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사람에게 주거라.
그 말을 벨레스는 마음 한켠에 새기듯 간직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흘린 눈물과 함께 쓴 독약같이 가슴을 할퀴던 기억은 추스리고 나면 벨레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깨달으면 자신은 언제나 지켜지고 있었다. 강한 무력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벨레스가 무슨 일을 해도 같은편에 서 줄 보호자였다.
벨레스는 할 수 있다면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 일까..하고 생각하면 언제나 에델가르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상처가 많은 아이였고 비밀도 그만큼 많았다. 손이 많이가는 아이만큼 애정도 많이 주게 된다고 했던가.
벨레스에게 에델가르트는 언제나 제일 신경쓰이고 지켜주고 싶고 저가 다치더라도 구하고 싶었던 존재였다. 무력이, 목숨이 유일한 재산인 용병에게 그건 무엇보다도 가치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주었다. 특별한 다른 의도가 있는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에델가르트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버지가 소중한 사람에게 주라고 했으니까.
기사가 레이디에게 검을 받치듯 벨레스도 에델가르트에게 반지를 준 것이다. 무언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눈치채면 벨레스는 제국의 황후가 되어서 에델가르트와 매일 침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엘....."
"응? 선생님, 오늘도 좋은 아침이네. 후후..선생님의 자는 얼굴도 무척 귀여웠어."
심지어 매일같이 침대에서 귀여움 받는 처지였다. 그런데에 관심이라고는 한톨도 없던데다가 용병들이 저급한 농담이라도 하려고 하면 호통을 치던 아버지 곁에서 자란 벨레스는 용병이면서도 그러한 지식은 제자들 이하였다.
아무래도 가족이라곤 아버지 뿐이고 동료들은 남자들뿐이니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반면 황제인 에델가르트는 황족이니 그러한 교육정도는 받았겠지.
그런 아무 의미없는 사실들을 머릿속에 늘어놓아봐도 달라지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벨레스는 분명 앞길이 창창한 제자의 미래를 가로막아버렸고 의도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황제의 중요한 정치패를 의미도 없는곳에 허투르게 쓰게 만들어버렸다.
전쟁영웅으로써의 가치는 있지만 어차피 벨레스는 어떤 위치에서라도 지키기로 마음먹은 소중한 에델가르트의 곁에 있었을 것이다. 이런 중요한 자리가 아닌 그저 용병으로 고용되었어도.
이것은 중대한 손실이다. 에델가르트는 좀 더 좋은 선택지가 많았고 적어도...적어도 자신은 아니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선생님? 평소라면 벌써 일어나 아침훈련 갈 준비를 했을텐데. ..혹시, 내가 너무 무리하게 했던건.."
걱정과 염려가 담긴 목소리에 애교섞인 응석부리는 표정. 이만큼이나 많은것을 줄 필요는 없는데. 에델가르트는 너무나도 자신의 가치를 모른다. 벨레스는 혼인 후 몇번이나 깨달은 사실을 다시금 되새긴다.
"피곤하다면 오늘은 쉬어. 모두 선생님이 무리하길 바라지 않으니까..그래! 오늘 도로테아가 방문하기로 했는데 다과회를 하는건 어때?"
"도로테아.. 알겠다."
"오랜만에 만나는거니까 도로테아도 기뻐할거야. 사실은 다른 사람들도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만.."
나도 바빠서 자주 못하는데....
..? 에델가르트가 작은 소리로 무언가 속삭인걸 벨레스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곤 넘겨버렸다. 중요한 일을 에델가르트는 절대로 얼버무리지 않는다. 저가 알아야 할 일이라면 다시금 말해주겠지.
"어쨋든. 도로테아가 올때까지 선생님은 절대 휴식. 집무실까지 바래다주는것도 오늘은 금지."
"그것 정도는...."
"안돼. 밤에는 기운차렸으면 좋겠네. 그럼."
쪽. 가볍게 립음을 울리는 키스를 하곤 에델가르트는 방을 떠났다. 전쟁이 끝나고 후처리도 대충 일단락 되어서 여유를 찾은 에델가르트는 한층 매력적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도 미소를 자주 머금고 그 눈은 항상 다정하게 반짝였다. 입에 담는 말들은 달콤하게 벨레스의 심장을 저리게 만들었다. 부드러운 손길은 마음을 푹 놓은 강아지처럼 벨레스를 손쉽게 녹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이런 어디서 굴러먹다 온건지도 모르는 용병출신의 가진게 없는 벨레스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엘이라면...좀 더.. 다정하고 능력있는 나보다 어울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텐데..하아...음?"
아무리 에델가르트가 쉬라고 했더라도 어디 아픈것이 아닌데 가만히 휴식을 취하는것은 열심히 일하는 제자들을 생각해서라도 할 수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서던 벨레스는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편지지 같은 것을 발견했다.
중요한 편지인걸까? 에델가르트는 일을 사적인 공간에 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둘만의 밀월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했던가..아마도 공적인 일에 감정적 사유가 섞이는걸 차단하는것일까.
주워들은 편지지에는 벨레스도 알고 있을 정도의 명문 귀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전쟁때 지원물자를 보낸이들의 명단에 있었기 때문이다.
"..청혼... "
예상했던 일이었다. 먼저 납득이 갔다. 그리고 갑자기 심장이 돌연 사라진것 같은.. 가슴에 공동이 생긴것 같은 기아감이 찾아왔다. 뱃속 내장이 끌려가는것처럼 속이 뒤집어졌다.
에델가르트가 맞았다. 아무래도 자신은 아픈것 같았다. 확인하지 않아서 몰랐을 뿐 타인이 보기에 안색이 좋지 않을지도 모르지. 미안하지만 도로테아에게는 아파서 만날 수 없다고 시종을 통해 전하곤 벨레스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
.
선생님이 이상해. 그 말로 서두를 꺼낸 에델가르트는 고개를 푹 숙인채로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침체함에 마시던 달달한 베리티가 쓸 지경이었다. 언제봐도 덤덤한 선생님이 이상하면 대체 어떻게 이상하단건지 저라도 선생님은 소중하니까 자세히 알려줬으면 싶다.
"어떻게 이상하신데? 하루에 6끼 이상 드셨다면 최대 10끼도 드시니까 별 일 아니잖아."
"입맛이 없다고 어제 아무것도 안먹었데. 겨우겨우 데운 우유 몇모금 마셨다던가.. 요 며칠새에 요리장이 몇번이나 울며 매달렸어."
"그건...정말 이상하네."
평소의 대식이라도 이상하지만 이건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질량보존의 법칙은 어디에 갔는가 의견이 분분했던 선생님의 위장에 대한 미스터리는 결국 높은 신진대사와 엄청난 운동량이 이유가 아닌가 하는 다소 부실한 결론으로 종결했었다.
그런데 우유 몇모금이라니... 입맛이 없는 수준을 넘어서서 그정도면 병이 있는게 아닌가 걱정을 할 수준이다.
"의사는? 혹시 위염이라거나... 아니면 소화기관 어딘가에 문제가 생겼다던가...."
"빈혈끼가 있다는것 외에는 건강하다고 했어. 그것도 잘먹으면 나을거라고..."
그런데도 안먹었다는건 큰 문제였다. 긴 용병생활로 컨디션 관리는 벨레스의 일상이었다. 의사의 처방을 듣고도 안된다면 그건 하지 않는게 아니라 못하고 있는것이다.
"그 외에는? 뭔가.. 이유라도."
"그걸 알면 고민하지 않지.. 심지어 나랑 마주치면 피하고 잘때도 다른 방으로 가.. 혼인하고 한번도 가본적 없는 황후궁은 대체 누가 알려준걸까.."
으득 이를 가는 소리는 착각일거라고 도로테아는 애써 무시했다.
"알겠어. 떠나기 전에 한번쯤 선생님 뵙고 싶었는데 그 김에 캐내볼게. 가끔 보는 제자에게 더 털어놓기 쉬운 일도 있겠지."
"고마워.. 되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야기 해 줄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안먹고 검만 휘두르다니 쓰러지면 어떻게 하지 걱정되서 서류도 눈에 안들어와서.."
"아.. 그거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에델짱 입에서 이런 연애이야기가 나오다니 그 시절엔 꿈도 못꿨는데."
울적한 기분을 돌리는데에 연인과의 행복한 이야기만큼 특효약은 없지. 그것이 고난과 역경을 해쳐나가 쟁취한 사랑이면 더욱 더.
삶은 극의 연속이고 연애는 그중에서도 대중에게 가장 인기있는 상영물이다. 신을 대적한 황제와 그를 지지한 반려인 용병출신 영웅은 백성들에게 특히나 인기였다.
에델가르트의 자랑하고픈 마음도 채워지고 한창 인기인 가극의 재현도도 높일겸 도로테아는 에델가르트를 부추겼다.
"흥미롭다고 해도.. 매일 같이 자고 일어날 뿐이야. ...뭐, 할건 하는데. 여느 부부랑 비슷해."
"오...그 선생님이 말이지... 하나도 모르는걸까, 이정돈 아무것도 아닌걸까 궁금했는데 아무래도 아무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네."
"...그 이야기 자세히 해볼래?"
살벌한 눈으로 쳐다보는 에델가르트는 그 어느때보다 무서웠다고 후에 도로테아는 친구들에게 토로했다.
.
.
잠시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심장이 찢어질듯 아파왔다. 병이 아닌가 의사의 진단을 받았지만 약간의 빈혈이라는 결과 뿐. 그렇다면 도대체 이 아픔은 어디로부터 왔는지 벨레스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전쟁에서 신체 일부를 잃은 병사들은 가끔 없는 기관의 아픔을 느낀다고 했다. 어쩌면 나는 다시 심장을 잃었나? 하지만 가슴에 손바닥을 올리면 쿵쿵 뛰어대는 고동이 느껴졌다.
벨레스는 아프지 않았다. 적어도 어딘가 다치지는 않았다. 아직도 미스테리인 스스로의 몸은 설계도 없이 기술이 사라져버린 오파츠와 같았다. 갑자기 어딘가 이상이 와도 올게 왔구나 싶을 것이다.
"선생님, 훈련 언제 끝나요? 귀여운 제자가 찾아왔는데 잠깐 쉬는건 어때요?"
"도로테아.."
그렇다면 떠나야겠지. 제자의 눈에 스승의 죽음만큼은 보여주지 않아야 했다. 어딘가 방랑하며 살아있을거라고 생각하는편이 좋다는걸 전쟁때 배웠다. 그래야 뒤를 돌아보느라 발이 묶이지 않는다.
죽음은 무게없는 족쇄다. 많이 접할수록 안보이는 무게에 짖눌리게 된다.
자신에게도 백성에게도 강한 책임감을 가지는 에델가르트는 이 죽음 또한 짊어질것이다. 벨레스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에델가르트는 좀 더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
"선생님..안색이 안좋아요. 요새 식사도 잘 안한다던데. 혹시 호화로운 황궁의 요리는 입에 안맞았어요?"
"사관학교의 식사도 황궁의 식사도 전부 맛있었어. 물과 육포뿐으로 며칠을 보낼때도 적지 않았으니까 음식은 가리지 않는다."
"흐음.."
"다만.. 입맛이 없을 뿐이야. 걱정 할 필요 없어. 쓰러지지 않을 정도는 챙기고 있으니까."
말 그대로 쓰러지지 않을 정도라는게 문제였지만 도로테아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억지로 캐내려든다면 이 사람은 입을 굳건하게 닫아버릴지도 몰랐다. 원래부터 원체 말이 적은편이니까.
"건강상 문제도 없다던데요. 3끼 챙기다가 1끼만 먹어도 걱정되는데 5~6끼가 기본인 선생님이 우유 몇모금만 마시기도 한다니까 걱정되어서.."
"...엘이 그렇게 말했나?"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었으므로 도로테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 선생님같은 경우 유도심문보다 솔직하게 호소하는게 효과가 좋았다. 이리 무덤한 표정인데 걱정도 많고 애정도 많았다.
"맞아요. 에델짱이 누구한테 의지 할 정도면 이미 엄청 고민했겠죠."
"...별로, 숨기려던건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겐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휴베르트라거나, 너에게. 요즘 나는 이상할지도 모른다. 혹시 이제서야 후유증이 나타난걸지도 모르지."
"후유증이라면.."
갑자기 돌연 화제의 무게가 변하는건 벨레스와의 회화에서 흔한 일이었다. 본인 일이든 상대 일이든.. 대화 중 갑자기 자신의 비밀을 아무렇지 않게 말해버리기도 하니까.
이번은 바라던바여서 도로테아는 놀라지 않았다. 이제서야 본론이나 마찬가지니까.
"심장의 박동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가슴 속이 텅 빈것처럼 고통이 느껴진다. 어째선지 엘을 보면 더욱 더.. 내장이 끌어 내려지는것 같고 가끔은 이유없이 울적해져."
"어....음..? 그, 언제부터..그러는데요? 계기라던가."
"계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프기 시작한건 침대 위 협탁에서 엘에게 온 편지를 발견했을때부터일까? 귀족 자제의 청혼서였다. 엘은 결코 공적인 일을 침실에 가져오진 않으니 신경쓰인 상대였겠지."
"그렇구나....아하, 하하하! 선생님은 가끔 엉뚱하다니까요.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정신없이 웃는 도로테아를 앞에 두고도 벨레스는 시종일관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런 문제에 익숙한 도로테아라면 벨레스가 떠나도 벨레스가 설명하는것 이상으로 에델가르트에게 잘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군대의 지휘에는 적절한 전력 배분도 중요했다. 벨레스의 눈에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어보였다.
"사실은.. 이건 좋은기회가 아닌가 싶어. 원래부터 내가 이런 자리에 있는건 좋지 않았다. 귀족들의 반발은 제국이 빨리 안정되어야 하는 지금 최대한 줄여야 하는데 평민출신의 그것도 용병이 황후라는 자리에 앉지는 말아야 했어."
"..선생님..?"
"전쟁영웅이라는 직함이 필요하다면 혼인이 아니더라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이용해도 좋았다. 제자의 앞길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그런데 나는..오히려 엘의 미래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리고 말았어.."
입을 떡하니 벌리고 눈을 크게 뜬 모습은 평소의 도로테아라면 절대 하지 않을 표정이지만 울적하고 괴로운 벨레스는 알아채지 못했다.난생 처음 휘둘리는 감정에 날카롭게 갈아진 감각조차 갈피를 못잡은 탓이다.
"이런게 아니라도 엘은 다정하고 듬직하고 신념에 굳건한데다가 유능하다. 더 좋은 기회를 쟁취해야해. 엘은.. 아직 어렸어서 잘 몰랐던거야. 선생이 제자를 지키는건 당연한 일인데. 그것에 빚을 느낀거야."
"선생님... 할말은 많은데....많지만, 내가 해야 할 말은 아닌지도. ..그러면 선생님은? 선생님은 어때요? 에델짱을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한숨을 푹 쉬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는 도로테아를 보고 벨레스는 도로테아도 이해했구나 싶어 씁쓸해졌다. 그와중에도 선생님을 걱정해주다니 벨레스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제자복이 많았다.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언제든 가장 먼저 생각나고 목숨을 바쳐 지켜도 좋다고 생각해. 행복해졌으면 좋겠고,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줄 수 있어."
"그렇구나...그래. 그거면 됐죠.."
"하지만 역시 혼인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게.."
"거기서부터! 거기서부터 어긋난거였어?! 할거 다했는데 어째서! 에델짱의 자랑을 베리티 두 주전자가 빌 때까지 교제한 나에게 사과해요!"
원래부터 감정에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던 선생님이었지만 설마 사랑도 처음이었던걸까. 하나도 모르는거였다니 반전에 반전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태로 행복절정인 우리의 황제폐하에게 지금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로테아는 머리가 아파질 지경이었다. 이래서는 애랑 연애를 뛰어넘어 혼인해버린 격인데 문제는 어떻게 봐도 상사상애였다.
'좋아. 에델짱 모르게 해결해버리자. 이런건 당사자가 깨닫는게 제일이지만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가극이 인기를 탄건 눈 앞에서 실제로 일어난 전설에 버금가는 활약에 매료 된것도 있겠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이 황제와 황후의 행복한 연애 이야기를 듣고 제국의 상징과도 같은 황실이 굳건하다는걸 느끼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흐뭇하게 지켜보던 황제와 황후가 갑자기 내외한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불안만 가중되겠지. 패왕과 그 날개가 갈라서면 제국이 어찌될까 걱정하는건 당연한 일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제가 선생님을 가르쳐야 할 것 같네요. 선생님은..사랑을 뭐라고 생각해요?"
"사랑..? 나는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일지를 생각해보자면 그 사람 밖에 안보이고 무엇보다 소중하고 아끼는 마음이 아닐까. 다른 사람이 된것처럼 바뀌기도 하고.. 곁에 있는것만으로 행복한.."
소티스는 질려했지만 벨레스는 제랄트의 일지를 읽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벨레스는 행복한 두명의 사랑 속에 태어난 아이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잃은 어머니이지만 그것만으로 벨레스는 안심할 수 있었다.
"어머, 잘알고계시는데 왜 몰라요? 선생님은 에델이 목숨보다 중요하고 같이 있으면 저절로 미소지을 정도로 행복하잖아요. 그건 같은게 아닌가?"
"다르다. 나는 엘의 선생님이야. 연장자로써 엘을 지키는건 당연하고 사랑스러운 제자를 보면 미소짓게 되는건 흔한 일이 아닌가."
"연장자..연장자 말이죠. 그것부터 알려줘야 한다니... 선생님은 분명 우리보다 연상이지만 5년동안 잠든 사이에 우리들은 자랐어요. 어쩌면 선생님보다도 더."
그리 충격적인 일을 지적한것도 아니것만 벨레스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원래부터도 이례적이라는 취급을 받을 정도인 어린 선생님이었던 벨레스는 그때부터도 학생들과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별로 변하지 않는 굳은 표정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휘둘리지 못하는 선생님은 어른스러워 보였을 뿐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흑수리반 뿐 아니라 다른 반까지 합해서 부모님을 잃었다고 무릎을 끌어안고 훌쩍이는 아이는 그다지 없었던 것이다.
"전쟁 때문에 졸업식은 못했지만 모두 한참 전 어른이 됐어요. 에델짱도 물론 어른이고요. 마냥 지켜줘야 하는 존재는 아니라는건 알죠? 세상에..제국의 누구에게 물어도 에델짱이 누구에게 지켜져야 할 사람이라고 안할걸요."
전장 선두에서 중갑을 입고 도끼를 휘두르는 홍염의 여제를 보고 무서워 할지언정 벨레스만큼 감싸안으려고 하지 않을것이다. 뭐 그런 부분에 에델가르트는 매료됐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나는 엘을 사랑하는걸지도 모른다."
"모른다가 아니라 제 주위 러브레터 남발하고 꽃다발 뿌리는 가벼운 남자들이랑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선생님이 제일 진중한 사랑을 하고 계시거든요."
"..하지만 엘은 아닐수도 있잖아. 선생님에게 향하는 친애의 정을 착각하는걸수도 있고 전쟁 중 곁을 지키던 사람에게 주는 신뢰일 수 있어."
사랑을 하면 겁쟁이가 된다고 했던가. 자각하고선 더 불안에 떠는 벨레스를 보며 간신히 한꺼풀 벗겨냈다고 히죽 웃은 도로테아가 턱을 괴며 벨레스를 바라봤다.
"선생님은 무엇이든 마음먹으면 해내는데 그래도 역시 사람의 마음은 모르네요. 이상한 사람이라고, 혹시 사람은 아닌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어요."
"나는..그때는 정말 사람이 아닌 존재였을지도 모르지만, 엘이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줬어."
"후후..누구나 하는 고민을 선생님도 한다니 신기해요. 제가 더 할 수 있는 조언은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상대에게 키스하고 행복해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키스를 하는 에델가르트는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눈을 감아달라는 부탁을 들은 후 벨레스는 충실히 에델가르트가 알려준데로 키스를 할때는 눈을 감았다. 궁중예절에 서먹한 벨레스는 무엇이든 배우면 실천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숨이 벅찰 쯤이면 에델가르트는 훅 초를 불어 껐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에델가르트의 뒤로 쏟아지는 월광이 그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벨레스는 입술의 부드러움과 뜨거운 손길에 농락당한채 의식이 혼미해져 잠들때까지 그 품을 벗어난 적이 없고 에델가르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확인 한 적이 없다.
훌륭한 장군은 일개 병사의 푸념도 충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심지어 도로테아는 이 분야에서 뛰어난 대선배였고 믿을 수 있는 제자였다. 예의를 지키다가 적에게 지는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겠지. 벨레스는 오늘밤 오랜만에 부부의 침실을 이용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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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더미같은 서류와 격투하고 침실의 문을 여는 에델가르트는 오늘도 싸늘하게 빈 침실과 마주하게 될 것을 슬퍼했다. 혹시 뭔가 잘못한게 있나? 내가 너무 많이 요구했던걸까? 기분이 좋지 않았을까? 어쩌면 의사가 아닌 한네만이나 린하르트에게 맡겨야 했을지도 몰라.
도로테아는 떠나기 전 선생님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며칠째 계속된 외로운 밤이 황제의 뿔을 심리적으로 꺾기 직전이었다. 에델가르트는 내일이라도 당장 스승의 앞에 무릎꿇고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데 빌고싶은 기분이었다.
"선생님?!"
"엘, 오늘도 일이 늦게 끝났나보네. 제국을 위해서 열심히라는건 알지만 네 건강이 더 중요하다는걸 알아줘."
벨레스가 소파에 앉아 책에 가죽으로 된 심플한 책갈피를 끼워 덮고는 붉은테의 안경을 그 책 표지 위에 살포시 올려두곤 일어서 다가왔다. 에델가르트는 기쁘고 벅찬 마음으로 오랜만의 황후의 포옹을 만끽하기로 했다. 도로테아가 옳았다. 무슨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선생님에겐 아무 문제가 없게 되었다.
행복을 만끽하느라 방심했던걸지도 모른다 역전의 용병인 벨레스는 눈 깜짝 할 사이에 에델가르트를 안아들고는 폭신한 침대 시트에 가라앉게 만들었다. 아직 무거운 예복을 벗지 않은 에델가르트의 무게가 그 몸을 깊숙히 파묻히게 만들고 순식간에 벨레스가 위에서 내리누르고 있었다.
황궁에서 유일하게 에델가르트를 정공법으로 제압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황후인 벨레스일것이다. 벨레스의 무게는 평소 에델가르트라면 한손으로도 들 수 있겠지만 큰 움직임을 할 수 없도록 정확히 관절부위를 누르고 있어서 꼼짝도 할 수 없다.
"선..생님..?"
"걱정마라, 엘. 네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을거야. 그냥 오늘은 네 얼굴이 보고 싶어."
"그거라면 굳이 이렇게 움직이지 못하게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지긋히 내려보는 벨레스의 시선에 열이 느껴졌다. 차라리 밧줄로 묶는다던가 하는 방법을 썼으면 억지로 끊어냈을텐데 벨레스가 다칠까봐 에델가르트는 반항 할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꿀꺽, 에델가르트는 드디어 이날이 온것인가 기대 할 수 밖에 없었다. 국혼을 치른 후 아무것도 모르던 선생님을 자신의 색으로 마음껏 물들이고도 에델가르트는 만족하지 않았다. 벨레스가 돌려줄 겨를도 없이 지쳐 무너질때까지 요구해버렸다. 이 사람이 내것이라는 정복욕에 흉포해지는 표정을 숨기려고 불까지 꺼버렸다.
벨레스는 에델가르트가 원하는대로 전부 주었다. 피가 날 정도로 이빨자국을 남겨도 조금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정도였고 밤새 재우지 않아도 에델가르트의 내일의 일정을 걱정했다. 두명 다 평범치 않은 체력을 가지고 있으니 날이 갈수록 더하면 더했지 쉬어가질 않았다.
아무리 새하얀 도화지 같던 벨레스라도 이렇게 농밀한 밀월에 푹 잠겼다면 더이상 모르는채로 있을 수 없겠지. 무표정에 숨겨져있던 벨레스의 전투광적인 면을 검술 뿐 아니라 다른곳에서도 보길 바래왔다. 에델가르트는 전쟁이 끝나도 여전히 벨레스의 명령에 따라 전장을 가로지르던 안심감을 잊지 않았다.
"사랑한다, 엘.."
"서, 선생님..!"
얼굴 이곳저곳에 내려앉는 버드키스. 깊은 감정을 박아넣도록 파고들어오는 뜨거운 혀. 달콤한 숨결이 안중은 간지럽힌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오는 감촉이 감미롭다. 소중하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오늘 처음 들었다. 에델가르트는 얼굴부터 귀 끝까지 새빨개졌다. 행복에 겨워 눈물이 그렁거릴 정도였다.
사실 에델가르트라고 벨레스가 사랑에 대해 잘모른다는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봐왔던 에델가르트야말로 이 사람이 감정에 아주 어리숙하단 것을 제일 잘 알고 있을것이다.
단지 아버지의 말을 따랐을 뿐인 반지에 재빨리 족쇄의 기능을 덧붙여버린것은 절대로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했기 때문이다. 벨레스는 책임감이 강했고 제자들에게 약했다. 일단 둘러싸버리면 떠나지 못할것을 알았다.
시간을 들여 애정을 보이면 언젠가는 알아주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오늘이라니. 이보다 더 행복 할 수가 없었다. 딱 벨레스가 눈물을 방울 방울 떨어뜨리기 전까지는.
벨레스는 눈물을 닦으려고 노력하면서 에델가르트의 위에서 비켜섰다. 제랄트를 잃은 날 만큼이나 흐르는 눈물을 다 닦을 수는 없었으나 덕분에 에델가르트는 구속에서 풀려나 떨리는 벨레스의 어깨를 감싸 안을 수 있었다.
"선생님, 무슨 일이야?! 왜그래? 역시 병이.."
"미안하다, 에델가르트.. 네가 억지로 하고 있는 줄 몰랐어. 울정도로 싫었는데 내가 반지를 준 바람에.. 괜찮아. 네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해도 난 곁에 있을거야. 지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라."
"하아..? ..선생님. 처음부터 말해봐."
벨레스의 말 전부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에델가르트는 단숨에 냉철해졌다. 방금까지 부글거리던 열이 식어서 사라졌다. 홍염의 황제에 걸맞은 불길같은 열망도 반려의 눈물 앞에서는 맥을 못추린다.
벨레스를 차분하게 만들기 위해 준비한 베르가모트티의 향기가 침실을 가득 채울때쯤에서야 반려가 조감씩 말문을 텄다. 모든것을 들을때쯤엔 에델가르트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양손에 푹 얼굴을 파묻을 수 밖에 없었다. 아직도 벗지 않은 붉은 건틀릿이 금속의 차가운 기운으로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주었다.
에델가르트는 분통이 터져 이 모든 일의 발단은 아니지만 악화 일로를 걷게 한 멍청한 귀족 자제에게 마땅한 처분을 내릴것을 속으로 맹세했다. 이 과정에는 자신의 충실한 신하 휴베르트 폰 베스트라가 함께 할 것이다.
"선생님, 우선 난 절대 싫어한 적 없어. 오히려...그...좋아하는편이지. 바쁘지만 않았다면 하루종일 침대에서 단 둘이 보내고 싶을 정도야."
"단것을 먹으면서 빈둥거리자던 약속은 잊지 않았다."
"그래, 그것도 함께. ..그리고 그 편지는. 그 전날 저녁 문틈에 끼어있었어. 감히 황제의 침실 문에 검수를 하지 않은 편지를 끼워넣다니.. 세작이 숨어있을지도 모르니까 휴베르트에게 전해 줄 생각이었지. 밤을 보내는 동안 무심코 잊었지만.."
불찰이었다고 말하는 에델가르트는 붉은 얼굴을 숨길 수 없었다. 제국의 중대사를 황후와 사랑을 나누는데 열중해서 잊어버리다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럼...엘, 너도 날 사랑해..?"
축 늘어진 눈썹의 강아지 같은 눈을 한 벨레스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쳐다보는것을 본 에델가르트는 날라가려는 이성의 고삐를 있는 힘껏 잡아챘다. 곧 필요없어지겠지만 지금만큼은 앞으로를 위해 꽉 잡아둬야했다.
"선생님이 날 선택했을때부터, 아니 혹시 그보다 전부터.. 난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 앞에만 서면 나는 무너져.. 당신만큼은 내 적이 아니길 바랬어.. 당신과 같은 길을 걷고 싶었어.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난 앞으로도 평생 사랑 할 일이 없을거야."
"엘...나도 그저 이 감정의 이름을 몰랐을 뿐인것 같다. 심장이 뛰기 전부터 눈치채지 못했을 뿐 내가 처음으로 스스로 선택했을때부터 난 널 이미 사랑했을지도 몰라."
활짝 웃는 얼굴에는 이제 확신에 찬 사랑의 감정이 담겨있었다. 어설픈 한걸음이지만 그러니까야말로 첫사랑인걸지도 모른다. 이내 에델가르트는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을 풀어해쳤다. 하여튼 아머로드인 에델가르트에게 기마술은 전혀 필요가 없었고 단련되어있지 않은것이다. 제자의 부족함은 선생님이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
에델가르트는 자신이 얼마나 절망적일 정도로 사랑에 굴러떨어졌는지 당사자에게 직접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 오늘은 촛불을 끄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