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한 손님이 전부 모인 여객선은 커다란 소리를 내며 출발했고,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는 동안 내려가던 석양 또한 사라져 밤하늘을 비춘지 꽤 시간이 지났다.
코코로는 결단을 내렸다.
카오루씨, 카논씨. 미안해. 이제와 무르기는 무리야.
돌발적인 여객선 이벤트엔 카오루씨가 가장 할 일이 많으니 이미 자리를 비운지 꽤 오래됬다. 카논씨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옆에 있지만, 곧 마왕에게 납치된 공주님처럼 화려하게 사라질 예정이었다. 제 목적을 위해 이 사람들을 괜한 일에 끌어들인 건 아닐까- 시간이 초 단위로 지날수록 코코로의 갈등은 심화 되었지만,
" 아, 미-군. 종종 테니스 치는 거 본 적 있어! "
" 그야 테니스부니까. 하구미는 소프트볼부지? 하구미 목소리, 테니스 코트까지 들리니까 항상 에너지 받고 있었어. "
" 에헤헤, 어머니는 항상 조용히 하라 하시지만. "
" 난 그대로도 좋은걸. 멋지다고 생각해. "
저렇게 아무것도 몰랐던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걸 보고 있자면, 심화된 갈등도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죄책감도 실컷 옅여진다.
의외로 철면피? 혹시 연기쪽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던가. 카오루씨와도 하구미와도 순식간에 사이 좋아져서 도란도란 요비스테까지도 무난히 클리어. 카논씨는 생각보다 더 자연스럽게 모른 척 하는 미사키에게 당황한 것 같다.
" 와~! 미-군, 미군미군!! 밖을 봐! "
" 어디어디. "
기분이 들뜬건지 넓은 회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하구미의 목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었을텐데 짜증 하나 없이 밖을 본 미사키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 코코로, 카논씨. 야경이 정말 예뻐요. "
그 얼굴은 한없이 순진무구하고 이 순간이 정말 즐겁다는 웃음이라 코코로에 심적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엄청 나쁜짓을 하려는 것 같잖아.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코코로는 눈을 꾹 감았다 떳다. 안돼, 이러다가 미루고 미뤄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할거야. 그냥 시작해 버리자. 한 손을 등뒤로 가져가,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린다. 어디선가 보고 있을 SP들에게 전해질 신호였다. 그녀들은 철저하니까 단번에 발견했겠지.
마지막으로. 미사키의 말에 곧바로 배 바깥을 보고 있는 카논씨의 어깨를 툭 건드린 코코로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 죄송해요, 카논씨. "
" 에, 응? 뭐라고 했어 코코... "
그리고, 정전.
5성 호텔의 로비만큼 호화롭게 꾸며진 여객선 속 연회장의 조명이 전부 꺼진다. 바깥의 야경만으로는 시야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깜깜하다. 당황한 하구미의 목소리와, 그런 하구미를 진정시키는 카오루씨의 목소리. 옆에 있던 카논씨의 짧은 단발마마저.
코코로의 머릿속에 한줄기 싸늘함이 지나갔다. 잠깐, 카오루씨? 생각 이상으로 한동안 불은 켜지지 않고, 어둠에 익숙해져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불은 다시 들어왔다.
" 이 호화 여객선, '스마일 호'에 온 걸 환영합니다, 사랑스러운 아가씨들~! "
한껏 호화스럽게 꾸며진 연회장의 중앙, 스포트라이트를 집중 받고 있는 인물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악동의 표본이었다. 멋드러진 하얀 망토는 반짝이라도 뿌린걸까 싶을 정도로 반짝거려서 모두의 이목을 집중 시켰고, 수상하고 미심쩍은 사악하게 웃고 있는 곰 가면은 야리꾸리한 가면 무도회장을 벌인걸까 착각했을 정도였다. 삐에로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있는 건 차라리 우습게도 보였다.
" 나는 마왕... ... '미카엘'. 오늘밤, 아가씨들에게서 아주 중요한 걸 받으러 왔어! 기꺼이 내어주지 않으려나~. "
" 마, 마왕!! "
" 후후, 덧없구나... "
" 후에에....? "
삐에로 모자가 기울어지다 못해 떨어지는 걸 고쳐쓰는, 그래... '미카엘'.
코코로는 빠르게 주변을 스캔했다. 정말로 마왕이 있었던 거였냐며 놀라는 하구미, 평소처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카오루씨, 갑작스런 상황에 대처방법을 잊은 카논씨. 역시나 한 명이 없었다.
오쿠사와 미사키. 이 이벤트에 동료였을.
" 저기 뭘 받아가겠다는거야? 하구미, 가지고 있는 게 없는 걸. "
" Oh, Nono! "
과장되게 손가락을 들어올려 츳츳, 하며 좌우로 까딱인다. 그래봤자 이상한 솜장갑 끼고 있으니까 어느 손가락인지도 모르지만. 검은 곰가면 위로 나오는 기세는 밝게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 먼저 알려주면 재미없잖아~? 아가씨들에게 시련을 줄거야. 그 시련을 모두 통과하면 알려줄게. 무척 어려울거라구? 도중에 포기하고 싶을지도 몰라? "
그러니까ㅡ. 말꼬리를 길게 늘어트린 그녀의 망토가 펄럭였다. 다리를 움직이는데로 따라오는 스포트라이트의 빛을 받으며 우스꽝스레 한 바퀴 빙글 돌기도 하고, 짝다리를 짚으며 다가오는 모습은 우스꽝스런 춤사위였다. 미셸. 투영되는 인형탈의 모습이 화가났다. 전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또 숨을 생각이야? 기어코 그렇게 코코로에게 가까이 다가왔을 때, 코코로는 그 가면을 벗기고자 손을 뻗었다.
" 으차차, 이 스마일 호의 아가씨를 인질로 잡겠어. "
" 앗, 아아...? "
" 코코로짱?!! "
휘청이는 모션으로 손을 피해버린 미카엘은 코코로를 공주님처럼 안아들었다. 한 줌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은 것처럼 굳건히 안아든 팔. 갑작스런 시야의 전환에 놀란 코코로는 문득 가면 안 속 짙푸른 눈을 볼 수 있었다. 미약하게 떨리는. 코코로는 그 눈을 본 순간 바둥거리기를 멈췄다.
" 걱정마, 걱정마. 스마일호의 공주님에겐 아무짓도 하지 않아. 물론 아가씨들이 포기하지 않을 경우. "
" 포, 포기할 경우 무슨 짓을 할 셈이야? "
" 으~음... 이렇고 저렇고, 요~런 짓이라던가? "
능글능글 대답한 미카엘은 쿡쿡 낮게 웃고는 한 손을 높게 들어올렸다. 코코로를 안고 있는 팔엔 흔들림 없이 솜과 천으로 덮힌 손이 신호를 보냈다. 불이 꺼진다. 연회장에서 과하게 어조를 꺾은 목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렸다.
" 그럼 카지노에서 봐! 첫번째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거야!! "
.
" 왜 이런 짓을 벌이는거야, 미사키? "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혀져서, 설치된 CCTV를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자기 편으로 포섭을 한 건지 화려한 카지노 안에서 검은옷 사람과 도둑잡기 중인 하구미네. 물론 어느정도 깨닫고 있었다. 포섭되지 않았다면 미사키의 행동은 눈치채지도 못하게 정지 되었겠지. 코코로는 소파의 팔걸이 부분을 꽉 잡아 검은 가면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바깥과 마찬가지로 호화스럽게 꾸며진 관제실에 천연가죽으로 덧댄 넓은 의자. 꼭, 모든 걸 지켜봐야만 하는 납치된 성의 공주님 같은 포지션이 아닌가.
오쿠사와 미사키는 아무런 계획 없이 이런 일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었다. 그치만 질문에도 미동없는 뒷모습은, 역시, 화가, 난다고.
" 대답해, 미사키. "
" ...내 이름은 미카엘이라구. "
" 좋아, 미카엘. 얼른 대답해. "
" 으응...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는 걸, 공주님. "
검은 곰 가면이 삐에로 모자를 고쳐썻다.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이 얼기섞여 있는게 보였다. CCTV 화면을 보고 있던 곰 가면은 코코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빨이 삐죽삐죽, 그러나 눈만은 반달 모양으로 웃고 있는 가면은, 어디까지 이 얘가 미셸에 의지하고 있는지 깨달아버려서 숨이 막혔다.
" 좋아좋아, 알았어. 이런 걸 주웠어. "
망토 안을 우스꽝스럽게 뒤적인 그녀가 메모장 하나를 꺼냈다. 노란색의. 그게 뭐길래, 하고 물으려던 코코로는 익숙한 메모장을 다시 한번 보고 깨달았다. 아. 여객선 이벤트 계획이 전부 적혀진 메모장이었다. 카오루씨와 하구미, 카논씨와 미사키의 이름이 잔뜩 들어갔을. 어느샌가 넓다란 집 안에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망연히 메모장을 보던 코코로는 문득 미사키를 살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그랬었다는 평이한 어조였다.
야심차게 준비한 계획은, 잃어버린 걸 가벼히 지나쳤을 때부터 일그러졌다. 언제? 심지어 자세히 살핀 미사키는 모든 게 엉망이었다. 시장의 장난감 가게에서나 구입한 것 같은 낡은 삐에로 모자며, 가까이서 보니 하얀 천에 반짝이 가루를 잔뜩 뿌린 망토라고 걸친 무언가, 민 무늬 가면에 솜을 붙여 검은색을 물감을 뿌린 게 티가 났다. 멀리서 보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럴듯한. 그 틈새로 보인 망토 안은 그녀가 배에 입고온 그대로, 집앞 패션이라서 한숨마저 튀어나올 것 같다.
" ... ... 그렇게, 엉망이었어? "
" 에? "
언제부터 계획했는지 몰라도 그새에 그 속까지 준비할 시간은 없었겠지. 그러나 그 시간만으로도 이렇게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코코로는, 이쪽을 그저 주시하고 있는 검은 가면에게 달려들었다. 제법 빠르게 달려 들어 가면에 손을 뻗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옆으로 물러서는 것만으로도 피한다. 가면 위로 곤란한 기운이 넘실거려서 짜증이 났다. 한 번 더 손을 뻗으니 허리를 뒤로 접는 것만으로도 피한다. 열받아. 이유 모를 화가 났다.
사실, 알고 있다.
" 아... 정말!! "
알고 있어, 터무니 없는 화풀이라는 건.
CCTV에선 도둑잡기가 끝난 건지 화기애애하게 통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검은옷의 사람이 미소 짓고 있는 것도 보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계획한건지 짐작도 할 수 없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복장과 다르게 완벽히 진행되는 그녀가 준비한 이벤트. 그 때문에 츠루마키 코코로는 화가 났다. 속으로 삭히려다 분에 못이겨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척이나 화가났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참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 어, 어라. 아가씨...? "
천천히, 쭈뼛쭈뼛 다가오는 발걸음에 싸늘한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무릎을 굽히는 것을 보았을 때, 코코로는 믿기지 않게도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생각하고 있는 건 이 친절함의 배반이었다. 그렇지만. 코코로는 걱정어린 손길을 뻗어오는 미사키의 팔목을 잡아챘다. 흠칫, 하고 떨리는 몸. 어깨를 잡고 밀어 붉은 융단 위로 눕혀 위에 올라탔다. 입고 있는 붉은 드레스가 마치 카펫에 섞여 흘러가는 것 같았다.
당신의 엉성한 가면이 서럽고, 이 상황이 억울하고, 모른 척 하는 모양새가 원통하고, 화가 나는 내가 경멸스러웠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단 말이야. 치졸한 어린애의 시기심이었다. 모자라고 철없는 어리광이다. 그러나 코코로는 스스로를 조절할 수 없었다. 가면 속 사정없이 흔들리는 짙푸름에 들어간 내 자신이 역겨워서, 한없이 추악해서. 결국, 결국에. 결국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너에게 휘둘리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오쿠사와 미사키가, 내 계획 그 자체로 당황스러운 일에 휘말려 마지막엔 즐거워 하는 걸 보고 싶었어.
근데 나는 그것조차 못하고,
결국 너를 이렇게까지 해버린 내가 너무 싫어.
.
세타 카오루는, 그녀의 흐린 미소를 떠올렸다.
기억 속에 없는 얼굴, 정적인 몸짓, 제 아름다움에 이끌려 다가오는 귀여운 아기고양이란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웃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듣기 전까진. 가슴을 따스하게 만드는 목표와 얇은 입술에서 나오는 사랑스러운 생각들. 카오루는 처음 보는 그녀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하구미의 웃음은 전염시키는 힘이 있어요. 아, 도둑잡기를 잘해요, 노력하는 만큼 따라주는 운도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기적같이 당첨만 피해가거든요. 그러니까, 조커 말이에요.
화려한 카지노. 마왕의 부하처럼 담담히 나타나 첫번째 시련이라고 내어주는 건 도둑잡기의 승부.
" 아, 하구미! 이겼어!! "
" 다행이다...! "
손에 든 두 장의 카드를 던지듯 내려 놓으며 하구미가 웃었다. 카논도 안심한 듯 두손을 가슴께로 끌어모아 웃고 있었다.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항상 무표정이었던 검은옷의 여자가 승자의 웃음이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선글라스 아래로 자연스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 축하드립니다. 첫번째 시련을 무사히 통과하셨군요. "
정말 이상한 일이지, 전부 네 말대로 되고 있구나.
- 카논씨는... 자신감이 없어서 쉽게 움츠러들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을 잘 헤아려 주고 생각이 깊어요. 조금만 등을 밀어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에요.
없는 게 없을 정도로 온갖 것이 가득한 기프트 샾. 마왕의 두번째 부하는 "진심이 될 때 필요한 것"에 맞는 단 하나의 물건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다.
" 뭐하고 있지, 카논? "
" 카오루... 진심이 될 때 필요한 걸, 생각해 보고 있었어. 진심이 된다는 건 솔직해진다는 거니까 수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하고. "
카논의 시선을 따라가면, 그곳엔 웃는 얼굴의 가면이 있었다.
" 나는 웃는 얼굴에 용기를 받았어. 그게 꾸며진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의지는 가득 전해져왔으니까. "
" 심판이 끝나도 진실은 진실이다... 덧없구나... "
" 에, 아, 미, 미안해. 내 할 말만 했네. "
" 아니, 훌륭하다. 카논이 고른 걸로 하지. "
에, 그래도 돼?
두 눈이 동그랗게 커져 의아해는 얼굴에 고개를 끄덕인다. 인형 코너를 두리번 거리던 하구미를 데리고 와 웃는 얼굴의 가면을 건네면 검은옷의 부하가 잠시 침묵하더니 길을 열어주었다.
" 진실이 필요할 때, 때론 부끄러움을 가면 속에 숨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요. 마왕님은 극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 예에!! 카논짱 선배, 멋있어! 그런 뜻이 있었다니! "
" 후에에... 아, 아니... "
" 아아- 카논, 그대의 혜안은 내 마음을 울리는군. "
카논은 새빨개진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 얼른 코코롱을 구하러 가자! 분명 덜덜 떨고 있을거야! "
카오루는 멋드러진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모두가 웃는 얼굴을 원해요. 흐리게 미소짓던 얼굴이 계속 생각났다. 곧 그 얼굴은 검은 가면에 의해 가려졌더랬다. 짠- 만들어왔어요. 밝게 높힌 목소리가 조금 어색했었다. 조금 목울림이 어눌했던 건, 원래의 습관인가 피로의 탓인가. 그것까진 카오루조차 알 수 없었다.
- 미리 검은옷 분들에게도 협조를 부탁했어요. 코코로가 이미 굉장한 이벤트를 준비했지만, 거기엔... 코코로는 들어가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코코로도 즐거울 수 있도록 돌발 이벤트에요!
- 그 멋진 이벤트를 내게 미리 알려주는 이유는 뭐지, 아기고양이?
- 카오루씨, 엉뚱한 말 잔뜩이지만 믿음직하니까요. 그리고 시선을 끌어주었으면 해요. 하구미라면 몰라도 카논씨라면 절 찾을지도 모르니까요. 화려하게 반짝이는 카오루씨라면 분명 모두의 시선을 한꺼번에 사로잡을 수 있겠죠.
카오루는 눈을 감았다.
- 부탁해요, 카오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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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공책(@Fox_nullnote)님이 써주셨습니다.
코코로는 결단을 내렸다.
카오루씨, 카논씨. 미안해. 이제와 무르기는 무리야.
돌발적인 여객선 이벤트엔 카오루씨가 가장 할 일이 많으니 이미 자리를 비운지 꽤 오래됬다. 카논씨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옆에 있지만, 곧 마왕에게 납치된 공주님처럼 화려하게 사라질 예정이었다. 제 목적을 위해 이 사람들을 괜한 일에 끌어들인 건 아닐까- 시간이 초 단위로 지날수록 코코로의 갈등은 심화 되었지만,
" 아, 미-군. 종종 테니스 치는 거 본 적 있어! "
" 그야 테니스부니까. 하구미는 소프트볼부지? 하구미 목소리, 테니스 코트까지 들리니까 항상 에너지 받고 있었어. "
" 에헤헤, 어머니는 항상 조용히 하라 하시지만. "
" 난 그대로도 좋은걸. 멋지다고 생각해. "
저렇게 아무것도 몰랐던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걸 보고 있자면, 심화된 갈등도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죄책감도 실컷 옅여진다.
의외로 철면피? 혹시 연기쪽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던가. 카오루씨와도 하구미와도 순식간에 사이 좋아져서 도란도란 요비스테까지도 무난히 클리어. 카논씨는 생각보다 더 자연스럽게 모른 척 하는 미사키에게 당황한 것 같다.
" 와~! 미-군, 미군미군!! 밖을 봐! "
" 어디어디. "
기분이 들뜬건지 넓은 회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하구미의 목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었을텐데 짜증 하나 없이 밖을 본 미사키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 코코로, 카논씨. 야경이 정말 예뻐요. "
그 얼굴은 한없이 순진무구하고 이 순간이 정말 즐겁다는 웃음이라 코코로에 심적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엄청 나쁜짓을 하려는 것 같잖아.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코코로는 눈을 꾹 감았다 떳다. 안돼, 이러다가 미루고 미뤄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할거야. 그냥 시작해 버리자. 한 손을 등뒤로 가져가,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린다. 어디선가 보고 있을 SP들에게 전해질 신호였다. 그녀들은 철저하니까 단번에 발견했겠지.
마지막으로. 미사키의 말에 곧바로 배 바깥을 보고 있는 카논씨의 어깨를 툭 건드린 코코로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 죄송해요, 카논씨. "
" 에, 응? 뭐라고 했어 코코... "
그리고, 정전.
5성 호텔의 로비만큼 호화롭게 꾸며진 여객선 속 연회장의 조명이 전부 꺼진다. 바깥의 야경만으로는 시야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깜깜하다. 당황한 하구미의 목소리와, 그런 하구미를 진정시키는 카오루씨의 목소리. 옆에 있던 카논씨의 짧은 단발마마저.
코코로의 머릿속에 한줄기 싸늘함이 지나갔다. 잠깐, 카오루씨? 생각 이상으로 한동안 불은 켜지지 않고, 어둠에 익숙해져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불은 다시 들어왔다.
" 이 호화 여객선, '스마일 호'에 온 걸 환영합니다, 사랑스러운 아가씨들~! "
한껏 호화스럽게 꾸며진 연회장의 중앙, 스포트라이트를 집중 받고 있는 인물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악동의 표본이었다. 멋드러진 하얀 망토는 반짝이라도 뿌린걸까 싶을 정도로 반짝거려서 모두의 이목을 집중 시켰고, 수상하고 미심쩍은 사악하게 웃고 있는 곰 가면은 야리꾸리한 가면 무도회장을 벌인걸까 착각했을 정도였다. 삐에로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있는 건 차라리 우습게도 보였다.
" 나는 마왕... ... '미카엘'. 오늘밤, 아가씨들에게서 아주 중요한 걸 받으러 왔어! 기꺼이 내어주지 않으려나~. "
" 마, 마왕!! "
" 후후, 덧없구나... "
" 후에에....? "
삐에로 모자가 기울어지다 못해 떨어지는 걸 고쳐쓰는, 그래... '미카엘'.
코코로는 빠르게 주변을 스캔했다. 정말로 마왕이 있었던 거였냐며 놀라는 하구미, 평소처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카오루씨, 갑작스런 상황에 대처방법을 잊은 카논씨. 역시나 한 명이 없었다.
오쿠사와 미사키. 이 이벤트에 동료였을.
" 저기 뭘 받아가겠다는거야? 하구미, 가지고 있는 게 없는 걸. "
" Oh, Nono! "
과장되게 손가락을 들어올려 츳츳, 하며 좌우로 까딱인다. 그래봤자 이상한 솜장갑 끼고 있으니까 어느 손가락인지도 모르지만. 검은 곰가면 위로 나오는 기세는 밝게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 먼저 알려주면 재미없잖아~? 아가씨들에게 시련을 줄거야. 그 시련을 모두 통과하면 알려줄게. 무척 어려울거라구? 도중에 포기하고 싶을지도 몰라? "
그러니까ㅡ. 말꼬리를 길게 늘어트린 그녀의 망토가 펄럭였다. 다리를 움직이는데로 따라오는 스포트라이트의 빛을 받으며 우스꽝스레 한 바퀴 빙글 돌기도 하고, 짝다리를 짚으며 다가오는 모습은 우스꽝스런 춤사위였다. 미셸. 투영되는 인형탈의 모습이 화가났다. 전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또 숨을 생각이야? 기어코 그렇게 코코로에게 가까이 다가왔을 때, 코코로는 그 가면을 벗기고자 손을 뻗었다.
" 으차차, 이 스마일 호의 아가씨를 인질로 잡겠어. "
" 앗, 아아...? "
" 코코로짱?!! "
휘청이는 모션으로 손을 피해버린 미카엘은 코코로를 공주님처럼 안아들었다. 한 줌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은 것처럼 굳건히 안아든 팔. 갑작스런 시야의 전환에 놀란 코코로는 문득 가면 안 속 짙푸른 눈을 볼 수 있었다. 미약하게 떨리는. 코코로는 그 눈을 본 순간 바둥거리기를 멈췄다.
" 걱정마, 걱정마. 스마일호의 공주님에겐 아무짓도 하지 않아. 물론 아가씨들이 포기하지 않을 경우. "
" 포, 포기할 경우 무슨 짓을 할 셈이야? "
" 으~음... 이렇고 저렇고, 요~런 짓이라던가? "
능글능글 대답한 미카엘은 쿡쿡 낮게 웃고는 한 손을 높게 들어올렸다. 코코로를 안고 있는 팔엔 흔들림 없이 솜과 천으로 덮힌 손이 신호를 보냈다. 불이 꺼진다. 연회장에서 과하게 어조를 꺾은 목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렸다.
" 그럼 카지노에서 봐! 첫번째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거야!! "
.
" 왜 이런 짓을 벌이는거야, 미사키? "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혀져서, 설치된 CCTV를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자기 편으로 포섭을 한 건지 화려한 카지노 안에서 검은옷 사람과 도둑잡기 중인 하구미네. 물론 어느정도 깨닫고 있었다. 포섭되지 않았다면 미사키의 행동은 눈치채지도 못하게 정지 되었겠지. 코코로는 소파의 팔걸이 부분을 꽉 잡아 검은 가면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바깥과 마찬가지로 호화스럽게 꾸며진 관제실에 천연가죽으로 덧댄 넓은 의자. 꼭, 모든 걸 지켜봐야만 하는 납치된 성의 공주님 같은 포지션이 아닌가.
오쿠사와 미사키는 아무런 계획 없이 이런 일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었다. 그치만 질문에도 미동없는 뒷모습은, 역시, 화가, 난다고.
" 대답해, 미사키. "
" ...내 이름은 미카엘이라구. "
" 좋아, 미카엘. 얼른 대답해. "
" 으응...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는 걸, 공주님. "
검은 곰 가면이 삐에로 모자를 고쳐썻다.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이 얼기섞여 있는게 보였다. CCTV 화면을 보고 있던 곰 가면은 코코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빨이 삐죽삐죽, 그러나 눈만은 반달 모양으로 웃고 있는 가면은, 어디까지 이 얘가 미셸에 의지하고 있는지 깨달아버려서 숨이 막혔다.
" 좋아좋아, 알았어. 이런 걸 주웠어. "
망토 안을 우스꽝스럽게 뒤적인 그녀가 메모장 하나를 꺼냈다. 노란색의. 그게 뭐길래, 하고 물으려던 코코로는 익숙한 메모장을 다시 한번 보고 깨달았다. 아. 여객선 이벤트 계획이 전부 적혀진 메모장이었다. 카오루씨와 하구미, 카논씨와 미사키의 이름이 잔뜩 들어갔을. 어느샌가 넓다란 집 안에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망연히 메모장을 보던 코코로는 문득 미사키를 살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그랬었다는 평이한 어조였다.
야심차게 준비한 계획은, 잃어버린 걸 가벼히 지나쳤을 때부터 일그러졌다. 언제? 심지어 자세히 살핀 미사키는 모든 게 엉망이었다. 시장의 장난감 가게에서나 구입한 것 같은 낡은 삐에로 모자며, 가까이서 보니 하얀 천에 반짝이 가루를 잔뜩 뿌린 망토라고 걸친 무언가, 민 무늬 가면에 솜을 붙여 검은색을 물감을 뿌린 게 티가 났다. 멀리서 보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럴듯한. 그 틈새로 보인 망토 안은 그녀가 배에 입고온 그대로, 집앞 패션이라서 한숨마저 튀어나올 것 같다.
" ... ... 그렇게, 엉망이었어? "
" 에? "
언제부터 계획했는지 몰라도 그새에 그 속까지 준비할 시간은 없었겠지. 그러나 그 시간만으로도 이렇게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코코로는, 이쪽을 그저 주시하고 있는 검은 가면에게 달려들었다. 제법 빠르게 달려 들어 가면에 손을 뻗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옆으로 물러서는 것만으로도 피한다. 가면 위로 곤란한 기운이 넘실거려서 짜증이 났다. 한 번 더 손을 뻗으니 허리를 뒤로 접는 것만으로도 피한다. 열받아. 이유 모를 화가 났다.
사실, 알고 있다.
" 아... 정말!! "
알고 있어, 터무니 없는 화풀이라는 건.
CCTV에선 도둑잡기가 끝난 건지 화기애애하게 통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검은옷의 사람이 미소 짓고 있는 것도 보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계획한건지 짐작도 할 수 없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복장과 다르게 완벽히 진행되는 그녀가 준비한 이벤트. 그 때문에 츠루마키 코코로는 화가 났다. 속으로 삭히려다 분에 못이겨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척이나 화가났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참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 어, 어라. 아가씨...? "
천천히, 쭈뼛쭈뼛 다가오는 발걸음에 싸늘한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무릎을 굽히는 것을 보았을 때, 코코로는 믿기지 않게도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생각하고 있는 건 이 친절함의 배반이었다. 그렇지만. 코코로는 걱정어린 손길을 뻗어오는 미사키의 팔목을 잡아챘다. 흠칫, 하고 떨리는 몸. 어깨를 잡고 밀어 붉은 융단 위로 눕혀 위에 올라탔다. 입고 있는 붉은 드레스가 마치 카펫에 섞여 흘러가는 것 같았다.
당신의 엉성한 가면이 서럽고, 이 상황이 억울하고, 모른 척 하는 모양새가 원통하고, 화가 나는 내가 경멸스러웠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단 말이야. 치졸한 어린애의 시기심이었다. 모자라고 철없는 어리광이다. 그러나 코코로는 스스로를 조절할 수 없었다. 가면 속 사정없이 흔들리는 짙푸름에 들어간 내 자신이 역겨워서, 한없이 추악해서. 결국, 결국에. 결국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너에게 휘둘리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오쿠사와 미사키가, 내 계획 그 자체로 당황스러운 일에 휘말려 마지막엔 즐거워 하는 걸 보고 싶었어.
근데 나는 그것조차 못하고,
결국 너를 이렇게까지 해버린 내가 너무 싫어.
.
세타 카오루는, 그녀의 흐린 미소를 떠올렸다.
기억 속에 없는 얼굴, 정적인 몸짓, 제 아름다움에 이끌려 다가오는 귀여운 아기고양이란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웃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듣기 전까진. 가슴을 따스하게 만드는 목표와 얇은 입술에서 나오는 사랑스러운 생각들. 카오루는 처음 보는 그녀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하구미의 웃음은 전염시키는 힘이 있어요. 아, 도둑잡기를 잘해요, 노력하는 만큼 따라주는 운도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기적같이 당첨만 피해가거든요. 그러니까, 조커 말이에요.
화려한 카지노. 마왕의 부하처럼 담담히 나타나 첫번째 시련이라고 내어주는 건 도둑잡기의 승부.
" 아, 하구미! 이겼어!! "
" 다행이다...! "
손에 든 두 장의 카드를 던지듯 내려 놓으며 하구미가 웃었다. 카논도 안심한 듯 두손을 가슴께로 끌어모아 웃고 있었다.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항상 무표정이었던 검은옷의 여자가 승자의 웃음이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선글라스 아래로 자연스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 축하드립니다. 첫번째 시련을 무사히 통과하셨군요. "
정말 이상한 일이지, 전부 네 말대로 되고 있구나.
- 카논씨는... 자신감이 없어서 쉽게 움츠러들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을 잘 헤아려 주고 생각이 깊어요. 조금만 등을 밀어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에요.
없는 게 없을 정도로 온갖 것이 가득한 기프트 샾. 마왕의 두번째 부하는 "진심이 될 때 필요한 것"에 맞는 단 하나의 물건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다.
" 뭐하고 있지, 카논? "
" 카오루... 진심이 될 때 필요한 걸, 생각해 보고 있었어. 진심이 된다는 건 솔직해진다는 거니까 수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하고. "
카논의 시선을 따라가면, 그곳엔 웃는 얼굴의 가면이 있었다.
" 나는 웃는 얼굴에 용기를 받았어. 그게 꾸며진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의지는 가득 전해져왔으니까. "
" 심판이 끝나도 진실은 진실이다... 덧없구나... "
" 에, 아, 미, 미안해. 내 할 말만 했네. "
" 아니, 훌륭하다. 카논이 고른 걸로 하지. "
에, 그래도 돼?
두 눈이 동그랗게 커져 의아해는 얼굴에 고개를 끄덕인다. 인형 코너를 두리번 거리던 하구미를 데리고 와 웃는 얼굴의 가면을 건네면 검은옷의 부하가 잠시 침묵하더니 길을 열어주었다.
" 진실이 필요할 때, 때론 부끄러움을 가면 속에 숨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요. 마왕님은 극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 예에!! 카논짱 선배, 멋있어! 그런 뜻이 있었다니! "
" 후에에... 아, 아니... "
" 아아- 카논, 그대의 혜안은 내 마음을 울리는군. "
카논은 새빨개진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 얼른 코코롱을 구하러 가자! 분명 덜덜 떨고 있을거야! "
카오루는 멋드러진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모두가 웃는 얼굴을 원해요. 흐리게 미소짓던 얼굴이 계속 생각났다. 곧 그 얼굴은 검은 가면에 의해 가려졌더랬다. 짠- 만들어왔어요. 밝게 높힌 목소리가 조금 어색했었다. 조금 목울림이 어눌했던 건, 원래의 습관인가 피로의 탓인가. 그것까진 카오루조차 알 수 없었다.
- 미리 검은옷 분들에게도 협조를 부탁했어요. 코코로가 이미 굉장한 이벤트를 준비했지만, 거기엔... 코코로는 들어가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코코로도 즐거울 수 있도록 돌발 이벤트에요!
- 그 멋진 이벤트를 내게 미리 알려주는 이유는 뭐지, 아기고양이?
- 카오루씨, 엉뚱한 말 잔뜩이지만 믿음직하니까요. 그리고 시선을 끌어주었으면 해요. 하구미라면 몰라도 카논씨라면 절 찾을지도 모르니까요. 화려하게 반짝이는 카오루씨라면 분명 모두의 시선을 한꺼번에 사로잡을 수 있겠죠.
카오루는 눈을 감았다.
- 부탁해요, 카오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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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공책(@Fox_nullnote)님이 써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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