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사랑하는법
개와 사랑하는법
사라졌던 벨레스가 돌아오고 5년동안 지지부진했던 전황도 순풍이 불었다. 오랜 전쟁에 지쳐가던 병사들도 활기를 띄었고 흑수리 유격대의 구성원들도 존경하던 선생님이 돌아온 일상을 즐기게 되었다.
에델가르트 또한 순조로운 전황과 함께 잊고있던것을 떠올렸다. 그렇다 그날, 에델가르트는 벨레스를 사랑한다는걸 깨달았다. 벨레스가 돌아와주었음을 실감하느라 뒤늦게 알아챘지만 빼앗긴 심장은 5년새에 더 뛰었으면 뛰었지 진정하질 않았다.
지금 당장은 전쟁중이니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벨레스는 곁에 있을것이다. 하지만 모든게 끝나면? 늑대는 언제든 야생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다. 벨레스는 뛰어난 용병이자 유능한 선생님이다. 어딜 가든 그만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을까.. 같은 길을 걷는것만으로 행복했지만 이대로면 언젠가는 끝이 난다.
"휴베르트, 책을 좀 찾아왔으면 하는데."
"빠른시일 내에 준비하도록 하지요. 부탁하실 책의 제목이..?"
"그렇네...개에게 사랑받는법일까.."
"호오.. 번견을 키우실 계획이십니까? 알겠습니다."
여전히 인간에게 이런것을 적용시켜도 과연 선생님의 인권적으로 괜찮은것일까 하는 고민은 멈추지 않았지만 효과는 결과로써 증명되었다.
5년전보다 황제로써 냉혹해진것을 자랑하는 에델가르트는 어떤 수단이라도 원하는바를 쟁취하기에 망설이지 않을것이다. 그것이 선생님을 강아지와 같이 취급하는것이라도!
에델가르트는 선생님에게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 되길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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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같이 산책하기
에델가르트는 사관학교시절 황제의 후계자로써의 가면을 쓸 필요가 없는 혼자 산책하는 시간을 즐기고는 하였다. 악몽으로 잠 못이루는 밤이나 르미르마을, 제랄트에게 일어난 일들이 마음을 괴롭힐때 그녀는 하늘에서 비추는 달빛만이 동무인 시간을 즐겼다.
악몽을 꾼다는걸 벨레스에게 들키고 나서는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었다. 벨레스는 말수가 적고 거의 듣는편이기는 했지만 그런 침묵이 에델가르트에게는 더욱 마음이 편했다.
전쟁이 시작한 이후로는 바쁘기도 했지만 안전을 위해서도 에델가르트는 혼자 산책을 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한밤중에 황제가 길을 걷다가 암살자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 산책에 동행해줄 수 있을까? 혼자라면 휴베르트가 반대하지만 선생님이 함께라면 묵인할거야."
"잠이 오지 않는건가? 좋다."
벨레스는 다음 출전을 위해 전략을 검토중이였는지 양피지 위를 유영하던 깃펜을 정리하고는 의자에 걸쳐있던 외투를 입었다. 신뢰관계로 단단히 엮여진 사이를 증명하듯 긴 말은 필요가 없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허리춤에 검을 매면 더이상 준비할것도 없다는듯 에델가르트의 근처에 다가섰다. 얼굴에는 미미한 웃음기가 묻어있었고 그러한 모습이 부드러운 솜털처럼 에델가르트의 심장을 간질였다.
이렇게 호의를 가감없이 보여줄때마다 에델가르트는 사실 꿈을 꾸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그 기분을 반영하듯 돌로 된 길을 걷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세상에 두명뿐인것 같았다.
"그러고보면 자주 산책을 하던 너와 마주치곤 했지. 처음에는 밤에 돌아다니는 수상한자인가 싶어 검을 뽑을 뻔 했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어서 몰랐지만 놀랐었구나.. 사실, 혼자서 산책하는게 취미야. 언제 어디서든 시선이 집중하니까.. 이럴때가 아니면 늘 여러가지를 신경써야했어."
우뚝 벨레스가 멈춰서선 에델가르트를 내려봤다. 달빛이 비추는 그 얼굴은 염려와 불안을 담고 있었다.
"무리하고 있는건 아닌가?"
5년이 지났어도 벨레스는 에델가르트의 선생님이었다. 따스한 걱정이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것 같았다.
황제는 무리 할 수 밖에 없는 위치이다. 전쟁을 일으킨 황제라면 더더욱.. 제국민을 책임져야 했고 지금은 포드라 전체의 미래를 책임져야 했다. 아마도 전쟁이 끝나도 에델가르트는 무리하는걸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리고 내가 바랬던 일들이니까. 후회하지 않아."
"에델가르트, 너는 뛰어난 학생이었지만 가끔 너무 먼 곳을 내다보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 할 때가 있지. 너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벨레스를 따라 흑수리반의 학생들은 에델가르트의 진영으로 왔고, 그곳에서 진정한 동료가 되었다. 그들은 문장과 신분제도 철폐를 위해 싸우고 있었고 강력한 아군이자 이해자였다.
사실 그렇기에 에델가르트는 더욱 무서웠다. 그들의 신뢰를 배반하고 싶지 않았고 죽는걸 보고 싶지 않았다. 어떤 결과가 나타나도 그것은 전부 에델가르트가 치뤄야 할 대가였다. 사랑하는 스승과 친구들이 희생되지 않았으면 했다.
알고있다. 벨레스를 사랑해버린 이상 에델가르트는 공정성을 잃었다. 제국군 한명조차 소중한 목숨일텐데 더이상 같은 가치로 생각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선생님...하나 부탁해도 될까?"
"얼마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전투가 있을 때마다 악몽을 꿔. 가족들 뿐이 아니야.. 전쟁으로 죽은 적군도 아군도 괴로워하며 내탓이라 부르짖어. 틀린 결정을 내렸다고 책망해."
괴로움에 일그러진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에델가르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꿈에서 그들이 외치는 말들은 항상 에델가르트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말들이었다. 좀 더 나은 선택은 없었나? 평화로운 해결법은 없었나?
에델가르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상대가 싸우길 포기 할 정도로 압도적인 무력도 없었고 이단자에게 극렬하게 반응하는 존재를 설득할 재간도 없었다.
"그런 날에는 잘 수 없어서 밤이 샐 때까지 집무를 해. 하지만.. 선생님이랑 걸으면 마음이 편해져. 내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당신과 함께라면 할 수 있다고 느껴. 그러니까 전투 후에는 같이 산책을 해줄래?"
절대로 이뤄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선생님과의 길은 말하자면 기적이었다. 포기하고 있던 빛을 기치로 삼았을때 에델가르트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것 같은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에게도 반가운 제안이군. 에델가르트, 기쁘게 수행하겠다."
"반드시 지켜줘야해. 크게 다치거나 죽어서 명령불복종을 하지 않도록. 황제 명령이니까."
쿡쿡 가볍게 밤공기를 흔드는 벨레스의 웃음소리에 에델가르트는 휙 붉어진 뺨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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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둘만 아는 보디랭귀지 만들기
매서운 눈폭풍과 깎아지른 절벽, 거친 침엽수가 가린 시야로 파악하지 못한 퍼거스의 게릴라군은 친숙한 지형을 유리하게 이용해서 제국군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잘 훈련되고 유능한 지휘 아래에 있더라도 추위로 굳은 근육과 불안한 시야확보가 명백한 악조건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때 벨레스가 천제의 검을 하늘높이 치켜들고 문장의 힘으로 붉은 불꽃을 피웠다. 단숨에 적아군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침착하게 대열을 유지하라! 눈폭풍에 속아 흔들리지 마라! 적들은 소수이고 오랜 잠복에 지쳐있다!"
그때 에델가르트와 벨레스의 눈이 마주쳤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말수가 적은 선생님의 근처에서 더 잘 알고싶어서 항상 지켜봐왔다.
에델가르트는 붉은 건틀릿으로 싸인 팔을 쭉 내질렀다. 망토가 펄럭이며 동작을 크게 보이게끔 만들어주었다.
"전군 돌격! 아이스너 장군과 짐이 함께한다!"
"""우오오오오!!"""
아군에게 압도적으로 적은 손실을 내는 연전무패의 장군으로 유명한 벨레스는 이미 이름만으로 믿음을 주었다. 원래부터 그녀는 스스럼없는 태도로 가르그마크의 문지기에 이를때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어내는 재능이 있었다.
또한 여신에게 반역하는 제국의 황제란 존재만으로 제국군의 의욕을 고취시켰다. 위풍당당한 붉은 갑옷에 위엄에 가득찬 뿔. 그녀는 제국의 의사였고 위대한 통치자이다.
무엇보다 이 두명은 스스로의 몸을 사리지 않았다. 솔선수범 전장에 뛰어들어 적군을 흐트러뜨리는 모습은 마치 활개치는 흑수리. 제국군은 단숨에 냉정을 되찾았다. 우리에게 패배란 없다.
제대로 먹고 쉴 환경을 제공 받지 못한 퍼거스의 게릴라군은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지휘도 없이 애국심과 광신에 물든 비이성적인 공격이 통할리가 없었다.
"에델가르트, 멋대로 행동해서 미안하다. 그때는 군의 침착을 되찾는게 먼저라고 생각했어."
결과적으로 벨레스가 시선을 끌었던 행동은 그때당시 최선이었다. 적은 지휘계통을 노리느냐 가까운 군사를 노리느냐에 대해 망설임을 가졌고 아군은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에델가르트의 명령을 생각하면 이것은 명백한 배신이었다. 적군의 시선을 끌었다는 것은 벨레스가 다치거나 죽을 확률을 높인다. 시선이 마주쳤을때 벨레스는 말하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전부 알고서도 벨레스는 스스로를 위험에 몰아넣는 선택을 했다.
"당신도 참.. 선생님이 그런 사람이라서 나는 더욱 당신을 믿는거야. 내가 응석부려도 중요한곳에서 옳은 길을 선택할테니까."
일순간 분노에 차오르고 슬프지만 인정했다. 에델가르트가 사랑하는 선생님은 그녀의 꿈을 위해서라면 에델가르트가 바라는것도, 약속도 어길것이다.
하지만 벨레스를 사랑하고 그녀와 같은 길을 걷길 바라는 에델가르트는 냉혹한 황제의 모습을 벗어날 수 밖에 없었다. 벨레스가 바라는바를 알고도 적군이 바라는 최상의 목표가 어디있는지를 당당히 밝혔다. 퍼거스 게릴라군의 목적을 생각하면 일개장군보다 단연 제국의 황제의 목이 중요했다.
후에 휴베르트의 잔소리는 길고 길었지만 결국 그는 한숨을 푹 쉬고는 무의미한 황제에게로의 충언보다 벨레스에게 자신의 몸을 소중히하라 설득하기를 택했다. 황제의 충실한 심복으로써 휴베르트는 그녀가 바라는것을 이루기 위해 최대한 노력할 의무가 있었다.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하는건 대단한 일이지만...이런것에 익숙해지길 바라진 않았어.."
"미안하다..."
또, 또 저 강아지 눈이다. 에델가르트는 결국 선생님의 '미안하다'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원래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질 수 밖에 없는건 알았지만 솔직히 에델가르트는 좀 억울했다. 누구라도 벨레스의 그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보면 져줄 수 밖에 없을것이다. 적어도 도로테아는 동의해주겠지.
"선생님, 적어도 다음부터는 미리 신호를 보내. 막지 않을테지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정도는 가지고 싶거든."
"그렇군..알았다. 미리 사과하도록 하지."
볼품없는 내용이지만 둘만 아는 신호라는걸로 에델가르트는 만족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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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스킨쉽하기
탁
반사적으로 에델가르트는 책을 덮었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적혀있지 않지만 개에 대한 책이니 쓰다듬는다던가 포옹하는 훈훈한 방법들이겠지. 하지만 지금 에델가르트가 떠올린것들은 도로테아가 알면 몇날몇칠을 놀려먹을 장면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벨레스는 완벽히 에델가르트의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실전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과 폭신해보이는 긴 머리카락, 포용력 있어보이는 품.. 축 늘어지면 뭐든 용서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귀여운 눈썹.. 물론 외모만으로 사랑하는건 아니지만 이유중 하나정도는 되었다.
스킨쉽...스킨쉽....에델가르트는 장담하건데 신체접촉을 좋아하지 않는편이다. 어릴때는 모르겠지만 지하감옥의 기억과 그 흔적들이 만들어낸 거부감은 꽁꽁 감싸맨 갑옷들로 나타났다.
"에델가르트, 내일의 전략에 대해서 의논할게 있다. 지금 시간 괜찮나?"
"앗, 선생님..!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벨레스는 가지고 온 지도를 책상위에 내려놓으며 힐끗 에델가르트가 옆에 둔 책을 바라봤다. 개에게 사랑받는법? 그녀가 알기로 에델가르트는 늘 방 앞에 뒹구는 흐레스벨가종 검은 고양이에게 먹이를 줄 정도로 고양이를 좋아했다.
하지만 개를 싫어한다는 기억도 없으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페르디난트는 귀족들은 취미로 사냥을 하기 위해 사냥견을 들이곤 한다고 했고 번견으로 사육하는 귀족과 부유층 상인도 많았다.
지금은 전쟁중이라 힘들겠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소소한 꿈도 도움이 되었다.
"무슨 개를 키우기로 했나? 직접 기른적은 없지만 나는 개를 꽤 좋아해서 수도원에서 자주 먹이를 주곤 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개가 잘 따르는편이야."
물론 에델가르트는 '제가 키우고 싶은 개는 당신입니다'라고 말 할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책을 집어다가 서랍에 쳐박아버릴 수 밖에 없었다. 다행인점은 벨레스가 매우 상식적이어서 그 책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떠올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글쎄, 대형견인건 확실하지만 구체적으론 정해진게 없어. 먹을걸 좋아하고 굉장히 똑똑한데다가 상냥한 성격인 정도?"
"흠.. 대형견은 대부분 너그러운 성격이지. 모호한 조건이구나. 그래, 내일 전략의 이 부분이.."
에델가르트가 이 주제에 대해서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걸 파악했는지 벨레스는 곧장 본론에 돌입했다. 유익하고 효과적인 대안을 마련해온 벨레스 덕분에 둘만의 회의는 활기를 띄었고 에델가르트는 몇가지 좋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5년이 지났지만 벨레스는 여전히 그녀의 선생님이었고 자신은 아직도 배울게 많은 학생이었다.
만족스런 시간을 보낸 후에 휴베르트가 가져온 간식과 함께 차를 즐기는 시간을 마련했다. 이미 흑수리 유격대 모두가 자신의 연정을 알고있다는 것은 에델가르트는 매우 부끄럽게 만들었으나 도움이 되고 있다는걸 부정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개에 대한것이지만.."
"끝난거 아니었어?"
에델가르트는 최대한 침착해 보이길 바라며 찻잔으로 떨리는 입가를 가렸다. 벨레스는 책임에 충실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뒤로 미뤘을 뿐인지 흥미진진해 보였다.
"이 이야기는 싫은가..? 개를 좋아한다는게 의외라서 흥미로웠지만.. 고양이 이야기가 더 좋다면 얼마전에 친해진 고양이에 대해서.."
"동물은 이제 그만 됐어.. 지금은 키울 시간도 없고 아마 전쟁이 끝나도 나는 바쁠테니까 키우지 않을거야."
"에델가르트 네가 바쁘다면 내가 돌봐도 되지 않나?"
지금 차를 마시는건 좋은 선택이 아닌것 같다고 생각한 에델가르트는 찻잔을 내려뒀다. 하마터면 사례가 들려 흉한 모습을 보일 뻔 했다. 벨레스는 그런 에델가르트를 봐도 달래줄것 같지만 이것은 황제의 체면에 대한 문제다.
"선생님은...전쟁이 끝나도 내 곁에 남아줄거야?"
"물론, 그럴 생각이었지만... 전쟁이 네 길의 끝은 아니고, 나와 같이 걷기를 바라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맞아.. 하지만 선생님은 혹시 책임감 때문에 남아있는걸지도 모르고.. 나는 이미 공식적인 학생도 아니고.. 원래 바라지 않았던 삶의 방식이었으니 용병으로 돌아갈거라고 생각했어."
에델가르트는 대사교와 같이 벨레스를 권위로 묶고 싶지 않았다. 곁에 있어주길 바라지만 그것이 벨레스 스스로의 의사로 이루어진 결과이길 바랬다.
정말 이걸로 괜찮은가, 자신이 전 학생이라서, 황제라서 선택한것은 아닌가. 상황이 그렇게 만든것은 아닌가, 벨레스가 전 선생님이라서, 레아가 실패작으로 칭하고 적대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은 끊임없이 에델가르트를 괴롭혀왔다. 무엇보다 벨레스는.. 에델가르트와 달리 다른 선택지가 많이 있었다.
숙여버린 황제의 위협적인 금빛 뿔이 달린 머리를 거친 손이 쓰다듬는다. 처음엔 서툴러서 도로테아가 불평 할 정도로 학생들의 머리칼을 헤쳐놓았던 손길도 지금은 적당한 힘으로 안심감을 불러일으킨다. 따스한 애정을 느끼게 했다.
에델가르트는 그 손을 꼭 잡아 손등에 키스했다. 당황해서 움찔 떨리는게 입술로 느껴졌다.
"고마워, 선생님. 당신이 내 곁에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거 같아. 확실히 천마의 뿔은 부족할지도.."
분명 벨레스는 키스의 의미같은건 모를거고 에델가르트는 알아도 문제가 없을 장소를 골랐다. 사랑하는 선생님을 존경한다는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동요한게 분명해 보이는 벨레스를 내심 기분좋게 여기며 에델가르트는 선생님을 산책으로 이끌었다. 아직 이 시간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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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에게 사람의 언어와 행동을 가르쳐주기
드디어 전쟁의 끝은 맞이했을때, 벨레스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비록 원래 박동이 없었다는걸 몰랐던 에델가르트는 도로테아는 알고 있었는데 자신은 들은적이 없었다는걸 분개했지만 이제와서 중요한것은 아니었다.
승리했지만 단연코 최악의 전투 환경이었기 때문에 사상자가 많았던 제국군은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 더 크게 웃고 더 떠들썩하게 그들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연회를 열었다. 배급 할 수 있는 것은 좀 더 많은 고기, 약간의 술 정도였지만 황제는 수도 앙바르에 도착하면 그들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축제를 약속하면서 제국군을 격려했다.
떠들고 마시는 병사들 사이로 도로테아가 장송곡 대신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가운데에 밝은 캠프파이어가 타오르자 너나 할것없이 춤추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춤추러 가지 않아?"
"지쳤다. 왜 다들 나와 춤추고 싶어하는지 모르겠어."
구석진곳에서 즐거워하는 학생들을 지켜보는 눈빛은 사뭇 따뜻하고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여신의 그릇 따위가 아닌 사람의 심장으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게 확실하고 더욱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그래, 예를들어 지금 바로 옆에 있는 에델가르트를 볼 때에 벨레스는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주위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건 아닐까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에델가르트에게도 들릴까? 벨레스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자신을 괴롭혔기 때문에 고민하길 그만두었다.
"선생님은 사관학교 시절부터 인기가 많았지. 후후, 조금 질투했어."
"질투?"
"..당신에게 언제나 내가 최고의 학생이길 바랬으니까."
벨레스는 갑자기 심장을 냉탕에 빠뜨린것처럼 열기가 식는것을 느꼈다. 그녀는 전 선생이었고 에델가르트는 벨레스를 그저 의지 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벨레스는 카스파르가 그녀의 격투술을 칭송할때도 페르디난트가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겠다고 호언장담 할 때도 충만함을 느꼈다. 그것은 결코 갈증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에델가르트, 나는 그날 이후로 좀 이상해진걸지도 모르겠다. 린하르트가 내 머리칼 색과 눈색, 심장 박동에 대해서 관심을 표했는데 지금이라도 진지하게 이야기 해봐야겠어."
"후유증이라도 있는 거야, 선생님?! 지금 당장이라도 의사를 부를게.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제국 최고의 의사들을 부를 수 있어."
"이건.. 아픈걸까? 그럴때도 있지만 아주 뜨겁고 둥실 떠오를때도 있어.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조금 아픈것 같군. 차갑고 시리게 찔리는것 같다."
"어디가? 큰 상처는 없어 보였는데.. 근육이 찢어졌거나 내출혈이라면 마누엘라가 봐줄거야. 알다싶이 뛰어난 백마법사니까 걱정 할 필요 없어."
에델가르트는 당황해서는 벨레스의 몸 이곳저곳을 손댔고 그 어디에도 눈에 띄는 부상이 없는걸 확인했다. 벨레스는 걱정이 가득한 황제를 보고 다시금 심장이 빠른 리듬을 고수하고 신체가 점점 풀려가는걸 느꼈다. 에델가르트는 언제나 그녀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벨레스는 에델가르트의 손을 잡고는 건틀릿을 벗기고 자신의 왼가슴 위에 두었다. 금색 장식이 비켜서면서 불만스레 짤랑 소리를 내었다. 에델가르트의 뺨이 장식의 흔들리는 분홍 술 만큼이나 달아올랐다.
"널 보면 심장 박동이 급격히 빨라져서 어지럽고 귀가 울리는것 같을 때가 있다. 간질간질 하기도 해. 화내는 모습을 보면 나까지도 끓어오르는것 같아. 그리고..네가 날 그저 선생님이라고 여긴다고 생각하니까.."
"생각하면?"
"모르겠다. 차가운 물 속에 던져진것 같고 혼자만 남은것 같아. 누군가 갑자기 내게서 널 빼앗아 갈 것 같아. 넌 결코 순순히 당할만큼 약하지 않은데. 이제는 내가 지킬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르는데."
캠프파이어가 불티를 날리고 대지는 화마에 삼켜진 부작용으로 열기를 머금고 있다. 북반구에 위치한 페르디아는 지금, 역사상 가장 뜨거운 온도를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벨레스는 혼자 늑대가 언제라도 공격해 올 수 있는 설원에 서 있는것 같았다. 지금 당장 연회에 뛰어들면 학생들은 벨레스에게 다가와서 같이 춤출것을 요구할것이고 병사들은 그들의 존경하는 지휘관에게 고기와 술을 얼마든지 나를텐데.
"선생님.. 그건 슬프다는 감정이야. 외롭다도 섞여 있고 어쩌면 질투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선생님에게 조금 이를까.."
"제랄트를 잃었을때랑은 달라. 눈물이 나왔는데 그때는 떨리지는 않았어. 무섭다? 에델가르트, 네가 날 선생님으로 여기는걸 나는 왜 두려워하지?"
에델가르트는 몹시 간지럽고 달콤한 이야기를 듣는다는듯 후훗 웃음을 흘리고 부드럽게 벨레스의 심장이 뛰는 부위를 쓰다듬으며 그 리듬을 즐겼다. 벨레스는 용광로 속 석탄이라도 되는 듯 열을 뿜으며 쿵쾅거리는 그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나쁘지는 않았다. 세상에 둘만이 남은것 같을때 전장에서라면 나쁜 소식이지만 안전이 보장되었을때 벨레스는 그 시간들을 소중히 여겼다.
"그건 선생님이 찾아야 하는 답이지만....당신이 빨리 깨닫기를 나도 바라니까 약간의 힌트를 줄게. 선생님으로는 영원히 황제의 가장 곁에 있을 수 없어. 선생님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거겠지, 안그래?"
"...."
"나는 어서 알아줬으면 좋겠지만.. 기다릴게. 천천히 알아도 좋아. 당신은 이미 나에게서 떠나지 않을거라고 알려줬으니까."
에델가르트는 이후 시무룩한 선생님의 손을 잡아 끌어 캠프파이어의 근처에서 춤을 췄다. 모두가 그들의 춤에 환호했고, 특히 흑수리 유격대는 선생님을 홀로 독점한 황제에게 놀림이 섞이 야유를 보냈다.
밤은 깊어졌고 그들은 승리에 만취해 미래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황제와 유능한 지휘관의 사랑에 대해서 속삭였다. 모두는 황제의 오랜 짝사랑을 응원하고 있었고 오직 벨레스만이 그 사실을 몰랐다.
차례차례 다음은 자신이라고 달려드는 제자들에게 지쳐 먼저 잠자리에 돌아갔을때 벨레스는 겉옷 주머니에서 짤랑 존재를 주장하는 아버지의 유품을 꺼내들었다.
"에델가르트.."
가장 소중한 사람. 벨레스의 머릿속에는 온통 에델가르트에 대한 것 밖에 남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었다. 하지만, 심장 박동이 벨레스를 인간으로 돌려놓은 것은 얼마 되지않았었고 지금에서야 엄청난 충격이 뒤이어 덮쳐왔다.
아아, 어떻게 모를수가 있었을까? 벨레스가 외롭고 무섭고 두려워하며 없는 상대에게 질투하는것은 전부 에델가르트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기 때문이었다.
벨레스는 그녀를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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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를 아기처럼 생각하지 않기.
에델가르트는 그동안 오래 신세진 책을 이제 그만 황궁의 도서관에 반납하기로 정했다. 이제 이런 책의 도움이 없어도 그녀는 자신이 벨레스에게 가장 사랑받고 있다는것을 어느정도 믿을 수 있었다.
여러차례 읽고 공부한 흔적이 있는 책은 벨레스가 자주 개를 기르고 싶은게 아닌지 황제에게 물어보게 될 만큼 황제의 애독서로 보였지만 에델가르트는 고양이파였다.
그리고 그녀가 눈치채지 못한게 있다면 벨레스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깨어난 심장과 함께 인간이 된 벨레스의 통찰력은 보다 에델가르트를 섬세하게 파악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똑똑 노크와 함께 방에 들어선 벨레스는 놓여져 있는 책의 표지를 노려보았다. 표지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여성과 공을 가지고 놀고 있는 개는 완벽한 동반자로 보였고 행복해보였다. 하지만 그 뒤에는 여성의 부부로 보이는 남성이 그려져 있었다. 벨레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에델가르트가 자신을 강아지로 여기는것에는 불만이 없었지만 벨레스는 인간이었으므로 그 관계에 누군가가 끼어들 가능성이 있다는걸 매우 불만스럽게 여겼다. 다행히 벨레스는 모든걸 해결할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에델가르트, 바쁜것은 알지만 오늘 여신의 탑에서 만날 수 있을까?"
"무슨 용건이라도 있는 거야?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시간을 낼 수 있는데."
"아니, 준비할게 있다."
"흠.. 알았어. 여신의 탑.. 그립네."
에델가르트는 인적이 적은곳에서 중요한 일이라도 논의하는걸까 방심하는것 같았다. 그야, 벨레스가 감정의 걸음마를 하는걸 바로 며칠 전에 보았으니 그 사이에 얼마나 성장했는지 감히 추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엔 두명은 너무 바빴고 그날 이후 오늘 처음으로 대면 할 수 있었다.
벨레스는 언제나 배움에 있어서 천재적이었고, 감정도 또한 마찬가지다. 에델가르트는 벨레스의 재능이 단지 전투에만 관련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여신의 탑은 행복한 커플에 대한 다소 경박한 소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적이 드물었다. 아마도 바람이 불면 오래된 돌틈 사이가 울리고 그 소리가 마치 사람이 우는 소리와 같았기 때문에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도 무성해서일 것이다.
"선생님, 많이 기다렸어?"
"에델가르트.. 아니, 널 생각하고 있으면 언제나 시간이 금방 흘러가. 신기한 일이군.."
선조의 힘이 있었을때 벨레스는 시간의 허무함을 알았다. 뒤로 되돌릴 수 있다는것은 그 가치를 퇴색하게 만들었고 가끔 소중하지 않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지금은 조금의 시간이라도 아까웠다. 계속 에델가르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황제를 불러낸 용건은? 설마...이제와서 다른 길을 찾았다고 떠나겠다는건 아니지..?"
불안스레 흘러내려있는 본인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황제는 영락없이 사랑하는 존재에게 뒤흔들리는 모습이었다. 벨레스는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활짝 웃는다는 고난이도의 표정을 할 수 없었지만 이정도도 충분히 급격한 발전이었다.
"에델가르트, 받아줬으면 하는게 있다."
벨레스는 책 한권 위에 반지를 올려둔채 그대로 에델가르트에게 내밀었다. 에델가르트는 감동해야 할지 당황해야할지 이게 놀리는건지 무엇인지 알수가 없어져서 조심스레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이상의 일을 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도 네가 매우 바쁠것을 알고 있지만 다행히 나는 네가 바빠도 점잖게 기다릴 수 있는 개를 찾았다. 아마, 네 마음에도 쏙 들거라고 장담하지."
"그게 지금 이 책과 반지랑 연관이 있는거야?"
"물론이지. 아주 중요해. 개를 키우는데에는 훈련과 목줄이 필수거든. 주인이 준비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개가 주인의 손을 묶는 수 밖에."
책을 수평 그대로 양손으로 들고 있는 에델가르트에게서 반지를 들어올린 벨레스는 그대로 왼손 약지에 끼워주었다. 에델가르트는 혼란으로 거의 울상이었다.
전부 다 들켜있었다는 사실도 그녀를 수치스럽게 만들었지만 문제는 알고도 벨레스가 웃고 있다는것이었다.
'개에게 사랑받는법'의 시리즈인걸로 보이는 책의 표지 속 남자의 얼굴에 직직 검게 엑스표가 그려져 있는걸 보는 순간 에델가르트는 모든게 질나쁜 농담은 아닌가 의심하기까지 했다.
로맨틱한 프러포즈의 현장은 아니었지만 하여튼 개는 자신의 공로에 평소처럼 의기양양한 순한 표정을 지었고 주인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었다.
"반지를 준비하지 못했지만 묶여줄거야? 산책을 하다가 도망이라도 가면 주인으로써 매우 슬플것 같은데."
"나는 매우 충성스럽고 주인을 사랑하는 개라서 도망갈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에티켓을 위해서라도 빠른 시일내에 준비하는게 좋지 않을까?"
장난스레 싱긋 웃으며 벨레스는 짖궃은 농담에 뺨을 붉히는 에델가르트의 허리를 한팔로 감싸 안아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을 다소 강압적이게 갈라 굳어진 혀를 얽어매면 황제가 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이건 선불금으로."
"선생님, 당신...역시 개가 아니라 늑대였어.."
"영광이군."
다시 한번 입을 맞추려 드는 벨레스를 막아내길 포기한 에델가르트의 힘이 풀린 손에서 책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개를 훈련하는법'
소녀와 개는 이제 서로를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