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튼다.
오쿠사와 미사키는 눈을 깜빡였다. 점차 밝은 빛을 투영하는 얇은 커텐을 멍하니 바라보다 제 품에 얌전히 잠든 연인의 머릿결에 얼굴을 묻었다. 최고급 시트에 은하수처럼 늘어진 빛깔이 어여쁘다. 멈추고 있던 숨을 천천히 내쉬기 시작했다.
미사키는 계단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정확히는 밀쳐지는 꿈을 꾸었다. 밀친 사람의 얼굴을 떠오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미사키가 일부로 잊어버린 유일한 것이었다.
- 누가 네 허황된 꿈에 자발적으로 어울려주겠어?! -
오랜만에 꾸는 꿈이라, 더욱 선명했다.
- 앞으로도 평생 나타나지 않을거야!! -
아직도 난 당신이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모른다. 어떤 머리를 했는지, 어떤 외형이었는지, 어떤 얼굴이었는지. 다만 반복되는 꿈에서 그 사람이 했던 것은 내 목표에 대한 부정.
날카롭게 찢어지는 분노는 화살로 변해 제 심장을 찔렀고, 모자이크 된 그 사람은 꼼짝도 못하는 내 어깨를 밀쳤다. 중심을 잡지 못한 나는 계단 밑으로 느리게 떨어졌다. 당신은 비명을 질렀던가. 꿈은 항상 떨어져 부딪히는 순간 끝이 났다.
눈을 뜨면 벅찰 정도로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 막연히 기뻐서 이루고자 했던 목표는 맹목적이 되어 내 목을 졸랐다. 이유는 몰랐다. 몰라도 된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이 웃음을 지으면 즐겁고, 행복하고, 반짝반짝거린다는 원 이유가- 무언가를 덮어 가리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무언가를 항상 외면해왔던 오쿠사와 미사키는 몇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게 무언지 직시할 수 있었다.
" 우응... "
이름도, 얼굴도- 이젠 떠오르지 않는 가장 친했던 내 친우.
난 네 말을 부정할 이유를 찾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미사키는 몸을 꾸물거리며 제 품에 더욱 안겨오는 코코로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네게선 깨끗하게 빤 빨래를 햇볕에 말린 향이 났다. 들판에 화려히 피며 뽐내던 꽃의 향도 났다. 불편한지 이불을 걷어내는 몸짓에 미사키는 좀 더 꼼꼼히 코코로에게 덮었다. 아, 더운걸지도. 계속 끌어안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미사키는 그녀가 느끼는 불편함을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에 입을 맞춘 미사키는 살짝 미소지었다.
" 으응... 아. "
" 잘잤어, 코코로? "
네 말이, 네가 틀렸어.
뭐든 이루어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어.
" ... 나 언제부터 잠든 걸까. "
" 응, 코코로가 내게 세번째로 사랑한다고 했을 때? "
" ... ... "
이런 나라도 좋아해준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어.
몽롱한 눈을 비비던 코코로가 몸을 딱 굳히곤 제 품에 얼굴을 묻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가 새빨갛다. 잠들기 전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걸지도. 미사키는 심술궂게도 보이는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 코코로는 하늘 높이 붕 뜬 기분일때밖에 사랑한다 해주지 않았으니까, 확실하게- 읍. "
" ──아아아아! 말하지 않는 매너라는 걸 모르는 걸까, 미사키는! "
코코로가 제 입을 막으며 왁, 하고 소리쳤다.
대리석처럼 하얀 피부가 페인트칠을 한 것처럼 붉다. 미사키의 눈꼬리가 사르르 휘었다. 제 입을 덮은 손등 위로 내 손을 덮어 깊숙히 어여쁜 손가락 위에 키스한다.
코 끝 가득 사람의 냄새가 가득했다. 청회색 눈에 애정이 뚝뚝 흘러 넘쳤다. 이불 속 어렴풋 보이는 코코로의 어깨에 잇자국과 가슴팍에 선명히 남겨진 제 흔적에 가슴이 뭉클했다.
입을 열어 지금 느끼고 감정을, 가득 넘쳐 흐르는 애정을 말하려던 미사키는 데구르르 눈을 굴리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반쯤 뜬 눈꺼풀 아래 코코로를 담은 눈이 사랑스러운 듯 깜빡여진다.
" ... 좋아한다는 말까지, 말하지 않고 눈으로 표현하라는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
심통난 얼굴로 화난 기색 없이 속닥이는 목소리가 무척 달았다. 입 안 가득 초콜릿과 사탕- 설탕을 뿌린 과자를 잔뜩 머금어 삼킨 것 같았다.
머릿속이, 세상이 행복으로 가득 찬다면 이런 기분일까. 미사키는 확답을 내리지 못한 채 코코로의 손을 끌어내리고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떨어트렸다.
" 그치만 참을 수 없는 걸. 무엇을 해도 받아주고 어울려주는 코코로가 나빠. 마음을 확인한지 하루만에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다니 너무해. "
넌 내 신뢰였고, 그 사람의 말을 부정할 근거였으며, 길 잃은 나의 길잡이였다.
무엇보다 내 가장 특별한 사람이라.
표현하지 않고선 버틸 수 없다. 끓어 넘기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게 만든 건 너니까.
" 그런식으로 말하는 건 치사하네. 미사키야말로 잔뜩 나를 어리광 부리게 한 주제에. "
" 흐응,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
" 모른 척이겠지? "
업악적이게 눈썹을 찌푸린 코코로에게, 미사키는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행복한 기분에 휩싸여서 코코로를 꼭 안고 그녀의 체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기색이 느껴졌지만 곧 크게 숨을 내쉬며 껴안아왔다. 아직 맨몸인 상태라 피부가 부드럽게 스쳤다.
그러자 결국 누운 상태로 화들짝 놀란 코코로의 고개가 급히 멀어졌다. 찬 기운이 그 사이를 메꾸었다. 한 차례 눈을 깜빡인 미사키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코코로를 볼 수 있었다.
" 왜 그래? 혹시 어디 아파? "
" 아, 아니... 아니... 아.. "
코코로는 끙끙 앓았다.
" 말해줘. 나는 의사가 아니지만 그냥 보고만 있기에는 괴로운 걸. "
코코로가 결국 이불보에 얼굴을 파묻었다. 난감한 기색으로 잠시 앓던 코코로는 그녀가 잠들었을 때부터 쭉 베개로 사용하고 있던 팔을 조심스레 잡아왔다.
" 정말로, 단순한 근육통이니까. "
" 아. "
잠시 침묵을 지키던 미사키는 천천히 근육통이란 단어를 받아들였다. 평소보다 무리한 운동을 했을 때 오는 근육의 통증. 무리한. 무리한? 아주 오랫동안 그 단어가 미사키에게 통용되지 않았으니 떠올리는 게 느릴만도 했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체력의 차가 미사키를 조금 위축시켰다. 무언가의 충격받은 개처럼 표정을 굳히던 미사키는 급박하게 몸을 일으켰다. 덮고 있던 이불이 스르르 내려간다.
" 미사키?! "
" 코코로, 잠깐만 기다려. 적신 수건이랑 같이 마사지하면 금방 나아질거야. "
" 아니 잠시만... "
" 코코로의 검은옷 사람들에게 온습포가 있는지 물어봐야겠어. 오늘 학교에 가니까 휴식할 틈이 없잖아? 붙이고 가면 도움이 되겠지. "
우선 수건부터.
쭉 자신의 경험과 언젠가 찾아본 치유방법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던 미사키는 코코로가 말릴새도 없이 침대에서 빠져나가 문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 넓디 넓은 저택에서 검은옷 사람들을 찾아나설 작정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무식하게 행동하기엔 안 될 일이 더 많다는 걸 여러가지 경험으로 깨닫고 있다. 그 사람들은 항상 코코로의 주변을 맴도니까 그냥 부르면 나올지도 모른다.
만약에 나오지 않는다면.
" 아, 정말...! "
이어지던 생각이 멈추고, 등 뒤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등에 무언가가 부딪혔다.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돈 미사키는 바닥에 떨어진 베게와 씩씩거리며 얼굴을 붉힌 코코로를 볼 수 있었다.
" 갈거면, 옷, 입고가! "
아.
.
바닥에 잔뜩 구겨진 잠옷들을 서둘러 주워입은 미사키가 나가려다 말고 던져버린 베게를 주워 옆에다 놓아주고 콧잔등에 입 맞춰주며 다녀오겠다는 말에, 한없이 풀어지려는 얼굴을 베개에 꼭 묻고 굴러다니다 침대에서 떨어져버린 건 작은 헤프닝이었다.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이불을 똘똘 말았다. 그러자 급히 다녀온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미사키는 품 안 한가득 무언가를 안고 있었다.
" 검은옷 사람들을 만났는데. 어쩐지, 아무말도 안했는데 가득 챙겨줬어. "
검은옷 사람들, 전부 알고 있다는 걸 이런식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될텐데.
침대 가까이로 다가온 미사키는 하나씩 물건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대야와 수건, 갈아입을 속옷과 교복. 붕대와 습포 파스 같은 것들. 붕대를 내려놓았을 때 코코로의 시선이 무심코 미사키에 목 근처에 머물렀다.
어제보단 확실히 멍이 빠진 것 같지만, 그럼에도 그냥보면 시선을 돌리기 힘들 정도로 파랗다.
" 미사키. 오늘 학교 가는 걸까나? "
" 응? 코코로가 빠지고 싶다면 같이 빠질건데. "
" ... 그런 얘기가 아니야. "
의아스럽게 고개를 기울인 미사키는 대야에 물을 받아와 수건을 적셨다. 능숙하게 수건을 짜고 머리만 빼꼼히 나와있는 코코로의 팔을 밖으로 빼낸다. 살짝 뜨끈할 정도의 수건이 팔을 감싸, 그 위로 상냥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주무른다.
집중하는 눈에 괜시리 잠들기 전의 기억이 떠올라 혼자 부끄러워졌다. 미사키의 리벤지 1차전은 정말 배운대로 느낀대로 행동해 보내버리더니, 쌩쌩한 얼굴로 2차전을 시작해버렸다.
미사키의 눈은 어두운 빛깔을 띠면서도 한없이 맑아서, 들여다보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선명히 보였다.
" 목 말이야. "
계속, 계속 뭉근히 애정으로 풀어진 눈 안 속에서 쾌락에 허덕이며 갈구하는 츠루마키 코코로가 보여서 부끄러움에 힘들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어느덧 3차전까지.
손목에서 어느덧 어깨까지 오른 미사키가 아주 잠깐 멈추었다. 모양새가 꼭 지금에야 알아챈 것 같았다.
" 확실히, 다른 애들이 보면 무서워할지도. "
그건 아니지 않을까.
반박이 바로 떠올랐지만 코코로는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당신이 해주는 마사지가 의외로 굉장히 기분이 좋은 것도 있고, 실제로 물어봤을 때 정말 다른 애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는 것도 있었다.
나른히 눈을 감은 코코로는 반대쪽 팔을 잡는 미사키에게 순순히 몸을 돌려 팔을 내어주었다.
" 근육통 많이 움직이기 힘들어? "
" 걸려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말하네 미사키. "
" 오래되서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겠어. "
" 항상 미셸 안에 들어가 있거나 격렬한 퍼포먼스도 하면서, 정말로? "
정말로.
조금 끊어 말하는 것처럼 어눌한 목소리에 코코로는 눈을 떴다. 골몰이 생각하는 기색으로, 그럼에도 끊임없이 팔을 주무루는 언밸런스한 모습에 꽤 다른 사람의 시중에 능숙하다는 생각을 막을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또 이런 정성스런 간호를 한 걸까. 삐죽- 하고 튀어나오려는 까만 감정을 나중으로 미뤄둘 생각으로 우선 꾹꾹 눌러담았다.
" 땀투성이가 될 정도로 더워서 끈적끈적해서 지치거나 힘들거나 하긴 하지만. 다음날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아픈 건 없어. "
" 그 말, 어쩐지 당신이 초인이라고 말하는 거랑 뭐가 다른걸까 싶은데. "
" 설마. "
난 이미 쓰러지고도 남을 체력차인 것 같은데.
" 만약 정말로 내가 초인이었다면 코코로는 이미 병원이었을거야. 이렇게 마사지를 하는 것보단 병원에 가서 의료적 찜질을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일거라구? "
" 업고 가겠다는 말일까? 미사키라면 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
" 할 수야 있겠지만, 승차감이 불편한 걸. "
그게 어떻게 들리는지 알고 있을까.
옆으로 누워있던 코코로는 미사키가 갑작스레 이불을 들춰 내리는 것에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이불보를 꼭 잡고 다리를 움츠렸다. 미사키의 움직임이 멈췄다.
어째서? 내려다보는 미사키의 눈이 집요해서 코코로는 결국 제 몸 전부를 이불에 감췄다.
이성을 차리고 생각해보자면, 어제는 심하게 분위기를 탔던 경우고. 이제와 이렇게 밝은 곳에서 몸을 보이는 건 굉장히 부끄럽다. 상대방이 그런 의도는 없다고 해도.
" ... 코코로? "
" 아... 그 꼭 들출 필요는 없잖아...? "
" 그치만 전체적으로 아픈 게 아니었어? "
아픈 건 아픈거고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니까!
이불에 덮혀 까맣게 변한 시야에서, 미사키의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코코로, 코코로~. 하며 목소리를 길게 늘어트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들렸다. 꿋꿋하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있던 코코로는 어느순간 모든 소음이 멈췄다는 걸 알아챘다.
아무리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해도, 이 정도면 미사키도 포기하겠지.
조심조심 머리 위까지 끌어올린 이불을 내리던 코코로는 갑자기 제 위를 덮치는 무게에 작게 비명을 질렀다. 무겁지 않은 무게가 제 옆구리 위에 내려앉아 있다. 눈을 크게뜨고 아래를 내려다본 코코로는 몸을 베게 삼아 대 자로 누워버린 미사키와 눈이 마주쳤다.
" ... ... 뭐하고 있어? "
" 에. 코코로가 탈피를 하고 나를 봐주길, 하고 기다리고 있었어. 지금 당장은 마사지도 사양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우선 잠이라도 잘까 하고. "
그리 말하며 웃는 미사키는 퍽 사랑스러웠다.
그래, 나쁜 생각으로 가득 차서 부끄러워 하는 건 나뿐이겠지. 어쩔 수 없단 생각으로 가득차서, 이불 밖으로 손을 꺼내 미사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감각이 좋은지 눈을 감으며 내맡긴다. 그 경계없음에 따스함이 물씬 올라왔다.
커텐 사이로 밝은 빛이 투영되어 침대 근처를 방황한다. 그게 손에 잡힐듯 선명했다.
코코로는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지 않았다. 고요한 숨소리와 작은 웃음소리가 같은 공간에서 퍼져나갔다.
아, 그래. 코코로는 인정했다. 지금 시간이 더없이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모든 색체는 반짝거리고, 침대 옆 화분의 꽃 향기가 달하며, 평범하게 지내오던 츠루마키 코코로의 방이 아주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 모든 게 당신 덕분이란 걸 알아. 지금 이 시간이 특별한 이유가 오로지 당신에게 있었다.
내게서 모든 색을 내리쬐어준 당신과 둘이서 보내는 나른한 월요일의 아침. 그런 순간이었다.
--------
여우공책님(@Fox_nullnote)님이 써주셨습니다.
오쿠사와 미사키는 눈을 깜빡였다. 점차 밝은 빛을 투영하는 얇은 커텐을 멍하니 바라보다 제 품에 얌전히 잠든 연인의 머릿결에 얼굴을 묻었다. 최고급 시트에 은하수처럼 늘어진 빛깔이 어여쁘다. 멈추고 있던 숨을 천천히 내쉬기 시작했다.
미사키는 계단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정확히는 밀쳐지는 꿈을 꾸었다. 밀친 사람의 얼굴을 떠오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미사키가 일부로 잊어버린 유일한 것이었다.
- 누가 네 허황된 꿈에 자발적으로 어울려주겠어?! -
오랜만에 꾸는 꿈이라, 더욱 선명했다.
- 앞으로도 평생 나타나지 않을거야!! -
아직도 난 당신이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모른다. 어떤 머리를 했는지, 어떤 외형이었는지, 어떤 얼굴이었는지. 다만 반복되는 꿈에서 그 사람이 했던 것은 내 목표에 대한 부정.
날카롭게 찢어지는 분노는 화살로 변해 제 심장을 찔렀고, 모자이크 된 그 사람은 꼼짝도 못하는 내 어깨를 밀쳤다. 중심을 잡지 못한 나는 계단 밑으로 느리게 떨어졌다. 당신은 비명을 질렀던가. 꿈은 항상 떨어져 부딪히는 순간 끝이 났다.
눈을 뜨면 벅찰 정도로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 막연히 기뻐서 이루고자 했던 목표는 맹목적이 되어 내 목을 졸랐다. 이유는 몰랐다. 몰라도 된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이 웃음을 지으면 즐겁고, 행복하고, 반짝반짝거린다는 원 이유가- 무언가를 덮어 가리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무언가를 항상 외면해왔던 오쿠사와 미사키는 몇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게 무언지 직시할 수 있었다.
" 우응... "
이름도, 얼굴도- 이젠 떠오르지 않는 가장 친했던 내 친우.
난 네 말을 부정할 이유를 찾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미사키는 몸을 꾸물거리며 제 품에 더욱 안겨오는 코코로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네게선 깨끗하게 빤 빨래를 햇볕에 말린 향이 났다. 들판에 화려히 피며 뽐내던 꽃의 향도 났다. 불편한지 이불을 걷어내는 몸짓에 미사키는 좀 더 꼼꼼히 코코로에게 덮었다. 아, 더운걸지도. 계속 끌어안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미사키는 그녀가 느끼는 불편함을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에 입을 맞춘 미사키는 살짝 미소지었다.
" 으응... 아. "
" 잘잤어, 코코로? "
네 말이, 네가 틀렸어.
뭐든 이루어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어.
" ... 나 언제부터 잠든 걸까. "
" 응, 코코로가 내게 세번째로 사랑한다고 했을 때? "
" ... ... "
이런 나라도 좋아해준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어.
몽롱한 눈을 비비던 코코로가 몸을 딱 굳히곤 제 품에 얼굴을 묻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가 새빨갛다. 잠들기 전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걸지도. 미사키는 심술궂게도 보이는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 코코로는 하늘 높이 붕 뜬 기분일때밖에 사랑한다 해주지 않았으니까, 확실하게- 읍. "
" ──아아아아! 말하지 않는 매너라는 걸 모르는 걸까, 미사키는! "
코코로가 제 입을 막으며 왁, 하고 소리쳤다.
대리석처럼 하얀 피부가 페인트칠을 한 것처럼 붉다. 미사키의 눈꼬리가 사르르 휘었다. 제 입을 덮은 손등 위로 내 손을 덮어 깊숙히 어여쁜 손가락 위에 키스한다.
코 끝 가득 사람의 냄새가 가득했다. 청회색 눈에 애정이 뚝뚝 흘러 넘쳤다. 이불 속 어렴풋 보이는 코코로의 어깨에 잇자국과 가슴팍에 선명히 남겨진 제 흔적에 가슴이 뭉클했다.
입을 열어 지금 느끼고 감정을, 가득 넘쳐 흐르는 애정을 말하려던 미사키는 데구르르 눈을 굴리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반쯤 뜬 눈꺼풀 아래 코코로를 담은 눈이 사랑스러운 듯 깜빡여진다.
" ... 좋아한다는 말까지, 말하지 않고 눈으로 표현하라는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
심통난 얼굴로 화난 기색 없이 속닥이는 목소리가 무척 달았다. 입 안 가득 초콜릿과 사탕- 설탕을 뿌린 과자를 잔뜩 머금어 삼킨 것 같았다.
머릿속이, 세상이 행복으로 가득 찬다면 이런 기분일까. 미사키는 확답을 내리지 못한 채 코코로의 손을 끌어내리고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떨어트렸다.
" 그치만 참을 수 없는 걸. 무엇을 해도 받아주고 어울려주는 코코로가 나빠. 마음을 확인한지 하루만에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다니 너무해. "
넌 내 신뢰였고, 그 사람의 말을 부정할 근거였으며, 길 잃은 나의 길잡이였다.
무엇보다 내 가장 특별한 사람이라.
표현하지 않고선 버틸 수 없다. 끓어 넘기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게 만든 건 너니까.
" 그런식으로 말하는 건 치사하네. 미사키야말로 잔뜩 나를 어리광 부리게 한 주제에. "
" 흐응,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
" 모른 척이겠지? "
업악적이게 눈썹을 찌푸린 코코로에게, 미사키는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행복한 기분에 휩싸여서 코코로를 꼭 안고 그녀의 체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기색이 느껴졌지만 곧 크게 숨을 내쉬며 껴안아왔다. 아직 맨몸인 상태라 피부가 부드럽게 스쳤다.
그러자 결국 누운 상태로 화들짝 놀란 코코로의 고개가 급히 멀어졌다. 찬 기운이 그 사이를 메꾸었다. 한 차례 눈을 깜빡인 미사키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코코로를 볼 수 있었다.
" 왜 그래? 혹시 어디 아파? "
" 아, 아니... 아니... 아.. "
코코로는 끙끙 앓았다.
" 말해줘. 나는 의사가 아니지만 그냥 보고만 있기에는 괴로운 걸. "
코코로가 결국 이불보에 얼굴을 파묻었다. 난감한 기색으로 잠시 앓던 코코로는 그녀가 잠들었을 때부터 쭉 베개로 사용하고 있던 팔을 조심스레 잡아왔다.
" 정말로, 단순한 근육통이니까. "
" 아. "
잠시 침묵을 지키던 미사키는 천천히 근육통이란 단어를 받아들였다. 평소보다 무리한 운동을 했을 때 오는 근육의 통증. 무리한. 무리한? 아주 오랫동안 그 단어가 미사키에게 통용되지 않았으니 떠올리는 게 느릴만도 했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체력의 차가 미사키를 조금 위축시켰다. 무언가의 충격받은 개처럼 표정을 굳히던 미사키는 급박하게 몸을 일으켰다. 덮고 있던 이불이 스르르 내려간다.
" 미사키?! "
" 코코로, 잠깐만 기다려. 적신 수건이랑 같이 마사지하면 금방 나아질거야. "
" 아니 잠시만... "
" 코코로의 검은옷 사람들에게 온습포가 있는지 물어봐야겠어. 오늘 학교에 가니까 휴식할 틈이 없잖아? 붙이고 가면 도움이 되겠지. "
우선 수건부터.
쭉 자신의 경험과 언젠가 찾아본 치유방법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던 미사키는 코코로가 말릴새도 없이 침대에서 빠져나가 문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 넓디 넓은 저택에서 검은옷 사람들을 찾아나설 작정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무식하게 행동하기엔 안 될 일이 더 많다는 걸 여러가지 경험으로 깨닫고 있다. 그 사람들은 항상 코코로의 주변을 맴도니까 그냥 부르면 나올지도 모른다.
만약에 나오지 않는다면.
" 아, 정말...! "
이어지던 생각이 멈추고, 등 뒤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등에 무언가가 부딪혔다.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돈 미사키는 바닥에 떨어진 베게와 씩씩거리며 얼굴을 붉힌 코코로를 볼 수 있었다.
" 갈거면, 옷, 입고가! "
아.
.
바닥에 잔뜩 구겨진 잠옷들을 서둘러 주워입은 미사키가 나가려다 말고 던져버린 베게를 주워 옆에다 놓아주고 콧잔등에 입 맞춰주며 다녀오겠다는 말에, 한없이 풀어지려는 얼굴을 베개에 꼭 묻고 굴러다니다 침대에서 떨어져버린 건 작은 헤프닝이었다.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이불을 똘똘 말았다. 그러자 급히 다녀온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미사키는 품 안 한가득 무언가를 안고 있었다.
" 검은옷 사람들을 만났는데. 어쩐지, 아무말도 안했는데 가득 챙겨줬어. "
검은옷 사람들, 전부 알고 있다는 걸 이런식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될텐데.
침대 가까이로 다가온 미사키는 하나씩 물건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대야와 수건, 갈아입을 속옷과 교복. 붕대와 습포 파스 같은 것들. 붕대를 내려놓았을 때 코코로의 시선이 무심코 미사키에 목 근처에 머물렀다.
어제보단 확실히 멍이 빠진 것 같지만, 그럼에도 그냥보면 시선을 돌리기 힘들 정도로 파랗다.
" 미사키. 오늘 학교 가는 걸까나? "
" 응? 코코로가 빠지고 싶다면 같이 빠질건데. "
" ... 그런 얘기가 아니야. "
의아스럽게 고개를 기울인 미사키는 대야에 물을 받아와 수건을 적셨다. 능숙하게 수건을 짜고 머리만 빼꼼히 나와있는 코코로의 팔을 밖으로 빼낸다. 살짝 뜨끈할 정도의 수건이 팔을 감싸, 그 위로 상냥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주무른다.
집중하는 눈에 괜시리 잠들기 전의 기억이 떠올라 혼자 부끄러워졌다. 미사키의 리벤지 1차전은 정말 배운대로 느낀대로 행동해 보내버리더니, 쌩쌩한 얼굴로 2차전을 시작해버렸다.
미사키의 눈은 어두운 빛깔을 띠면서도 한없이 맑아서, 들여다보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선명히 보였다.
" 목 말이야. "
계속, 계속 뭉근히 애정으로 풀어진 눈 안 속에서 쾌락에 허덕이며 갈구하는 츠루마키 코코로가 보여서 부끄러움에 힘들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어느덧 3차전까지.
손목에서 어느덧 어깨까지 오른 미사키가 아주 잠깐 멈추었다. 모양새가 꼭 지금에야 알아챈 것 같았다.
" 확실히, 다른 애들이 보면 무서워할지도. "
그건 아니지 않을까.
반박이 바로 떠올랐지만 코코로는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당신이 해주는 마사지가 의외로 굉장히 기분이 좋은 것도 있고, 실제로 물어봤을 때 정말 다른 애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는 것도 있었다.
나른히 눈을 감은 코코로는 반대쪽 팔을 잡는 미사키에게 순순히 몸을 돌려 팔을 내어주었다.
" 근육통 많이 움직이기 힘들어? "
" 걸려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말하네 미사키. "
" 오래되서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겠어. "
" 항상 미셸 안에 들어가 있거나 격렬한 퍼포먼스도 하면서, 정말로? "
정말로.
조금 끊어 말하는 것처럼 어눌한 목소리에 코코로는 눈을 떴다. 골몰이 생각하는 기색으로, 그럼에도 끊임없이 팔을 주무루는 언밸런스한 모습에 꽤 다른 사람의 시중에 능숙하다는 생각을 막을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또 이런 정성스런 간호를 한 걸까. 삐죽- 하고 튀어나오려는 까만 감정을 나중으로 미뤄둘 생각으로 우선 꾹꾹 눌러담았다.
" 땀투성이가 될 정도로 더워서 끈적끈적해서 지치거나 힘들거나 하긴 하지만. 다음날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아픈 건 없어. "
" 그 말, 어쩐지 당신이 초인이라고 말하는 거랑 뭐가 다른걸까 싶은데. "
" 설마. "
난 이미 쓰러지고도 남을 체력차인 것 같은데.
" 만약 정말로 내가 초인이었다면 코코로는 이미 병원이었을거야. 이렇게 마사지를 하는 것보단 병원에 가서 의료적 찜질을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일거라구? "
" 업고 가겠다는 말일까? 미사키라면 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
" 할 수야 있겠지만, 승차감이 불편한 걸. "
그게 어떻게 들리는지 알고 있을까.
옆으로 누워있던 코코로는 미사키가 갑작스레 이불을 들춰 내리는 것에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이불보를 꼭 잡고 다리를 움츠렸다. 미사키의 움직임이 멈췄다.
어째서? 내려다보는 미사키의 눈이 집요해서 코코로는 결국 제 몸 전부를 이불에 감췄다.
이성을 차리고 생각해보자면, 어제는 심하게 분위기를 탔던 경우고. 이제와 이렇게 밝은 곳에서 몸을 보이는 건 굉장히 부끄럽다. 상대방이 그런 의도는 없다고 해도.
" ... 코코로? "
" 아... 그 꼭 들출 필요는 없잖아...? "
" 그치만 전체적으로 아픈 게 아니었어? "
아픈 건 아픈거고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니까!
이불에 덮혀 까맣게 변한 시야에서, 미사키의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코코로, 코코로~. 하며 목소리를 길게 늘어트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들렸다. 꿋꿋하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있던 코코로는 어느순간 모든 소음이 멈췄다는 걸 알아챘다.
아무리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해도, 이 정도면 미사키도 포기하겠지.
조심조심 머리 위까지 끌어올린 이불을 내리던 코코로는 갑자기 제 위를 덮치는 무게에 작게 비명을 질렀다. 무겁지 않은 무게가 제 옆구리 위에 내려앉아 있다. 눈을 크게뜨고 아래를 내려다본 코코로는 몸을 베게 삼아 대 자로 누워버린 미사키와 눈이 마주쳤다.
" ... ... 뭐하고 있어? "
" 에. 코코로가 탈피를 하고 나를 봐주길, 하고 기다리고 있었어. 지금 당장은 마사지도 사양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우선 잠이라도 잘까 하고. "
그리 말하며 웃는 미사키는 퍽 사랑스러웠다.
그래, 나쁜 생각으로 가득 차서 부끄러워 하는 건 나뿐이겠지. 어쩔 수 없단 생각으로 가득차서, 이불 밖으로 손을 꺼내 미사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감각이 좋은지 눈을 감으며 내맡긴다. 그 경계없음에 따스함이 물씬 올라왔다.
커텐 사이로 밝은 빛이 투영되어 침대 근처를 방황한다. 그게 손에 잡힐듯 선명했다.
코코로는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지 않았다. 고요한 숨소리와 작은 웃음소리가 같은 공간에서 퍼져나갔다.
아, 그래. 코코로는 인정했다. 지금 시간이 더없이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모든 색체는 반짝거리고, 침대 옆 화분의 꽃 향기가 달하며, 평범하게 지내오던 츠루마키 코코로의 방이 아주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 모든 게 당신 덕분이란 걸 알아. 지금 이 시간이 특별한 이유가 오로지 당신에게 있었다.
내게서 모든 색을 내리쬐어준 당신과 둘이서 보내는 나른한 월요일의 아침. 그런 순간이었다.
--------
여우공책님(@Fox_nullnote)님이 써주셨습니다.
'뱅드림 > ㅁㅅㅋㅋ'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퀘1 (0) | 2018.06.06 |
---|---|
(미사코코)성격리버스-20(완결) (0) | 2018.06.05 |
(미사코코)안식처에서 마주잡은손-5(완결) (2) | 2018.06.02 |
(미사코코)성격리버스-18 (0) | 2018.06.01 |
(미사코코)성격리버스-17 (0) | 2018.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