톡이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까의 그 사람이다. 과제가 급하기라도 했었던걸까?
이제부터 거리를 둘 사이라도 이로하는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는것이 당연한일이라고 생각했다.
[아까는 미안했어. 타마키씨가 이런 말을 하는거..좋아하지 않을건 알고 있었지만.. 하지만 친해지고 싶어서. 고양이에 대해서라면.. 좀 더 사적인 대화라도 해주지 않을까 싶어서.. 싫었다면 사과할게. ..내일도 인사해줄래?]
..의외의 일이었다.
친해지고 싶다고? 뭘 위해서?
의심은 나쁜 일이다. 우이의 언니라면 괜찮다고 받아주고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내일도 웃으며 인사해야한다.
"냐아-."
야치요가 이로하의 발목근처에 몸을 문질러온다.
야치요가 이렇게 애교를 부리는 일은 흔하지 않지만 없는 일은 아니다. 배가 고프거나. 간식을 먹고 싶거나.
..이로하가 우울하거나. 지쳤거나. 우이를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기 싫어질때.
이로하는 쓰고 있던 답장을 지웠다.
이래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무거웠던 발걸음이 왠지 가볍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자신은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것 같았다.
뚜르르르르...
"여보세요? 응. 아니야.. 사과 할 필요없어. 다 맞는 말이야. 사실, 지금까지 말한적이 없지만.. 정말로 어디든지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던거 같아. ..지금은 아니지만. 귀여운 고양이를 두고 멀리 여행 갈 순 없거든. 이 아이 야치요라고 하는데. 글쎄, 내가 없으면 밥도 먹지를 않아서-. 아, 다음에 혹시 보러 올래? ..."
야치요는 처음엔 걸을려고 하지 않았다.
다리가 심하게 다친것도 아니라서 붕대를 하긴 했지만 걸어다니는데 문제가 없었는데..
수의사는 아마도 큰 충격을 받아서라고 했다.
하지만 야치요는 이제 걷기는 물론이고 옷장위로 뛰어 올라가서 혼자서 못내려올때도 있을 정도로 천방지축이다.
이아이도 힘내서 변했는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응. 사양말고 놀러와. 애플파이 만들어서 기다릴게."
전화를 하는 이로하의 발등 위에 앉은채로 야치요는 꼬리를 이로하의 발목에 살짝 감고는 하품을 했다.
여전히 천역덕스러운 얼굴이네하며 작게 웃고 이로하는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내일은 사과를 사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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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하를 데려왔을때부터 다닌 이 동물병원은 대기실에 설치된 차례대기표를 띄운 화면에 동물의 이름을 표시한다.
사람의 이름으로 표시하는것보다 프라이버시 보호가 되는걸까하고 야치요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카미하마시에서 꽤 이름이 알려져있는편인 야치요로써는 괜찮은 시스템이다.
"이로하, 오늘은 주사맞는게 아니라 검진만 하는거니까 산책하면서 돌아갈까? 최근 조금 바빠서 별로 못놀아줬으니까.."
"멍!"
기대로 가득찬 시선을 보내는 이로하는 주사도 별로 무서워하는편이 아니고 약도 야치요가 주면 잘 먹는다.
수의사의 앞에서도 짖거나 물지 않으니까 매번 착하다고 간식을 얻어먹을 정도로 환영받고 있다.
"음.. 오늘은 생각보다 손님이 많네.. 아직 한참 남았나? 응..?"
언제 시스템을 교체한걸까? 지금 치료실에 야치요가 있다고 쓰여있었다.
하지만 시선을 내려보면..대기실의 칸에 이로하도 쓰여있었다.
"우연이네.. 이로하, 나랑 같은 이름의 동물이 있나봐. 개일까, 고양이일까?"
"끼잉?"
말을 이해못했는지 아니면 저도 모른다는 표시인지 고개를 갸웃하며 이로하는 야치요를 올려다본다.
"뭐, 혹시 햄스터 이름일수도 있고.. 후후..신기한 우연이네. 앗."
호기심에 보고있던 치료실의 문이 열리고 안에서 아마도 러시안블루..처럼 보이는 고양이를 안고 나오는 귀엽고 다소곳해 보이는 여자아이가 나왔다.
손가락에 생채기도 여럿 보이고 지금도 꼬리로 탁탁 얻어맞는걸 보면 상당히 성격있는 고양이같다.
그런데도 곤란한듯 웃으며 다독이는걸 보니 그 아이는 상당히 그 고양이가 소중하겠지.
"우리 차례네. 가자, 이로하."
이로하와 함께 치료실에 향하면서 문득 그아이가 이쪽을 본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아마 착각이겠지하며 야치요는 수의사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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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치요와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건 대체로 전쟁을 방불케한다.
우선 야치요는 이로하 이외의 타인의 손에 닿는걸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물고, 발로 차고, 할퀴려고 든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지언정 폐를 끼치는게 미안한걸 넘어서서 싫은 이로하는 항상 최선을 다해서 야치요를 다독이지만 결국 한손을 내주고 나서야 봐준다는듯 얌전해진다.
주사를 맞는 동안에 화풀이 하듯 잘근잘근 씹거나 살짝 할퀴어지는 손은 이제와서는 별로 아프다고 생각되지도 않을 정도다.
요새는 야치요 나름의 응석일까하고 흐뭇해 질 정도다.
"네. 다리는 이제 붕대를 풀어도 될 것 같고요. 다음 예방접종때 또 봅시다. 야치요, 너무 타마키씨 괴롭히지 말고 다음에도 건강하게 만나자?"
"감사합니다. ..야치요 그렇게 파고들지 말고 인사해야지."
"하하..괜찮아요. 동물에게 미움받는건 익숙해서.."
"죄송합니다..."
자신을 아프게 한 수의사를 보기도 싫은지 이로하의 품에 고개를 박은 야치요는 치료실을 나갈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음 접종 예정일도 듣고, 계산도 해야하는데 이래서는 지갑을 꺼내기 힘들겠다고 곤란하게 웃으며 이로하는 난처해보이는 자신을 보고 웃고있는 데스크의 직원에게 걸어갔다.
"..?"
이로하가 지금까지 본 사람중에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방금 자신의 이름을 부른것 같았다.
멍하니 되돌아보자 그쪽에 설치되어있는 대기자 명단의 치료실 부분에 이로하가 있다고 쓰여있었다.
혹시 개나 고양이의 이름이 겹칠수도 있으니까 대기자 이름 옆에는 간단하게 동물의 종류와 나이, 성별이 표시되어있다.
"그런가.. 강아지 이름이 이로하구나. 신기하네."
"야옹?"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빨리 집에 돌아가자. 피곤하지? 앗."
다시 데스크로 향하려다가 보인 테이블 위 책 표지에 그 사람이 있었다.
"나나미..야치요? 모델인가보네. 후후후, 야치요. 네 이름이랑 똑같아. 이로하에 야치요.. 정말 엄청난 우연이네."
"냐-."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듯 야치요의 꼬리가 또 퍽퍽 이로하의 팔을 치댔다.
이름이 겹치는게 나쁜일도 아니고 오히려 신기한 일이었다고 조금 놀랐지만 왠지 즐거워진채로 이로하는 친구에게 오늘의 조그마한 사건을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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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야치요.."
"엣..이로하?"
같은 동물병원을 다니는거라면 생활반경이 비슷한걸까?
우연히도 포인트10배의 노래가 들려오는 마트에서 야치요는 저번에 동물병원에서 본 그 아이와 마주쳤다.
상대도 대기자명단을 보았었는지 깜짝 놀라서는 꽤 재밌는 반응을 돌려주었다. 누군가 두명을 본다면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한 사람이 우연히 마주친걸거라고 생각되는걸까?
그런데 우습게도 실상은 서로 상대의 이름이 아닌 서로의 개와 고양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거니까 사실을 알고나면 정말 박장대소를 할지도 모른다.
"아아아..! 죄송합니다.. 그, 사실 강아지랑 제 이름이 똑같아서.. 게다가 야치요씨랑 제 고양이 이름이랑 똑같아서..! 신기한 우연이니까, 설마 여기에서 만난다고는 생각도 못했고.."
주인의 이름까지는 쓰여있지 않았으니까 야치요는 설마 자신의 이름과 같은 고양이의 주인이 이로하라고는 알아채지 못했다.
뭐, 나름 인기있는 모델이니까, 상대는 이름을 알아챈거겠지.
그나저나 횡설수설 있는 힘껏 설명하려는 붉어진 얼굴이 공을 가지고 놀다가 실수로 물통을 엎어버린 이로하같아서 야치요는 무심결에 풋 웃어버렸다.
"아하하하..그렇게 당황하지 않아도.. 그러니까.. 이로하씨? 나도 그렇게 부르면 될까요?"
"네! 아마도 제가 연하일테니까. 편하게 말놓으셔도 돼요. 모델, 맞으시죠? 동물병원에 놓인 잡지에서 봤어요."
평소부터의 구독자는 아닌거 같다. 하긴 팬이라면 야치요가 인터뷰에서 키우는 개에 대한걸 말하는것도 읽은적이 있을테고, 얌전해 보이는 인상이니까 패션잡지같은건 관심없을지도.
"아, 강아지 간식 사러 온건가요? 하아.. 부럽네요.. 야치요는 간식은 커녕 밥도 직접 만들어주지 않으면 한입먹고는 먹질 않아서.."
"이로하는 뭐든 가리지 않고 먹으니까. 하지만..그렇게 공들여 손수 만들어주는것도 멋진 일이네. 시간도 노력도 많이 들어가니까.. 아무래도 바쁜나머지 사버리게 되버려서.."
상냥한 미소가 이로하를 꼭 닮아서 야치요는 처음 대화를 나누는데도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한 나이는 몇인지 그런건 하나도 모르는데 이야기 할 화제가 끊기지않고 결국 타임세일의 시간이 올때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타임세일..! 포인트10배데이의 타임세일은 전쟁의 시작이야. 이로하씨. 준비는 됐어?"
"네?! 엣...네??"
깜짝 놀란 표정이다. 하긴 모델이 이런 말을 하는것은 자신을 잘 아는 팬이 아니더라도 이미지를 와장창 할 정도의 충격을 줄것이다.
내심 살짝 실망하면서..실망?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것일까.. 야치요는 부쩍 욕심이 많아진거 같다고 생각하면서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 흘러가버릴것 같은 이로하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익숙해지면 오히려 즐거울거야. 오늘 필요한건?"
"아..그러니까.."
주머니에서 메모용지를 꺼낸걸 보면 살 물건을 미리 정해 둘 정도로 성실한 성격인것 같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 일부러 종이에 글을 써오다니..아날로그를 좋아하는걸까?
식재료를 여러가지 적어온걸 보면 요리를 잘 할것 같다. 요리의 성공은 기본적으로 준비성으로부터 정해지는것이다.
"나는 오늘은 이것만이니까, 이로하씨. 도와줄게."
"괘, 괜찮은데..앗!"
"안-돼. 내가 걱정되니까 도와주는거야."
이로하랑 이름이 같아서. 닮아서일까? 야치요는 도저히 이로하를 혼자 내버려둘 수 없었다.
지금까지 혼자서 장을 봤을테니까 조금 고전하더라도 혼자 할 수 있을거란것은 잘 알지만.. 그래도 도와주고 싶었다.
뭐, 계산하고 나올때쯤에 바른자세가 바람직하던 등골이 피로로 축 흐트러진걸 보면 도와서 다행이었겠지.
"오늘 감사합니다.. 하아, 자취한지도 오래 됐는데 저런 쟁탈전은 처음이에요."
"어머, 자취한다면 할인정보같은건 알아두는게 좋지 않아? 이득이고. 그만큼 다른데 여유를 가질 수 있잖아. 대학생이라면 여기저기 돈 쓸일도 많겠지?"
"아, 뭐... 그렇죠."
너무 깊게 발을 들였나.. 저번에 지나가듯 본것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으니 첫만남이라기도 애매하다. 진정한 첫만남은 오늘이라고 해야겠지.
허물없이 대하기엔 그저 이름만으로 엮인 우연이 만들어낸 사이. 다시 만날 일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야치요는 어느새 이로하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신경쓰고 있었다.
모델이라고 환상을 품었을지도 모르는데.. 물건을 먼저 사겠다고 전력질주하고, 무심코 할인에 눈이 멀어 살필요도 없는걸 잔뜩 사서 이로하의 짐만큼이나 부풀어오른 장바구니를 들고.
"사람이 많아서 조금 무섭긴했는데 정말 즐거웠어요. 마트에서 그렇게 달려본건 처음일지도.. 후후, 야치요씨 눈까지 반짝반짝하면서 이것저것 고르는모습 귀여우셨어요."
"귀엽..."
"앗..실례인가요..? 하지만, 잡지에서 봤을때는 아름답지만 타인을 거절할듯 예리한 눈빛이고..아! 물론 멋지다는 이야기에요! ..그렇지만 이렇게 친근하게 대해주고 심지어 장보는걸 도와주다니 이젠 팬이 되버리는 수 밖에 없네요!"
이로하는.. 개여도 인간이여도 똑같이 이로하인가 하고 야치요는 살짝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
놀랍게도 야치요 스스로도 이건 아니지.라고 생각한 행동을 이로하는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곤 심지어 웃으며 기뻐하는것 같았다.
야치요는 이 만남을 이번 한번으로 끝내고 싶지 않아졌다.
"저기, 싫지않으면 전화번호 물어봐도 될까? 역시 이로하에게 간단한 간식 정도는 만들어서 주고 싶은데..물어봐도 될까해서."
"좋아요! 저도 도움받았고. 음..개랑 고양이는 못먹는 음식이 조금 다른거같긴 했지만. 요새 관심이 있어서 공부중이니까 괜찮아요. 맡겨주세요!"
전화번호를 나누며 밝혀진 사실. 이로하는 딱히 아날로그를 선호해서가 아니라 스마트폰을 사용하는데 서툴렀던거 같다.
여러모로 귀여운 연하의 친구가 생긴것 같다고 야치요는 갈림길에서 손을 흔들어주며 작게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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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번호를 나누긴 했지만 이렇게 친해질 줄은 몰랐다고 이로하는 긴장하며 야치요가 내어준 머그컵을 두손으로 살포시 잡고 있었다.
그 이후로 서로 고양이와 개의 사진을 교환하거나. (이로하(개)의 사진을 받은 후에 야치요(고양이)의 사진을 보내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하냐고 친구에게 물어 가르쳐받았다.)
야치요가 이로하와 산책하는걸 발견해서 같이 공원을 걸으며 이야기하거나.
이로하가 레시피를 정리한 노트와 함께 시험삼아 만들어봤다며 수제 개 간식과 친구도 좋아한다는 애플파이를 같이 준적도 있다.
하지만 집에 들어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물건을 전해주는것도 사진을 교환하는것도 집에 갈 필요는 없으니까.
이로하는 서로 집에 놀러가는 친구를 사귀어본게 최근의 한건 뿐이므로 이것이 어느정도의 거리감인지 알기 어려웠다.
"멍! 헥헥헥.."
"아..이로하, 후훗..간지러워."
왠지 자신과 이름이 같은 이 상냥한 시바견은 이로하를 아주 잘 따랐다. 어째서 이렇게 좋아하는걸까 궁금할정도로 산책하는 도중 마주쳤을때엔 실컷 냄새맡아졌다.
뭔가 달콤한 냄새라도 나는 걸까..? 이로하는 슬쩍 소매부분을 냄새맡아봤지만 스스로는 잘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하는 정말 이로하씨를 좋아하는구나. 츠루노한테도 그렇게 애교를 부리지는 않는데.."
"저는 잘 모르겠지만 이로하가 좋아하는 냄새라도 났던게 아닐까요? 자주 집에서 요리를 하니까 음식 냄새가 베어들었다던가.."
"흠?"
흥미가득한 표정으로 불쑥 다가온 야치요가 이로하의 머리칼을 스륵 쥐더니 냄새를 맡고는 놓아주었다.
언제 봐도 정말 아름답다..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이로하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가끔 어떻게 이렇게 허물없이 자연스레 다가올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모델들은 다 이런걸까?
"확실히 조금 달콤한 향기가 나는것 같기도..향수라도 뿌리니?"
"아뇨.. 그런건 잘 몰라서."
"샴푸향이라던가, 그런걸까? 음식냄새는 아닌거같아. 개뿐만 아니라 나도 마음에 드는데."
"엣.."
그것은..어떤 의미..?하고 묻기도 전에 야치요는 벌써 이 화제에 대해서는 자기완결해버렸는지 이로하의 앞에 노트를 한권 두었다.
"자, 도움이 됐으면 좋겠는데. 나름 성적은 괜찮았으니까. 그 강의는 재밌어서 더 열심히 공부했고."
"와아. 야치요씨는 글씨까지 예쁘네요! 게다가 정리도 잘되있어서 엄청 도움이 될것같아요! 아아..야치요씨가 같은 대학이었어서 다행이에요.."
"..그렇네. 이로하씨가 한살만 더 많았으면 대학교에서 마주쳤을지도."
아쉽다는듯 노트의 표지를 쓰다듬는 야치요의 손가락이 가늘고 길어 피아노를 쳐도 어울릴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로하가 다니는 대학이 야치요가 졸업했던곳이란걸 알게 된것은 이젠 몇번째인지 세려면 두손으론 부족할 정도로 마주친 공원에서의 일 때문이었다.
그 공원은 이로하가 집으로 갈때 사람이 붐비는 대로를 피해서 지나치는 조금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제 거리를 두는것은 그만두자고 정했지만 원래부터 사람이 붐비는곳은 서툴렀다.
그날은 이미 다리가 다 나아서 필요없을지도 모르지만 야치요라면 장난을 치다가 어딘가 다칠수도 있다는 걱정으로 동물용 연고를 추가로 사서 집에 돌아가고 있었다.
뭐, 피부병이나 습진이라던가에도 써도 된다고 하니까 습기찬 여름에 미리 준비해두는건 나쁘지 않을것 같았다.
"아, 야치요씨다. 응?"
앉아있는 이로하의 앞발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모습이 다급하고 걱정스러워보였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이로하가 보는 야치요는 대체로 침착하고 여유로운 어른의 표정이 많았는데 지금은 길을 잃은 미아같은 도움을 구하는 표정이었다.
이로하는 한달음에 뛰어갔다. 도울 수 없을지 몰라도 뛰어들어보면 뭐든지 할 수 있는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야치요를 구했을때 배웠다.
"무슨 일이에요?"
"아.. 이로하씨.. 그게, 아무래도 날카로운걸 밟은것 같아서. 유리같은건 아닌거 같고 아무래도 플라스틱같은데.."
"잠시만요."
이로하는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서 앞발의 상처를 씻어내렸다.
약간의 모래먼지와 피가 씻겨나간 자리에는 꼬맬정도는 아닌 상처가 있었다. 이정도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야치요때에 배운 이로하는 휴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가방에는 연고도 있고 소독약도 있고 붕대도 있다. 사실 동물용 연고가 아니라 소독약이나 붕대, 반창고는 평소부터 들고다녔다.
이로하는 이제는 필요없는데도 우이나 토우카, 네무가 넘어지면 치료해주기 위해서 가지고 다니던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아니..고치지 않은걸지도 모른다. 이것도 우이가 남긴 흔적이니까.
"그런걸 다 가지고 다니는거야? 게다가 붕대매는 솜씨도 좋네.."
"아, 간호학과라서요. 음.. 동물치료에 대해서는 최근에 따로 공부한거지만.."
"공부 열심히 하는구나. 고마워. 덕분에 또 도움받았네."
가만히 잘 참아준 이로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일어서면 야치요가 안심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이런..건 이로하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중학교 이후로부터는 거의 들은적이 없었다.
"별거 아니에요. 야치요가 크게 다쳤던적이 있어서 혹시 다음에 또 다친다면 큰일이니 미리 공부해둔거고. 뭐, 쓸데없는 걱정이라도 지금 도움이 됐으니 다행이네요."
"그게 어떻게 쓸데없는 걱정이니? 야치요를 위해서 이로하씨가 노력한건데. 실제로 지금 이렇게 도움도 됐고. 오히려 대단한거 아니야? 보통 크게 다쳐도 사람들은 다음을 생각하지 않잖아."
"그럴까요..? ..이미 다쳐버렸던건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다치지 않게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강아지의 맑은눈이 이로하를 올려다봐온다.
약을 바르고 붕대를 매뒀어도 이미 다친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로하가 간호사가 되어서 아픈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되어도 우이와 두명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미 전부 늦은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역시 과거에 얽매여 추억을 되새기고 있는것 뿐 아닐까.
"이미 흘러가버린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악마정도가 아닐까?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잘먹이고 약 잘 발라줘서 이로하가 낫는걸 돕는것 뿐이지. 플라스틱 조각을 이로하씨가 버린것도 아니잖아?"
"..어쩔 수 없는 일인데도 어떻게든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버려요. 바보같네요, 저."
치료하느라 무릎을 꿇고 있던 바람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일어서서 야치요에게 시선을 맞추지 않기 위해 이로하를 쓰다듬으며 까딱이는 귀를 쳐다보는척을 했다.
알고있다. 아무 사정도 모르는 야치요가 이런 이야기를 들어봤자 고양이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투정을 부리는거라고 들리겠지.
"이로하씨는 역시 매우 상냥하구나."
"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늘도 야치요씨에게 투정부리고 있고."
"나라면 소원을 빌 수 있을때에 날 위해서 빌테지만 이로하씨는 그 도울 수 없었던 일을 소원으로 빌겠지? 타인을 위해서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이 상냥하지 않다면 이 세상에 상냥한 사람같은거 존재하지 않아."
이로하를 달래려고 억지로 말하는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본 야치요의 표정 중에서 제일 상냥해서, 눈물이 나올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우연히 마주칠때마다 손을 흔들며 헤어지는 갈림길까지 같이 걸으며 이로하와 야치요는 지금까지는 피해가던 서로의 정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좋아하는 음식이나, 좋아하는 음악. 또는 지금 다니는 대학교에 대해서나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헤어지기 아쉬워서 아플텐데도 평소처럼 이로하에게 가지 말라고 옷자락을 물고 살짝 당기는 이로하에게 응석부려 두명은 좀 더 서서 이야기했다.
그것이 저번에 만났을때의 이야기.
그때 지금 하고 있는 과제에 대해서 이야기한것을 듣고 야치요는 자신도 그 강의를 들었다며 가지고 있는 자료와 노트를 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이로하는 처음에 사양했지만 어차피 필요도 없고 받지 않겠다면 슬슬 정리해버려야겠다는 말을 듣고 받기로 했다.
뒤늦게 놀리는거란걸 깨달았지만 간질간질해도 호의를 받는것은 기쁜일이니까.
"음.. 하지만 같은 대학을 다녔어도 말 걸 수 있었을지는.. 야치요씨 분명 인기 많았죠? 누구라도 야치요씨를 보면 한눈에 반할텐데."
"눈에 띄기는 했겠지만 아무래도 모델이라는 직업이 친숙하지 않아서인지 별로 다가오진 않았어. 이로하야말로 이런 상냥하고 귀여운 아이를 내버려둘것 같지 않은데?"
"네엣?! 전혀 아니에요! 고백받은적도 없는걸요, 저."
여기저기서 말을 걸어온적은 많지만 모르는 부분을 가르쳐달라거나 짐 옮기는걸 도와달라거나 행사준비를 위한 물품을 같이 사러 가자거나 하는 거절하지 않는 이로하를 편히 여긴 용건 뿐이었다.
답례로 무언가 같이 먹으러가자는 말을 들어도 거북하고, 어차피 돕지 않았어도 집에 갈 뿐이고 다른 용건도 없었으니까 사양해왔다.
"흐응..모두 보는눈이 없구나. 아직 아이라서 그럴까?"
"아이라니.. 술도 마실 수 있는 나이라구요?"
"후훗..대답부터가 아직도 아이인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네.. 서로서로 주변에서 다가오지 않았다면 외톨이끼리 친구가 됐을지도. 우연히 마주쳐서 그대로.."
만약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지금의 만남도 순전히 우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혹시 그런 방법으로 만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로하는 왠지 이로하 생에 제일 아름답고 먼 존재로 생각되던 야치요와 같이 차를 마시는게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상같이 생각되었다.
자연스레 꽉 쥐고있던 손가락의 힘을 풀고 야치요를 따라 웃음소리를 흘리면 야치요는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타마키씨, 평소에도 그렇게 힘을 빼고 있는게 어때? 방금의 미소, 사진으로 남겨도 좋을 정도였는데."
"무, 무슨소리에요! 야치요씨의 미소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으으..부끄러워.."
"이로하씨는 가끔..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일까 헷갈린단 말이지.."
"네?"
"아니야. 역시 귀엽구나했어."
그렇게 말하고 살풋 웃는 얼굴은 아, 역시 아름다운 사람이네하고 이로하의 마음을 뒤흔들어왔다.
물론 외면도 모델을 할만큼 아름답지만 이로하에게 향하여 주는 시선의 따스함이나 자연스레 이로하의 호의를 받고 돌려주는 답례의 말들이 무엇보다도 야치요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비추어주고 있는것 같았다.
분명 사랑받고 또 사랑해주며 마음을 나누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가지는 부분일것이다.
우이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나도 배울 기회가 있었을까? 이로하는 세명에게 듬뿍 사랑을 주었지만 세명의 호의를 돌려받기에는 세명에겐 여유도 없었고 나이도 어렸다.
그들에게는 사는것이 필사적이었다. 이로하가 최선을 다해서 줘도 좀 더 달라고 갈구할만큼 메말라있었다. 이로하의 외로움을 보듬어 줄 여유는 없었을것이다.
어떻게 이로하가 매일 병원에 찾아오는지 그걸 위해서 무엇을 포기했는지 알아채주길 바라는건 너무한 일이겠지.
"그나저나 곤란하네.."
"네!? 무슨 일 있으세요?"
잠시 차를 마시며 익숙하지 않은 넥카라를 벗어보려고 양앞발로 꾹 힘을 주는 바람에 찌그러진 얼굴의 이로하를 구경하던 야치요가 툭 작게 한숨처럼 내뱉은 말을 이로하는 놓치지 않았다.
릴렉스 한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역시 남의 집에서 긴장하는건 어쩔 수 없는지 과하게 반응해버렸다.
"이번에 촬영을 위해서 좀 멀리 가야해서 외박을 하게 될 것 같은데 이로하를 맡길 적당한곳을 못찾아서."
"아.. 음, 혹시 곤란하시면 제가 맡아드릴까요? 야치요는 큰개가 아니면 괜찮거든요."
공격당한 트라우마인지 야치요는 대형견을 보면 이로하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로하가 구해준것을 확실히 기억하는것 같았다.
그래도 중형견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은것 같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짖어오면 위협 할 정도다.
"괜찮겠어? 부담주고 싶지는 않지만.. 주변인에게 부탁하려고 해도 집이 음식점이다보니 개는 안될것같아서.. 맡아줄 수 있다면 고마운데."
"괜찮아요. 이로하, 착하고 얌전하니까. 이로하 야치요랑 잘 지낼 수 있지?"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로하는 나름 자신있었다. 원래는 고양이에 대해서만 공부했지만 마트에서 만난 후 부터 개에 대해서도 신경쓰여서 조사했으니까.
먹으면 안되는 음식이나 개가 아플때의 증상같은건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 개를 키우지도 않는데 야치요가 물어보면 대답해주기 위해서..
"이로하씨, 언제나 고마워."
이렇게 야치요가 웃어주니까.
왜 야치요가 웃어준다는 이유만으로 노력하고 있는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상냥한 연상의 친구가 생겨서 기쁘다고 웃어 돌려주었다.
이로하는 이미 호의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어가고 있었다.
*
*
*
비오는 날은 싫다. 큰 개도 싫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싫은건 약하면서 지키려고하는것이다.
야치요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주변을 인지하게 됐을때는 이미 뒷골목의 주민으로 음식을 구하는것만으로 힘겨웠다.
그럭저럭 오래 살아왔다는 이유만으로 동료라고 칭하는 고양이들이 모여와서 다소 큰 무리가 되긴 했지만 사는 요령을 알 정도로 오래 살았으므로 그때쯤에는 배를 굶주리지도 않았다.
나름 잘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쥐같은 작은 동물을 사냥하는 방법이나 고양이를 좋아할것 같은 사람에게 먹이를 타내는 방법같은걸 알려주며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줬다.
그러니까 날 지키려다가 죽지말고 어디라도 도망쳐서 살아갔으면 좋았을텐데..
그날은 비가와서 옹기종기 모두 모여 비를 피하고 있었다. 며칠이 계속된 장마가 빼앗아가는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가붙어 온기를 나누었다.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는 모른다. 그곳에 커다란 개가 나타났다.
큰 적은 맞서는게 아니다. 모두는 알고 있었지만 이곳엔 작은 고양이도 있다. 야치요는 자신은 오래 살았으니까 그녀석들을 지키는게 나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싸움이 발발했을때에 아무도 도망치지 않았다. 모두가 야치요를 믿었다. 기회를 만들려고 개의 시선을 끌거나 야치요의 앞을 막아서 대신 공격받았다.
터무니없는 일이다. 지키려고 했는데. 약한주제에. 도망갔어야지.. 어차피 저런 커다란개를 고양이는 이기지도 못하는데..
그때 지금의 주인에게 도움받았다.
처음은 원망했다. 도와줄거면 좀 더 일찍 올것이지. 차라리 날 죽게 내버려두지..
할퀴고, 물고, 울어대고, 어지르고. 길에서 배운 사람이 싫어하는 일은 다 했다.
그런데도 이로하는 억지로 밥을 먹이고 약을 먹이고 ..열을 내는 야치요를 끌어안고 울어주었다.
제발 더이상 제 앞에서 죽지 말라고 우는 그 모습이 무척 작아보였다. 야치요는 이로하보다 훨씬 작은데도 불구하고.
이로하는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않고 잠도 잘 자지 못했다. 멍하니 사진만 들여다보거나 밤새도록 닳아버린 노트의 페이지를 넘겨보거나.
개를 쫓아버리고 저항하는 자신을 병원에 데려갈때에는 그토록 강해보였는데. 이래서야 버려진지 얼마안된 아기고양이다.
야치요는 약한주제에 지키려고 드는것이 정말정말 싫지만 이로하는 지금 자신의 주인이니까 어쩔 수 없이 강하게 만들어주기로 했다.
주인을 바꾸면 되지 않느냐고? 자신을 살려놨으니 키우는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아기고양이 가르치듯 알려주는것 뿐이다.
"앗, 야치요! 그걸 엎지르면 어떻게해!"
"냣!"
길고양이의 삶에 가장 중요한것은 무엇보다 먹는것이다.
우선 먹게 하는것부터 고난이었다. 이로하는 야치요에게 억지로 밥을 먹일 정도로 식사의 중요성을 아는 주제에 먹질 않았다. 괘씸한 주인이다. 야치요는 이로하가 뭘 먹을때까지 물에도 입을 안댔다.
다행히도 이로하는 먹을것을 구하는 능력은 있는것 같았지만 무엇을 먹어야 좋을지는 모르는것 같았다. 그래서 손수 먹어야할것과 지양해야할것을 알려주었다. 인간은 바닥에 떨어진건 안먹으니까 엎어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와중에 발견된 좋은 소식은 이로하는 먹을것을 만드는 능력이 뛰어나다는것이다. 가르침의 대가로 야치요는 맛있는 식사와 간식을 받기로 했다. 물론 얼마나 받을지는 야치요의 마음대로다.
"흑..읏..야치요.. 지금만큼은 내버려둬.."
"..."
길고양이의 삶에 중요한것중 하나는 앞을 보는것이다.
많은 이유로 고양이들은 길에서 살게 된다. 주인이 죽었거나. 버려졌거나. 때로는 길에서 태어났거나. 길을 잃었거나.
하지만 결국 살아가는데 필요한건 과거는 아니었다. 아무리 주인을 그리워하며 울어봤자 버린 주인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이로하는 그런것도 모르는것 같았다. 매일매일 덩치는 산만하면서 눈도 못뜬 아기고양이처럼 울어댄다.
그러니까 야치요는 아기고양이에게 했던것처럼 감싸 안아줬다. 몸크기의 차이 때문에 무릎에 올라앉은것처럼 보이지만 야치요가 안아줬다고 하면 그런거다.
이로하가 내려둬도 다시 올라앉고 자리를 피해도 따라갔다. 마침내 이로하는 야치요를 끌어안고 울었다.
슬픔을 나누는것은 미래를 보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야치요는 그 눈물을 핥아서 위로해줬다.
"..."
"냐아-."
길고양이의 삶에서 야치요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것은 동료다.
솔직히 야치요정도 되면 혼자 사는것이 편하다. 먹이도 혼자 구하는게 적어도 되고 사는곳도 좁아도 된다.
하지만 혼자서는 아파도 핥아줄 고양이가 없고 추워도 다가붙을 고양이가 없다. 외로워도 슬퍼도 혼자면 울어주는 고양이가 없다.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을 고양이도 없다.
그것은 사는데에는 문제가 없지만 너무나도 슬프고 허무한 삶의 방법이다.
이로하는 그렇게 사는것이 마치 의무라도 되는듯 항상 주변에 아무도 두질 않았다. 심지어 그건 야치요에게도 그랬었다.
야치요를 맡아줄 다른 주인을 찾아보기도 하고 언제 자신이 사라져도 괜찮게 부모님에게 야치요에 대해 설명해뒀다.
아기고양이같은 주제에 하는 행동은 동료에게 자신의 죽음을 보이지 않으려는 늙어 약해진 고양이 같은 일을 한다.
그러니까 야치요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말이 통하고 이로하가 아플때 도와줄 수도 있고 야치요가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을 지탱해줄 동료를 구하도록 닥달했다.
그렇게 모두를 가르쳤을때 이로하는 아기고양이에서부터 야치요의 훌룡한 리더고양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한쌍을 데리고 돌아오라는건 아니었다. 그런건 한참 이르다. 확실히 리더고양이라고 인정은 했지만 아직도 심적으로 이로하는 야치요의 아기고양이다. 언제 어른고양이가 될지는 아직 안정했다.
야치요는 불만스럽게 이로하가 데려온 한쌍의 후보를 노려보았다.
이로하보다 덩치도 크고, 털(머리카락)도 아름답고 먹이 구하는 솜씨도 있는것 같지만 상당히 응석이다.
게다가 딸린 식구도 있다.
[너는 누구? 이로하의 가족? 좋은냄새-.]
[저리가지 못해! 개는 싫어!]
하필이면 개다. 게다가 발크기를 보건데 꽤 커질것 같다.
그 커다란 개처럼 무례하고 폭력적이고 머리가 나빠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봤자 개니까 고양이를 장난감정도로 밖에 보지 않을것이다.
[저리 가라니까!]
[부드럽고 따뜻해. 이로하같아.]
[...]
꽤 사람을 볼 줄 아는 개다. 똑똑할것 같다.
아무래도 이 개의 이름은 이로하인것 같다. 이름도 엄청 귀엽고 사랑스럽고 좋은것 같다.
먹이 보는 눈은 좀 없는것 같지만 뭐, 그런건 가르치면 된다.
고양이여도 괴롭히지 않고 얌전하고 그루밍 실력은 엉망이지만 노력하는 모습은 칭찬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름이 같아서 그런가 이 이로하도 포기하는법을 모르는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떨어져있지만 언젠가 동생도 찾을 수 있을거야. 자주 산책하면 훨씬 빨리 찾겠지?]
[..뭐, 그렇지 않을까? 카미하마시는 넓으니까 오래걸리겠지만..]
원래는 아픈 동생이 버려질 예정이었는데 몰래 바꿔들어간것 같았다. 바보같은 일이다.. 길에서 사는법도 모르는 강아지가 내버려지면 죽는게 당연한 일인데.
강아지를 버릴 정도의 주인이 동생한테 치료비를 쓸 리가 없고 결국은 둘 다 죽을텐데.
그런데도 이로하는 자신이 대신 버려지면 부담이 줄어서 동생을 살려줄거라고 생각한것 같다.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똑똑하다는 말은 다 취소다..
야치요는 약한주제에 지키려고 드는게 여전히 정말 싫었다. 이로하를 가르친건 처음도 아니니까 이번에도 잘 할 수 있을것이다.
대가는 뭐, 닮은 책임을 물어서 주인에게 받기로 하자. 이로하가 이번에 만든 간식은 무슨맛일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이 강아지가 앞을 보게 될 때쯤에는 야치요의 아기고양이도 어른고양이가 됐을것이다. 이로하는 죽은 동생 대신 털을 핥아 줄 고양이를 얻고 야치요도 죽은 동료 대신에 안아줄 강아지를 얻는다면 모두가 행복한 일이 아닌가.
야치요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지만 역시 가족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