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친해지는법
늑대와 친해지는법
르미르 마을에서 학생들을 구한 공로로 흑수리반의 새로운 선생님이 된 벨레스 아이스너를 에델가르트는 눈여겨 볼 수 밖에 없었다.
구체적 대가도 제시하지 않은 정체불명의 학생을 구하기 위해 산적의 도끼 앞에 뛰어드는 벨레스의 눈은 푸른 불길처럼 타오르고 날렵하고 실용적인 근육이 물결쳤다. 솟구치는 핏방울에도 눈 깜짝 하지 않는 냉정한 표정이 용감해보였다.
자칫하면 소홀해보이기 쉽상인 대응도 용병이라는걸 생각하면 신중하고 알지 못하는 상대에 충분한 경계를 아끼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제랄트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모습은 잘 훈련된 사냥견을 방불케 하였다.
에델가르트의 눈에 벨레스 아이스너는 마치 한마리의 늑대 같았다. 지능적으로 사냥 할 줄 알고 무리의 약한자를 기꺼이 지킬 줄 알며 아무한테나 꼬리를 흔들지 않는 고고함을 겸비한 맹수.
"제물을 원하는자에게는 금과 보석으로, 권력을 원하는자에게는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자를 끌어들이려면...어떻게 해야 할까?"
도서관 일각에서 고민하던 에델가르트는 번뜩 시야에 박혀들어오는 책 한권을 빼들었다. '경계심 강한 개랑 친해지는법'. 개랑 고양이가 자유롭게 방목되어있는 가르그 마크에서는 나름 수요가 있는 책인지 사람의 손길을 탄 흔적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런 방법을 쓰는건 인권적으로 괜찮은것일까..? 에델가르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대로 실행하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참고정도는 해도 되지 않겠는가. 그다지 두껍지도 않고 빈 시간에 읽기에도 적절해 보였다.
.
.
1. 편하게 옆에 앉아서 개를 안심시켜라.
벨레스 아이스너는 태어났을때부터 오랜기간 한곳에 머무르지 못했다. 용병의 딸로써 자라는 동안 식량을 조달하고 부상을 치료 할 때를 제외하곤 항상 이동했다. 자연히 르미르 마을같은 예외를 빼곤 잠을 자고 먹을때도 경계해야 했다.
흑수리반의 선생님으로 취임하고 처음의 휴일. 벨레스는 가르그 마크의 마굿간으로부터 기숙사 2층까지 갈 수 있는 모든곳을 돌아다녔다. 어떤 사람들이 살고 어디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위협이 될만한것이 있는가 방비는 제대로 되어 있는지. 누군가가 말을 걸어올 때 빼고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이윽고 가르그 마크에 고양이가 몇마리 살고 있나 그 숫자를 알게 되자 시간은 벌써 저녁을 먹어야 할 때가 되었다. 제랄트가 기사단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 이상 벨레스는 누군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먹을 수 있을때 먹어야 하는 용병 생활의 영향으로 생각 난 즉시 식당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식당 근처에 도착하자 저녁시간에 걸맞은 인파가 붐비고 있어 벨레스는 멈칫 걸음을 늦췄다. 모르는 사람들로 둘러싸이는건 벨레스에게 껄끄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용병단의 거친 동료들과 다르게 사근사근한 말투와 예의바른 몸가짐을 중시하는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벨레스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잿빛의 악마로 불리워 경외와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벨레스를 기꺼이 같은 식탁에 불러넣는 인물은 많지 않았다. 무표정으로 사람들을 도륙내고 저녁으로 멧돼지 다리를 뜯고 있는 벨레스를 그들은 역겨워하기도 했다. 빵과 치즈, 햄을 얻어다가 방에서 대충 끼니를 떼우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는데 보이질 않아서 가르그 마크 밖으로 외출이라도 한 줄 알았어."
고민하던 벨레스에게 뛰어와 헉헉 숨을 고르며 에델가르트가 긴 소매를 붙들고 있었다. 사교성이 뛰어나지도 않고 수도원에 머문지 일주일정도인 벨레스를 사람들은 호의적으로 보지 않았다. 이런 폐쇄된 공간에선 낯선이를 배척하는게 흔한 일이었고 더욱이 낙하산처럼 선생님이 된 사람을 경계하는건 당연했다.
호기심 어린 시선도 있으나 대부분은 겁을 먹고 용병과 눈을 마주치려고 들지 않았다. 목격정보를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벨레스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고양이를 쫓아 좁은 건물 틈에 들어가는등 평범하게 이동하지도 않았다.
에델가르트가 언제부터 자신을 찾으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땀에 젖은 머리칼을 보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한것 같았다.
"미안하다. 이번 휴일은 주둔지 시찰을 위해 돌아다녔으니 찾기 어려웠겠지. 물어볼거라도 있었나?"
"주둔지...? 용병인 선생님 시점에서는 그렇게 보이는구나."
"아아, 제랄트도 나도 어쩔 수 없이 머물 뿐 이니까. 계속 여기 있을 예정은 아니다."
대사교의 부탁은 무언의 압력을 담고 있고 제랄트는 그녀를 경계하라고 벨레스에게 직접 경고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곳은 적진은 아니지만 언제라도 떠나게 될 수도 있는 장소와 다름 없었다.
"질문할 것은 없지만.. 찾은 이유는 다른거야. 혹시 저녁식사를 같이 하겠어? 제랄트는 오늘 파견으로 없다고 들은것 같아서."
"상관없지만 나는 귀족의 예법은 모른다. 거슬릴텐데."
"당신한테 그런걸 요구 할 생각은 없어. 장차 황제가 될테지만 지금은 그저 선생님의 학생이니까."
벨레스에겐 거절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할 때 싫다라는 감정도 좋다라는 감정도 희박한 벨레스는 상대가 바라는대로 행동하고는 했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에델가르트는 만족스레 미소지었고 바라는건 정말 그거 하나였던것 같았다.
생소한 요구는 아니었다. 벨레스의 실체를 알기 전에는 유명한 용병단 단장의 딸에게 의뢰인이나 뒤를 봐주길 바라는 사람들이 아첨 삼아 식사를 권유하곤 했다. 힘을 빌리고 싶거나 약점을 찾기 위해서. 말이 적은 편인 벨레스에겐 고역이었다.
하지만 벨레스의 전투를 보고나서는 아니었다. 낯가리는 애완견인 줄 알았는데 사람의 머리통을 씹어 부수는 턱을 지닌 늑대임을 깨달은것처럼 그들은 갑자기 공손하고 자리를 피하려 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은 생과 사가 달린 필사적인 전투에서 아무 표정을 보이지 않는이에게서 위화감을 느낀다. 무표정이라함은 속내를 알 수 없다는것이고 인간은 모르는것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다.
"선생님은 무슨 음식을 좋아해? 좋아하는걸로 골라도 괜찮아."
"가리는건 없다. 가르그 마크의 식단은 뭘 먹어도 맛있었어."
"호불호가 적은건가.. 참고할게."
작은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은 뒤에 에델가르트는 그럼 자신이 좋아하는걸로 주문하겠다고 했다. 벨레스는 고기, 생선, 야채를 불문하고 먹을 수 있는것 모두를 싫어하지 않았다. 산에서 최소의 짐으로 야영 할 때에는 먹을 수만 있다면 독만 없으면 다 먹어야 했었다.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용병의 혀와 위는 둔할수록 좋았다. 신선한 물이 없을때는 가죽의 텁텁함이 베어든 미지근한 물을 마시거나 상처를 치료 할 겸 들고 다니는 독한 증류주로 목을 축이고 돌같은 육포를 맛이 느껴지지 않을때까지 씹어 넘겨야 하는데 끓이거나 구우면 그게 진수성찬이다.
"앞에 앉지 않는 건가? 비어있는데."
"예법을 신경쓰느라 선생님이 식사를 즐기지 못하는걸 바라진 않아. 옆에 앉으면 잘보이지 않잖아? 게다가 사람이 붐벼서 소란스러우니까 이렇게 앉는편이 당신의 목소리가 잘 들려."
"그렇군...고맙다."
이런 섬세한 배려는 오랜만이었다. 자신의 의견이랄게 없는 벨레스는 보다 효율적인 전투를 위한 제안을 할 때가 아니라면 이리저리 휘둘리는게 보통이었다. 아주 어렸을때는 용병단의 여성 치료사가 신경을 써주었던것도 같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신선한 생선을 튀겨 절인 양상추와 함께 빵에 끼워 먹는 피쉬샌드는 심플하고 맛있었다. 저녁치고는 가벼운 식사에 벨레스가 만족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는지 에델가르트는 푹 끓인 큼지막한 뿌리채소가 가득한 스프와 샐러드도 추가해 주었다.
지내는 동안 불편한건 없었는지 흑수리반 아이들 중에 궁금한건 없었는지 스몰토크를 나누며 시간알 보낸 에델가르트는 다음에도 같이 저녁식사를 하자고 말하곤 기숙사 앞에서 헤어졌다.
"결국 에델가르트는 뭘 하고 싶었던거지?"
"자네.. 감정이 미발달한건 이해하지만 이제 잠에서 깼으니 사람의 호의에 반응정도는 해야지. 언제까지 사람과의 교제를 부모한테 맡길셈이느냐?"
"에델가르트가 날 좋아해서 저녁을 같이 먹고 싶었던거라고? 이해가 안돼.. 난 해야 할 일 이상을 그 아이에게 한 적이 없어."
지금껏 흐뭇하게 두명을 지켜보던 소티스가 안타깝게 혀를 찼다. 자신 때문에 이지경이 된 벨레스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스승의 마음에 들기 위한 노력이 보답받지 못한 에델가르트가 애처롭기도 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관계도 있다. 학생이 네가 좋다는데, 냉정하게 쳐낼 생각은 아니겠지? 자네는 지금 선생님이지 용병이 아니다."
"알고 있다."
"문자 그대로 정보로써 인식하고 있는거겠지. 하아..느끼지 못하는데 어찌 이해하겠냐만은. 너도 학생과 함께 배우려 노력하거라."
용병이 아닌 삶의 방법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벨레스는 저절로 멍해졌다. 누군가에게 전투를 가르치는 일은 용병단에 신입이 들어왔을때 해봤지만 그들은 이미 독립된 개체로 벨레스에게 보살핌을 받는 존재는 아니였다.
모르는것은 누군가에게 배우거나 책을 읽고 깨우친다. 벨레스는 이미 어둑해지고 있는 수도원을 가로질러 도서관에 향하기로 했다.
.
.
2.개의 보호자와 친한 사이임을 보여 익숙하게 하라.
벨레스가 가르그 마크에 익숙해짐에 따라서 에델가르트의 수첩도 채워지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쉬운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특별히 싫어하는게 없는 대신에 좋아하는것도 찾기 어려웠다.
유기견을 집에 들였을때에 처음엔 어떤 간식이나 먹이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맛을 느끼는 일 자체에 익숙하지 않고 그럴 환경도 아니었기 때문에 선호를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가지를 맛보고 충분한 먹이를 공급받게 되면 그들도 좋아하는 간식이 생긴다고 한다.
휴베르트를 통해 공수한 각종 찻잎과 쿠키같은 선물을 주었을때 선생님은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미소를 보이지도 않았고 거절하지도 않았다. 이래서야 싫어하는것도 알 수가 없다.
"벨레스 반, 반장 아니냐? 너도 낚시를 하려고?"
"제랄트경...아니요. 그냥 선생님을 만나러 왔어요."
효과가 있는건가 싶은 책의 조항 중에는 자주 만나 얼굴과 냄새를 익히게 하는게 효과가 좋다고 했다. 개는 아니니 냄새를 제외하더라도 얼굴을 익히는건 해볼만 했다. 사람도 자주 만나 인사하는 상대를 친근하게 여길테니 에델가르트는 휴일에도 꼭 한번은 벨레스를 만나러 갔다.
벨레스는 산적토벌이 끝날쯤에 가르그 마크를 탐색하는걸 그만두고 온실에서 작물과 꽃을 가꾸거나 낚시를 해서는 학생들과 식사를 하는걸 즐겼다. 에델가르트도 자주 초대받고는 했는데 학생중에서 제일 빈도가 높았다. 그것이 에델가르트가 책을 반납 할 기간을 연장한 이유이기도 했다.
오늘은 제랄트와 벨레스의 휴일이 겹쳤는지 같이 낚시를 할 모양이었다. 나무로 된 양동이가 두개 겹쳐 있었고 미리 빌려둔 낚싯대가 놓여져 있었다.
"흠.. 귀족들은 이런 일은 할 기회가 없지. 낚시는 심신수양에도 좋고 혼자 고립되었을때 식량을 구하기에도 좋다. 괜찮다면 해보지 않겠나?"
"하지만 한번도 해 본적이 없어서...방해될거에요."
"괜찮다, 에델가르트. 낚시터는 충분히 넓어."
어느새 뒤에서 접근한 벨레스가 학생의 새로운 도전을 격려하듯 그 어깨를 다독였다. 처음은 어설픈 칭찬의 말로 시작해서 지금은 꽤 학생의 의욕을 돋구는데 능숙해져 오고 있었다. 여전히 무표정하단점을 제외하면.
설마 황제가 고립된다고 낚시로 물고기를 마련할 일은 없겠지만 에델가르트는 이것이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벨레스 못지 않게 제랄트도 수상한점이 많았다. 낚시로 풀어진 긴장에 중요한 정보를 흘릴지도 모른다. 그는 벨레스의 학생이란 존재가 신기하고 흐뭇한지 경계심이라곤 한톨도 없어 보였다.
"내가 물고기 한마리도 잡지 못한다고 실망하진 말아줘, 선생님.. 제국에선 이런 일을 할 기회가 없었거든."
"물론 익숙하지 않은 일에 도전 할 결심을 한것만으로 너는 내 자랑스런 학생이다."
벨레스는 이내 자신의 몫으로 마련된 낚싯대를 에델가르트에게 쥐여주고는 관리인에게 한개 더 빌리러 자리를 떠났다. 이런 빈약한 나뭇가지같은게 과연 제대로 물고기의 무게를 버티는걸까 불안해하며 에델가르트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낡은 낚싯대를 노려봤다.
벨레스가 돌아오면 세명은 적당히 떨어져 낚싯터의 나무부두에 낚싯줄을 드리웠다. 초보자에게 낚시의 즐거움을 느끼게 할 요량인지 벨레스가 직접 미끼를 끼워줬다.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서 낚싯줄을 가능한 멀리 던져. 이렇게 하면 된다."
숙련된 솜씨로 휙 물고기가 숨어있을법한 장소에 정확히 낚싯줄을 드리운 벨레스가 에델가르트를 빤히 본다. 겉보기로는 별로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이왕이면 작은 물고기라도 잡아서 선생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에델가르트는 있는 힘껏 벨레스가 낚싯줄을 드리운 방향으로 캐스팅했다.
"앗..! 낚싯줄이 엉켜서..미안해, 선생님.. 이걸 어쩌지? 줄을 자르고 다시 매면 되는건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다가 오히려 선생님을 방해해버려 에델가르트는 당황했다. 지나치듯 낚시하는 벨레스를 봤을때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잦은 빈도를 보면 좋아하는 일일것이다.
"어이쿠. 벨레스, 좀 더 자세하게 알려줬어야지. 괜찮아, 괜찮아. 벨레스도 어릴때에 똑같은 실수를 했어. 이리 줘봐라."
무언의 눈길로 책망하는 벨레스를 쳐다 보지도 않고 제랄트는 낚싯줄을 슬슬 감아다가 엉킨곳을 능숙하게 풀어냈다. 당황해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에델가르트 덕분에 심하게 엉켜있지는 않았다.
"보다싶이 이 아이가 무덤덤해서 미안하다. 갑자기 선생님을 하게 되서 얼마나 걱정했는지...웃차! 자, 이제 이걸 들고 물고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벨레스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듣는 선생님이란 생소하고 조금 귀여웠다. 삐진 강아지 같았다.
"선생님의 강의는 유익하고 과제에서도 모두를 안전하게 지켰어요. 모르는점은 반장인 저한테 물으면 되고 흑수리반 아이들도 선생님을 잘 따라요."
"아.. 그렇군. 다행이구나, 벨레스. 신뢰받고 있는 모양인데. 쓸데없는 걱정이였구나."
"..."
어느새 그렇게 낚았는지 나무 양동이를 채운 물 속에 커다란 물고기가 튀어올랐다. 벨레스는 방금 잡은 물고기에서 바늘을 빼내 양동이에 추가했다.
"착실한 반장이라 믿음직해. 학생에게 부탁해도 되는가 싶지만..벨레스를 잘 부탁한다."
곰같은 체격의 제랄트는 평생 무기를 잡아 거친 손으로 에델가르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좀 떨어진 장소에서 낚시를 시작했다.
그때 낚싯대를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에델가르트는 거의 패닉에 빠져 낚싯대를 꽉 잡아 부숴뜨릴뻔 했다. 이대로 당기면 되는 걸까? 벨레스가 하는걸 보면 어려워 보이지 않았지만 에델가르트는 이미 실수를 한번 했다.
"당황하지 마라. 침착하게 물고기의 힘을 빼. 너무 당겨도 줄이 끊기고 너무 풀어주면 놓치게 된다."
벨레스가 뒤로부터 에델가르트를 감싸안듯이 두손으로 낚싯대를 지지했다. 선물했던 베르가모트티 향에 은은하게 휩싸였다. 도끼술 강습때 자세교정을 받는거랑은 틀렸다.
"그래, 전투에서의 힘겨루기랑 비슷하다. 잘하고 있어."
물고기가 힘을 써 낚싯대를 당기면 벨레스가 에델가르트의 허리에 손을 감아 안아 버티고 물고기가 지쳐 끌려오면 다시 낚싯대 위 에델가르트의 손 위를 감싸쥔다. 물고기가 수면 위로 끌려올라오고서야 에델가르트는 새빨간 얼굴을 드디어 가릴 수 있었다.
"월척이네. 첫성과로써 최상이다. 이대로 같이 식사를 하러 갈까? 식당에서 잡은 물고기를 요리해주거든."
"응.. 좋은..생각이네."
학생의 성과에 기뻐하는 벨레스는 이제 제법 선생님티가 났다.
.
.
3. 개가 스스로 다가오기로 결정했을때 갑작스런 접촉은 절대금물.
"에델가르트, 괜찮다면 같이 다과회를 하지 않겠나?"
"다과회..? 시간은 있지만... 선생님도 다과회를 하는구나."
"사실은 네게 처음으로 권유한거다."
귀족들이 많이 다니는 사관학교는 사교의 장도 중요시한다. 누구나가 사관학교를 졸업해서 장교가 되길 바라고 오는것은 아니다. 인맥을 쌓기에 선별된 인재들이 모인 이 장소는 효과적이겠지.
사관학교인 이상 학생들에게 술이 금지되어있으므로 대화를 나눌때 선호되는것은 역시나 차였다. 그러므로 유통되는 종류도 다양하고 식당에서는 곁들여 먹을 쿠키같은 티푸드도 제공했다.
선생님들의 다과회에 초대되는것은 학생들에게 일종의 스테이터스다. 가르그 마크의 교사란 포드라 최대이자 사실상 유일한 종교의 신임을 받는 직책이다. 유능한 인재들을 키워 포드라 전역에 제자를 가지게 될 교사들은 국경을 불문하고 인맥을 쌓을 척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에델가르트에게 중요한건 벨레스가 첫 다과회의 상대로 자신을 택했다는 것이다. 제랄트도 레아도 아닌 바로 에델가르트 자신. 그 밖에도 많은 흑수리반 아이들이 아닌 자신.
"내게 기회를 줘서 영광이야. 물론 기쁘게 받아드릴게."
미리 장소를 정해뒀는지 벨레스는 곧바로 에델가르트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에델가르트에게 거절당했어도 다른 사람에게 권유 할 생각이었을까? 조금 서운했지만 어쨋든 벨레스의 첫번째 선택은 에델가르트였다.
도착한 장소는 의외의 벨레스의 방이었다. 기본으로 주어지는 물품빼고는 사유물이 많아보이지 않았다. 책상 위도 어지럽혀져 있지 않고 방은 깔끔했다. 오히려 텅비어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벨레스는 첫 다과회라는 말에 걸맞게 다구를 다루는 솜씨가 어색했다. 제대로 공부는 했는지 섬세함은 부족했지만 시간과 절차는 완벽했다. 용병생활을 했다는걸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였다.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연습은 했으니 못마실 정도는 아닐거다."
"고마워. ..베르가모트티네, 내가 좋아하는 차야."
"네가 제일 먼저 준것이 그것이니까. 어쩌면 네가 좋아하는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보낸 선물 중에 제일 먼저 준 것은 베르가모트티였다. 좋아하는게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줄 수 있는 선물은 자신이 받았을때 기쁠 물건이였던 것이다. 설마 벨레스가 그걸 역으로 헤아려줄 줄은 몰랐지만.
생각해보면 무뚝뚝해 보여도 벨레스는 세심한면이 있었다. 달력을 확인해 학생들의 생일에 꽃을 보내기도 하고 식당에서는 늘 학생들이 기뻐하는 메뉴를 고른다. 한명이라도 번거로운 일인데 흑수리반 뿐 아니라 다른반 학생들까지 챙기는것은 직업의식만으론 설명이 부족할 것이다.
"항상 고맙다. 노력하고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 업무에 에델가르트, 네 도움이 없었더라면 적응하기 어려웠을거야."
드물게도 벨레스는 에델가르트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적의 창날에 베여 피를 흘릴때도 한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벨레스가 이렇게 속마음을 내보이는것은 경외로울 정도였다.
에델가르트는 벅찬 마음에 떨리는 손을 숨기기 위해 차를 한모금 마셨다. 물 온도가 뜨거웠는지 다소 씁쓸함이 강한 맛이 냉정함을 되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내 도움이 없었어도 모두가 도와줬을거야. 이렇게 단기간에 모두의 신뢰를 얻다니 놀라웠어 흑수리반은 다소 독특한 아이들이 많으니까.."
"흠.. 곤란한 부분도 있지만 다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의욕을 불러일으키는건 선생님의 의무이지. 내가 해야 할 일이야."
"이상적인 교사네. 확실히 당신이 오고나서 린하르트도 무단결석이 줄어들었고 베르나데타도 방 밖에 나오게 됐으니까."
다소 사무적인 대화이지만 상대의 흥미를 자극한다는점에서 벨레스는 다과회 주최자로써 고득점을 흭득 할 수 있을것이다.
에델가르트는 저절로 긴장이 풀리는걸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는 황제의 후계로써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벨레스는 무지하다고로 밖에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종교에도 귀족들의 상식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런걸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았다.
문득 가벼운 대화에 섞어서 벨레스가 같은 길을 걸을지 떠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끼리는 흔한 일이었다. 상대가 적인지 동맹을 맺을 상대인지 차를 마시면서 교묘하게 살피고 가끔 독을 넣기도 하고.
"선생님은 로나토경의 반란진압과 고티에가문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전자는 미흡한 사전정보가 불러 일으킨 실태를 반성해야 하고 후자는 갑작스런 일에도 신속히 대처한 학생들을 자랑스러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난한 대답이었다. 홍차의 물결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불만스럽게 찡그려진것이 보였다.
"그럼, 이러한 일들에 대한 세이로스교의 대처에 대해서는? 그들이 사람들을 처형하고 명분으로 신을 앞세우는건 어때? 스렝과 고티에가문의 분쟁을 알고서도 유산을 몰수하는건?"
"에델가르트."
탁. 찻잔이 힘있게 테이블에 놓여있다. 벨레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고 입술은 일자로 굳게 다물려있었다. 에델가르트는 그제서야 벨레스가 귀족도 신도도 아님을 상기했다. 알아주길 바랬지만 결코 강요하려는건 아니었는데.
에델가르트는 정말 진심으로 벨레스와 적이 되고 싶지 않았다.
방 안을 가득채운 침묵이 벨레스가 보여준 신뢰를 깨부순 결과라면 어떻게 되찾을지 눈물이 날것 같았다.
"네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겠다. 난 널 좀 더 알고 싶어서 오늘 이 자리에 불렀어. 네가..나랑 친해지고 싶어하는 줄 알았는데.."
"선생님, 아니야. 내가 바라는건..."
"걱정하지 않아도 실망한게 아니다. 모두 생각해봐야 할 일들이지. 너와 난 제자와 스승이다, 제자의 질문에 답하는게 내 일이야."
벨레스는 벌떡 일어나더니 책상 위 작은 책꽂이에서 신학과 정치에 대한 책을 들고 왔고 식은 차가 담긴 찻잔을 옆으로 밀어냈다.
그 행동은 마치 다가오는 사람의 손을 피해 냄새를 맡던 코를 치우고 등을 돌린 늑대 같았다.
.
.
4. 몸을 낮춰 당신이 개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것임을 알게하라.
제랄트가 죽은 후 벨레스는 방안에 틀어박혀 일주일을 나오지 않았다. 대사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을 추스릴때까지 쉬는것이 좋을거라고 그것을 허락했다. 공식적으로 그것은 상사가 허가한 휴가와 마찬가지이므로 지금 에델가르트가 하려는 일은 권리의 침해였다.
그렇지 않아도 벨레스는 그날 이후로 에델가르트를 부쩍 사무적으로 대했고 더불어 모니카가 나타나 두명을 함께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염제로 분장해 필사적으로 오해를 풀려고 했을때에는 모든것이 잘못되어감을 슬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선택이 과연 어떻게 작용할지 에델가르트는 알 수 없다. 모든 상황이 벨레스와 에델가르트를 적으로 만들려는데 에델가르트가 할 수 밖에 없는 일은 벨레스가 보다 자신을 싫어하게 할지 모르는 말들을 뱉어내는거라니.
자신이 선택하고 스스로의 신념에서 우러나온 말들이지만 붉게 부은 눈을 찡그리며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벨레스를 보는건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아무도 서로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 할 수 없고 에델가르트가 할 수 있는 일은 벨레스가 일어나기로 했을때에 손을 내밀거라는것 뿐이다.
다음날 벨레스는 수업에 복귀했다. 아직 수척해보이고 눈가는 붉었지만 강의를 하는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다시 어제가 되더라도 똑같은 행동을 하겠지만 에델가르트는 벨레스를 정면에서 쳐다 볼 수 없었다.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에델가르트, 잠시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수업이 끝나고 떠나려는 에델가르트의 손을 벨레스가 붙잡았다.
설마 벨레스가 다가와줄 줄은 몰랐던 에델가르트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도 못하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한 말을 생각해 봤다."
정말 오랜만에 방문하게 된 벨레스의 방은 베르나데타가 만든 인형, 메르세데스가 준걸로 보이는 직접 만든 쿠키, 페르디난트가 보낸 안정에 좋은 찻잎등등 선물들로 조금 어지럽혀져 있었다. 며칠동안 무릎을 끌어안고 울던 벨레스를 생각해보면 정리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벨레스는 햇빛이 비쳐오는 창문을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원망이나 분노같은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과하지는 않을거야, 선생님. 난 내가 했어야 하는 말을 했다고 생각하니까."
"그때는 화가나고 또, 조금 슬펐지만 네 말이 맞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오늘 수업시간에 나갔다. 난 제랄트의 딸이지만 동시에 너희의 선생님인걸 잊으면 안됐어."
머뭇거리다가 일어선 벨레스는 선물로 받은 쿠키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페르디난트에게 받은 찻잎을 우리기 시작했다. 그때보다 훨씬 부실했지만 다시금 그날로 돌아간것 같았다.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어."
따라진 찻물은 베르가모트티가 아니었지만 맛있었다. 벨레스는 이제 능숙하게 차를 우릴 줄 알았다.
"뭔데, 선생님?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거라면 성심성의껏 응하기를 약속할게. ..그날 그때에 내 잘못을 사과하는 의미로."
벨레스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더니 이내 떠올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내가 일어서길 바란다면 손을 내밀겠다고 했지. 왜지? 나에게 뭘 바라고 있는 거지?"
질문은 그날로부터 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에델가르트가 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면으로 숨기고 사정이 있다고 회피하고.. 아해해주길 바란다. 그런데도 신뢰받길 바란다니 명백한 모순이다.
"난.. 선생님이 때가 되었을때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선생님이 바라는걸 스스로 결정했으면 해. 의무도 강제도 아닌 정말로 당신이 바라는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나는 받아들이게 될 거야."
"모두..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어. 레아는 순종적인 복종을, 디미트리는 복수심을 나눌 이해자를, 클로드는 내 힘을 이용하기를. 그런데 정말 내가 무엇이든 원하는걸 선택하기를 바란다는건가?"
"그래, 선생님이 바라는길이라면."
결국 에델가르트는 선생님을 강제하기엔 이미 너무나도 많은 마음을 내주었다. 패도를 위해서 수 많은 사람들의 피로 길을 물들이기로 결심했는데 단 한사람에게는 그럴수가 없었다.
벨레스를 끌어들이겠다고 개랑 친해지는법이라느니 하는 바보같은 책을 따르기로 했을때부터 이미 답은 정해진거나 마찬가지였다. 에델가르트는 단지 벨레스랑 친해지고 싶었다. 좋아하게 된 사람이랑 친해지고 싶다는건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벨레스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에델가르트가 흑수리반에서 가장 강하다는걸 칭찬했고 에델가르트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앞으로도 그럴거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에델가르트가 그날 성급하지 않았다면 즐겼을 완벽한 티타임이었다.
.
.
5. 곁에서 같이 걸어라.
"그 이단자를 당장 처형하세요, 벨레스!"
아아, 결국 이날이 오고야 말았다. 에델가르트는 무릎꿇린채로 차마 사랑하는 선생님을 볼 수 없었다. 실망과 배신감으로 점칠 된 얼굴을 보면 황제로써의 자신을 유지 할 수 없을것 같았다.
절컥. 벨레스가 검을 움켜쥐는 소리가 들려온다. 휴베르트가 전황을 살펴 구출하러 오게끔 전략이 짜여있지만 가슴이 찢어질듯 아파왔다.
에델가르트는 어리석게도 고고한 늑대를 길들여보려고 했지만 심장을 빼앗긴것은 자신이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벨레스는 여신조차 사랑할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매일 바보같다고 생각하면서 책을 읽으며 당신을 떠올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찾아갔어. 무엇을 주면 좋아할까 고민하는것이 일상이 됐고 저녁식사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부르는걸 보면 실망했지. 하루가 전부 당신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지?'
"난 에델가르트를 지킨다."
"선, 생님..?"
"너와 같은 길을 걷겠다. 그게 내가 바라는거야.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원했고, 결정했다."
천제의 검 끝이 레아를 향했고 대사교는 분노의 외침과 함께 짐승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벨레스는 에델가르트의 손을 잡아 일으켰고 그들은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혼비백산하는 주변과 달리 두명은 고요했다. 익숙해진 거리였다. 더이상 벨레스는 에델가르트를 경계하지 않았다. 같이 있기를 바랬다.
여신조차도 자신을 지켜보지 않는다고 절망한 소녀는 명령을 따르는것 밖에 모르던 늑대를 만났고 두명은 비로소 같이 걸어가는 법을 배웠다.
소녀는 늑대의 친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