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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3.11.06 인외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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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1.02.04 ...
  5. 2020.12.30 개와 사랑하는법
  6. 2020.12.27 늑대와 친해지는법
  7. 2020.12.25 첫사랑
  8. 2020.11.25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9. 2020.08.06 (야치이로)Winning bet
  10. 2020.07.25 [야치이로] 너로부터 시작된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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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외완성

2023. 11. 6.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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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2. 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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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사랑하는법

사라졌던 벨레스가 돌아오고 5년동안 지지부진했던 전황도 순풍이 불었다. 오랜 전쟁에 지쳐가던 병사들도 활기를 띄었고 흑수리 유격대의 구성원들도 존경하던 선생님이 돌아온 일상을 즐기게 되었다.

에델가르트 또한 순조로운 전황과 함께 잊고있던것을 떠올렸다. 그렇다 그날, 에델가르트는 벨레스를 사랑한다는걸 깨달았다. 벨레스가 돌아와주었음을 실감하느라 뒤늦게 알아챘지만 빼앗긴 심장은 5년새에 더 뛰었으면 뛰었지 진정하질 않았다.

지금 당장은 전쟁중이니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벨레스는 곁에 있을것이다. 하지만 모든게 끝나면? 늑대는 언제든 야생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다. 벨레스는 뛰어난 용병이자 유능한 선생님이다. 어딜 가든 그만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을까.. 같은 길을 걷는것만으로 행복했지만 이대로면 언젠가는 끝이 난다.

"휴베르트, 책을 좀 찾아왔으면 하는데."

"빠른시일 내에 준비하도록 하지요. 부탁하실 책의 제목이..?"

"그렇네...개에게 사랑받는법일까.."

"호오.. 번견을 키우실 계획이십니까? 알겠습니다."

여전히 인간에게 이런것을 적용시켜도 과연 선생님의 인권적으로 괜찮은것일까 하는 고민은 멈추지 않았지만 효과는 결과로써 증명되었다.

5년전보다 황제로써 냉혹해진것을 자랑하는 에델가르트는 어떤 수단이라도 원하는바를 쟁취하기에 망설이지 않을것이다. 그것이 선생님을 강아지와 같이 취급하는것이라도!

에델가르트는 선생님에게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 되길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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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같이 산책하기

에델가르트는 사관학교시절 황제의 후계자로써의 가면을 쓸 필요가 없는 혼자 산책하는 시간을 즐기고는 하였다. 악몽으로 잠 못이루는 밤이나 르미르마을, 제랄트에게 일어난 일들이 마음을 괴롭힐때 그녀는 하늘에서 비추는 달빛만이 동무인 시간을 즐겼다.

악몽을 꾼다는걸 벨레스에게 들키고 나서는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었다. 벨레스는 말수가 적고 거의 듣는편이기는 했지만 그런 침묵이 에델가르트에게는 더욱 마음이 편했다.

전쟁이 시작한 이후로는 바쁘기도 했지만 안전을 위해서도 에델가르트는 혼자 산책을 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한밤중에 황제가 길을 걷다가 암살자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 산책에 동행해줄 수 있을까? 혼자라면 휴베르트가 반대하지만 선생님이 함께라면 묵인할거야."

"잠이 오지 않는건가? 좋다."

벨레스는 다음 출전을 위해 전략을 검토중이였는지 양피지 위를 유영하던 깃펜을 정리하고는 의자에 걸쳐있던 외투를 입었다. 신뢰관계로 단단히 엮여진 사이를 증명하듯 긴 말은 필요가 없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허리춤에 검을 매면 더이상 준비할것도 없다는듯 에델가르트의 근처에 다가섰다. 얼굴에는 미미한 웃음기가 묻어있었고 그러한 모습이 부드러운 솜털처럼 에델가르트의 심장을 간질였다.

이렇게 호의를 가감없이 보여줄때마다 에델가르트는 사실 꿈을 꾸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그 기분을 반영하듯 돌로 된 길을 걷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세상에 두명뿐인것 같았다.

"그러고보면 자주 산책을 하던 너와 마주치곤 했지. 처음에는 밤에 돌아다니는 수상한자인가 싶어 검을 뽑을 뻔 했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어서 몰랐지만 놀랐었구나.. 사실, 혼자서 산책하는게 취미야. 언제 어디서든 시선이 집중하니까.. 이럴때가 아니면 늘 여러가지를 신경써야했어."

우뚝 벨레스가 멈춰서선 에델가르트를 내려봤다. 달빛이 비추는 그 얼굴은 염려와 불안을 담고 있었다.

"무리하고 있는건 아닌가?"

5년이 지났어도 벨레스는 에델가르트의 선생님이었다. 따스한 걱정이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것 같았다.

황제는 무리 할 수 밖에 없는 위치이다. 전쟁을 일으킨 황제라면 더더욱.. 제국민을 책임져야 했고 지금은 포드라 전체의 미래를 책임져야 했다. 아마도 전쟁이 끝나도 에델가르트는 무리하는걸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리고 내가 바랬던 일들이니까. 후회하지 않아."

"에델가르트, 너는 뛰어난 학생이었지만 가끔 너무 먼 곳을 내다보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 할 때가 있지. 너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벨레스를 따라 흑수리반의 학생들은 에델가르트의 진영으로 왔고, 그곳에서 진정한 동료가 되었다. 그들은 문장과 신분제도 철폐를 위해 싸우고 있었고 강력한 아군이자 이해자였다.

사실 그렇기에 에델가르트는 더욱 무서웠다. 그들의 신뢰를 배반하고 싶지 않았고 죽는걸 보고 싶지 않았다. 어떤 결과가 나타나도 그것은 전부 에델가르트가 치뤄야 할 대가였다. 사랑하는 스승과 친구들이 희생되지 않았으면 했다.

알고있다. 벨레스를 사랑해버린 이상 에델가르트는 공정성을 잃었다. 제국군 한명조차 소중한 목숨일텐데 더이상 같은 가치로 생각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선생님...하나 부탁해도 될까?"

"얼마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전투가 있을 때마다 악몽을 꿔. 가족들 뿐이 아니야.. 전쟁으로 죽은 적군도 아군도 괴로워하며 내탓이라 부르짖어. 틀린 결정을 내렸다고 책망해."

괴로움에 일그러진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에델가르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꿈에서 그들이 외치는 말들은 항상 에델가르트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말들이었다. 좀 더 나은 선택은 없었나? 평화로운 해결법은 없었나?

에델가르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상대가 싸우길 포기 할 정도로 압도적인 무력도 없었고 이단자에게 극렬하게 반응하는 존재를 설득할 재간도 없었다.

"그런 날에는 잘 수 없어서 밤이 샐 때까지 집무를 해. 하지만.. 선생님이랑 걸으면 마음이 편해져. 내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당신과 함께라면 할 수 있다고 느껴. 그러니까 전투 후에는 같이 산책을 해줄래?"

절대로 이뤄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선생님과의 길은 말하자면 기적이었다. 포기하고 있던 빛을 기치로 삼았을때 에델가르트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것 같은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에게도 반가운 제안이군. 에델가르트, 기쁘게 수행하겠다."

"반드시 지켜줘야해. 크게 다치거나 죽어서 명령불복종을 하지 않도록. 황제 명령이니까."

쿡쿡 가볍게 밤공기를 흔드는 벨레스의 웃음소리에 에델가르트는 휙 붉어진 뺨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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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둘만 아는 보디랭귀지 만들기

매서운 눈폭풍과 깎아지른 절벽, 거친 침엽수가 가린 시야로 파악하지 못한 퍼거스의 게릴라군은 친숙한 지형을 유리하게 이용해서 제국군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잘 훈련되고 유능한 지휘 아래에 있더라도 추위로 굳은 근육과 불안한 시야확보가 명백한 악조건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때 벨레스가 천제의 검을 하늘높이 치켜들고 문장의 힘으로 붉은 불꽃을 피웠다. 단숨에 적아군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침착하게 대열을 유지하라! 눈폭풍에 속아 흔들리지 마라! 적들은 소수이고 오랜 잠복에 지쳐있다!"

그때 에델가르트와 벨레스의 눈이 마주쳤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말수가 적은 선생님의 근처에서 더 잘 알고싶어서 항상 지켜봐왔다.

에델가르트는 붉은 건틀릿으로 싸인 팔을 쭉 내질렀다. 망토가 펄럭이며 동작을 크게 보이게끔 만들어주었다.

"전군 돌격! 아이스너 장군과 짐이 함께한다!"

"""우오오오오!!"""

아군에게 압도적으로 적은 손실을 내는 연전무패의 장군으로 유명한 벨레스는 이미 이름만으로 믿음을 주었다. 원래부터 그녀는 스스럼없는 태도로 가르그마크의 문지기에 이를때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어내는 재능이 있었다.

또한 여신에게 반역하는 제국의 황제란 존재만으로 제국군의 의욕을 고취시켰다. 위풍당당한 붉은 갑옷에 위엄에 가득찬 뿔. 그녀는 제국의 의사였고 위대한 통치자이다.

무엇보다 이 두명은 스스로의 몸을 사리지 않았다. 솔선수범 전장에 뛰어들어 적군을 흐트러뜨리는 모습은 마치 활개치는 흑수리. 제국군은 단숨에 냉정을 되찾았다. 우리에게 패배란 없다.

제대로 먹고 쉴 환경을 제공 받지 못한 퍼거스의 게릴라군은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지휘도 없이 애국심과 광신에 물든 비이성적인 공격이 통할리가 없었다.

"에델가르트, 멋대로 행동해서 미안하다. 그때는 군의 침착을 되찾는게 먼저라고 생각했어."

결과적으로 벨레스가 시선을 끌었던 행동은 그때당시 최선이었다. 적은 지휘계통을 노리느냐 가까운 군사를 노리느냐에 대해 망설임을 가졌고 아군은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에델가르트의 명령을 생각하면 이것은 명백한 배신이었다. 적군의 시선을 끌었다는 것은 벨레스가 다치거나 죽을 확률을 높인다. 시선이 마주쳤을때 벨레스는 말하고 있었다. '미안하다'고.

전부 알고서도 벨레스는 스스로를 위험에 몰아넣는 선택을 했다.

"당신도 참.. 선생님이 그런 사람이라서 나는 더욱 당신을 믿는거야. 내가 응석부려도 중요한곳에서 옳은 길을 선택할테니까."

일순간 분노에 차오르고 슬프지만 인정했다. 에델가르트가 사랑하는 선생님은 그녀의 꿈을 위해서라면 에델가르트가 바라는것도, 약속도 어길것이다.

하지만 벨레스를 사랑하고 그녀와 같은 길을 걷길 바라는 에델가르트는 냉혹한 황제의 모습을 벗어날 수 밖에 없었다. 벨레스가 바라는바를 알고도 적군이 바라는 최상의 목표가 어디있는지를 당당히 밝혔다. 퍼거스 게릴라군의 목적을 생각하면 일개장군보다 단연 제국의 황제의 목이 중요했다.

후에 휴베르트의 잔소리는 길고 길었지만 결국 그는 한숨을 푹 쉬고는 무의미한 황제에게로의 충언보다 벨레스에게 자신의 몸을 소중히하라 설득하기를 택했다. 황제의 충실한 심복으로써 휴베르트는 그녀가 바라는것을 이루기 위해 최대한 노력할 의무가 있었다.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하는건 대단한 일이지만...이런것에 익숙해지길 바라진 않았어.."

"미안하다..."

또, 또 저 강아지 눈이다. 에델가르트는 결국 선생님의 '미안하다'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원래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질 수 밖에 없는건 알았지만 솔직히 에델가르트는 좀 억울했다. 누구라도 벨레스의 그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보면 져줄 수 밖에 없을것이다. 적어도 도로테아는 동의해주겠지.

"선생님, 적어도 다음부터는 미리 신호를 보내. 막지 않을테지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정도는 가지고 싶거든."

"그렇군..알았다. 미리 사과하도록 하지."

볼품없는 내용이지만 둘만 아는 신호라는걸로 에델가르트는 만족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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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스킨쉽하기



반사적으로 에델가르트는 책을 덮었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적혀있지 않지만 개에 대한 책이니 쓰다듬는다던가 포옹하는 훈훈한 방법들이겠지. 하지만 지금 에델가르트가 떠올린것들은 도로테아가 알면 몇날몇칠을 놀려먹을 장면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벨레스는 완벽히 에델가르트의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실전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과 폭신해보이는 긴 머리카락, 포용력 있어보이는 품.. 축 늘어지면 뭐든 용서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귀여운 눈썹.. 물론 외모만으로 사랑하는건 아니지만 이유중 하나정도는 되었다.

스킨쉽...스킨쉽....에델가르트는 장담하건데 신체접촉을 좋아하지 않는편이다. 어릴때는 모르겠지만 지하감옥의 기억과 그 흔적들이 만들어낸 거부감은 꽁꽁 감싸맨 갑옷들로 나타났다.

"에델가르트, 내일의 전략에 대해서 의논할게 있다. 지금 시간 괜찮나?"

"앗, 선생님..!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벨레스는 가지고 온 지도를 책상위에 내려놓으며 힐끗 에델가르트가 옆에 둔 책을 바라봤다. 개에게 사랑받는법? 그녀가 알기로 에델가르트는 늘 방 앞에 뒹구는 흐레스벨가종 검은 고양이에게 먹이를 줄 정도로 고양이를 좋아했다.

하지만 개를 싫어한다는 기억도 없으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페르디난트는 귀족들은 취미로 사냥을 하기 위해 사냥견을 들이곤 한다고 했고 번견으로 사육하는 귀족과 부유층 상인도 많았다.

지금은 전쟁중이라 힘들겠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소소한 꿈도 도움이 되었다.

"무슨 개를 키우기로 했나? 직접 기른적은 없지만 나는 개를 꽤 좋아해서 수도원에서 자주 먹이를 주곤 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개가 잘 따르는편이야."

물론 에델가르트는 '제가 키우고 싶은 개는 당신입니다'라고 말 할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책을 집어다가 서랍에 쳐박아버릴 수 밖에 없었다. 다행인점은 벨레스가 매우 상식적이어서 그 책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떠올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글쎄, 대형견인건 확실하지만 구체적으론 정해진게 없어. 먹을걸 좋아하고 굉장히 똑똑한데다가 상냥한 성격인 정도?"

"흠.. 대형견은 대부분 너그러운 성격이지. 모호한 조건이구나. 그래, 내일 전략의 이 부분이.."

에델가르트가 이 주제에 대해서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걸 파악했는지 벨레스는 곧장 본론에 돌입했다. 유익하고 효과적인 대안을 마련해온 벨레스 덕분에 둘만의 회의는 활기를 띄었고 에델가르트는 몇가지 좋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5년이 지났지만 벨레스는 여전히 그녀의 선생님이었고 자신은 아직도 배울게 많은 학생이었다.

만족스런 시간을 보낸 후에 휴베르트가 가져온 간식과 함께 차를 즐기는 시간을 마련했다. 이미 흑수리 유격대 모두가 자신의 연정을 알고있다는 것은 에델가르트는 매우 부끄럽게 만들었으나 도움이 되고 있다는걸 부정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개에 대한것이지만.."

"끝난거 아니었어?"

에델가르트는 최대한 침착해 보이길 바라며 찻잔으로 떨리는 입가를 가렸다. 벨레스는 책임에 충실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뒤로 미뤘을 뿐인지 흥미진진해 보였다.

"이 이야기는 싫은가..? 개를 좋아한다는게 의외라서 흥미로웠지만.. 고양이 이야기가 더 좋다면 얼마전에 친해진 고양이에 대해서.."

"동물은 이제 그만 됐어.. 지금은 키울 시간도 없고 아마 전쟁이 끝나도 나는 바쁠테니까 키우지 않을거야."

"에델가르트 네가 바쁘다면 내가 돌봐도 되지 않나?"

지금 차를 마시는건 좋은 선택이 아닌것 같다고 생각한 에델가르트는 찻잔을 내려뒀다. 하마터면 사례가 들려 흉한 모습을 보일 뻔 했다. 벨레스는 그런 에델가르트를 봐도 달래줄것 같지만 이것은 황제의 체면에 대한 문제다.

"선생님은...전쟁이 끝나도 내 곁에 남아줄거야?"

"물론, 그럴 생각이었지만... 전쟁이 네 길의 끝은 아니고, 나와 같이 걷기를 바라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맞아.. 하지만 선생님은 혹시 책임감 때문에 남아있는걸지도 모르고.. 나는 이미 공식적인 학생도 아니고.. 원래 바라지 않았던 삶의 방식이었으니 용병으로 돌아갈거라고 생각했어."

에델가르트는 대사교와 같이 벨레스를 권위로 묶고 싶지 않았다. 곁에 있어주길 바라지만 그것이 벨레스 스스로의 의사로 이루어진 결과이길 바랬다.

정말 이걸로 괜찮은가, 자신이 전 학생이라서, 황제라서 선택한것은 아닌가. 상황이 그렇게 만든것은 아닌가, 벨레스가 전 선생님이라서, 레아가 실패작으로 칭하고 적대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은 끊임없이 에델가르트를 괴롭혀왔다. 무엇보다 벨레스는.. 에델가르트와 달리 다른 선택지가 많이 있었다.

숙여버린 황제의 위협적인 금빛 뿔이 달린 머리를 거친 손이 쓰다듬는다. 처음엔 서툴러서 도로테아가 불평 할 정도로 학생들의 머리칼을 헤쳐놓았던 손길도 지금은 적당한 힘으로 안심감을 불러일으킨다. 따스한 애정을 느끼게 했다.

에델가르트는 그 손을 꼭 잡아 손등에 키스했다. 당황해서 움찔 떨리는게 입술로 느껴졌다.

"고마워, 선생님. 당신이 내 곁에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거 같아. 확실히 천마의 뿔은 부족할지도.."

분명 벨레스는 키스의 의미같은건 모를거고 에델가르트는 알아도 문제가 없을 장소를 골랐다. 사랑하는 선생님을 존경한다는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동요한게 분명해 보이는 벨레스를 내심 기분좋게 여기며 에델가르트는 선생님을 산책으로 이끌었다. 아직 이 시간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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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에게 사람의 언어와 행동을 가르쳐주기

드디어 전쟁의 끝은 맞이했을때, 벨레스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비록 원래 박동이 없었다는걸 몰랐던 에델가르트는 도로테아는 알고 있었는데 자신은 들은적이 없었다는걸 분개했지만 이제와서 중요한것은 아니었다.

승리했지만 단연코 최악의 전투 환경이었기 때문에 사상자가 많았던 제국군은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 더 크게 웃고 더 떠들썩하게 그들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연회를 열었다. 배급 할 수 있는 것은 좀 더 많은 고기, 약간의 술 정도였지만 황제는 수도 앙바르에 도착하면 그들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축제를 약속하면서 제국군을 격려했다.

떠들고 마시는 병사들 사이로 도로테아가 장송곡 대신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가운데에 밝은 캠프파이어가 타오르자 너나 할것없이 춤추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춤추러 가지 않아?"

"지쳤다. 왜 다들 나와 춤추고 싶어하는지 모르겠어."

구석진곳에서 즐거워하는 학생들을 지켜보는 눈빛은 사뭇 따뜻하고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여신의 그릇 따위가 아닌 사람의 심장으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게 확실하고 더욱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그래, 예를들어 지금 바로 옆에 있는 에델가르트를 볼 때에 벨레스는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주위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건 아닐까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에델가르트에게도 들릴까? 벨레스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자신을 괴롭혔기 때문에 고민하길 그만두었다.

"선생님은 사관학교 시절부터 인기가 많았지. 후후, 조금 질투했어."

"질투?"

"..당신에게 언제나 내가 최고의 학생이길 바랬으니까."

벨레스는 갑자기 심장을 냉탕에 빠뜨린것처럼 열기가 식는것을 느꼈다. 그녀는 전 선생이었고 에델가르트는 벨레스를 그저 의지 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벨레스는 카스파르가 그녀의 격투술을 칭송할때도 페르디난트가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겠다고 호언장담 할 때도 충만함을 느꼈다. 그것은 결코 갈증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에델가르트, 나는 그날 이후로 좀 이상해진걸지도 모르겠다. 린하르트가 내 머리칼 색과 눈색, 심장 박동에 대해서 관심을 표했는데 지금이라도 진지하게 이야기 해봐야겠어."

"후유증이라도 있는 거야, 선생님?! 지금 당장이라도 의사를 부를게.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제국 최고의 의사들을 부를 수 있어."

"이건.. 아픈걸까? 그럴때도 있지만 아주 뜨겁고 둥실 떠오를때도 있어.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조금 아픈것 같군. 차갑고 시리게 찔리는것 같다."

"어디가? 큰 상처는 없어 보였는데.. 근육이 찢어졌거나 내출혈이라면 마누엘라가 봐줄거야. 알다싶이 뛰어난 백마법사니까 걱정 할 필요 없어."

에델가르트는 당황해서는 벨레스의 몸 이곳저곳을 손댔고 그 어디에도 눈에 띄는 부상이 없는걸 확인했다. 벨레스는 걱정이 가득한 황제를 보고 다시금 심장이 빠른 리듬을 고수하고 신체가 점점 풀려가는걸 느꼈다. 에델가르트는 언제나 그녀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벨레스는 에델가르트의 손을 잡고는 건틀릿을 벗기고 자신의 왼가슴 위에 두었다. 금색 장식이 비켜서면서 불만스레 짤랑 소리를 내었다. 에델가르트의 뺨이 장식의 흔들리는 분홍 술 만큼이나 달아올랐다.

"널 보면 심장 박동이 급격히 빨라져서 어지럽고 귀가 울리는것 같을 때가 있다. 간질간질 하기도 해. 화내는 모습을 보면 나까지도 끓어오르는것 같아. 그리고..네가 날 그저 선생님이라고 여긴다고 생각하니까.."

"생각하면?"

"모르겠다. 차가운 물 속에 던져진것 같고 혼자만 남은것 같아. 누군가 갑자기 내게서 널 빼앗아 갈 것 같아. 넌 결코 순순히 당할만큼 약하지 않은데. 이제는 내가 지킬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르는데."

캠프파이어가 불티를 날리고 대지는 화마에 삼켜진 부작용으로 열기를 머금고 있다. 북반구에 위치한 페르디아는 지금, 역사상 가장 뜨거운 온도를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벨레스는 혼자 늑대가 언제라도 공격해 올 수 있는 설원에 서 있는것 같았다. 지금 당장 연회에 뛰어들면 학생들은 벨레스에게 다가와서 같이 춤출것을 요구할것이고 병사들은 그들의 존경하는 지휘관에게 고기와 술을 얼마든지 나를텐데.

"선생님.. 그건 슬프다는 감정이야. 외롭다도 섞여 있고 어쩌면 질투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선생님에게 조금 이를까.."

"제랄트를 잃었을때랑은 달라. 눈물이 나왔는데 그때는 떨리지는 않았어. 무섭다? 에델가르트, 네가 날 선생님으로 여기는걸 나는 왜 두려워하지?"

에델가르트는 몹시 간지럽고 달콤한 이야기를 듣는다는듯 후훗 웃음을 흘리고 부드럽게 벨레스의 심장이 뛰는 부위를 쓰다듬으며 그 리듬을 즐겼다. 벨레스는 용광로 속 석탄이라도 되는 듯 열을 뿜으며 쿵쾅거리는 그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나쁘지는 않았다. 세상에 둘만이 남은것 같을때 전장에서라면 나쁜 소식이지만 안전이 보장되었을때 벨레스는 그 시간들을 소중히 여겼다.

"그건 선생님이 찾아야 하는 답이지만....당신이 빨리 깨닫기를 나도 바라니까 약간의 힌트를 줄게. 선생님으로는 영원히 황제의 가장 곁에 있을 수 없어. 선생님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거겠지, 안그래?"

"...."

"나는 어서 알아줬으면 좋겠지만.. 기다릴게. 천천히 알아도 좋아. 당신은 이미 나에게서 떠나지 않을거라고 알려줬으니까."

에델가르트는 이후 시무룩한 선생님의 손을 잡아 끌어 캠프파이어의 근처에서 춤을 췄다. 모두가 그들의 춤에 환호했고, 특히 흑수리 유격대는 선생님을 홀로 독점한 황제에게 놀림이 섞이 야유를 보냈다.

밤은 깊어졌고 그들은 승리에 만취해 미래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황제와 유능한 지휘관의 사랑에 대해서 속삭였다. 모두는 황제의 오랜 짝사랑을 응원하고 있었고 오직 벨레스만이 그 사실을 몰랐다.

차례차례 다음은 자신이라고 달려드는 제자들에게 지쳐 먼저 잠자리에 돌아갔을때 벨레스는 겉옷 주머니에서 짤랑 존재를 주장하는 아버지의 유품을 꺼내들었다.

"에델가르트.."

가장 소중한 사람. 벨레스의 머릿속에는 온통 에델가르트에 대한 것 밖에 남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었다. 하지만, 심장 박동이 벨레스를 인간으로 돌려놓은 것은 얼마 되지않았었고 지금에서야 엄청난 충격이 뒤이어 덮쳐왔다.

아아, 어떻게 모를수가 있었을까? 벨레스가 외롭고 무섭고 두려워하며 없는 상대에게 질투하는것은 전부 에델가르트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기 때문이었다.

벨레스는 그녀를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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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를 아기처럼 생각하지 않기.

에델가르트는 그동안 오래 신세진 책을 이제 그만 황궁의 도서관에 반납하기로 정했다. 이제 이런 책의 도움이 없어도 그녀는 자신이 벨레스에게 가장 사랑받고 있다는것을 어느정도 믿을 수 있었다.

여러차례 읽고 공부한 흔적이 있는 책은 벨레스가 자주 개를 기르고 싶은게 아닌지 황제에게 물어보게 될 만큼 황제의 애독서로 보였지만 에델가르트는 고양이파였다.

그리고 그녀가 눈치채지 못한게 있다면 벨레스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깨어난 심장과 함께 인간이 된 벨레스의 통찰력은 보다 에델가르트를 섬세하게 파악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똑똑 노크와 함께 방에 들어선 벨레스는 놓여져 있는 책의 표지를 노려보았다. 표지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여성과 공을 가지고 놀고 있는 개는 완벽한 동반자로 보였고 행복해보였다. 하지만 그 뒤에는 여성의 부부로 보이는 남성이 그려져 있었다. 벨레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에델가르트가 자신을 강아지로 여기는것에는 불만이 없었지만 벨레스는 인간이었으므로 그 관계에 누군가가 끼어들 가능성이 있다는걸 매우 불만스럽게 여겼다. 다행히 벨레스는 모든걸 해결할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에델가르트, 바쁜것은 알지만 오늘 여신의 탑에서 만날 수 있을까?"

"무슨 용건이라도 있는 거야?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시간을 낼 수 있는데."

"아니, 준비할게 있다."

"흠.. 알았어. 여신의 탑.. 그립네."

에델가르트는 인적이 적은곳에서 중요한 일이라도 논의하는걸까 방심하는것 같았다. 그야, 벨레스가 감정의 걸음마를 하는걸 바로 며칠 전에 보았으니 그 사이에 얼마나 성장했는지 감히 추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엔 두명은 너무 바빴고 그날 이후 오늘 처음으로 대면 할 수 있었다.

벨레스는 언제나 배움에 있어서 천재적이었고, 감정도 또한 마찬가지다. 에델가르트는 벨레스의 재능이 단지 전투에만 관련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여신의 탑은 행복한 커플에 대한 다소 경박한 소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적이 드물었다. 아마도 바람이 불면 오래된 돌틈 사이가 울리고 그 소리가 마치 사람이 우는 소리와 같았기 때문에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도 무성해서일 것이다.

"선생님, 많이 기다렸어?"

"에델가르트.. 아니, 널 생각하고 있으면 언제나 시간이 금방 흘러가. 신기한 일이군.."

선조의 힘이 있었을때 벨레스는 시간의 허무함을 알았다. 뒤로 되돌릴 수 있다는것은 그 가치를 퇴색하게 만들었고 가끔 소중하지 않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지금은 조금의 시간이라도 아까웠다. 계속 에델가르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황제를 불러낸 용건은? 설마...이제와서 다른 길을 찾았다고 떠나겠다는건 아니지..?"

불안스레 흘러내려있는 본인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황제는 영락없이 사랑하는 존재에게 뒤흔들리는 모습이었다. 벨레스는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활짝 웃는다는 고난이도의 표정을 할 수 없었지만 이정도도 충분히 급격한 발전이었다.

"에델가르트, 받아줬으면 하는게 있다."

벨레스는 책 한권 위에 반지를 올려둔채 그대로 에델가르트에게 내밀었다. 에델가르트는 감동해야 할지 당황해야할지 이게 놀리는건지 무엇인지 알수가 없어져서 조심스레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이상의 일을 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도 네가 매우 바쁠것을 알고 있지만 다행히 나는 네가 바빠도 점잖게 기다릴 수 있는 개를 찾았다. 아마, 네 마음에도 쏙 들거라고 장담하지."

"그게 지금 이 책과 반지랑 연관이 있는거야?"

"물론이지. 아주 중요해. 개를 키우는데에는 훈련과 목줄이 필수거든. 주인이 준비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개가 주인의 손을 묶는 수 밖에."

책을 수평 그대로 양손으로 들고 있는 에델가르트에게서 반지를 들어올린 벨레스는 그대로 왼손 약지에 끼워주었다. 에델가르트는 혼란으로 거의 울상이었다.

전부 다 들켜있었다는 사실도 그녀를 수치스럽게 만들었지만 문제는 알고도 벨레스가 웃고 있다는것이었다.

'개에게 사랑받는법'의 시리즈인걸로 보이는 책의 표지 속 남자의 얼굴에 직직 검게 엑스표가 그려져 있는걸 보는 순간 에델가르트는 모든게 질나쁜 농담은 아닌가 의심하기까지 했다.

로맨틱한 프러포즈의 현장은 아니었지만 하여튼 개는 자신의 공로에 평소처럼 의기양양한 순한 표정을 지었고 주인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었다.

"반지를 준비하지 못했지만 묶여줄거야? 산책을 하다가 도망이라도 가면 주인으로써 매우 슬플것 같은데."

"나는 매우 충성스럽고 주인을 사랑하는 개라서 도망갈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에티켓을 위해서라도 빠른 시일내에 준비하는게 좋지 않을까?"

장난스레 싱긋 웃으며 벨레스는 짖궃은 농담에 뺨을 붉히는 에델가르트의 허리를 한팔로 감싸 안아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을 다소 강압적이게 갈라 굳어진 혀를 얽어매면 황제가 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이건 선불금으로."

"선생님, 당신...역시 개가 아니라 늑대였어.."

"영광이군."

다시 한번 입을 맞추려 드는 벨레스를 막아내길 포기한 에델가르트의 힘이 풀린 손에서 책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개를 훈련하는법'

소녀와 개는 이제 서로를 사랑했다.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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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친해지는법

르미르 마을에서 학생들을 구한 공로로 흑수리반의 새로운 선생님이 된 벨레스 아이스너를 에델가르트는 눈여겨 볼 수 밖에 없었다.

구체적 대가도 제시하지 않은 정체불명의 학생을 구하기 위해 산적의 도끼 앞에 뛰어드는 벨레스의 눈은 푸른 불길처럼 타오르고 날렵하고 실용적인 근육이 물결쳤다. 솟구치는 핏방울에도 눈 깜짝 하지 않는 냉정한 표정이 용감해보였다.

자칫하면 소홀해보이기 쉽상인 대응도 용병이라는걸 생각하면 신중하고 알지 못하는 상대에 충분한 경계를 아끼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제랄트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모습은 잘 훈련된 사냥견을 방불케 하였다.

에델가르트의 눈에 벨레스 아이스너는 마치 한마리의 늑대 같았다. 지능적으로 사냥 할 줄 알고 무리의 약한자를 기꺼이 지킬 줄 알며 아무한테나 꼬리를 흔들지 않는 고고함을 겸비한 맹수.

"제물을 원하는자에게는 금과 보석으로, 권력을 원하는자에게는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자를 끌어들이려면...어떻게 해야 할까?"

도서관 일각에서 고민하던 에델가르트는 번뜩 시야에 박혀들어오는 책 한권을 빼들었다. '경계심 강한 개랑 친해지는법'. 개랑 고양이가 자유롭게 방목되어있는 가르그 마크에서는 나름 수요가 있는 책인지 사람의 손길을 탄 흔적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런 방법을 쓰는건 인권적으로 괜찮은것일까..? 에델가르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대로 실행하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참고정도는 해도 되지 않겠는가. 그다지 두껍지도 않고 빈 시간에 읽기에도 적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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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편하게 옆에 앉아서 개를 안심시켜라.

벨레스 아이스너는 태어났을때부터 오랜기간 한곳에 머무르지 못했다. 용병의 딸로써 자라는 동안 식량을 조달하고 부상을 치료 할 때를 제외하곤 항상 이동했다. 자연히 르미르 마을같은 예외를 빼곤 잠을 자고 먹을때도 경계해야 했다.

흑수리반의 선생님으로 취임하고 처음의 휴일. 벨레스는 가르그 마크의 마굿간으로부터 기숙사 2층까지 갈 수 있는 모든곳을 돌아다녔다. 어떤 사람들이 살고 어디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위협이 될만한것이 있는가 방비는 제대로 되어 있는지. 누군가가 말을 걸어올 때 빼고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이윽고 가르그 마크에 고양이가 몇마리 살고 있나 그 숫자를 알게 되자 시간은 벌써 저녁을 먹어야 할 때가 되었다. 제랄트가 기사단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 이상 벨레스는 누군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먹을 수 있을때 먹어야 하는 용병 생활의 영향으로 생각 난 즉시 식당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식당 근처에 도착하자 저녁시간에 걸맞은 인파가 붐비고 있어 벨레스는 멈칫 걸음을 늦췄다. 모르는 사람들로 둘러싸이는건 벨레스에게 껄끄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용병단의 거친 동료들과 다르게 사근사근한 말투와 예의바른 몸가짐을 중시하는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벨레스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잿빛의 악마로 불리워 경외와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벨레스를 기꺼이 같은 식탁에 불러넣는 인물은 많지 않았다. 무표정으로 사람들을 도륙내고 저녁으로 멧돼지 다리를 뜯고 있는 벨레스를 그들은 역겨워하기도 했다. 빵과 치즈, 햄을 얻어다가 방에서 대충 끼니를 떼우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는데 보이질 않아서 가르그 마크 밖으로 외출이라도 한 줄 알았어."

고민하던 벨레스에게 뛰어와 헉헉 숨을 고르며 에델가르트가 긴 소매를 붙들고 있었다. 사교성이 뛰어나지도 않고 수도원에 머문지 일주일정도인 벨레스를 사람들은 호의적으로 보지 않았다. 이런 폐쇄된 공간에선 낯선이를 배척하는게 흔한 일이었고 더욱이 낙하산처럼 선생님이 된 사람을 경계하는건 당연했다.

호기심 어린 시선도 있으나 대부분은 겁을 먹고 용병과 눈을 마주치려고 들지 않았다. 목격정보를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벨레스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고양이를 쫓아 좁은 건물 틈에 들어가는등 평범하게 이동하지도 않았다.

에델가르트가 언제부터 자신을 찾으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땀에 젖은 머리칼을 보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한것 같았다.

"미안하다. 이번 휴일은 주둔지 시찰을 위해 돌아다녔으니 찾기 어려웠겠지. 물어볼거라도 있었나?"

"주둔지...? 용병인 선생님 시점에서는 그렇게 보이는구나."

"아아, 제랄트도 나도 어쩔 수 없이 머물 뿐 이니까. 계속 여기 있을 예정은 아니다."

대사교의 부탁은 무언의 압력을 담고 있고 제랄트는 그녀를 경계하라고 벨레스에게 직접 경고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곳은 적진은 아니지만 언제라도 떠나게 될 수도 있는 장소와 다름 없었다.

"질문할 것은 없지만.. 찾은 이유는 다른거야. 혹시 저녁식사를 같이 하겠어? 제랄트는 오늘 파견으로 없다고 들은것 같아서."

"상관없지만 나는 귀족의 예법은 모른다. 거슬릴텐데."

"당신한테 그런걸 요구 할 생각은 없어. 장차 황제가 될테지만 지금은 그저 선생님의 학생이니까."

벨레스에겐 거절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할 때 싫다라는 감정도 좋다라는 감정도 희박한 벨레스는 상대가 바라는대로 행동하고는 했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에델가르트는 만족스레 미소지었고 바라는건 정말 그거 하나였던것 같았다.

생소한 요구는 아니었다. 벨레스의 실체를 알기 전에는 유명한 용병단 단장의 딸에게 의뢰인이나 뒤를 봐주길 바라는 사람들이 아첨 삼아 식사를 권유하곤 했다. 힘을 빌리고 싶거나 약점을 찾기 위해서. 말이 적은 편인 벨레스에겐 고역이었다.

하지만 벨레스의 전투를 보고나서는 아니었다. 낯가리는 애완견인 줄 알았는데 사람의 머리통을 씹어 부수는 턱을 지닌 늑대임을 깨달은것처럼 그들은 갑자기 공손하고 자리를 피하려 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은 생과 사가 달린 필사적인 전투에서 아무 표정을 보이지 않는이에게서 위화감을 느낀다. 무표정이라함은 속내를 알 수 없다는것이고 인간은 모르는것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다.

"선생님은 무슨 음식을 좋아해? 좋아하는걸로 골라도 괜찮아."

"가리는건 없다. 가르그 마크의 식단은 뭘 먹어도 맛있었어."

"호불호가 적은건가.. 참고할게."

작은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은 뒤에 에델가르트는 그럼 자신이 좋아하는걸로 주문하겠다고 했다. 벨레스는 고기, 생선, 야채를 불문하고 먹을 수 있는것 모두를 싫어하지 않았다. 산에서 최소의 짐으로 야영 할 때에는 먹을 수만 있다면 독만 없으면 다 먹어야 했었다.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용병의 혀와 위는 둔할수록 좋았다. 신선한 물이 없을때는 가죽의 텁텁함이 베어든 미지근한 물을 마시거나 상처를 치료 할 겸 들고 다니는 독한 증류주로 목을 축이고 돌같은 육포를 맛이 느껴지지 않을때까지 씹어 넘겨야 하는데 끓이거나 구우면 그게 진수성찬이다.

"앞에 앉지 않는 건가? 비어있는데."

"예법을 신경쓰느라 선생님이 식사를 즐기지 못하는걸 바라진 않아. 옆에 앉으면 잘보이지 않잖아? 게다가 사람이 붐벼서 소란스러우니까 이렇게 앉는편이 당신의 목소리가 잘 들려."

"그렇군...고맙다."

이런 섬세한 배려는 오랜만이었다. 자신의 의견이랄게 없는 벨레스는 보다 효율적인 전투를 위한 제안을 할 때가 아니라면 이리저리 휘둘리는게 보통이었다. 아주 어렸을때는 용병단의 여성 치료사가 신경을 써주었던것도 같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신선한 생선을 튀겨 절인 양상추와 함께 빵에 끼워 먹는 피쉬샌드는 심플하고 맛있었다. 저녁치고는 가벼운 식사에 벨레스가 만족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는지 에델가르트는 푹 끓인 큼지막한 뿌리채소가 가득한 스프와 샐러드도 추가해 주었다.

지내는 동안 불편한건 없었는지 흑수리반 아이들 중에 궁금한건 없었는지 스몰토크를 나누며 시간알 보낸 에델가르트는 다음에도 같이 저녁식사를 하자고 말하곤 기숙사 앞에서 헤어졌다.

"결국 에델가르트는 뭘 하고 싶었던거지?"

"자네.. 감정이 미발달한건 이해하지만 이제 잠에서 깼으니 사람의 호의에 반응정도는 해야지. 언제까지 사람과의 교제를 부모한테 맡길셈이느냐?"

"에델가르트가 날 좋아해서 저녁을 같이 먹고 싶었던거라고? 이해가 안돼.. 난 해야 할 일 이상을 그 아이에게 한 적이 없어."

지금껏 흐뭇하게 두명을 지켜보던 소티스가 안타깝게 혀를 찼다. 자신 때문에 이지경이 된 벨레스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스승의 마음에 들기 위한 노력이 보답받지 못한 에델가르트가 애처롭기도 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관계도 있다. 학생이 네가 좋다는데, 냉정하게 쳐낼 생각은 아니겠지? 자네는 지금 선생님이지 용병이 아니다."

"알고 있다."

"문자 그대로 정보로써 인식하고 있는거겠지. 하아..느끼지 못하는데 어찌 이해하겠냐만은. 너도 학생과 함께 배우려 노력하거라."

용병이 아닌 삶의 방법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벨레스는 저절로 멍해졌다. 누군가에게 전투를 가르치는 일은 용병단에 신입이 들어왔을때 해봤지만 그들은 이미 독립된 개체로 벨레스에게 보살핌을 받는 존재는 아니였다.

모르는것은 누군가에게 배우거나 책을 읽고 깨우친다. 벨레스는 이미 어둑해지고 있는 수도원을 가로질러 도서관에 향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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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보호자와 친한 사이임을 보여 익숙하게 하라.

벨레스가 가르그 마크에 익숙해짐에 따라서 에델가르트의 수첩도 채워지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쉬운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특별히 싫어하는게 없는 대신에 좋아하는것도 찾기 어려웠다.

유기견을 집에 들였을때에 처음엔 어떤 간식이나 먹이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맛을 느끼는 일 자체에 익숙하지 않고 그럴 환경도 아니었기 때문에 선호를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가지를 맛보고 충분한 먹이를 공급받게 되면 그들도 좋아하는 간식이 생긴다고 한다.

휴베르트를 통해 공수한 각종 찻잎과 쿠키같은 선물을 주었을때 선생님은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미소를 보이지도 않았고 거절하지도 않았다. 이래서야 싫어하는것도 알 수가 없다.

"벨레스 반, 반장 아니냐? 너도 낚시를 하려고?"

"제랄트경...아니요. 그냥 선생님을 만나러 왔어요."

효과가 있는건가 싶은 책의 조항 중에는 자주 만나 얼굴과 냄새를 익히게 하는게 효과가 좋다고 했다. 개는 아니니 냄새를 제외하더라도 얼굴을 익히는건 해볼만 했다. 사람도 자주 만나 인사하는 상대를 친근하게 여길테니 에델가르트는 휴일에도 꼭 한번은 벨레스를 만나러 갔다.

벨레스는 산적토벌이 끝날쯤에 가르그 마크를 탐색하는걸 그만두고 온실에서 작물과 꽃을 가꾸거나 낚시를 해서는 학생들과 식사를 하는걸 즐겼다. 에델가르트도 자주 초대받고는 했는데 학생중에서 제일 빈도가 높았다. 그것이 에델가르트가 책을 반납 할 기간을 연장한 이유이기도 했다.

오늘은 제랄트와 벨레스의 휴일이 겹쳤는지 같이 낚시를 할 모양이었다. 나무로 된 양동이가 두개 겹쳐 있었고 미리 빌려둔 낚싯대가 놓여져 있었다.

"흠.. 귀족들은 이런 일은 할 기회가 없지. 낚시는 심신수양에도 좋고 혼자 고립되었을때 식량을 구하기에도 좋다. 괜찮다면 해보지 않겠나?"

"하지만 한번도 해 본적이 없어서...방해될거에요."

"괜찮다, 에델가르트. 낚시터는 충분히 넓어."

어느새 뒤에서 접근한 벨레스가 학생의 새로운 도전을 격려하듯 그 어깨를 다독였다. 처음은 어설픈 칭찬의 말로 시작해서 지금은 꽤 학생의 의욕을 돋구는데 능숙해져 오고 있었다. 여전히 무표정하단점을 제외하면.

설마 황제가 고립된다고 낚시로 물고기를 마련할 일은 없겠지만 에델가르트는 이것이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벨레스 못지 않게 제랄트도 수상한점이 많았다. 낚시로 풀어진 긴장에 중요한 정보를 흘릴지도 모른다. 그는 벨레스의 학생이란 존재가 신기하고 흐뭇한지 경계심이라곤 한톨도 없어 보였다.

"내가 물고기 한마리도 잡지 못한다고 실망하진 말아줘, 선생님.. 제국에선 이런 일을 할 기회가 없었거든."

"물론 익숙하지 않은 일에 도전 할 결심을 한것만으로 너는 내 자랑스런 학생이다."

벨레스는 이내 자신의 몫으로 마련된 낚싯대를 에델가르트에게 쥐여주고는 관리인에게 한개 더 빌리러 자리를 떠났다. 이런 빈약한 나뭇가지같은게 과연 제대로 물고기의 무게를 버티는걸까 불안해하며 에델가르트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낡은 낚싯대를 노려봤다.

벨레스가 돌아오면 세명은 적당히 떨어져 낚싯터의 나무부두에 낚싯줄을 드리웠다. 초보자에게 낚시의 즐거움을 느끼게 할 요량인지 벨레스가 직접 미끼를 끼워줬다.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서 낚싯줄을 가능한 멀리 던져. 이렇게 하면 된다."

숙련된 솜씨로 휙 물고기가 숨어있을법한 장소에 정확히 낚싯줄을 드리운 벨레스가 에델가르트를 빤히 본다. 겉보기로는 별로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이왕이면 작은 물고기라도 잡아서 선생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에델가르트는 있는 힘껏 벨레스가 낚싯줄을 드리운 방향으로 캐스팅했다.

"앗..! 낚싯줄이 엉켜서..미안해, 선생님.. 이걸 어쩌지? 줄을 자르고 다시 매면 되는건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다가 오히려 선생님을 방해해버려 에델가르트는 당황했다. 지나치듯 낚시하는 벨레스를 봤을때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잦은 빈도를 보면 좋아하는 일일것이다.

"어이쿠. 벨레스, 좀 더 자세하게 알려줬어야지. 괜찮아, 괜찮아. 벨레스도 어릴때에 똑같은 실수를 했어. 이리 줘봐라."

무언의 눈길로 책망하는 벨레스를 쳐다 보지도 않고 제랄트는 낚싯줄을 슬슬 감아다가 엉킨곳을 능숙하게 풀어냈다. 당황해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에델가르트 덕분에 심하게 엉켜있지는 않았다.

"보다싶이 이 아이가 무덤덤해서 미안하다. 갑자기 선생님을 하게 되서 얼마나 걱정했는지...웃차! 자, 이제 이걸 들고 물고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벨레스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듣는 선생님이란 생소하고 조금 귀여웠다. 삐진 강아지 같았다.

"선생님의 강의는 유익하고 과제에서도 모두를 안전하게 지켰어요. 모르는점은 반장인 저한테 물으면 되고 흑수리반 아이들도 선생님을 잘 따라요."

"아.. 그렇군. 다행이구나, 벨레스. 신뢰받고 있는 모양인데. 쓸데없는 걱정이였구나."

"..."

어느새 그렇게 낚았는지 나무 양동이를 채운 물 속에 커다란 물고기가 튀어올랐다. 벨레스는 방금 잡은 물고기에서 바늘을 빼내 양동이에 추가했다.

"착실한 반장이라 믿음직해. 학생에게 부탁해도 되는가 싶지만..벨레스를 잘 부탁한다."

곰같은 체격의 제랄트는 평생 무기를 잡아 거친 손으로 에델가르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좀 떨어진 장소에서 낚시를 시작했다.

그때 낚싯대를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에델가르트는 거의 패닉에 빠져 낚싯대를 꽉 잡아 부숴뜨릴뻔 했다. 이대로 당기면 되는 걸까? 벨레스가 하는걸 보면 어려워 보이지 않았지만 에델가르트는 이미 실수를 한번 했다.

"당황하지 마라. 침착하게 물고기의 힘을 빼. 너무 당겨도 줄이 끊기고 너무 풀어주면 놓치게 된다."

벨레스가 뒤로부터 에델가르트를 감싸안듯이 두손으로 낚싯대를 지지했다. 선물했던 베르가모트티 향에 은은하게 휩싸였다. 도끼술 강습때 자세교정을 받는거랑은 틀렸다.

"그래, 전투에서의 힘겨루기랑 비슷하다. 잘하고 있어."

물고기가 힘을 써 낚싯대를 당기면 벨레스가 에델가르트의 허리에 손을 감아 안아 버티고 물고기가 지쳐 끌려오면 다시 낚싯대 위 에델가르트의 손 위를 감싸쥔다. 물고기가 수면 위로 끌려올라오고서야 에델가르트는 새빨간 얼굴을 드디어 가릴 수 있었다.

"월척이네. 첫성과로써 최상이다. 이대로 같이 식사를 하러 갈까? 식당에서 잡은 물고기를 요리해주거든."

"응.. 좋은..생각이네."

학생의 성과에 기뻐하는 벨레스는 이제 제법 선생님티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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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가 스스로 다가오기로 결정했을때 갑작스런 접촉은 절대금물.

"에델가르트, 괜찮다면 같이 다과회를 하지 않겠나?"

"다과회..? 시간은 있지만... 선생님도 다과회를 하는구나."

"사실은 네게 처음으로 권유한거다."

귀족들이 많이 다니는 사관학교는 사교의 장도 중요시한다. 누구나가 사관학교를 졸업해서 장교가 되길 바라고 오는것은 아니다. 인맥을 쌓기에 선별된 인재들이 모인 이 장소는 효과적이겠지.

사관학교인 이상 학생들에게 술이 금지되어있으므로 대화를 나눌때 선호되는것은 역시나 차였다. 그러므로 유통되는 종류도 다양하고 식당에서는 곁들여 먹을 쿠키같은 티푸드도 제공했다.

선생님들의 다과회에 초대되는것은 학생들에게 일종의 스테이터스다. 가르그 마크의 교사란 포드라 최대이자 사실상 유일한 종교의 신임을 받는 직책이다. 유능한 인재들을 키워 포드라 전역에 제자를 가지게 될 교사들은 국경을 불문하고 인맥을 쌓을 척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에델가르트에게 중요한건 벨레스가 첫 다과회의 상대로 자신을 택했다는 것이다. 제랄트도 레아도 아닌 바로 에델가르트 자신. 그 밖에도 많은 흑수리반 아이들이 아닌 자신.

"내게 기회를 줘서 영광이야. 물론 기쁘게 받아드릴게."

미리 장소를 정해뒀는지 벨레스는 곧바로 에델가르트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에델가르트에게 거절당했어도 다른 사람에게 권유 할 생각이었을까? 조금 서운했지만 어쨋든 벨레스의 첫번째 선택은 에델가르트였다.

도착한 장소는 의외의 벨레스의 방이었다. 기본으로 주어지는 물품빼고는 사유물이 많아보이지 않았다. 책상 위도 어지럽혀져 있지 않고 방은 깔끔했다. 오히려 텅비어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벨레스는 첫 다과회라는 말에 걸맞게 다구를 다루는 솜씨가 어색했다. 제대로 공부는 했는지 섬세함은 부족했지만 시간과 절차는 완벽했다. 용병생활을 했다는걸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였다.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연습은 했으니 못마실 정도는 아닐거다."

"고마워. ..베르가모트티네, 내가 좋아하는 차야."

"네가 제일 먼저 준것이 그것이니까. 어쩌면 네가 좋아하는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보낸 선물 중에 제일 먼저 준 것은 베르가모트티였다. 좋아하는게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줄 수 있는 선물은 자신이 받았을때 기쁠 물건이였던 것이다. 설마 벨레스가 그걸 역으로 헤아려줄 줄은 몰랐지만.

생각해보면 무뚝뚝해 보여도 벨레스는 세심한면이 있었다. 달력을 확인해 학생들의 생일에 꽃을 보내기도 하고 식당에서는 늘 학생들이 기뻐하는 메뉴를 고른다. 한명이라도 번거로운 일인데 흑수리반 뿐 아니라 다른반 학생들까지 챙기는것은 직업의식만으론 설명이 부족할 것이다.

"항상 고맙다. 노력하고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 업무에 에델가르트, 네 도움이 없었더라면 적응하기 어려웠을거야."

드물게도 벨레스는 에델가르트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적의 창날에 베여 피를 흘릴때도 한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벨레스가 이렇게 속마음을 내보이는것은 경외로울 정도였다.

에델가르트는 벅찬 마음에 떨리는 손을 숨기기 위해 차를 한모금 마셨다. 물 온도가 뜨거웠는지 다소 씁쓸함이 강한 맛이 냉정함을 되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내 도움이 없었어도 모두가 도와줬을거야. 이렇게 단기간에 모두의 신뢰를 얻다니 놀라웠어 흑수리반은 다소 독특한 아이들이 많으니까.."

"흠.. 곤란한 부분도 있지만 다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의욕을 불러일으키는건 선생님의 의무이지. 내가 해야 할 일이야."

"이상적인 교사네. 확실히 당신이 오고나서 린하르트도 무단결석이 줄어들었고 베르나데타도 방 밖에 나오게 됐으니까."

다소 사무적인 대화이지만 상대의 흥미를 자극한다는점에서 벨레스는 다과회 주최자로써 고득점을 흭득 할 수 있을것이다.

에델가르트는 저절로 긴장이 풀리는걸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는 황제의 후계로써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벨레스는 무지하다고로 밖에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종교에도 귀족들의 상식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런걸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았다.

문득 가벼운 대화에 섞어서 벨레스가 같은 길을 걸을지 떠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끼리는 흔한 일이었다. 상대가 적인지 동맹을 맺을 상대인지 차를 마시면서 교묘하게 살피고 가끔 독을 넣기도 하고.

"선생님은 로나토경의 반란진압과 고티에가문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전자는 미흡한 사전정보가 불러 일으킨 실태를 반성해야 하고 후자는 갑작스런 일에도 신속히 대처한 학생들을 자랑스러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난한 대답이었다. 홍차의 물결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불만스럽게 찡그려진것이 보였다.

"그럼, 이러한 일들에 대한 세이로스교의 대처에 대해서는? 그들이 사람들을 처형하고 명분으로 신을 앞세우는건 어때? 스렝과 고티에가문의 분쟁을 알고서도 유산을 몰수하는건?"

"에델가르트."

탁. 찻잔이 힘있게 테이블에 놓여있다. 벨레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고 입술은 일자로 굳게 다물려있었다. 에델가르트는 그제서야 벨레스가 귀족도 신도도 아님을 상기했다. 알아주길 바랬지만 결코 강요하려는건 아니었는데.

에델가르트는 정말 진심으로 벨레스와 적이 되고 싶지 않았다.

방 안을 가득채운 침묵이 벨레스가 보여준 신뢰를 깨부순 결과라면 어떻게 되찾을지 눈물이 날것 같았다.

"네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겠다. 난 널 좀 더 알고 싶어서 오늘 이 자리에 불렀어. 네가..나랑 친해지고 싶어하는 줄 알았는데.."

"선생님, 아니야. 내가 바라는건..."

"걱정하지 않아도 실망한게 아니다. 모두 생각해봐야 할 일들이지. 너와 난 제자와 스승이다, 제자의 질문에 답하는게 내 일이야."

벨레스는 벌떡 일어나더니 책상 위 작은 책꽂이에서 신학과 정치에 대한 책을 들고 왔고 식은 차가 담긴 찻잔을 옆으로 밀어냈다.

그 행동은 마치 다가오는 사람의 손을 피해 냄새를 맡던 코를 치우고 등을 돌린 늑대 같았다.

.
.

4. 몸을 낮춰 당신이 개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것임을 알게하라.

제랄트가 죽은 후 벨레스는 방안에 틀어박혀 일주일을 나오지 않았다. 대사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을 추스릴때까지 쉬는것이 좋을거라고 그것을 허락했다. 공식적으로 그것은 상사가 허가한 휴가와 마찬가지이므로 지금 에델가르트가 하려는 일은 권리의 침해였다.

그렇지 않아도 벨레스는 그날 이후로 에델가르트를 부쩍 사무적으로 대했고 더불어 모니카가 나타나 두명을 함께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염제로 분장해 필사적으로 오해를 풀려고 했을때에는 모든것이 잘못되어감을 슬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선택이 과연 어떻게 작용할지 에델가르트는 알 수 없다. 모든 상황이 벨레스와 에델가르트를 적으로 만들려는데 에델가르트가 할 수 밖에 없는 일은 벨레스가 보다 자신을 싫어하게 할지 모르는 말들을 뱉어내는거라니.

자신이 선택하고 스스로의 신념에서 우러나온 말들이지만 붉게 부은 눈을 찡그리며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벨레스를 보는건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아무도 서로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 할 수 없고 에델가르트가 할 수 있는 일은 벨레스가 일어나기로 했을때에 손을 내밀거라는것 뿐이다.

다음날 벨레스는 수업에 복귀했다. 아직 수척해보이고 눈가는 붉었지만 강의를 하는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다시 어제가 되더라도 똑같은 행동을 하겠지만 에델가르트는 벨레스를 정면에서 쳐다 볼 수 없었다.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에델가르트, 잠시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수업이 끝나고 떠나려는 에델가르트의 손을 벨레스가 붙잡았다.

설마 벨레스가 다가와줄 줄은 몰랐던 에델가르트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도 못하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한 말을 생각해 봤다."

정말 오랜만에 방문하게 된 벨레스의 방은 베르나데타가 만든 인형, 메르세데스가 준걸로 보이는 직접 만든 쿠키, 페르디난트가 보낸 안정에 좋은 찻잎등등 선물들로 조금 어지럽혀져 있었다. 며칠동안 무릎을 끌어안고 울던 벨레스를 생각해보면 정리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벨레스는 햇빛이 비쳐오는 창문을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원망이나 분노같은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과하지는 않을거야, 선생님. 난 내가 했어야 하는 말을 했다고 생각하니까."

"그때는 화가나고 또, 조금 슬펐지만 네 말이 맞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오늘 수업시간에 나갔다. 난 제랄트의 딸이지만 동시에 너희의 선생님인걸 잊으면 안됐어."

머뭇거리다가 일어선 벨레스는 선물로 받은 쿠키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페르디난트에게 받은 찻잎을 우리기 시작했다. 그때보다 훨씬 부실했지만 다시금 그날로 돌아간것 같았다.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어."

따라진 찻물은 베르가모트티가 아니었지만 맛있었다. 벨레스는 이제 능숙하게 차를 우릴 줄 알았다.

"뭔데, 선생님?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거라면 성심성의껏 응하기를 약속할게. ..그날 그때에 내 잘못을 사과하는 의미로."

벨레스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더니 이내 떠올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내가 일어서길 바란다면 손을 내밀겠다고 했지. 왜지? 나에게 뭘 바라고 있는 거지?"

질문은 그날로부터 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에델가르트가 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면으로 숨기고 사정이 있다고 회피하고.. 아해해주길 바란다. 그런데도 신뢰받길 바란다니 명백한 모순이다.

"난.. 선생님이 때가 되었을때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선생님이 바라는걸 스스로 결정했으면 해. 의무도 강제도 아닌 정말로 당신이 바라는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나는 받아들이게 될 거야."

"모두..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어. 레아는 순종적인 복종을, 디미트리는 복수심을 나눌 이해자를, 클로드는 내 힘을 이용하기를. 그런데 정말 내가 무엇이든 원하는걸 선택하기를 바란다는건가?"

"그래, 선생님이 바라는길이라면."

결국 에델가르트는 선생님을 강제하기엔 이미 너무나도 많은 마음을 내주었다. 패도를 위해서 수 많은 사람들의 피로 길을 물들이기로 결심했는데 단 한사람에게는 그럴수가 없었다.

벨레스를 끌어들이겠다고 개랑 친해지는법이라느니 하는 바보같은 책을 따르기로 했을때부터 이미 답은 정해진거나 마찬가지였다. 에델가르트는 단지 벨레스랑 친해지고 싶었다. 좋아하게 된 사람이랑 친해지고 싶다는건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벨레스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에델가르트가 흑수리반에서 가장 강하다는걸 칭찬했고 에델가르트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앞으로도 그럴거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에델가르트가 그날 성급하지 않았다면 즐겼을 완벽한 티타임이었다.

.
.

5. 곁에서 같이 걸어라.

"그 이단자를 당장 처형하세요, 벨레스!"

아아, 결국 이날이 오고야 말았다. 에델가르트는 무릎꿇린채로 차마 사랑하는 선생님을 볼 수 없었다. 실망과 배신감으로 점칠 된 얼굴을 보면 황제로써의 자신을 유지 할 수 없을것 같았다.

절컥. 벨레스가 검을 움켜쥐는 소리가 들려온다. 휴베르트가 전황을 살펴 구출하러 오게끔 전략이 짜여있지만 가슴이 찢어질듯 아파왔다.

에델가르트는 어리석게도 고고한 늑대를 길들여보려고 했지만 심장을 빼앗긴것은 자신이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벨레스는 여신조차 사랑할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매일 바보같다고 생각하면서 책을 읽으며 당신을 떠올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찾아갔어. 무엇을 주면 좋아할까 고민하는것이 일상이 됐고 저녁식사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부르는걸 보면 실망했지. 하루가 전부 당신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지?'

"난 에델가르트를 지킨다."

"선, 생님..?"

"너와 같은 길을 걷겠다. 그게 내가 바라는거야.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원했고, 결정했다."

천제의 검 끝이 레아를 향했고 대사교는 분노의 외침과 함께 짐승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벨레스는 에델가르트의 손을 잡아 일으켰고 그들은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혼비백산하는 주변과 달리 두명은 고요했다. 익숙해진 거리였다. 더이상 벨레스는 에델가르트를 경계하지 않았다. 같이 있기를 바랬다.

여신조차도 자신을 지켜보지 않는다고 절망한 소녀는 명령을 따르는것 밖에 모르던 늑대를 만났고 두명은 비로소 같이 걸어가는 법을 배웠다.

소녀는 늑대의 친구가 되었다.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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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카테고리 없음 2020. 12. 25. 12:44

소중한 사람에게 주거라.

그 말을 벨레스는 마음 한켠에 새기듯 간직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흘린 눈물과 함께 쓴 독약같이 가슴을 할퀴던 기억은 추스리고 나면 벨레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깨달으면 자신은 언제나 지켜지고 있었다. 강한 무력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벨레스가 무슨 일을 해도 같은편에 서 줄 보호자였다.

벨레스는 할 수 있다면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 일까..하고 생각하면 언제나 에델가르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상처가 많은 아이였고 비밀도 그만큼 많았다. 손이 많이가는 아이만큼 애정도 많이 주게 된다고 했던가.

벨레스에게 에델가르트는 언제나 제일 신경쓰이고 지켜주고 싶고 저가 다치더라도 구하고 싶었던 존재였다. 무력이, 목숨이 유일한 재산인 용병에게 그건 무엇보다도 가치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주었다. 특별한 다른 의도가 있는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에델가르트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버지가 소중한 사람에게 주라고 했으니까.

기사가 레이디에게 검을 받치듯 벨레스도 에델가르트에게 반지를 준 것이다. 무언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눈치채면 벨레스는 제국의 황후가 되어서 에델가르트와 매일 침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엘....."

"응? 선생님, 오늘도 좋은 아침이네. 후후..선생님의 자는 얼굴도 무척 귀여웠어."

심지어 매일같이 침대에서 귀여움 받는 처지였다. 그런데에 관심이라고는 한톨도 없던데다가 용병들이 저급한 농담이라도 하려고 하면 호통을 치던 아버지 곁에서 자란 벨레스는 용병이면서도 그러한 지식은 제자들 이하였다.

아무래도 가족이라곤 아버지 뿐이고 동료들은 남자들뿐이니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반면 황제인 에델가르트는 황족이니 그러한 교육정도는 받았겠지.

그런 아무 의미없는 사실들을 머릿속에 늘어놓아봐도 달라지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벨레스는 분명 앞길이 창창한 제자의 미래를 가로막아버렸고 의도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황제의 중요한 정치패를 의미도 없는곳에 허투르게 쓰게 만들어버렸다.

전쟁영웅으로써의 가치는 있지만 어차피 벨레스는 어떤 위치에서라도 지키기로 마음먹은 소중한 에델가르트의 곁에 있었을 것이다. 이런 중요한 자리가 아닌 그저 용병으로 고용되었어도.

이것은 중대한 손실이다. 에델가르트는 좀 더 좋은 선택지가 많았고 적어도...적어도 자신은 아니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선생님? 평소라면 벌써 일어나 아침훈련 갈 준비를 했을텐데. ..혹시, 내가 너무 무리하게 했던건.."

걱정과 염려가 담긴 목소리에 애교섞인 응석부리는 표정. 이만큼이나 많은것을 줄 필요는 없는데. 에델가르트는 너무나도 자신의 가치를 모른다. 벨레스는 혼인 후 몇번이나 깨달은 사실을 다시금 되새긴다.

"피곤하다면 오늘은 쉬어. 모두 선생님이 무리하길 바라지 않으니까..그래! 오늘 도로테아가 방문하기로 했는데 다과회를 하는건 어때?"

"도로테아.. 알겠다."

"오랜만에 만나는거니까 도로테아도 기뻐할거야. 사실은 다른 사람들도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만.."

나도 바빠서 자주 못하는데....

..? 에델가르트가 작은 소리로 무언가 속삭인걸 벨레스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곤 넘겨버렸다. 중요한 일을 에델가르트는 절대로 얼버무리지 않는다. 저가 알아야 할 일이라면 다시금 말해주겠지.

"어쨋든. 도로테아가 올때까지 선생님은 절대 휴식. 집무실까지 바래다주는것도 오늘은 금지."

"그것 정도는...."

"안돼. 밤에는 기운차렸으면 좋겠네. 그럼."

쪽. 가볍게 립음을 울리는 키스를 하곤 에델가르트는 방을 떠났다. 전쟁이 끝나고 후처리도 대충 일단락 되어서 여유를 찾은 에델가르트는 한층 매력적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도 미소를 자주 머금고 그 눈은 항상 다정하게 반짝였다. 입에 담는 말들은 달콤하게 벨레스의 심장을 저리게 만들었다. 부드러운 손길은 마음을 푹 놓은 강아지처럼 벨레스를 손쉽게 녹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이런 어디서 굴러먹다 온건지도 모르는 용병출신의 가진게 없는 벨레스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엘이라면...좀 더.. 다정하고 능력있는 나보다 어울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텐데..하아...음?"

아무리 에델가르트가 쉬라고 했더라도 어디 아픈것이 아닌데 가만히 휴식을 취하는것은 열심히 일하는 제자들을 생각해서라도 할 수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서던 벨레스는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편지지 같은 것을 발견했다.

중요한 편지인걸까? 에델가르트는 일을 사적인 공간에 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둘만의 밀월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했던가..아마도 공적인 일에 감정적 사유가 섞이는걸 차단하는것일까.

주워들은 편지지에는 벨레스도 알고 있을 정도의 명문 귀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전쟁때 지원물자를 보낸이들의 명단에 있었기 때문이다.

"..청혼... "

예상했던 일이었다. 먼저 납득이 갔다. 그리고 갑자기 심장이 돌연 사라진것 같은.. 가슴에 공동이 생긴것 같은 기아감이 찾아왔다. 뱃속 내장이 끌려가는것처럼 속이 뒤집어졌다.

에델가르트가 맞았다. 아무래도 자신은 아픈것 같았다. 확인하지 않아서 몰랐을 뿐 타인이 보기에 안색이 좋지 않을지도 모르지. 미안하지만 도로테아에게는 아파서 만날 수 없다고 시종을 통해 전하곤 벨레스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
.

선생님이 이상해. 그 말로 서두를 꺼낸 에델가르트는 고개를 푹 숙인채로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침체함에 마시던 달달한 베리티가 쓸 지경이었다. 언제봐도 덤덤한 선생님이 이상하면 대체 어떻게 이상하단건지 저라도 선생님은 소중하니까 자세히 알려줬으면 싶다.

"어떻게 이상하신데? 하루에 6끼 이상 드셨다면 최대 10끼도 드시니까 별 일 아니잖아."

"입맛이 없다고 어제 아무것도 안먹었데. 겨우겨우 데운 우유 몇모금 마셨다던가.. 요 며칠새에 요리장이 몇번이나 울며 매달렸어."

"그건...정말 이상하네."

평소의 대식이라도 이상하지만 이건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질량보존의 법칙은 어디에 갔는가 의견이 분분했던 선생님의 위장에 대한 미스터리는 결국 높은 신진대사와 엄청난 운동량이 이유가 아닌가 하는 다소 부실한 결론으로 종결했었다.

그런데 우유 몇모금이라니... 입맛이 없는 수준을 넘어서서 그정도면 병이 있는게 아닌가 걱정을 할 수준이다.

"의사는? 혹시 위염이라거나... 아니면 소화기관 어딘가에 문제가 생겼다던가...."

"빈혈끼가 있다는것 외에는 건강하다고 했어. 그것도 잘먹으면 나을거라고..."

그런데도 안먹었다는건 큰 문제였다. 긴 용병생활로 컨디션 관리는 벨레스의 일상이었다. 의사의 처방을 듣고도 안된다면 그건 하지 않는게 아니라 못하고 있는것이다.

"그 외에는? 뭔가.. 이유라도."

"그걸 알면 고민하지 않지.. 심지어 나랑 마주치면 피하고 잘때도 다른 방으로 가.. 혼인하고 한번도 가본적 없는 황후궁은 대체 누가 알려준걸까.."

으득 이를 가는 소리는 착각일거라고 도로테아는 애써 무시했다.

"알겠어. 떠나기 전에 한번쯤 선생님 뵙고 싶었는데 그 김에 캐내볼게. 가끔 보는 제자에게 더 털어놓기 쉬운 일도 있겠지."

"고마워.. 되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야기 해 줄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안먹고 검만 휘두르다니 쓰러지면 어떻게 하지 걱정되서 서류도 눈에 안들어와서.."

"아.. 그거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에델짱 입에서 이런 연애이야기가 나오다니 그 시절엔 꿈도 못꿨는데."

울적한 기분을 돌리는데에 연인과의 행복한 이야기만큼 특효약은 없지. 그것이 고난과 역경을 해쳐나가 쟁취한 사랑이면 더욱 더.

삶은 극의 연속이고 연애는 그중에서도 대중에게 가장 인기있는 상영물이다. 신을 대적한 황제와 그를 지지한 반려인 용병출신 영웅은 백성들에게 특히나 인기였다.

에델가르트의 자랑하고픈 마음도 채워지고 한창 인기인 가극의 재현도도 높일겸 도로테아는 에델가르트를 부추겼다.

"흥미롭다고 해도.. 매일 같이 자고 일어날 뿐이야. ...뭐, 할건 하는데. 여느 부부랑 비슷해."

"오...그 선생님이 말이지... 하나도 모르는걸까, 이정돈 아무것도 아닌걸까 궁금했는데 아무래도 아무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네."

"...그 이야기 자세히 해볼래?"

살벌한 눈으로 쳐다보는 에델가르트는 그 어느때보다 무서웠다고 후에 도로테아는 친구들에게 토로했다.

.
.

잠시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심장이 찢어질듯 아파왔다. 병이 아닌가 의사의 진단을 받았지만 약간의 빈혈이라는 결과 뿐. 그렇다면 도대체 이 아픔은 어디로부터 왔는지 벨레스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전쟁에서 신체 일부를 잃은 병사들은 가끔 없는 기관의 아픔을 느낀다고 했다. 어쩌면 나는 다시 심장을 잃었나? 하지만 가슴에 손바닥을 올리면 쿵쿵 뛰어대는 고동이 느껴졌다.

벨레스는 아프지 않았다. 적어도 어딘가 다치지는 않았다. 아직도 미스테리인 스스로의 몸은 설계도 없이 기술이 사라져버린 오파츠와 같았다. 갑자기 어딘가 이상이 와도 올게 왔구나 싶을 것이다.

"선생님, 훈련 언제 끝나요? 귀여운 제자가 찾아왔는데 잠깐 쉬는건 어때요?"

"도로테아.."

그렇다면 떠나야겠지. 제자의 눈에 스승의 죽음만큼은 보여주지 않아야 했다. 어딘가 방랑하며 살아있을거라고 생각하는편이 좋다는걸 전쟁때 배웠다. 그래야 뒤를 돌아보느라 발이 묶이지 않는다.

죽음은 무게없는 족쇄다. 많이 접할수록 안보이는 무게에 짖눌리게 된다.

자신에게도 백성에게도 강한 책임감을 가지는 에델가르트는 이 죽음 또한 짊어질것이다. 벨레스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에델가르트는 좀 더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

"선생님..안색이 안좋아요. 요새 식사도 잘 안한다던데. 혹시 호화로운 황궁의 요리는 입에 안맞았어요?"

"사관학교의 식사도 황궁의 식사도 전부 맛있었어. 물과 육포뿐으로 며칠을 보낼때도 적지 않았으니까 음식은 가리지 않는다."

"흐음.."

"다만.. 입맛이 없을 뿐이야. 걱정 할 필요 없어. 쓰러지지 않을 정도는 챙기고 있으니까."

말 그대로 쓰러지지 않을 정도라는게 문제였지만 도로테아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억지로 캐내려든다면 이 사람은 입을 굳건하게 닫아버릴지도 몰랐다. 원래부터 원체 말이 적은편이니까.

"건강상 문제도 없다던데요. 3끼 챙기다가 1끼만 먹어도 걱정되는데 5~6끼가 기본인 선생님이 우유 몇모금만 마시기도 한다니까 걱정되어서.."

"...엘이 그렇게 말했나?"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었으므로 도로테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 선생님같은 경우 유도심문보다 솔직하게 호소하는게 효과가 좋았다. 이리 무덤한 표정인데 걱정도 많고 애정도 많았다.

"맞아요. 에델짱이 누구한테 의지 할 정도면 이미 엄청 고민했겠죠."

"...별로, 숨기려던건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겐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휴베르트라거나, 너에게. 요즘 나는 이상할지도 모른다. 혹시 이제서야 후유증이 나타난걸지도 모르지."

"후유증이라면.."

갑자기 돌연 화제의 무게가 변하는건 벨레스와의 회화에서 흔한 일이었다. 본인 일이든 상대 일이든.. 대화 중 갑자기 자신의 비밀을 아무렇지 않게 말해버리기도 하니까.

이번은 바라던바여서 도로테아는 놀라지 않았다. 이제서야 본론이나 마찬가지니까.

"심장의 박동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가슴 속이 텅 빈것처럼 고통이 느껴진다. 어째선지 엘을 보면 더욱 더.. 내장이 끌어 내려지는것 같고 가끔은 이유없이 울적해져."

"어....음..? 그, 언제부터..그러는데요? 계기라던가."

"계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프기 시작한건 침대 위 협탁에서 엘에게 온 편지를 발견했을때부터일까? 귀족 자제의 청혼서였다. 엘은 결코 공적인 일을 침실에 가져오진 않으니 신경쓰인 상대였겠지."

"그렇구나....아하, 하하하! 선생님은 가끔 엉뚱하다니까요.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정신없이 웃는 도로테아를 앞에 두고도 벨레스는 시종일관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런 문제에 익숙한 도로테아라면 벨레스가 떠나도 벨레스가 설명하는것 이상으로 에델가르트에게 잘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군대의 지휘에는 적절한 전력 배분도 중요했다. 벨레스의 눈에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어보였다.

"사실은.. 이건 좋은기회가 아닌가 싶어. 원래부터 내가 이런 자리에 있는건 좋지 않았다. 귀족들의 반발은 제국이 빨리 안정되어야 하는 지금 최대한 줄여야 하는데 평민출신의 그것도 용병이 황후라는 자리에 앉지는 말아야 했어."

"..선생님..?"

"전쟁영웅이라는 직함이 필요하다면 혼인이 아니더라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이용해도 좋았다. 제자의 앞길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그런데 나는..오히려 엘의 미래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리고 말았어.."

입을 떡하니 벌리고 눈을 크게 뜬 모습은 평소의 도로테아라면 절대 하지 않을 표정이지만 울적하고 괴로운 벨레스는 알아채지 못했다.난생 처음 휘둘리는 감정에 날카롭게 갈아진 감각조차 갈피를 못잡은 탓이다.

"이런게 아니라도 엘은 다정하고 듬직하고 신념에 굳건한데다가 유능하다. 더 좋은 기회를 쟁취해야해. 엘은.. 아직 어렸어서 잘 몰랐던거야. 선생이 제자를 지키는건 당연한 일인데. 그것에 빚을 느낀거야."

"선생님... 할말은 많은데....많지만, 내가 해야 할 말은 아닌지도. ..그러면 선생님은? 선생님은 어때요? 에델짱을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한숨을 푹 쉬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는 도로테아를 보고 벨레스는 도로테아도 이해했구나 싶어 씁쓸해졌다. 그와중에도 선생님을 걱정해주다니 벨레스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제자복이 많았다.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언제든 가장 먼저 생각나고 목숨을 바쳐 지켜도 좋다고 생각해. 행복해졌으면 좋겠고,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줄 수 있어."

"그렇구나...그래. 그거면 됐죠.."

"하지만 역시 혼인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게.."

"거기서부터! 거기서부터 어긋난거였어?! 할거 다했는데 어째서! 에델짱의 자랑을 베리티 두 주전자가 빌 때까지 교제한 나에게 사과해요!"

원래부터 감정에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던 선생님이었지만 설마 사랑도 처음이었던걸까. 하나도 모르는거였다니 반전에 반전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태로 행복절정인 우리의 황제폐하에게 지금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로테아는 머리가 아파질 지경이었다. 이래서는 애랑 연애를 뛰어넘어 혼인해버린 격인데 문제는 어떻게 봐도 상사상애였다.

'좋아. 에델짱 모르게 해결해버리자. 이런건 당사자가 깨닫는게 제일이지만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가극이 인기를 탄건 눈 앞에서 실제로 일어난 전설에 버금가는 활약에 매료 된것도 있겠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이 황제와 황후의 행복한 연애 이야기를 듣고 제국의 상징과도 같은 황실이 굳건하다는걸 느끼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흐뭇하게 지켜보던 황제와 황후가 갑자기 내외한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불안만 가중되겠지. 패왕과 그 날개가 갈라서면 제국이 어찌될까 걱정하는건 당연한 일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제가 선생님을 가르쳐야 할 것 같네요. 선생님은..사랑을 뭐라고 생각해요?"

"사랑..? 나는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일지를 생각해보자면 그 사람 밖에 안보이고 무엇보다 소중하고 아끼는 마음이 아닐까. 다른 사람이 된것처럼 바뀌기도 하고.. 곁에 있는것만으로 행복한.."

소티스는 질려했지만 벨레스는 제랄트의 일지를 읽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벨레스는 행복한 두명의 사랑 속에 태어난 아이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잃은 어머니이지만 그것만으로 벨레스는 안심할 수 있었다.

"어머, 잘알고계시는데 왜 몰라요? 선생님은 에델이 목숨보다 중요하고 같이 있으면 저절로 미소지을 정도로 행복하잖아요. 그건 같은게 아닌가?"

"다르다. 나는 엘의 선생님이야. 연장자로써 엘을 지키는건 당연하고 사랑스러운 제자를 보면 미소짓게 되는건 흔한 일이 아닌가."

"연장자..연장자 말이죠. 그것부터 알려줘야 한다니... 선생님은 분명 우리보다 연상이지만 5년동안 잠든 사이에 우리들은 자랐어요. 어쩌면 선생님보다도 더."

그리 충격적인 일을 지적한것도 아니것만 벨레스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원래부터도 이례적이라는 취급을 받을 정도인 어린 선생님이었던 벨레스는 그때부터도 학생들과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별로 변하지 않는 굳은 표정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휘둘리지 못하는 선생님은 어른스러워 보였을 뿐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흑수리반 뿐 아니라 다른 반까지 합해서 부모님을 잃었다고 무릎을 끌어안고 훌쩍이는 아이는 그다지 없었던 것이다.

"전쟁 때문에 졸업식은 못했지만 모두 한참 전 어른이 됐어요. 에델짱도 물론 어른이고요. 마냥 지켜줘야 하는 존재는 아니라는건 알죠? 세상에..제국의 누구에게 물어도 에델짱이 누구에게 지켜져야 할 사람이라고 안할걸요."

전장 선두에서 중갑을 입고 도끼를 휘두르는 홍염의 여제를 보고 무서워 할지언정 벨레스만큼 감싸안으려고 하지 않을것이다. 뭐 그런 부분에 에델가르트는 매료됐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나는 엘을 사랑하는걸지도 모른다."

"모른다가 아니라 제 주위 러브레터 남발하고 꽃다발 뿌리는 가벼운 남자들이랑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선생님이 제일 진중한 사랑을 하고 계시거든요."

"..하지만 엘은 아닐수도 있잖아. 선생님에게 향하는 친애의 정을 착각하는걸수도 있고 전쟁 중 곁을 지키던 사람에게 주는 신뢰일 수 있어."

사랑을 하면 겁쟁이가 된다고 했던가. 자각하고선 더 불안에 떠는 벨레스를 보며 간신히 한꺼풀 벗겨냈다고 히죽 웃은 도로테아가 턱을 괴며 벨레스를 바라봤다.

"선생님은 무엇이든 마음먹으면 해내는데 그래도 역시 사람의 마음은 모르네요. 이상한 사람이라고, 혹시 사람은 아닌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어요."

"나는..그때는 정말 사람이 아닌 존재였을지도 모르지만, 엘이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줬어."

"후후..누구나 하는 고민을 선생님도 한다니 신기해요. 제가 더 할 수 있는 조언은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상대에게 키스하고 행복해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키스를 하는 에델가르트는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눈을 감아달라는 부탁을 들은 후 벨레스는 충실히 에델가르트가 알려준데로 키스를 할때는 눈을 감았다. 궁중예절에 서먹한 벨레스는 무엇이든 배우면 실천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숨이 벅찰 쯤이면 에델가르트는 훅 초를 불어 껐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에델가르트의 뒤로 쏟아지는 월광이 그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벨레스는 입술의 부드러움과 뜨거운 손길에 농락당한채 의식이 혼미해져 잠들때까지 그 품을 벗어난 적이 없고 에델가르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확인 한 적이 없다.

훌륭한 장군은 일개 병사의 푸념도 충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심지어 도로테아는 이 분야에서 뛰어난 대선배였고 믿을 수 있는 제자였다. 예의를 지키다가 적에게 지는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겠지. 벨레스는 오늘밤 오랜만에 부부의 침실을 이용하기로 했다.

.
.

산더미같은 서류와 격투하고 침실의 문을 여는 에델가르트는 오늘도 싸늘하게 빈 침실과 마주하게 될 것을 슬퍼했다. 혹시 뭔가 잘못한게 있나? 내가 너무 많이 요구했던걸까? 기분이 좋지 않았을까? 어쩌면 의사가 아닌 한네만이나 린하르트에게 맡겨야 했을지도 몰라.

도로테아는 떠나기 전 선생님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며칠째 계속된 외로운 밤이 황제의 뿔을 심리적으로 꺾기 직전이었다. 에델가르트는 내일이라도 당장 스승의 앞에 무릎꿇고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데 빌고싶은 기분이었다.

"선생님?!"

"엘, 오늘도 일이 늦게 끝났나보네. 제국을 위해서 열심히라는건 알지만 네 건강이 더 중요하다는걸 알아줘."

벨레스가 소파에 앉아 책에 가죽으로 된 심플한 책갈피를 끼워 덮고는 붉은테의 안경을 그 책 표지 위에 살포시 올려두곤 일어서 다가왔다. 에델가르트는 기쁘고 벅찬 마음으로 오랜만의 황후의 포옹을 만끽하기로 했다. 도로테아가 옳았다. 무슨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선생님에겐 아무 문제가 없게 되었다.

행복을 만끽하느라 방심했던걸지도 모른다 역전의 용병인 벨레스는 눈 깜짝 할 사이에 에델가르트를 안아들고는 폭신한 침대 시트에 가라앉게 만들었다. 아직 무거운 예복을 벗지 않은 에델가르트의 무게가 그 몸을 깊숙히 파묻히게 만들고 순식간에 벨레스가 위에서 내리누르고 있었다.

황궁에서 유일하게 에델가르트를 정공법으로 제압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황후인 벨레스일것이다. 벨레스의 무게는 평소 에델가르트라면 한손으로도 들 수 있겠지만 큰 움직임을 할 수 없도록 정확히 관절부위를 누르고 있어서 꼼짝도 할 수 없다.

"선..생님..?"

"걱정마라, 엘. 네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을거야. 그냥 오늘은 네 얼굴이 보고 싶어."

"그거라면 굳이 이렇게 움직이지 못하게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지긋히 내려보는 벨레스의 시선에 열이 느껴졌다. 차라리 밧줄로 묶는다던가 하는 방법을 썼으면 억지로 끊어냈을텐데 벨레스가 다칠까봐 에델가르트는 반항 할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꿀꺽, 에델가르트는 드디어 이날이 온것인가 기대 할 수 밖에 없었다. 국혼을 치른 후 아무것도 모르던 선생님을 자신의 색으로 마음껏 물들이고도 에델가르트는 만족하지 않았다. 벨레스가 돌려줄 겨를도 없이 지쳐 무너질때까지 요구해버렸다. 이 사람이 내것이라는 정복욕에 흉포해지는 표정을 숨기려고 불까지 꺼버렸다.

벨레스는 에델가르트가 원하는대로 전부 주었다. 피가 날 정도로 이빨자국을 남겨도 조금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정도였고 밤새 재우지 않아도 에델가르트의 내일의 일정을 걱정했다. 두명 다 평범치 않은 체력을 가지고 있으니 날이 갈수록 더하면 더했지 쉬어가질 않았다.

아무리 새하얀 도화지 같던 벨레스라도 이렇게 농밀한 밀월에 푹 잠겼다면 더이상 모르는채로 있을 수 없겠지. 무표정에 숨겨져있던 벨레스의 전투광적인 면을 검술 뿐 아니라 다른곳에서도 보길 바래왔다. 에델가르트는 전쟁이 끝나도 여전히 벨레스의 명령에 따라 전장을 가로지르던 안심감을 잊지 않았다.

"사랑한다, 엘.."

"서, 선생님..!"

얼굴 이곳저곳에 내려앉는 버드키스. 깊은 감정을 박아넣도록 파고들어오는 뜨거운 혀. 달콤한 숨결이 안중은 간지럽힌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오는 감촉이 감미롭다. 소중하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오늘 처음 들었다. 에델가르트는 얼굴부터 귀 끝까지 새빨개졌다. 행복에 겨워 눈물이 그렁거릴 정도였다.

사실 에델가르트라고 벨레스가 사랑에 대해 잘모른다는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봐왔던 에델가르트야말로 이 사람이 감정에 아주 어리숙하단 것을 제일 잘 알고 있을것이다.

단지 아버지의 말을 따랐을 뿐인 반지에 재빨리 족쇄의 기능을 덧붙여버린것은 절대로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했기 때문이다. 벨레스는 책임감이 강했고 제자들에게 약했다. 일단 둘러싸버리면 떠나지 못할것을 알았다.

시간을 들여 애정을 보이면 언젠가는 알아주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오늘이라니. 이보다 더 행복 할 수가 없었다. 딱 벨레스가 눈물을 방울 방울 떨어뜨리기 전까지는.

벨레스는 눈물을 닦으려고 노력하면서 에델가르트의 위에서 비켜섰다. 제랄트를 잃은 날 만큼이나 흐르는 눈물을 다 닦을 수는 없었으나 덕분에 에델가르트는 구속에서 풀려나 떨리는 벨레스의 어깨를 감싸 안을 수 있었다.

"선생님, 무슨 일이야?! 왜그래? 역시 병이.."

"미안하다, 에델가르트.. 네가 억지로 하고 있는 줄 몰랐어. 울정도로 싫었는데 내가 반지를 준 바람에.. 괜찮아. 네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해도 난 곁에 있을거야. 지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라."

"하아..? ..선생님. 처음부터 말해봐."

벨레스의 말 전부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에델가르트는 단숨에 냉철해졌다. 방금까지 부글거리던 열이 식어서 사라졌다. 홍염의 황제에 걸맞은 불길같은 열망도 반려의 눈물 앞에서는 맥을 못추린다.

벨레스를 차분하게 만들기 위해 준비한 베르가모트티의 향기가 침실을 가득 채울때쯤에서야 반려가 조감씩 말문을 텄다. 모든것을 들을때쯤엔 에델가르트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양손에 푹 얼굴을 파묻을 수 밖에 없었다. 아직도 벗지 않은 붉은 건틀릿이 금속의 차가운 기운으로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주었다.

에델가르트는 분통이 터져 이 모든 일의 발단은 아니지만 악화 일로를 걷게 한 멍청한 귀족 자제에게 마땅한 처분을 내릴것을 속으로 맹세했다. 이 과정에는 자신의 충실한 신하 휴베르트 폰 베스트라가 함께 할 것이다.

"선생님, 우선 난 절대 싫어한 적 없어. 오히려...그...좋아하는편이지. 바쁘지만 않았다면 하루종일 침대에서 단 둘이 보내고 싶을 정도야."

"단것을 먹으면서 빈둥거리자던 약속은 잊지 않았다."

"그래, 그것도 함께. ..그리고 그 편지는. 그 전날 저녁 문틈에 끼어있었어. 감히 황제의 침실 문에 검수를 하지 않은 편지를 끼워넣다니.. 세작이 숨어있을지도 모르니까 휴베르트에게 전해 줄 생각이었지. 밤을 보내는 동안 무심코 잊었지만.."

불찰이었다고 말하는 에델가르트는 붉은 얼굴을 숨길 수 없었다. 제국의 중대사를 황후와 사랑을 나누는데 열중해서 잊어버리다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럼...엘, 너도 날 사랑해..?"

축 늘어진 눈썹의 강아지 같은 눈을 한 벨레스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쳐다보는것을 본 에델가르트는 날라가려는 이성의 고삐를 있는 힘껏 잡아챘다. 곧 필요없어지겠지만 지금만큼은 앞으로를 위해 꽉 잡아둬야했다.

"선생님이 날 선택했을때부터, 아니 혹시 그보다 전부터.. 난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 앞에만 서면 나는 무너져.. 당신만큼은 내 적이 아니길 바랬어.. 당신과 같은 길을 걷고 싶었어.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난 앞으로도 평생 사랑 할 일이 없을거야."

"엘...나도 그저 이 감정의 이름을 몰랐을 뿐인것 같다. 심장이 뛰기 전부터 눈치채지 못했을 뿐 내가 처음으로 스스로 선택했을때부터 난 널 이미 사랑했을지도 몰라."

활짝 웃는 얼굴에는 이제 확신에 찬 사랑의 감정이 담겨있었다. 어설픈 한걸음이지만 그러니까야말로 첫사랑인걸지도 모른다. 이내 에델가르트는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을 풀어해쳤다. 하여튼 아머로드인 에델가르트에게 기마술은 전혀 필요가 없었고 단련되어있지 않은것이다. 제자의 부족함은 선생님이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

에델가르트는 자신이 얼마나 절망적일 정도로 사랑에 굴러떨어졌는지 당사자에게 직접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 오늘은 촛불을 끄지 않기로 했다.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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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새벽녘, 아직 새도 울지 않는 시간에 벨레스는 숨을 들이켜며 경직된 채로 잠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쓸면 손가락 끝이 놀랍도록 차가웠다. 심장이 뛰기 시작한 이후로 온기를 잃은 적이 없는 신체가 이렇게 한기를 띄는건 요새들어 부쩍 늘어난 일이었다.

그럴때마다 벨레스는 꿈 속의 이야기가 조금씩 자신을 침범해오는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풀어발해지지 않았다고, 모든 것은 착각이라는듯이. 너는 인간은 아닌 다른 무언가라고 말하는것 같았다.

"으음...선생님..?"

"....엘."

깨워버려서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전에 에델가르트는 벨레스를 끌어안아 토닥여줬다. 두근두근..일정한 박자로 뛰는 고동소리가 벨레스를 달래줬다.

며칠째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에델가르트는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느라 이 시간에 깨버리는것은 분명 치명적일텐데 에델가르트는 결코 피곤한 기색도 내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선생님..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도대체 어떤 꿈을 꾸는지 알려줄 수 있어? 나라도 선생님의 고민을 나누어 받고 싶은데."

신경써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닌 에델가르트에게 벨레스는 도움이 될지언정 조금의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걱정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용병의 삶에 의한 영향도 적지 않았고 무엇보다 언제까지나 벨레스에게 에델가르트는 지켜줘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황제가 된 에델가르트는 이제 벨레스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몰랐지만.

그렇기에 더욱 벨레스는 말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무너뜨릴 수 밖에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것이 도리어 걱정을 불러일으킨다면 자신의 감정은 사소한 문제였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보다 걱정어린 시선을 보내는 에델가르트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어떤것이라도 이미 끝났다. 그러니까 말하든지 말하지 않든지 변할것은 없을것이다.

"엘. 만약.. 만약에, 시간을 돌리는 힘이 있는 사람이 한사람을 구하기 위해 몇번이나 세상을 되돌려버렸다면..용서받을 수 있을까."

"...글쎄. 만약 내가 되돌려진 세상에 살던 사람이라면.. 원망하려나. 노력도, 괴로워도 참고 견딘 인내의 시간도. 전부 없었던것이 되버리는거니까."

신을 저버리고 인간의 시대를 연 황제다운 말이었다. 단 한번의 삶, 제한된 시간을 살기에 필사적일 수 있고 실력과 노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이 땅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벨레스가 아는 에델가르트였다.

그러니까 자신은 옆에 있을 자격이 없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은 순진하게 그 옆을 차지해버렸지만 그래서는 안됐었다. 비록 아무도 몰라도 죄는 처벌받아야하고 죄인은 빛 아래에 설 수 없다.

그렇다면 벨레스는 차라리 자신의 반려이자 최대의 피해자. 사랑하는 에델가르트에게 처단 받고 싶었다. 그것이 벨레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라고 믿으니까.

"어떤 사람이 있었어. 태어날때부터 울지 않고 웃지도 않고, 감정이 없는것 뿐 아니라 심장까지 뛰지 않았지."

"선생님..?"

에델가르트는 갑자기 시작된 이야기의 서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이 누구를 가르키는것인가 모르지 않았기에 잠자코 벨레스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자란 그 사람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악마가 되었다. 동정하지 않아도 돼. 그 말을 들어도 악마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았거든. 슬프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자랑스럽지도 않았어."

잿빛악마.

에델가르트의 머릿속에 단어가 떠올랐다.

그때는 나름 유명한 용병이 선생님으로 들어왔네 정도였지만 생각해보면 악랄한 비방이다.

학교에서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벨레스는 죽이지 않을 수 있었다면 절대 그런 행동을 할 인물이 아니다. 일로써 죽였다면 병사가 하는 일과도 다름없었다.

용병도 병사도 무기도 매한가지. 잘못 쓴 사람이 잘못한것이지 명령을 들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하는것은 이 어찌나 얕은 생각인지.

"우연한 기회로 악마는 힘을 얻었어. 잘 쓰기만 한다면 어떤 싸움도 절대 질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 ...시간을 되돌리는 힘."

"?!"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벨레스다. 벨레스의 과거이야기는 본인이 잘 말하지 않으므로 우연히 흘리듯 나오는 정보로 밖에 알 수 없지만 뛰지 않는 심장, 잿빛악마로 충분히 유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벨레스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위인이 아닌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에델가르트라도 이게 정말 사실인가 의심 할 이야기였다.

납득은 갔다. 에델가르트가 아는 한 벨레스는 한번이라도 진적이 없다. 압도적 전력차라도 최소한의 손해로 무조건 이기는 그 모습은 바야흐로 패왕의 날개.

전장의 지휘를 잡아본 사람들은 전부 의문을 안을 수 밖에 없었을 정도로 갑작스런 매복이나 안개 속 적까지 벨레스는 미리 알고 있었던듯 모두를 이끌었다.

말 그래도 모두 미리 알았다면..

"그 힘은 최초.. 악마가 도적의 도끼로부터 한 아이를 구할때 쓰였다. 어리석게도 사람을 구한건 좋았지만 그 도끼에 악마가 죽을뻔 했거든. 감정이 없으니 제 목숨이 소중한지도 몰랐던거야."

"선생님..그건..."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때 분명 벨레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도끼를 검으로 날려버렸다. 압도적이었다...로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사실은 거기서 벨레스가 죽을 뻔 했어...? 에델가르트는 살짝 한기가 들었다.

"그 뒤로는..그 공적을 높게 사 선생으로 고용되었지. 거기서 제자들을 만나고 점점 악마는 사람이 되어갔다. 꽃도 기르고 낚시도 즐기고 다과회에서는 상대와의 대화에 온 신경을 기울였지. 점차 웃기도 했어."

갈라설 미래를 생각하며 괴로웠지만 행복했기에 더욱 잃는것을 두려워했다. 에델가르트에게도 무엇보다 소중했던 추억이다.

"...하지만 이 손으로 제자를 베었다. 그래야한다고 생각했지. 선생님을 하고 있었지만 악마는 용병이었어.고용된 이상 고용주를 따라야했다. 그리고 모든것이 그 제자가 악마의 적이라고 가리켰어."

"베었...다..?"

기억과는 전혀 달랐다. 모든 상황과 조건이 전부 에델가르트와 벨레스의 길이 다르다고 말해왔는데도 벨레스는 그 순간 동족에게 등을 돌렸다.

"전쟁이 일어나고, 악마가 5년의 잠에 들고. 깨어나서. 사람을 죽이는데에 특출난 악마는 이겼다. 그 힘이 있는 한 실수도 없었으니 질 방법이 없었지. 결국 전쟁을 일으킨 제자의 목을 베었지."

"..."

몇번이고 생각했던 끝이었다. 벨레스와 다른길을 걷는다면 이럴지도 모른다고 정말 셀 수 없이 많이 생각했었다. 있었을지 모르는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정말 있었던 길이다.

"여기까지라면 아직. 악마라고 말 할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그때는...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주위에 휩쓸려서, 목숨을 위협받고..피해자였지."

"맞아. 아마 나는.. 선생님이 날 처단했다면 납득했을거야. 진다면.. 선생님에게 지는게 나을거라고 생각했을거야.."

"엘.. 너는 나를 너무 믿고 있어. ..그 이후에 악마는 인간으로써의 길을 벗어났다. 진정 그 몸의 힘과 일체화했는지 주변의 모두가 죽어도 악마는 죽지 않았어. 본능적으로 아마 앞으로도 죽지 않을거란걸 알았어. 어쩌면 영원히."

에델가르트는 저절로 레아, 세테스, 흐렌을 떠올렸다. 그들은 기나긴 세월을 늙지않고 살아갔다. 누가 죽이지 않으면 영원히 살지도 모른다.

신의 힘을 잃은 지금도 벨레스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가끔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일대 다수라도 검 하나로 아무렇지 않게 이겨냈다.

"그 영원의 시간동안 악마는.. 공허했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제자를 처단한 그 순간을 떠올렸지. 그때는 불가능했지만 완벽히 힘과 일체화 한 지금이라면 어떨까? 부족한가...그래, 되돌리는 시간 안에서 스스로를 유지하는 힘까지 더하면..악마는 되돌아갔다. 자기 자신까지."

아마 다른 사람의 심정따위 생각하지 못했을거다. 스스로에 대한 감정도 잘 모르는데 타인이 이 결정을 어떻게 생각할지 깊게 생각했을까? 이기적인 선택이었지.

읊조리는듯한 회고는 어느세 다시 끝으로 향하고 악마는 두번이나 더 제자의 목을 베버렸다. 스스로의 기억조차 되돌아가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목적을 모르는데 어떻게 이루겠는가.

다 끝나고 혼자남으면 악마는 꿈으로 기억을 되찾았다. 그 전 세상보다 더 시간이 흐른뒤에. 자신의 힘이 미치지 않은 미래의 시간에서. 도박이 실패한걸 깨달은 악마는 다시 되돌아가는 시간속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이번은 빨랐어. 힘을 잃었기 때문일까? 그게..내가 악몽을 꾸는 이유야, 엘. 이 손으로.. 난 세번이나 너를 죽이고. 세번이나 세상을 지워버렸어."

가만히 에델가르트를 바라보는 벨레스의 표정은 지극히 담담했다. 어떤 비난이라도 받아들이겠다는 처연함이 느껴졌다.

에델가르트는 참을 수 없어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부정할 생각도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비난의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자신과 같은 길을 걷기 위해 벨레스가 한 일들이 환희의 감정을 일으켰다.

이성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한 벨레스를 다그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벨레스가 아니라면 이런 결말은 이룰 수 없었다는걸 감사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해?"

"...엘만 괜찮다면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지게 해줘. 아무도 이 이야기를 믿지 않겠지만 사실이 없어지진 않아. 나는..처벌받는다면 엘, 네가 좋다."

스륵 감긴 눈매는 각오로 단단하게 닫혀있었다. 비록 이미 힘을 잃어 사람이 되었다지만 그 어떤 여신의 권속보다 중대한 대죄를 지었다. 에델가르트는 충분히 그 목숨을 거둘 권리가 있었다.

그런 벨레스의 뺨을 에델가르트는 손끝으로 스륵 쓰다듬었다. 말라붙은 눈물자국이 선연했다. 얼마나 고통받고 있을까? 에델가르트 자신을 위해 저지른 죄악에.

"선생님은 고작 목숨으로 이 모든걸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해?"

"...무엇이라도 하겠어. 힘은 사라졌지만 이 몸에는 대사교가 진행한 시술의 흔적이 있어. 태어나자마자 심장이 뛰지 않은 아이가 살아났을 정도다. 연구의 가치는 있겠지."

스스로를 연구자료로 쓰라는 말에 그 고통을 저에게 들어 모르지 않을 벨레스가 그만한 각오를 표하고 있다는것은 알지만 자신을 한없이 가볍게 취급하는 말이 거슬렸다.

"그런것은 이 제국에도 나에게도 필요하지 않아. 사라져야 할 것들이니까."

"..그렇다면, 어느 사지로든 출전시키면 된다. 네가 바란다면 기꺼이 이 목숨이 끊어질때까지 적들을 베어낼 수 있어."

천부적인 지휘능력을 제외해도 벨레스는 그 혼자서 왠만한 적들은 종잇장처럼 해치울 수 있었다. 소모를 신경쓰지 않는다면 그만한 전략병기도 없을 것이다.

"제국은 이제 선생님이 필요할 정도로 적이 많지 않아. 최대의 적도..전부 배제했으니까. 브리기트와 팔미라도 지금은 교역이 활발할 정도로 관계가 개선되었어."

"...에델가르트. 나도, 내가 가진것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걸 알고있어. 네 옆에 있을 권리도 기억을 되찾은 지금 없어져버렸지. 그런 내가 너에게 처벌을 바라는것은 사치라는걸 알고 있다. ...네 눈앞에 영원히 나타나지 않겠어. 허락한다면 멀리서나마 널 돕고 싶었지만, 욕심이었군."

고개를 떨군채로 벨레스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용병생활이 긴 벨레스는 별다른 짐도 필요없었다. 옷가지와 검만 챙기면 바로 궁을 나갈 생각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제 손으로 에델가르트의 목을 베고 나서 그렇게 괴로웠는데 에델가르트에게 같은 아픔을 주려고 했다니 어리석었다.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죄였다. 그렇다면 스스로 처벌하는 수 밖에.

"기다려!"

일어나 떠나려는 벨레스의 팔을 에델가르트가 다급히 잡았다. 급한 마음에 힘조절도 하지 않았는지 아픔이 느껴질 정도였다.

"엘..?"

순간 이제는 에델가르트라고 불러야할까..고민했지만 벨레스는 이제 그 이름으로 불러 줄 사람이 남지 않을텐데 마지막까지 불러주는게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뒤돌아본 에델가르트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어 기분탓인지 조금 울상이었다. 무심코 죄인을 만류해서일까? 유일한 안식처에 배반당했으니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벨레스의 마음이 죄책감으로 바늘에 쑤시듯 아파왔다.

"어째서 선생님은 그렇게 자신의 가치를 몰라? 제국에도, 군대에도 선생님을 대체할건 수없이 많지만 나한테는 선생님이 전부인데.. 선생님만 있으면 되는데..."

"엘....."

"벌을 받고 싶으면 영원히 내 옆에서 갚아. 궁이 답답해서 떠나고 싶어져도, 죄악감에 무너져 그만두고 싶어져도. 진정 날 위한다면 선생님이 나한테 그만한 존재인것을 자각해. 모른다면 이해하려고 노력해."

에델가르트라고 모르는것이 아니었다. 감정에 미숙한 벨레스가 자신을 선택한것은 나이 어린 아이가 첫사랑에 빠져 미래의 가능성을 버리는것과 같다. 벨레스는 그날 그때에 처음 태어난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더욱 자신만큼 필사적이게 애타길 바라고 다른 누구에게 잠시라도 시선을 두면 불안했다. 혹시라도 벨레스의 감정이 성장하기에 따라 이것이 착각이라거나, 더 좋아하는 사람을 찾았다고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에델가르트는 폭군이라고 불릴 일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하지만 엘...나에게 그런 자격 따위 없어. 나는 너 뿐만 아니라 모두를 기만하고 배반했다. 어떻게 네 곁에 있을 수 있지? 나는 행복해선 안돼. 너를 구하기 위한 선택 때문에 대신 죽어버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이 세상에 도달하기까지 살았던 자가 죽고, 죽었던 자가 살았던 경우를 벨레스는 여러차례 봤다. 시간을 돌리는 힘은 만능이 아니다. 없는 경우의 수를 만들어낼 수는 없고 희생은 제로가 될 수 없다.

대표적으로는...그래, 푸른 사자의 왕은 이제는 없다.

"선생님도 모르는게 있구나. 나도 선생님이랑 같은 길을 걸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 무엇보다도 바라지만...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건 누가 정하는거야? 죽은 전사자들? 아니면 그 가족? 신을 믿던 신봉자들?"

"..그 모두가 아닐까."

에델가르트는 그만 푸훗 웃어버렸다. 그들이 누군가를 원망해야 한다면 절대 벨레스는 아니었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벨레스가 시간을 돌려서가 아니었다.

전부 에델가르트가 패도를 걷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이것만큼은 벨레스도 결코 바꾸지 못했다. 어느 세상에서도 에델가르트는 전쟁을 일으켰으니까. 수 많은 경우의 수에서 어느 에델가르트도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시체의 산을 쌓기로 결정했다. 벨레스는 말려든것이다.

아마도 벨레스는 말하지 않은게 있다. 이야기 속에서 모든것이 끝났을때라고 흐리멍텅하게 축약했지만 에델가르트가 죽은 세상은 분명 벨레스가 에델가르트에 대해서만 괴로워 했을 정도로 후회없이 평화로웠던것이다.

에델가르트의 패도가 틀렸는지 아닌지는 아직 보지 않은 미래의 후손들이 평가할테지만 적어도 에델가르트의 패도가 실패한 길은 스승이 보기에 적어도 실수는 아니었다.

"승자의 의무를 지켜 벨레스. 승자는 패자의 몫까지 행복해야해. 전쟁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되지 않도록. 그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게 아무 의미가 없는것이 되지 않도록."

"...전쟁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

"아니, 남아. 남도록 해야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이 모든게 희생 위에 세워졌다는걸 잊지 않고 그 피웅덩이 위에서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야해."

그리고 에델가르트의 행복을 위해 벨레스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반려였다.
벨레스에게 그렇듯이.

"사랑하는 사람 옆에 있을 자격은 다른 누가 주지 않아.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에게 주는거지. 그러니까 벌을 받고 싶다면 시간을 돌린것 때문에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되새기며 내 옆에서 행복하도록 해."

이것이 억지라는건 에델가르트라도 알고 있다. 죽을때까지 살기로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 복수에 불타는 왕이 자신의 삶을 대가로 에델가르트가 행복하길 바랄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선 모두가 불행하다. 살아남은 사람은 나름대로 자신이 납득할 변명을 지어내며 살아가야한다.

야비하고도 기만적인 방식이지만 죄악감에 붙들려만 있으면 발전이 없지 않은가.

"정말...그래도 되나..? 하지만, 내 손은 네 피에 물들었는데.."

"그러니까 벌로써 선생님은 절대 내 곁에서 떠나면 안된다니까. 자, 이걸로 이 이야기는 끝. 오늘도 일이 많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자두고 싶어."

망설이는 벨레스를 꼭 끌어안고 에델가르트는 그 심장 소리를 듣기 위해 다가붙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사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아무도 모를 이야기였고. 에델가르트는 벨레스가 자신에게 한 사랑의 고백을 누구에게도 말해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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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깔 비웃는 소리와 질척한 피냄새가 진득한 이상한 총천연색의 공간 안에서 이로하는 숨을 쉴 때마다 손끝, 발끝으로부터 힘이 빠져나가는걸 느꼈다.

살기 위해 호흡하는데 숨을 쉴때마다 생명이 흘러 사라지는 무력한 느낌.

그것은 이 손으로 붙잡지 못한 가여운 그 아이를 생각나게 했다.

"아직 늦지 않았어. 소원을 빌고 마법소녀가 되면 넌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어. 자, 마녀에게 죽고 싶지 않지? 어서 소원을 말해줘, 타마키 이로하."

봉제인형 같이 생긴 이상한 하얀 생물이 하는 말은 이 공간만큼이나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소원? 무슨 소원을 빌라는걸까.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좋았을텐데.. 이미 모든걸 다 잃었는데 도대체 뭘 바라라는걸까.

괴롭지만, 무섭지만.. 이대로 죽어서 그 아이가 기다리는곳에 가는것이 행복이지 않을까?

"그걸로 만족하는거야?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쉬운 일이네. 아주 작은 소원이라도 괜찮아. 지금 당장 살고 싶다는 어때?"

살아서? 살아서 뭘 하는데?

이미 소중한것들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영원히 주울 수가 없는데.

아아..그 아이도, 나도 무슨 죄가 있었던걸까?

"무엇이라도 괜찮아. 원한이라도 행복이라도 바라는게 있다면 단 하나만 이뤄질거야."

원한..?

몽롱한 정신이 그 순간 뚝 둑이 터진듯 휘몰아쳐왔다.

그 아이는 왜 그렇게 죽었어야 했나. 나는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아무것도 잘못한게 없는데.

전부 다 죽어버렸으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우이가 죽고 장례식도 끝나 우이가 땅속에 잠들게 된 이후였다.

모두 슬퍼했었는데, 이제는 미래를 봐야 한다고 말한다. 우이는 미래를 꿈 꿀 기회를 영원히 잃었는데.

우이에게는 나 뿐이다.

어머니도 아버지고 이미 추스리고 일어서 버렸다. 우이를 기리는건 나만이다.

세상은, 사람들은 우이가 죽었는데도 아무렇지 않다. 다들 웃고 떠들고 기억하지 않는다.

우이가 죽어도 변함없는 세상따위 필요없다.
이런 세상따위 전부 없어져버렸으면.

"어서 소원을 빌어. 빨리!"

"이런 세상따위 필요없어.. 전부 다 부숴버리겠어.. 그때까지 나는 죽을 수 없어!"

산소가 부족해 일하지 않는 뇌는 정리되지 못 한 바램들을 뒤섞어 흩뿌려 놓았다.

"이로하, 네 소원은 엔트로피를 능가했어."

그것이 마법소녀 타마키 이로하의 기원이었다.

.
.

카미하마시에는 주변보다 마녀가 많지만 월등히 강력하다. 보통 마법소녀로는 사역마를 잡는것도 힘들 수 있고 숙련된 마법소녀도 고전 할 정도다.

나나미 야치요는 그런 카미하마시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아온 베테랑 마법소녀로 동료가 없어도 단독으로 마녀사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에 자신이 있다.

그러니까 다른곳에서부터 온 마법소녀가 눈앞에서 죽는것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조금 위협을 담아서 도와주는 김에 밖으로 쫓아내기도 하고 있었다.

대학생, 모델, 마법소녀를 겸임하는 야치요가 언제나 주시 할 수 있을리도 없고 늦은 경우도 많지만 여유가 있을때는 언제나 패트롤을 하고 있다.

"..늦었나?"

피웅덩이 위, 골목의 벽에 기대 앉아 있는 본 기억이 없는 교복 차림의 여자아이는 그리프시드를 손으로 그러안은채로 눈감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녀와 서로 마지막일격을 주고받았는지 마녀의 결계도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다행히 죽지는 않은것 같지만.. 미타마에게 데려가야겠네."

야치요는 치유가 특기는 아니므로 이만큼 중상을 입은 마법소녀는 조정상에 데려가는게 빨랐다.

이번은 살아남았지만 강한 마녀와 또 싸울지도 모르니 향후를 위해서라도 조정상을 만나는건 이 아이에게 좋은 일이기도 하다.

방침을 정하고 소녀를 안아올리기 위해 다가가려고 하는데 야치요의 발치에 분홍빛 화살이 박혔다.

"다가오지 마."

변신이 풀렸을 정도로 다쳤는데도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는지 노려보는 시선이 날카롭다. 그 짧은 순간에 교복을 검은 로브로 바꿔낸 마력은 소름끼칠 정도로 적의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일어설 힘도 없는 신체를 억지로 움직인건지 석궁을 매고 있는 팔이 스르륵 바닥을 향한다.

"당신, 그대로 있으면 죽을거야. 처음보는 마법소녀를 경계하는건 이해하지만 도우려는 사람이랑 적 정도는 구분하는게 어때?"

"내버려둬.."

눈을 뜨고 있을 힘조차 잃었는지 스르륵 감기는 눈꺼풀은 통각차단을 할 여유도 없는지 고통에 떨리고 있었다.

예상외의 반항이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춘 소녀에게 다가가서 야치요는 마녀화 직전처럼 보이는 새까매진 소울젬에 자신이 가진 여유분의 그리프시드를 가져다 대었다.

맑게 정화된 소울젬은 밝은 분홍색. 들어올린 신체는 지나칠 정도로 가벼웠다.

바르작대며 벗어나려는 몸짓은 새끼고양이와 다를 바 없이 허약해서 꽉 힘을 줘 안으면 얌전해져버렸다.

"어차피 안죽으니까 내려놔.."

"이런 신체로 그런말을 해봤자 아무도 믿지 않아. 용케 마녀를 이겼네."

"나랑 상관도 없잖아."

"누구라도 이런 상태의 사람을 보면 처음봤든 아니든 도우려고해."

"도우라고 한 적 없어."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면서도 최대한 부담이 안가게 편한자세로 안아들고 다른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하는건 꽤 힘든 일이었지만 이런 상태에서 환자가 정신을 잃는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미타마. 응급환자. 부탁할 수 있어?"

"어머, 야치요. 지금 손님은 없지만..그 아이 어디도 다친데는 없어보이는데? 피투성이지만.."

"응..? 그럴리가. 분명히 피를 엄청 흘렸는데?"

"그러니까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잖아. 나는 이제 가야겠어."

턱 야치요를 밀치더니 비틀비틀한 발걸음으로 걸어간다. 치유마법을 쓴 흔적도 없는데 그 어디에도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따라가지 않아도 돼? 다친곳은 없지만.. 또 마녀라도 만났다가는 이번에는 죽을지도 모르는데."

"..실례했어."

히죽히죽 웃는 미타마의 표정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지만 확실히 아직 경고도 하지 못했고 저 상태로 보냈다가는 어딘가에서 또 쓰러질것 같았다.

비척비척 걸어가는 모습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인데 소녀는 집에 돌아갈 생각이 없는지 또 다시 어스름한 뒷골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디 가는거야? 집은? 그러고보니 이름은?"

"..."

대화해봤자 쫓아낼 수 없다는걸 알자마자 소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날도 저물어가고 지하철도 곧 끊길 시간인데 사람이 없는 뒷길만 헤매고 다니는 모습은 집에 돌아갈 마음이 없어 보였다.

결국 야치요는 가출을 했던지 아니면 돌아갈곳이 없던지 이 혼자두기 불안한 소녀를 데리고 돌아가기로 했다.

물론 이번에는 기운을 꽤 차렸는지 반항이 거칠었지만 이래봬도 카미하마시 마법소녀들의 최연장자. 밖에서 온 것 치고 이상할수록 강했지만 제압해냈다.

"놔! 놓으라고! 납치범으로 신고할거야!"

"네.네. 할 수 있으면 해보면? 가만보니 스마트폰도 없는것 같은데.."

옆구리에 끼인채로 바동바동 움직이는 모습이 꽤 귀엽지만 머리치장 바로 밑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간 화살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사나운 성격같다.

서슴없이 소울젬을 노리는 모습을 보건데 험악한 지역의 마법소녀였을까? 아니면 계속 따라다니는 야치요가 음울한나머지 위협한걸지도 모른다.

신고해보라곤 했지만 이런 모습이 눈에 띄어서 좋을건 하나도 없으므로 야치요는 일단 소녀를 집에 데리고 들어갔다.

사람 한, 둘은 커녕 서너명도 재울 수 있는 하숙집이므로 오늘 하루 재우고 사정을 탈탈 털어볼 생각이다.

"왜 나따위를 신경쓰는거야? 곤란한 마법소녀는 지천에 널렸고 마녀에 죽을뻔한 사람은 그보다 더 많은데."

야치요가 이 소녀를 책임 질 필요는 물론 하나도 없다.

집이 없든 가출을 했든 지금까지 구해주고 쫓아내버린 마법소녀들을 데리고 집에 간 적도 물론 한번도 없다.

"삶을 포기한것 같은 눈이 마음에 안들어서..일까?"

"하? 쓸데없는 참견이야."

그러면서 앞머리를 헝클어트려 눈을 감추는 모습이 기세등등한 말과는 다르게 소동물 같았다.

가만보면 신체도 지나치게 가볍고 눈 아래에 기미도 진하다.

"내가 죽더라도 당신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잖아."

"당신이 아니고 나나미 야치요. 상관없을지 아닐지는 내가 정하는거야. 그래서, 당신의 이름은?"

"...타마키 이로하."

날이 선 말들을 내뱉으면서도 욕은 하나도 하지 않고 이름을 들으면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꽤 성실한 성격인것일까.

"씻고 나면 늦은 저녁을 먹고 자고 가도록해. 이미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까. 연락해야 할 상대는 있어?"

"없어. 그 사람들은 어차피 나한테 관심 없으니까."

보호자는 있는 모양이지만 없느니만 못한 상태인것 같다.

이래서는 내일 풀어줘도 카미하마시에서 나가지 않고 또 돌아다니다가 같은 일이 벌어질것 같다.

"교복을 입고 있던데 학교는? 돌아갈곳은 있니?"

"왜 그렇게 나를 신경쓰는지 모르겠지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참견 끝났으면 내려줘."

어차피 이미 집에 도착했으니 씻으려면 내려줄 수 밖에 없다. 이로하의 말대로 과한 참견인것은 알고있는 야치요는 조용히 이로하를 내려줬다.

당장 도망갈 생각은 버렸는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이곳저곳 둘러보는 모습이 마치 길고양이 같은 이로하는 야치요가 씻으라고 수건을 던지면 반사적으로 잡아채더니 한숨을 푹 쉬고는 야치요가 손으로 가르킨 욕실로 향했다.

말로는 실컷 반항하는 주제에 꽤 순응적인 태도였다. 나쁜아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야치요는 무심코 오늘 처음 만난 마법소녀에게서 경계를 풀어버렸던것이다.

그것을 후회한것은 주변이 침묵으로 가라앉은 새벽.

목에 느껴지는 시리도록 차가운 감촉과 몸을 짖누르는 무게에 눈을 떴을때였다.

"역시 베테랑은 다르네..지금까지 한번도 죽이기 전에 눈치챈 마법소녀는 없었는데.."

창밖에 훤히 빛나는 달에 음영이 진 얼굴은 형형한 눈동자 밖에 보이지 않았다. 웃고있는것인지 울상을 짓고 있는것인지 야치요는 판단 할 수 없었다.

단지 하나 알 수 있는것은 이로하에게 이것은 일상이고 아주 익숙해진 일이라는것. 방심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야치요는 오래 살아남은 마법소녀다. 이렇게 쉽게 급소를 내어준적은 단연코 한번도 없다.

"뭐야. 겁먹지 않아? 울어도 외쳐도 살려줄 생각은 없지만. 혹시 누군가 도우러 올지도 모르잖아?"

"글쎄. 이 주변에 사는 마법소녀는 없어서. 그리고, 바로 죽이지 않았다는건 무언가 용건이 있는거겠지, 암살자씨?"

"..하, 마법소녀 경력이 긴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지도.. 날 죽여줘. 아니면 날 죽일 수 있는 마법소녀를 소개해줘."

처음부터 요구조건을 듣게 하려고 위협했는지 의문에 고개를 까딱하는 야치요에게 오히려 이로하가 동요해서 나이프를 살짝 치우는게 보인다.

"엉뚱한 자살지망자를 주워와버린 모양이네. 죽고 싶다면 적당한 마녀를 찾아서 특공해보면 되지 않아? 아까도 거의 다 죽어가고 있었으면서."

"말했잖아. 나는 죽지 않아. 소울젬이 부서져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뿐.. 이 세상이 없어질때까지 죽지 않을거야. 그게 나의 소원이었으니까."

"..보통 그렇게 소원을 남에게 알려주는 마법소녀는 별로 없는데. 경솔하구나."

"죽지 않으니까."

소원은 곧 마법소녀의 고유마법.

그리고 기원이다..

마법을 알려진다는건 곧 전투할 때 약점을 찔리기 쉬워진다는것이고 소원 자체가 마법소녀의 가장 소중한게 뭔지 알려주는거나 마찬가지이므로 마음의 약점이기도 하다.

"못믿겠으면 확인해도 좋아. 자, 여기. 이대로 찌르면 내 소울젬은 부서지고, 죽겠지? 누르기만 하면 돼."

야치요가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이로하는 나이프를 야치요의 목에서부터 자신의 목을 향해 바꿔들고는 야치요의 한손을 꾹 나이프의 손잡이에 밀어붙여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얹는다.

날 끝으로 사람의 영혼에 닿는것은 소름끼치는 감각이었다. 자신의 손짓 하나로 한사람의 운명을 부숴버릴 수 있는 위치는 마치 자신의 소원과도 같이 불쾌감을 느끼게 했다.

"왜 망설이는거야? 눈 앞에서 사람이 죽는 모습은 마법소녀라면 수도 없이 봐왔을텐데. 당신, 혹시 사역마까지 다 잡는 타입의 마법소녀?"

업씬여기듯 목소리를 낮게 깔고 물어보는 이로하는 야치요가 부정하지 않자 하, 하고 기가막힌 소리를 내었다.

"그럼, 이건 어때. 당신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나는 이 거리의 마법소녀들을 죽이고 다닐거야. 그러면 마녀를 잡을 사람이 없고 결국 사람들이 죽어나가겠지. 마지막으로 마녀를 사냥하면 간단하게 이 세상은 무너져. 어때? 죽일 마음이 들었어?"

"읏.."

꾹. 무심코 힘을 주고 만 나이프의 끝이 이로하의 소울젬을 긁어 내렸다. 마법소녀에게는 이것만으로 치명상이다. 금이 간 소울젬 때문에 영원히 깨어나지 않은 마법소녀도 있다.

야치요는 자신의 실태에 숨을 들이키며 서둘러 손을 떼어놓아버렸다.

"인내심이 강하네. 부숴뜨리는게 더 확실한 증명이 됐을텐데..봐. 끔찍하지? 잔혹하지 않아? 누구에게나 평등히 내려질 영혼의 안식을 빼앗긴 모습이 어때."

분홍빛의 희미한 빛이 감돌며 서서히 소울젬이 회복되어가는 모습은 이로하의 말과는 다르게 오히려 눈앞에서 기적을 선보이듯 성스러워보였다.

하지만 어두운 방 안에 생긴 희미한 광원의 덕분에 보이게 된 이로하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뚝뚝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어서 아, 그녀에게는 이것이 저주구나라는걸 말해주고 있었다.

"타인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자신의 소망만 우선한 사람의 말로야. 죽음에게도 거절당하고 추악하게 세상의 멸망을 뒤쫓아야만해."

"그런 소원을 빌것같지 않은데..."

"사람은 벼랑 끝에 몰리면 본성을 들어낸다고 하잖아. 난 그런 사람인거야."

더이상은 듣지 않아도 알것 같았다. 분명 이 아이도 큐베의 희생자겠지.

여유가 없어진 사람은 그 순간 가장 최악의 선택을 한다. 소중한 사람도 가지고 있는 꿈도 희망도 떠올릴 수 없을때 떠오르는것은 절망 뿐이니까.

그것을 본성이라고 칭하기에는 너무 가혹하고 인간미가 없다. 사람들은 대체로 상황이 허락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생각하니까.

"죽지 않는다는건 정말? 혹시 재생능력이 높은걸지도 모르잖아."

"영혼이 더러움에 물들어 버티다못해 산산조각이 나도 되살아나면 그 능력이 재생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잖아. 어쨋든 죽지 못하니까. 그래서 대답은?"

"그렇다면..제안이 있어. 나의 소원은 리더로써 살아남고 싶다..즉 동료를 희생해서 나만은 살아남는거야. 타마키씨, 내 동료가 되는건 어때? 당신과 내 소원..어떤게 더 간절한지 시험해보자."

절대 죽지 않는 동료.. 야치요는 이로하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선 내심 바라마지 않던 구원을 얻은것 같았다.

그게 이로하에게는 절대 기쁘지 않은 저주였다고 하더라도 이 외롭고 고독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제가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내려온것을 놓칠 수 없지 않은가.

이로하는 지금 당장이 아닐 미온수같은 제안에 탐탁치 않은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변신을 풀고는 야치요의 위로부터 비켰다.

"어차피 시간이라면 많고 당신이 죽기 전까지 누가 더 최악인지 비교해보는것도 나쁘지 않겠네. 분명 내가 이기겠지만."

"어머,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불행을 바랬던 사람이랑 서로 목숨걸고 같이 싸운 사람들에게 불행을 준 사람을 비교하면 당연히 이쪽이 승리이지 않겠어?"

"양보다 질? 사람의 목숨에 경중을 붙이는건 그다지 좋지 않은것 같은데."

"타마키씨는 세상의 멸망을 바란것치고는 꽤 박애주의네."

말의 이모저모에서 상냥함이 베어나와서 도리어 안쓰러워졌다. 목숨을 위협당한 상황에서 느낄 감정은 아니지만..

"..동료니까 그냥 이름으로 불러도 돼."

"그럼, 이로하. 앞으로 잘부탁해."

대답을 하지 않고 등을 돌려 나가버리는 이로하의 최대한의 반항을 보며 야치요는 씁쓰레 웃어버렸다.

어디까지 자신은 야비해질 수 있는 것일까. 언뜻보면 평등해보이는 계약이지만 야치요는 이 내기에서 잃을게 없다고 확신했다.

이로하는 이기기 위해, 죽기 위해 야치요를 지키려고 할 것이다. 동료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할것이다. 소울젬이 부서져도 살아남는다면 그 몸을 희생해서 야치요를 구하더라도 죽지 않을것이다.

야치요는 이미 충분히 오래 산 마법소녀다. 언제 미후유처럼 약체화 할지 모른다. 그리고 죽고 싶어하는 이로하에게는 미안하지만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다. 야치요가 죽는다면 이로하는 혼자 남을것이고 그때서야 속은걸 알겠지.

아마도 먼저 죽는것은 야치요일것이다.
야치요는 이로하가 듣지 못할 사과의 말을 내뱉고 새로운 동료와 맞이 할 아침을 기대하며 다시 잠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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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치이로] 너로부터 시작된다.(상)  (0) 2020.07.25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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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버려져 버렸니?"

사무소로부터 돌아가는길.

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 속 퇴근러시에 치이고 싶지 않아서 선택한 비가 내리는 뒷골목에는 물에 젖어서 형태가 무너져버린 종이 상자 속 버려진 강아지가 있었다.

볼품 없는 '키워주세요'라고 쓰였을게 분명한 물에 번진 푸른 색으로 덮인 하얀종이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채 빗물만이 가득 찬 먹이통은 이 강아지가 비가 내리기 전부터 이곳에 있었음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장마 시기에 버려진 강아지라니.. 이 강아지를 버린 주인은 정말로 급했던지, 아니면 자신의 눈앞에서만 죽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돌아오지도 않을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는 볼품없이 젖고 뼈의 윤곽이 보일 정도로 매말라 있었다. 살아있는게 기적일지도 모른다.

떠나려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었을텐데.. 빗물로 무너져버린 상자의 구석은 강아지라도 찢고 나올 수 있었을것이다.

"끼잉?"

주인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것 같은 맑은 눈동자가 야치요를 올려다봐온다.

죽음이 곧 근처에 다가온 상황에서도 주인을 의심하지 않다니.. 야치요는 자신만큼 어리석은 존재라고 생각해버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하숙을 그만둔 야치요의 집에서 모두는 떠나버렸다.

부모님도 없고, 마지막 남은 보호자도 없어진 야치요는 어른들의 쉬운 먹잇감이었겠지.. 온갖 법적공방이 끝난 후에는 아무도 없었다.

친척들에게 시달려 날카로워진 기분으로 험한 말을 향한 친구도 결국 사라져버렸다.

야치요는 지금도 아무도 없는 하숙집에서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라면 나를 두고 어디에도 가지 않겠지.."

강아지는 야치요가 쓰다듬자 입을 헤 벌리고 눈을 감고는 기분좋게 혀를 내밀곤 헥헥거리기 시작했다.

붙임성이 좋은 성격.. 뒷골목같이 발견되기 어려운곳이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이 데려갔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부터 이 아이는 자신이 키우기로 결정했다. 강아지라면, 야치요가 버리지 않는 한 계속 옆에 있어 줄 것이다.

마음대로 실망하지도 않고, 재멋대로 기대하지도 않고. 야치요가 주는 사랑을 사랑으로 돌려주겠지.

대학을 졸업하고 모델 일이 아니라면 바쁜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강아지 한마리 정도는 아무 부담도 안될것이고, 이 아이는 얌전하고...

집은... 한사람이라면 너무 넓으니까.

그러니까 야치요는 버려진 강아지를 주워서 이로하라고 이름 붙였다.

누군가에게 버려졌던 지금까지를 잊고, 사랑받고 살아가는 지금부터가 네 삶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담아.

.
.
.


카미하마시는 이로하에겐 기쁜 추억과 그만큼의 슬픈추억이 가득한곳이었다.

누군가 이로하의 사정을 안다면 부모님을 따라 해외로 가 새로운 삶을 사는게 좋지 않았겠느냐고 했겠지.

이로하가 아무리 추억을 보듬어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이로하는 중학교때로부터 대학교를 다니는 지금까지도 무덤 앞의 망부석인채로 살고 있었다.

학교, 도서관, 집.
학교, 도서관, 집.

마치 다른 삶의 방법은 모르는가 싶을 정도로 같은 생활의 루트.

살아가는 이유같은건 진작에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 아이가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것을 마음대로 손놓는 일도 할 수 없었다.

이로하는 죽지못해 살고 있었다.

컹컹 개가 짖는 소리가 났다.
더불어 고양이의 절규에도 닮은 울음소리도 났다.

이로하는 가던길을 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우이는 이런걸 그대로 두지 않겠지. 언니인 나도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방해되는 우산을 내팽개친채 달려가서 근처에서 주운 돌맹이를 힘껏 던져 개를 쫓아버렸다.

하지만 발견이 늦었는지 피투성이의 고양이들은 그곳에서 이미 짧은 삶의 끝을 맞이 했다.

이로하는 이번에도 도와줄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언제나 누군가의 죽음을 기리기만 할 뿐이다.

"..냐아...."

"어..? 사, 살아있어?! 아얏!"

푸른빛이 도는 회색의 털이 눈에 띄는 고양이가 숨을 가쁘게 쉬면서도 살아있는것을 보고 이로하는 급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방금까지 적에게 공격당하는 바람에 흥분해 있는 것일까, 고양이는 도움의 손길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물리쳐버렸다.

앞발만으로 반신을 일으켜세운 고양이는 뒷다리를 다쳤는지 엉덩이를 질질 끌고서는 다른 고양이의 시체를 핥기 시작했다.

아마도 동료였겠지.. 이 고양이도, 소중한 존재를 죽음에게 잃어버린것이다.

"..그렇게 핥아봤자. 그 아이는 돌아오지 않아. 네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핥아도 눈을 뜨지 않을거야."

정작 자기자신은 챙기지도 않고 이미 죽어버려서 어떻게도 하지 못 할 빈껍질을 필사적으로 핥는 그 모습에 이로하는 왠지 화가 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로하는 동생이 살아있을적에도, 죽은 후에도 이렇게 화를 낸적이 없었는데.

그게 비록 말을 못하는 동물일지라도. 이런 상처를 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아..그렇구나.

이로하는.. 이 고양이가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자기자신도 내던지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죽어버린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되뇌이고 또 되뇌이며.. 이미 거기 없는 존재에게 사랑을 한다.

이토록 의미도 없고 어리석은 행위가 세상에 또 있을까.

"...우선, 네가 살아야지. 너도 사실 알고 있잖아. 되돌아오지 않을 생명보다 네가 중요한것을. 네가 불행해지는걸 저 고양이들이 바랄리가 없다는걸."

"...샤아악!"

비가내리는 이 날씨에 계속 피를 흘리면 이 고양이도 죽을것이다.

더이상 눈앞에서 누군가 죽는걸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네가 나랑 똑같은 길을 걷는걸 보고 싶지 않다.

이로하는 깨물고 할퀴는 고양이에게 상처를 입으면서도 안아들고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상처를 치료하고 안먹으려는 먹이와 약을 강제로 입을 벌려서라도 삼키게 하고.

이로하는 고양이에게 오래살기를 기원하며 영원을 이름붙였다.

죽음에게 동료를 잃어, 다시 만나려면 죽는 수 밖에 없는 야치요에게는 조금 심술궃은 이름이였다.

.
.
.


이로하는 총명하고 얌전하고 사랑스러운 강아지였다.

배변훈련이나 간단한 손, 기다려 등. 야치요가 가르치면 금방금방 배워서 칭찬해달라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조금 응석쟁이이긴 하지만 원래 개는 응석부리는게 일이다.

이로하가 온 이후로 야치요는 웃음이 많아졌다.

개구리를 잡으려다가 흙탕물에 빠져서 어리둥절 자신을 쳐다보는 이로하라던가, 산책의 시옷자만 나와도 벌떡 일어나서 안절부절 야치요의 근처를 빙글빙글 도는 이로하라던가, 야치요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현관 바로 앞에서 업드려 잠들어있는 이로하를 보면 야치요는 저절로 웃음짓게 되었다.

"만만세, 라멘세트 2인분 배달이요-!"

장마로 매일 비가 오는 동안,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 바빴는지 한동안 오지 않았던 자칭제자가 오랜만에 방문했다.

야치요는 문을 열어줄까 말까 잠시 고민했지만 열어줄때까지 츠루노는 가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문득, 자신의 옆에 꼭 붙어서는 현관의 문과 야치요를 번갈아 쳐다보는 새 식구를 츠루노에게도 소개하고 싶어졌다.

"오-! 오늘은 일찍 열어줬네~! 혹시 배고팠어?"

"하아.. 가지고 오지 않아도 된다고 몇번을 말해야 들어주는거야? 앗, 이로하."

평소 택배기사나 배달원이 와도 염전히 앉아 기다리던 이로하가 왠지 츠루노에게 가까이 가서는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강아지적으로는 맛있는 냄새인걸까..? 하고 야치요가 고민하는 사이에 츠루노는 배달통을 내려놓더니 야치요가 공들여 폭신폭신하게 만들어놓은 이로하의 털을 엉망진창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왠 강아지야?! 야치요 강아지 키워?"

"어쩌다보니, 키우게 됐어. 그보다 안들어와? 현관에서 계속 이야기할거야?"

"물론 들어가야지! 오늘의 라멘은 회심작이라구? 꼭 50점 이상 받을거니까!"

얌전히 쓰다듬을 즐기는 이로하가 마음에 들었는지 한손엔 배달통, 한팔엔 강아지를 안은채로 츠루노는 신발을 허둥지둥 벗더니 곧장 식탁쪽으로 향했다.

귀여운 강아지가 있어도 만만세의 음식에서는 도망칠 수 없는 모양이다..

"강아지라던가, 키우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저항이 없는 이로하를 품에 안은채 의자에 앉아 츠루노는 의외라는 표정을 일체 숨기지도 않은채로 야치요를 쳐다보았다.

야치요는 이로하가 이대로라면 아무나 좋다고 따라가버리는건 아닌지, 조금 교육을 해야하는게 아닐까라고 고민하던걸 멈추고 맞은편에 앉았다.

이로하는 츠루노에게 안긴채로도 고개를 휙 돌려서 야치요를 보고 있다.

..사람이라면 목근육이 매우 아플것 같았다.

"어쩌다가라고 했잖아. 나라도 버려진 개가 있으면 주워버릴 정도로는 상냥함을 가지고 있어."

"아니아니. 상냥하지 않다던가 매정하다든가의 이야기는 아니고. 이 집에 누구도 들이고 싶어하지 않은거 같았다는 말이야."

내가 잠시 머무는것도 못마땅해하잖아.

평소 자주 생각해왔는지 가볍게 툭 던지듯 츠루노가 말했다.

지금까지 상당히 서운하게 만들어왔던걸까..

"..이로하는 나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아니라면, 도와줄 수 있을 사람도 없었고. 그대로 두고 오면 죽어버렸겠지? 어쩔 수 없잖아."

이로하를 도저히 볼 수 없어 외면하면서 말하는 야치요는 내심 이로하가 어려운 말을 알아들을 수 개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거짓말-. 이렇게 귀여운 강아지라면 누구라도 키우겠다고 나설걸?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아무도 개를 좋아한다고 놀리지 않아."

"츠루노도 의외라고 생각했잖아. 놀리진 않아도 놀라겠지."

"멍!"

갑자기 이로하가 짖었다.

이로하는 때로 바라는게 있으면 짖고는 했다. 그 이외로는 성대에 문제가 생긴건지 수의사에게 상담했을 정도로 조용했다.

"우왓.. 작아도 중형견.. 우렁찬데? 건강해서 다행이네! 야치요가 잘 돌봐줘~?"

츠루노가 싱글벙글 웃으며 그런 이로하를 쓰다듬었다.

츠루노는 이로하를 처음 보니까 이로하가 크게 짖는게 희귀한 일이라는것도 모를것이다. 당연한 대응이겠지.

"멍!"

아무래도 신경써달라는 의미의 짖음은 아닌것 같았다. 하긴 이로하는 야치요가 누군가와 대화 할 때에는 점잖게 기다려주는 착한 멍멍이였다.

"끼잉...."

"배고픈건가? 야치요, 이로하짱 밥 안줬어?"

"이로하는 알아서 적당량 먹으니까 시간 맞춰서 주지 않아도 돼. 놔주면 먹으러 갈거야."

"오.. 똑똑하구나... 음, 아무래도 밥은 아니었나보네."

츠루노가 바닥에 놓아주자마자 이로하는 한달 사이에 부쩍 커버린 몸으로 토도독 야치요에게 걸어와서 앞발을 무릎에 걸쳤다.

이로하의 안아올려달라는 싸인이었다.

이로하는 야치요가 안아주자마자 날름 야치요의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왠지 집요하게 눈 근처를 노려와서 야치요는 이로하를 조금 떼어냈다.

"이로하짱..엄청 응석꾸러기잖아? 야치요가 정말 좋은가 본데? 나 버려져버렸다~. 하지만 야치요가 사랑받고 있어서 다행이야."

양손을 유감이라는듯 까딱이면서도 츠루노는 만면 웃음이었다.

야치요는 왠지 그걸 듣고는..무거웠다고 생각했던게 지금이라면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워진것 같았다.

"사실..외로워서 데려왔어. ..혼자서 이 집은 너무 넓고. 강아지라면 내 곁을 떠나지 않잖아. 내가 험한 말을 하든, 매정하게 대하든 개라면.. 주인을 사랑하겠지?"

말하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츠루노가 어벙벙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아직, 장난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츠루노는 이해심이 많은 아이니까 장난을 쳤다고 해도 화내거나 하지 않는다. 에이~ 장난이었구나 하고 웃어버릴거다. 그러면..그러면?

"멍!"

왠지 그러지 않아도 될것 같았다.

전부 사실이니까.

전부 사실이어도, 그걸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이로하는 떠나지 않는다.

야치요가 무슨 짓을 해도 이로하는 계속 옆에 있으려고 할것이다.. 야치요는 드디어 가족을 얻었던 것이다.

흐르는 눈물을 이로하는 아까처럼 핥았다. 이로하는 어쩌면 야치요가 스스로 눈치채지 못했던 눈물을 닦아주려고 하고 있었던걸지도 모른다.

츠루노는 진지한 표정으로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재촉하려고 다그치지도 않고 가져온 라멘이 불어터지는것도 신경쓰는것 같지 않았다.

"..정말은, 혼자서 있고 싶지 않았어. 할머니도 모두도 떠나버려서. 누구든 언제든 내 옆을 떠나버릴거라고 생각했어. 그렇다면 차라리 혼자인게 나은 일이라고..생각했어."

방울 방울 떨어지는 눈물이 이로하의 털 끝을 적셔간다. 그것이 묘하게도 야치요를 온화하게 만들었다.

이로하가 야치요의 슬픔을 받아들여주는것 같아서 기뻤다.

이미 끝난 일이라면 말로 풀어버리는것도 어려운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이로하가 있으니까 외롭지도 않고. 오히려 즐거울정도. 보시다시피 위로도 할 줄 아는 훌룡한 가족이 생겼거든."

"..그러게. 내가 걱정할 필요도 없었네! 이로하짱은 최강보다 최강인 강아지구나! 다행이야. ....다행이야.."

활짝 웃던 츠루노가 울기 시작했다.

언제나 과장될 정도로 야치요에게 다가서던건 무리하고 있던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과연 자신이 위로 할 자격이 되는지 야치요는 고민했다. 주변이 떠나버리는걸 무서워한 주제에 걱정하며 다가오던 츠루노를 내쳐버린건 자신이였다.

"멍!"

"..알았어. 알았어. 정말.. 사실은 너 전부 이해하고 있는거 아니야? 하아.. 츠루노. 이로하의 덕분도 있지만... 츠루노가 없었다면 외롭다는 생각도 인정하지 않고 이로하를 다른데에 보내버렸을거야."

"멍!"

..정말 다 알아듣는건 아니지? 슬쩍 내려다봐도 이로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듯 고개를 까딱 할 뿐이었다.

"네가 알다싶이 여기저기 인맥정도는 있으니까.. 찾으려고 하면 금방 이로하를 데려갈 사람정도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발견됐겠지. 이렇게 귀엽고 말 잘듣는 강아지가 어디있어."

"그건..흑..내가 아니라 이로하짱이..."

"..갑자기 바빠졌다고 누구누구씨가 찾아오지 않았잖아. 안그래? 솔직히.. 조금 서운했으니까."

츠루노는 드디어 눈물을 멈추는가 싶더니 마침내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야치요는 이로하의 아무생각도 안하는것만 같은 얼굴을 쳐다보며 아이구~ 하곤 이로하를 내려두고 츠루노를 달래러 일어섰다.

오늘밤은 할 이야기가 아주 많을것 같으니 불어버린 라멘을 먹은 후에는 츠루노를 위해 빈방의 침대커버를 벗겨둬야겠다고 생각하며 야치요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
.
.

야치요는 까다롭고 심술궃고 손이 많이 가는 고양이였다.

이로하가 쓰다듬으려하면 도망가는 주제에 이로하가 없으면 아무것도 먹지않고, 자는 이로하의 몸 위에 올라가 업드려 잠들어버리고, 시중에서 파는 간식은 전부 걷어차버리면서 이로하가 만든 간식은 몰래 훔쳐먹어버린다.

하지만 이로하가 슬퍼하고 있으면 반드시 다가붙어주는 상냥한 고양이다.

야치요가 온 이후로 이로하는 화낼 일이 많아졌다.

야치요가 쓰레기통을 엎어버린다던지, 야치요가 약을 안먹고 숨긴다던지, 야치요가 휴지를 몽땅 풀어해쳐버린걸 보면 이로하는 이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하는 야치요를 붙잡아 앞에 앉힌채 알아들을리 없는 설교를 시작했다.

"타마키씨, 왠지 요새 자주 다쳐있네."

제일 친하다던가, 베스트 프렌드같은 사람은 없지만 이로하는 만인에게 상냥한편이므로 수업을 같이 듣는 사람 정도는 있다.

미움받기는 어려운 성정이기 때문일것이다. ..다소 이용당하기 쉬운 성격인것은 자각하고 있다.

"응. 고양이를 키우게 됐거든."

"헤에.. 의외네."

이 사람은 그래도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서로서로 혹시 아파서 강의를 빠진다거나. 볼일이 있어서 빠져야할때에 공지사항이나 수업내용을 공유하는 정도의 교류를 하는 상부상조인 관계였다.

이로하에게는 오히려 마음이 편한정도다.
이로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슬퍼하는 사람이나, 걱정된다고 이것저것 캐물어오는 사람들을 상처주지 않으며 떼어내는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그렇게 의외인가?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 꽤 있지 않아?"

"으응.. 그렇지만 타마키씨는 할것 같지 않다고 할까.. 어딘지 금방이라도 떠나버릴것 같으니까, 얽매이는것은 만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어."

이로하는 다른 사람이 이렇게 자신을 보고 있을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시야 안에 들어와도 거슬리지 않지만 신경도 쓰이지 않는 사람.

그것이 자신의 위치이도록 행동해 온 것 같았는데.

"후후, 그럴리가 없잖아. 여행같은거 별로 가본적도 없고.."

다가오지 말아줘. 나도 다가가지 않을테니.

이로하는 언제나 경계의 바깥쪽에 서 있다.
선의 밖은 아니다. 하지만 결코 안쪽도 아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올 수 있는것은 이미 죽어버린 세명뿐이라고 결정하고 있었다.

"..고양이 약을 발라줘야해서 먼저 가볼게. 과제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아, 이야기가 길어졌네. 잘가, 타마키씨."

명백히 화제를 돌리는 이로하에게 상대는 조금 당황한거같았지만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내일부터는 이 자리는 앉지 말자. 창가쪽 구석이라면 이 뙤약볕 때문이라도 모두는 근처를 피할것이다.

도서관에도 들리지 않고 간단히 장을 본 후에 이로하는 집에 돌아왔다.

사실 요리는 오랫동안 하지 않았지만 야치요의 식사를 만드는김에 이로하도 스스로의 식사를 요리하기 시작했다.

먹기 싫어하는데도 야치요의 입을 벌리고 쑤셔넣었었는데 저만 대충 떼워버리는것에 찔리는 부분도 있긴 하다.

뭐 어차피 장을 봐야하니까 그 김에 자신의 식재료도 사는것이다.

"다녀왔어-."

"냐아"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오면 우연히 지나가는척 야치요가 스륵 이로하 앞을 지나치며 야옹 울고 간다.

한두번이라면 우연이겠지만 야치요는 걸을 수 있게 되자마자 똑같은 행동을 계속했다. 이쯤되면 알아차리라고 대놓고 티내고 있는건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다리는 아프지 않았어? 아.. 역시 점심 안먹었네.."

의외로 흘린 피에 비해서 상처는 크지 않았다. 아무래도 야치요는 무리에서 사랑받는 존재였는지 주위에 죽어있던 다른 고양이들이 지켜준 모양이었다.

그 고양이들은 어차피 취미도 없고 사치도 부리지 않아서 쓸데도 없는데 딸을 혼자 둔다는 죄책감에 많은 용돈을 보내주는 부모님의 덕에 장례를 치뤄줄 수 있었다.

야치요는 그날 하루종일 울었다.

이로하는 야치요가 지쳐 잠들때까지 쓰다듬어주었다.

"저녁은 금방 만들테니까. ..먼저 먹어주진 않을거지?"

이로하가 밥을 제대로 챙겨먹을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야치요가 이로하가 밥을 먹지 않으면 자신도 밥을 먹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기운을 차려서 힘도 돌아왔는지 억지로 먹이는것도 일이므로 이로하는 그냥 밥을 챙겨먹기로 했다.

칼로리바도 젤리음료도 통하지 않으니까 이로하는 자신을 위해서라면 한없이 무가치하고 귀찮게 느껴지는 요리를 시작했다.

그러기에 앞서 우선 장을 본 물건들을 정리할때에 이로하는 카톡이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까의 그 사람이다. 과제가 급하기라도 했었던걸까?

이제부터 거리를 둘 사이라도 이로하는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는것이 당연한일이라고 생각했다.

[아까는 미안했어. 타마키씨가 이런 말을 하는거..좋아하지 않을건 알고 있었지만.. 하지만 친해지고 싶어서. 고양이에 대해서라면.. 좀 더 사적인 대화라도 해주지 않을까 싶어서.. 싫었다면 사과할게. ..내일도 인사해줄래?]

..의외의 일이었다.

친해지고 싶다고? 뭘 위해서?

의심은 나쁜 일이다. 우이의 언니라면 괜찮다고 받아주고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내일도 웃으며 인사해야한다.

"냐아-."

야치요가 이로하의 발목근처에 몸을 문질러온다.

야치요가 이렇게 애교를 부리는 일은 흔하지 않지만 없는 일은 아니다. 배가 고프거나. 간식을 먹고 싶거나.

..이로하가 우울하거나. 지쳤거나. 우이를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기 싫어질때.

이로하는 쓰고 있던 답장을 지웠다.

이래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무거웠던 발걸음이 왠지 가볍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자신은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것 같았다.

뚜르르르르...

"여보세요? 응. 아니야.. 사과 할 필요없어. 다 맞는 말이야. 사실, 지금까지 말한적이 없지만.. 정말로 어디든지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던거 같아. ..지금은 아니지만. 귀여운 고양이를 두고 멀리 여행 갈 순 없거든. 이 아이 야치요라고 하는데. 글쎄, 내가 없으면 밥도 먹지를 않아서-. 아, 다음에 혹시 보러 올래? ..."

야치요는 처음엔 걸을려고 하지 않았다.

다리가 심하게 다친것도 아니라서 붕대를 하긴 했지만 걸어다니는데 문제가 없었는데..

수의사는 아마도 큰 충격을 받아서라고 했다.

하지만 야치요는 이제 걷기는 물론이고 옷장위로 뛰어 올라가서 혼자서 못내려올때도 있을 정도로 천방지축이다.

이아이도 힘내서 변했는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응. 사양말고 놀러와. 애플파이 만들어서 기다릴게."

전화를 하는 이로하의 발등 위에 앉은채로 야치요는 꼬리를 이로하의 발목에 살짝 감고는 하품을 했다.

여전히 천역덕스러운 얼굴이네하며 작게 웃고 이로하는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내일은 사과를 사와야겠다.


.
.
.


이로하를 데려왔을때부터 다닌 이 동물병원은 대기실에 설치된 차례대기표를 띄운 화면에 동물의 이름을 표시한다.

사람의 이름으로 표시하는것보다 프라이버시 보호가 되는걸까하고 야치요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카미하마시에서 꽤 이름이 알려져있는편인 야치요로써는 괜찮은 시스템이다.

"이로하, 오늘은 주사맞는게 아니라 검진만 하는거니까 산책하면서 돌아갈까? 최근 조금 바빠서 별로 못놀아줬으니까.."

"멍!"

기대로 가득찬 시선을 보내는 이로하는 주사도 별로 무서워하는편이 아니고 약도 야치요가 주면 잘 먹는다.

수의사의 앞에서도 짖거나 물지 않으니까 매번 착하다고 간식을 얻어먹을 정도로 환영받고 있다.

"음.. 오늘은 생각보다 손님이 많네.. 아직 한참 남았나? 응..?"

언제 시스템을 교체한걸까? 지금 치료실에 야치요가 있다고 쓰여있었다.

하지만 시선을 내려보면..대기실의 칸에 이로하도 쓰여있었다.

"우연이네.. 이로하, 나랑 같은 이름의 동물이 있나봐. 개일까, 고양이일까?"

"끼잉?"

말을 이해못했는지 아니면 저도 모른다는 표시인지 고개를 갸웃하며 이로하는 야치요를 올려다본다.

"뭐, 혹시 햄스터 이름일수도 있고.. 후후..신기한 우연이네. 앗."

호기심에 보고있던 치료실의 문이 열리고 안에서 아마도 러시안블루..처럼 보이는 고양이를 안고 나오는 귀엽고 다소곳해 보이는 여자아이가 나왔다.

손가락에 생채기도 여럿 보이고 지금도 꼬리로 탁탁 얻어맞는걸 보면 상당히 성격있는 고양이같다.

그런데도 곤란한듯 웃으며 다독이는걸 보니 그 아이는 상당히 그 고양이가 소중하겠지.

"우리 차례네. 가자, 이로하."

이로하와 함께 치료실에 향하면서 문득 그아이가 이쪽을 본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아마 착각이겠지하며 야치요는 수의사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

야치요와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건 대체로 전쟁을 방불케한다.

우선 야치요는 이로하 이외의 타인의 손에 닿는걸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물고, 발로 차고, 할퀴려고 든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지언정 폐를 끼치는게 미안한걸 넘어서서 싫은 이로하는 항상 최선을 다해서 야치요를 다독이지만 결국 한손을 내주고 나서야 봐준다는듯 얌전해진다.

주사를 맞는 동안에 화풀이 하듯 잘근잘근 씹거나 살짝 할퀴어지는 손은 이제와서는 별로 아프다고 생각되지도 않을 정도다.

요새는 야치요 나름의 응석일까하고 흐뭇해 질 정도다.

"네. 다리는 이제 붕대를 풀어도 될 것 같고요. 다음 예방접종때 또 봅시다. 야치요, 너무 타마키씨 괴롭히지 말고 다음에도 건강하게 만나자?"

"감사합니다. ..야치요 그렇게 파고들지 말고 인사해야지."

"하하..괜찮아요. 동물에게 미움받는건 익숙해서.."

"죄송합니다..."

자신을 아프게 한 수의사를 보기도 싫은지 이로하의 품에 고개를 박은 야치요는 치료실을 나갈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음 접종 예정일도 듣고, 계산도 해야하는데 이래서는 지갑을 꺼내기 힘들겠다고 곤란하게 웃으며 이로하는 난처해보이는 자신을 보고 웃고있는 데스크의 직원에게 걸어갔다.

"..?"

이로하가 지금까지 본 사람중에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방금 자신의 이름을 부른것 같았다.

멍하니 되돌아보자 그쪽에 설치되어있는 대기자 명단의 치료실 부분에 이로하가 있다고 쓰여있었다.

혹시 개나 고양이의 이름이 겹칠수도 있으니까 대기자 이름 옆에는 간단하게 동물의 종류와 나이, 성별이 표시되어있다.

"그런가.. 강아지 이름이 이로하구나. 신기하네."

"야옹?"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빨리 집에 돌아가자. 피곤하지? 앗."

다시 데스크로 향하려다가 보인 테이블 위 책 표지에 그 사람이 있었다.

"나나미..야치요? 모델인가보네. 후후후, 야치요. 네 이름이랑 똑같아. 이로하에 야치요.. 정말 엄청난 우연이네."

"냐-."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듯 야치요의 꼬리가 또 퍽퍽 이로하의 팔을 치댔다.

이름이 겹치는게 나쁜일도 아니고 오히려 신기한 일이었다고 조금 놀랐지만 왠지 즐거워진채로 이로하는 친구에게 오늘의 조그마한 사건을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아. 야치요.."

"엣..이로하?"

같은 동물병원을 다니는거라면 생활반경이 비슷한걸까?

우연히도 포인트10배의 노래가 들려오는 마트에서 야치요는 저번에 동물병원에서 본 그 아이와 마주쳤다.

상대도 대기자명단을 보았었는지 깜짝 놀라서는 꽤 재밌는 반응을 돌려주었다. 누군가 두명을 본다면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한 사람이 우연히 마주친걸거라고 생각되는걸까?

그런데 우습게도 실상은 서로 상대의 이름이 아닌 서로의 개와 고양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거니까 사실을 알고나면 정말 박장대소를 할지도 모른다.

"아아아..! 죄송합니다.. 그, 사실 강아지랑 제 이름이 똑같아서.. 게다가 야치요씨랑 제 고양이 이름이랑 똑같아서..! 신기한 우연이니까, 설마 여기에서 만난다고는 생각도 못했고.."

주인의 이름까지는 쓰여있지 않았으니까 야치요는 설마 자신의 이름과 같은 고양이의 주인이 이로하라고는 알아채지 못했다.

뭐, 나름 인기있는 모델이니까, 상대는 이름을 알아챈거겠지.

그나저나 횡설수설 있는 힘껏 설명하려는 붉어진 얼굴이 공을 가지고 놀다가 실수로 물통을 엎어버린 이로하같아서 야치요는 무심결에 풋 웃어버렸다.

"아하하하..그렇게 당황하지 않아도.. 그러니까.. 이로하씨? 나도 그렇게 부르면 될까요?"

"네! 아마도 제가 연하일테니까. 편하게 말놓으셔도 돼요. 모델, 맞으시죠? 동물병원에 놓인 잡지에서 봤어요."

평소부터의 구독자는 아닌거 같다. 하긴 팬이라면 야치요가 인터뷰에서 키우는 개에 대한걸 말하는것도 읽은적이 있을테고, 얌전해 보이는 인상이니까 패션잡지같은건 관심없을지도.

"아, 강아지 간식 사러 온건가요? 하아.. 부럽네요.. 야치요는 간식은 커녕 밥도 직접 만들어주지 않으면 한입먹고는 먹질 않아서.."

"이로하는 뭐든 가리지 않고 먹으니까. 하지만..그렇게 공들여 손수 만들어주는것도 멋진 일이네. 시간도 노력도 많이 들어가니까.. 아무래도 바쁜나머지 사버리게 되버려서.."

상냥한 미소가 이로하를 꼭 닮아서 야치요는 처음 대화를 나누는데도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한 나이는 몇인지 그런건 하나도 모르는데 이야기 할 화제가 끊기지않고 결국 타임세일의 시간이 올때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타임세일..! 포인트10배데이의 타임세일은 전쟁의 시작이야. 이로하씨. 준비는 됐어?"

"네?! 엣...네??"

깜짝 놀란 표정이다. 하긴 모델이 이런 말을 하는것은 자신을 잘 아는 팬이 아니더라도 이미지를 와장창 할 정도의 충격을 줄것이다.

내심 살짝 실망하면서..실망?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것일까.. 야치요는 부쩍 욕심이 많아진거 같다고 생각하면서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 흘러가버릴것 같은 이로하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익숙해지면 오히려 즐거울거야. 오늘 필요한건?"

"아..그러니까.."

주머니에서 메모용지를 꺼낸걸 보면 살 물건을 미리 정해 둘 정도로 성실한 성격인것 같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 일부러 종이에 글을 써오다니..아날로그를 좋아하는걸까?

식재료를 여러가지 적어온걸 보면 요리를 잘 할것 같다. 요리의 성공은 기본적으로 준비성으로부터 정해지는것이다.

"나는 오늘은 이것만이니까, 이로하씨. 도와줄게."

"괘, 괜찮은데..앗!"

"안-돼. 내가 걱정되니까 도와주는거야."

이로하랑 이름이 같아서. 닮아서일까? 야치요는 도저히 이로하를 혼자 내버려둘 수 없었다.

지금까지 혼자서 장을 봤을테니까 조금 고전하더라도 혼자 할 수 있을거란것은 잘 알지만.. 그래도 도와주고 싶었다.

뭐, 계산하고 나올때쯤에 바른자세가 바람직하던 등골이 피로로 축 흐트러진걸 보면 도와서 다행이었겠지.

"오늘 감사합니다.. 하아, 자취한지도 오래 됐는데 저런 쟁탈전은 처음이에요."

"어머, 자취한다면 할인정보같은건 알아두는게 좋지 않아? 이득이고. 그만큼 다른데 여유를 가질 수 있잖아. 대학생이라면 여기저기 돈 쓸일도 많겠지?"

"아, 뭐... 그렇죠."

너무 깊게 발을 들였나.. 저번에 지나가듯 본것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으니 첫만남이라기도 애매하다. 진정한 첫만남은 오늘이라고 해야겠지.

허물없이 대하기엔 그저 이름만으로 엮인 우연이 만들어낸 사이. 다시 만날 일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야치요는 어느새 이로하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신경쓰고 있었다.

모델이라고 환상을 품었을지도 모르는데.. 물건을 먼저 사겠다고 전력질주하고, 무심코 할인에 눈이 멀어 살필요도 없는걸 잔뜩 사서 이로하의 짐만큼이나 부풀어오른 장바구니를 들고.

"사람이 많아서 조금 무섭긴했는데 정말 즐거웠어요. 마트에서 그렇게 달려본건 처음일지도.. 후후, 야치요씨 눈까지 반짝반짝하면서 이것저것 고르는모습 귀여우셨어요."

"귀엽..."

"앗..실례인가요..? 하지만, 잡지에서 봤을때는 아름답지만 타인을 거절할듯 예리한 눈빛이고..아! 물론 멋지다는 이야기에요! ..그렇지만 이렇게 친근하게 대해주고 심지어 장보는걸 도와주다니 이젠 팬이 되버리는 수 밖에 없네요!"

이로하는.. 개여도 인간이여도 똑같이 이로하인가 하고 야치요는 살짝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

놀랍게도 야치요 스스로도 이건 아니지.라고 생각한 행동을 이로하는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곤 심지어 웃으며 기뻐하는것 같았다.

야치요는 이 만남을 이번 한번으로 끝내고 싶지 않아졌다.

"저기, 싫지않으면 전화번호 물어봐도 될까? 역시 이로하에게 간단한 간식 정도는 만들어서 주고 싶은데..물어봐도 될까해서."

"좋아요! 저도 도움받았고. 음..개랑 고양이는 못먹는 음식이 조금 다른거같긴 했지만. 요새 관심이 있어서 공부중이니까 괜찮아요. 맡겨주세요!"

전화번호를 나누며 밝혀진 사실. 이로하는 딱히 아날로그를 선호해서가 아니라 스마트폰을 사용하는데 서툴렀던거 같다.

여러모로 귀여운 연하의 친구가 생긴것 같다고 야치요는 갈림길에서 손을 흔들어주며 작게 미소지었다.

.

전화번호를 나누긴 했지만 이렇게 친해질 줄은 몰랐다고 이로하는 긴장하며 야치요가 내어준 머그컵을 두손으로 살포시 잡고 있었다.

그 이후로 서로 고양이와 개의 사진을 교환하거나. (이로하(개)의 사진을 받은 후에 야치요(고양이)의 사진을 보내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하냐고 친구에게 물어 가르쳐받았다.)

야치요가 이로하와 산책하는걸 발견해서 같이 공원을 걸으며 이야기하거나.

이로하가 레시피를 정리한 노트와 함께 시험삼아 만들어봤다며 수제 개 간식과 친구도 좋아한다는 애플파이를 같이 준적도 있다.

하지만 집에 들어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물건을 전해주는것도 사진을 교환하는것도 집에 갈 필요는 없으니까.

이로하는 서로 집에 놀러가는 친구를 사귀어본게 최근의 한건 뿐이므로 이것이 어느정도의 거리감인지 알기 어려웠다.

"멍! 헥헥헥.."

"아..이로하, 후훗..간지러워."

왠지 자신과 이름이 같은 이 상냥한 시바견은 이로하를 아주 잘 따랐다. 어째서 이렇게 좋아하는걸까 궁금할정도로 산책하는 도중 마주쳤을때엔 실컷 냄새맡아졌다.

뭔가 달콤한 냄새라도 나는 걸까..? 이로하는 슬쩍 소매부분을 냄새맡아봤지만 스스로는 잘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하는 정말 이로하씨를 좋아하는구나. 츠루노한테도 그렇게 애교를 부리지는 않는데.."

"저는 잘 모르겠지만 이로하가 좋아하는 냄새라도 났던게 아닐까요? 자주 집에서 요리를 하니까 음식 냄새가 베어들었다던가.."

"흠?"

흥미가득한 표정으로 불쑥 다가온 야치요가 이로하의 머리칼을 스륵 쥐더니 냄새를 맡고는 놓아주었다.

언제 봐도 정말 아름답다..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이로하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가끔 어떻게 이렇게 허물없이 자연스레 다가올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모델들은 다 이런걸까?

"확실히 조금 달콤한 향기가 나는것 같기도..향수라도 뿌리니?"

"아뇨.. 그런건 잘 몰라서."

"샴푸향이라던가, 그런걸까? 음식냄새는 아닌거같아. 개뿐만 아니라 나도 마음에 드는데."

"엣.."

그것은..어떤 의미..?하고 묻기도 전에 야치요는 벌써 이 화제에 대해서는 자기완결해버렸는지 이로하의 앞에 노트를 한권 두었다.

"자, 도움이 됐으면 좋겠는데. 나름 성적은 괜찮았으니까. 그 강의는 재밌어서 더 열심히 공부했고."

"와아. 야치요씨는 글씨까지 예쁘네요! 게다가 정리도 잘되있어서 엄청 도움이 될것같아요! 아아..야치요씨가 같은 대학이었어서 다행이에요.."

"..그렇네. 이로하씨가 한살만 더 많았으면 대학교에서 마주쳤을지도."

아쉽다는듯 노트의 표지를 쓰다듬는 야치요의 손가락이 가늘고 길어 피아노를 쳐도 어울릴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로하가 다니는 대학이 야치요가 졸업했던곳이란걸 알게 된것은 이젠 몇번째인지 세려면 두손으론 부족할 정도로 마주친 공원에서의 일 때문이었다.

그 공원은 이로하가 집으로 갈때 사람이 붐비는 대로를 피해서 지나치는 조금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제 거리를 두는것은 그만두자고 정했지만 원래부터 사람이 붐비는곳은 서툴렀다.

그날은 이미 다리가 다 나아서 필요없을지도 모르지만 야치요라면 장난을 치다가 어딘가 다칠수도 있다는 걱정으로 동물용 연고를 추가로 사서 집에 돌아가고 있었다.

뭐, 피부병이나 습진이라던가에도 써도 된다고 하니까 습기찬 여름에 미리 준비해두는건 나쁘지 않을것 같았다.

"아, 야치요씨다. 응?"

앉아있는 이로하의 앞발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모습이 다급하고 걱정스러워보였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이로하가 보는 야치요는 대체로 침착하고 여유로운 어른의 표정이 많았는데 지금은 길을 잃은 미아같은 도움을 구하는 표정이었다.

이로하는 한달음에 뛰어갔다. 도울 수 없을지 몰라도 뛰어들어보면 뭐든지 할 수 있는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야치요를 구했을때 배웠다.

"무슨 일이에요?"

"아.. 이로하씨.. 그게, 아무래도 날카로운걸 밟은것 같아서. 유리같은건 아닌거 같고 아무래도 플라스틱같은데.."

"잠시만요."

이로하는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서 앞발의 상처를 씻어내렸다.

약간의 모래먼지와 피가 씻겨나간 자리에는 꼬맬정도는 아닌 상처가 있었다. 이정도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야치요때에 배운 이로하는 휴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가방에는 연고도 있고 소독약도 있고 붕대도 있다. 사실 동물용 연고가 아니라 소독약이나 붕대, 반창고는 평소부터 들고다녔다.

이로하는 이제는 필요없는데도 우이나 토우카, 네무가 넘어지면 치료해주기 위해서 가지고 다니던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아니..고치지 않은걸지도 모른다. 이것도 우이가 남긴 흔적이니까.

"그런걸 다 가지고 다니는거야? 게다가 붕대매는 솜씨도 좋네.."

"아, 간호학과라서요. 음.. 동물치료에 대해서는 최근에 따로 공부한거지만.."

"공부 열심히 하는구나. 고마워. 덕분에 또 도움받았네."

가만히 잘 참아준 이로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일어서면 야치요가 안심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이런..건 이로하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중학교 이후로부터는 거의 들은적이 없었다.

"별거 아니에요. 야치요가 크게 다쳤던적이 있어서 혹시 다음에 또 다친다면 큰일이니 미리 공부해둔거고. 뭐, 쓸데없는 걱정이라도 지금 도움이 됐으니 다행이네요."

"그게 어떻게 쓸데없는 걱정이니? 야치요를 위해서 이로하씨가 노력한건데. 실제로 지금 이렇게 도움도 됐고. 오히려 대단한거 아니야? 보통 크게 다쳐도 사람들은 다음을 생각하지 않잖아."

"그럴까요..? ..이미 다쳐버렸던건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다치지 않게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강아지의 맑은눈이 이로하를 올려다봐온다.
약을 바르고 붕대를 매뒀어도 이미 다친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로하가 간호사가 되어서 아픈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되어도 우이와 두명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미 전부 늦은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역시 과거에 얽매여 추억을 되새기고 있는것 뿐 아닐까.

"이미 흘러가버린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악마정도가 아닐까?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잘먹이고 약 잘 발라줘서 이로하가 낫는걸 돕는것 뿐이지. 플라스틱 조각을 이로하씨가 버린것도 아니잖아?"

"..어쩔 수 없는 일인데도 어떻게든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버려요. 바보같네요, 저."

치료하느라 무릎을 꿇고 있던 바람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일어서서 야치요에게 시선을 맞추지 않기 위해 이로하를 쓰다듬으며 까딱이는 귀를 쳐다보는척을 했다.

알고있다. 아무 사정도 모르는 야치요가 이런 이야기를 들어봤자 고양이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투정을 부리는거라고 들리겠지.

"이로하씨는 역시 매우 상냥하구나."

"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늘도 야치요씨에게 투정부리고 있고."

"나라면 소원을 빌 수 있을때에 날 위해서 빌테지만 이로하씨는 그 도울 수 없었던 일을 소원으로 빌겠지? 타인을 위해서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이 상냥하지 않다면 이 세상에 상냥한 사람같은거 존재하지 않아."

이로하를 달래려고 억지로 말하는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본 야치요의 표정 중에서 제일 상냥해서, 눈물이 나올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우연히 마주칠때마다 손을 흔들며 헤어지는 갈림길까지 같이 걸으며 이로하와 야치요는 지금까지는 피해가던 서로의 정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좋아하는 음식이나, 좋아하는 음악. 또는 지금 다니는 대학교에 대해서나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헤어지기 아쉬워서 아플텐데도 평소처럼 이로하에게 가지 말라고 옷자락을 물고 살짝 당기는 이로하에게 응석부려 두명은 좀 더 서서 이야기했다.

그것이 저번에 만났을때의 이야기.

그때 지금 하고 있는 과제에 대해서 이야기한것을 듣고 야치요는 자신도 그 강의를 들었다며 가지고 있는 자료와 노트를 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이로하는 처음에 사양했지만 어차피 필요도 없고 받지 않겠다면 슬슬 정리해버려야겠다는 말을 듣고 받기로 했다.

뒤늦게 놀리는거란걸 깨달았지만 간질간질해도 호의를 받는것은 기쁜일이니까.

"음.. 하지만 같은 대학을 다녔어도 말 걸 수 있었을지는.. 야치요씨 분명 인기 많았죠? 누구라도 야치요씨를 보면 한눈에 반할텐데."

"눈에 띄기는 했겠지만 아무래도 모델이라는 직업이 친숙하지 않아서인지 별로 다가오진 않았어. 이로하야말로 이런 상냥하고 귀여운 아이를 내버려둘것 같지 않은데?"

"네엣?! 전혀 아니에요! 고백받은적도 없는걸요, 저."

여기저기서 말을 걸어온적은 많지만 모르는 부분을 가르쳐달라거나 짐 옮기는걸 도와달라거나 행사준비를 위한 물품을 같이 사러 가자거나 하는 거절하지 않는 이로하를 편히 여긴 용건 뿐이었다.

답례로 무언가 같이 먹으러가자는 말을 들어도 거북하고, 어차피 돕지 않았어도 집에 갈 뿐이고 다른 용건도 없었으니까 사양해왔다.

"흐응..모두 보는눈이 없구나. 아직 아이라서 그럴까?"

"아이라니.. 술도 마실 수 있는 나이라구요?"

"후훗..대답부터가 아직도 아이인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네.. 서로서로 주변에서 다가오지 않았다면 외톨이끼리 친구가 됐을지도. 우연히 마주쳐서 그대로.."

만약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지금의 만남도 순전히 우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혹시 그런 방법으로 만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로하는 왠지 이로하 생에 제일 아름답고 먼 존재로 생각되던 야치요와 같이 차를 마시는게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상같이 생각되었다.

자연스레 꽉 쥐고있던 손가락의 힘을 풀고 야치요를 따라 웃음소리를 흘리면 야치요는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타마키씨, 평소에도 그렇게 힘을 빼고 있는게 어때? 방금의 미소, 사진으로 남겨도 좋을 정도였는데."

"무, 무슨소리에요! 야치요씨의 미소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으으..부끄러워.."

"이로하씨는 가끔..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일까 헷갈린단 말이지.."

"네?"

"아니야. 역시 귀엽구나했어."

그렇게 말하고 살풋 웃는 얼굴은 아, 역시 아름다운 사람이네하고 이로하의 마음을 뒤흔들어왔다.

물론 외면도 모델을 할만큼 아름답지만 이로하에게 향하여 주는 시선의 따스함이나 자연스레 이로하의 호의를 받고 돌려주는 답례의 말들이 무엇보다도 야치요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비추어주고 있는것 같았다.

분명 사랑받고 또 사랑해주며 마음을 나누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가지는 부분일것이다.

우이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나도 배울 기회가 있었을까? 이로하는 세명에게 듬뿍 사랑을 주었지만 세명의 호의를 돌려받기에는 세명에겐 여유도 없었고 나이도 어렸다.

그들에게는 사는것이 필사적이었다. 이로하가 최선을 다해서 줘도 좀 더 달라고 갈구할만큼 메말라있었다. 이로하의 외로움을 보듬어 줄 여유는 없었을것이다.

어떻게 이로하가 매일 병원에 찾아오는지 그걸 위해서 무엇을 포기했는지 알아채주길 바라는건 너무한 일이겠지.

"그나저나 곤란하네.."

"네!? 무슨 일 있으세요?"

잠시 차를 마시며 익숙하지 않은 넥카라를 벗어보려고 양앞발로 꾹 힘을 주는 바람에 찌그러진 얼굴의 이로하를 구경하던 야치요가 툭 작게 한숨처럼 내뱉은 말을 이로하는 놓치지 않았다.

릴렉스 한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역시 남의 집에서 긴장하는건 어쩔 수 없는지 과하게 반응해버렸다.

"이번에 촬영을 위해서 좀 멀리 가야해서 외박을 하게 될 것 같은데 이로하를 맡길 적당한곳을 못찾아서."

"아.. 음, 혹시 곤란하시면 제가 맡아드릴까요? 야치요는 큰개가 아니면 괜찮거든요."

공격당한 트라우마인지 야치요는 대형견을 보면 이로하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로하가 구해준것을 확실히 기억하는것 같았다.

그래도 중형견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은것 같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짖어오면 위협 할 정도다.

"괜찮겠어? 부담주고 싶지는 않지만.. 주변인에게 부탁하려고 해도 집이 음식점이다보니 개는 안될것같아서.. 맡아줄 수 있다면 고마운데."

"괜찮아요. 이로하, 착하고 얌전하니까. 이로하 야치요랑 잘 지낼 수 있지?"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로하는 나름 자신있었다. 원래는 고양이에 대해서만 공부했지만 마트에서 만난 후 부터 개에 대해서도 신경쓰여서 조사했으니까.

먹으면 안되는 음식이나 개가 아플때의 증상같은건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 개를 키우지도 않는데 야치요가 물어보면 대답해주기 위해서..

"이로하씨, 언제나 고마워."

이렇게 야치요가 웃어주니까.

왜 야치요가 웃어준다는 이유만으로 노력하고 있는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상냥한 연상의 친구가 생겨서 기쁘다고 웃어 돌려주었다.

이로하는 이미 호의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어가고 있었다.

*
*
*


비오는 날은 싫다. 큰 개도 싫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싫은건 약하면서 지키려고하는것이다.

야치요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주변을 인지하게 됐을때는 이미 뒷골목의 주민으로 음식을 구하는것만으로 힘겨웠다.

그럭저럭 오래 살아왔다는 이유만으로 동료라고 칭하는 고양이들이 모여와서 다소 큰 무리가 되긴 했지만 사는 요령을 알 정도로 오래 살았으므로 그때쯤에는 배를 굶주리지도 않았다.

나름 잘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쥐같은 작은 동물을 사냥하는 방법이나 고양이를 좋아할것 같은 사람에게 먹이를 타내는 방법같은걸 알려주며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줬다.

그러니까 날 지키려다가 죽지말고 어디라도 도망쳐서 살아갔으면 좋았을텐데..

그날은 비가와서 옹기종기 모두 모여 비를 피하고 있었다. 며칠이 계속된 장마가 빼앗아가는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가붙어 온기를 나누었다.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는 모른다. 그곳에 커다란 개가 나타났다.

큰 적은 맞서는게 아니다. 모두는 알고 있었지만 이곳엔 작은 고양이도 있다. 야치요는 자신은 오래 살았으니까 그녀석들을 지키는게 나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싸움이 발발했을때에 아무도 도망치지 않았다. 모두가 야치요를 믿었다. 기회를 만들려고 개의 시선을 끌거나 야치요의 앞을 막아서 대신 공격받았다.

터무니없는 일이다. 지키려고 했는데. 약한주제에. 도망갔어야지.. 어차피 저런 커다란개를 고양이는 이기지도 못하는데..

그때 지금의 주인에게 도움받았다.

처음은 원망했다. 도와줄거면 좀 더 일찍 올것이지. 차라리 날 죽게 내버려두지..

할퀴고, 물고, 울어대고, 어지르고. 길에서 배운 사람이 싫어하는 일은 다 했다.

그런데도 이로하는 억지로 밥을 먹이고 약을 먹이고 ..열을 내는 야치요를 끌어안고 울어주었다.

제발 더이상 제 앞에서 죽지 말라고 우는 그 모습이 무척 작아보였다. 야치요는 이로하보다 훨씬 작은데도 불구하고.

이로하는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않고 잠도 잘 자지 못했다. 멍하니 사진만 들여다보거나 밤새도록 닳아버린 노트의 페이지를 넘겨보거나.

개를 쫓아버리고 저항하는 자신을 병원에 데려갈때에는 그토록 강해보였는데. 이래서야 버려진지 얼마안된 아기고양이다.

야치요는 약한주제에 지키려고 드는것이 정말정말 싫지만 이로하는 지금 자신의 주인이니까 어쩔 수 없이 강하게 만들어주기로 했다.

주인을 바꾸면 되지 않느냐고? 자신을 살려놨으니 키우는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아기고양이 가르치듯 알려주는것 뿐이다.

"앗, 야치요! 그걸 엎지르면 어떻게해!"

"냣!"

길고양이의 삶에 가장 중요한것은 무엇보다 먹는것이다.

우선 먹게 하는것부터 고난이었다. 이로하는 야치요에게 억지로 밥을 먹일 정도로 식사의 중요성을 아는 주제에 먹질 않았다. 괘씸한 주인이다. 야치요는 이로하가 뭘 먹을때까지 물에도 입을 안댔다.

다행히도 이로하는 먹을것을 구하는 능력은 있는것 같았지만 무엇을 먹어야 좋을지는 모르는것 같았다. 그래서 손수 먹어야할것과 지양해야할것을 알려주었다. 인간은 바닥에 떨어진건 안먹으니까 엎어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와중에 발견된 좋은 소식은 이로하는 먹을것을 만드는 능력이 뛰어나다는것이다. 가르침의 대가로 야치요는 맛있는 식사와 간식을 받기로 했다. 물론 얼마나 받을지는 야치요의 마음대로다.

"흑..읏..야치요.. 지금만큼은 내버려둬.."

"..."

길고양이의 삶에 중요한것중 하나는 앞을 보는것이다.

많은 이유로 고양이들은 길에서 살게 된다. 주인이 죽었거나. 버려졌거나. 때로는 길에서 태어났거나. 길을 잃었거나.

하지만 결국 살아가는데 필요한건 과거는 아니었다. 아무리 주인을 그리워하며 울어봤자 버린 주인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이로하는 그런것도 모르는것 같았다. 매일매일 덩치는 산만하면서 눈도 못뜬 아기고양이처럼 울어댄다.

그러니까 야치요는 아기고양이에게 했던것처럼 감싸 안아줬다. 몸크기의 차이 때문에 무릎에 올라앉은것처럼 보이지만 야치요가 안아줬다고 하면 그런거다.

이로하가 내려둬도 다시 올라앉고 자리를 피해도 따라갔다. 마침내 이로하는 야치요를 끌어안고 울었다.

슬픔을 나누는것은 미래를 보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야치요는 그 눈물을 핥아서 위로해줬다.

"..."

"냐아-."

길고양이의 삶에서 야치요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것은 동료다.

솔직히 야치요정도 되면 혼자 사는것이 편하다. 먹이도 혼자 구하는게 적어도 되고 사는곳도 좁아도 된다.

하지만 혼자서는 아파도 핥아줄 고양이가 없고 추워도 다가붙을 고양이가 없다. 외로워도 슬퍼도 혼자면 울어주는 고양이가 없다.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을 고양이도 없다.

그것은 사는데에는 문제가 없지만 너무나도 슬프고 허무한 삶의 방법이다.

이로하는 그렇게 사는것이 마치 의무라도 되는듯 항상 주변에 아무도 두질 않았다. 심지어 그건 야치요에게도 그랬었다.

야치요를 맡아줄 다른 주인을 찾아보기도 하고 언제 자신이 사라져도 괜찮게 부모님에게 야치요에 대해 설명해뒀다.

아기고양이같은 주제에 하는 행동은 동료에게 자신의 죽음을 보이지 않으려는 늙어 약해진 고양이 같은 일을 한다.

그러니까 야치요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말이 통하고 이로하가 아플때 도와줄 수도 있고 야치요가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을 지탱해줄 동료를 구하도록 닥달했다.

그렇게 모두를 가르쳤을때 이로하는 아기고양이에서부터 야치요의 훌룡한 리더고양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한쌍을 데리고 돌아오라는건 아니었다. 그런건 한참 이르다. 확실히 리더고양이라고 인정은 했지만 아직도 심적으로 이로하는 야치요의 아기고양이다. 언제 어른고양이가 될지는 아직 안정했다.

야치요는 불만스럽게 이로하가 데려온 한쌍의 후보를 노려보았다.

이로하보다 덩치도 크고, 털(머리카락)도 아름답고 먹이 구하는 솜씨도 있는것 같지만 상당히 응석이다.

게다가 딸린 식구도 있다.

[너는 누구? 이로하의 가족? 좋은냄새-.]

[저리가지 못해! 개는 싫어!]

하필이면 개다. 게다가 발크기를 보건데 꽤 커질것 같다.

그 커다란 개처럼 무례하고 폭력적이고 머리가 나빠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봤자 개니까 고양이를 장난감정도로 밖에 보지 않을것이다.

[저리 가라니까!]

[부드럽고 따뜻해. 이로하같아.]

[...]

꽤 사람을 볼 줄 아는 개다. 똑똑할것 같다.

아무래도 이 개의 이름은 이로하인것 같다. 이름도 엄청 귀엽고 사랑스럽고 좋은것 같다.

먹이 보는 눈은 좀 없는것 같지만 뭐, 그런건 가르치면 된다.

고양이여도 괴롭히지 않고 얌전하고 그루밍 실력은 엉망이지만 노력하는 모습은 칭찬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름이 같아서 그런가 이 이로하도 포기하는법을 모르는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떨어져있지만 언젠가 동생도 찾을 수 있을거야. 자주 산책하면 훨씬 빨리 찾겠지?]

[..뭐, 그렇지 않을까? 카미하마시는 넓으니까 오래걸리겠지만..]

원래는 아픈 동생이 버려질 예정이었는데 몰래 바꿔들어간것 같았다. 바보같은 일이다.. 길에서 사는법도 모르는 강아지가 내버려지면 죽는게 당연한 일인데.

강아지를 버릴 정도의 주인이 동생한테 치료비를 쓸 리가 없고 결국은 둘 다 죽을텐데.

그런데도 이로하는 자신이 대신 버려지면 부담이 줄어서 동생을 살려줄거라고 생각한것 같다.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똑똑하다는 말은 다 취소다..

야치요는 약한주제에 지키려고 드는게 여전히 정말 싫었다. 이로하를 가르친건 처음도 아니니까 이번에도 잘 할 수 있을것이다.

대가는 뭐, 닮은 책임을 물어서 주인에게 받기로 하자. 이로하가 이번에 만든 간식은 무슨맛일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이 강아지가 앞을 보게 될 때쯤에는 야치요의 아기고양이도 어른고양이가 됐을것이다. 이로하는 죽은 동생 대신 털을 핥아 줄 고양이를 얻고 야치요도 죽은 동료 대신에 안아줄 강아지를 얻는다면 모두가 행복한 일이 아닌가.

야치요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지만 역시 가족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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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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