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지는 파열음. 사방으로 흩어지는 도자기 조각. 새어나오는 붉은 줄기.

어머니가 사다주신 귀여운 곰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 컵이 결국 깨어져 추락했다. 어린 미사키는 어머니가 소리를 듣고 올 때까지 하염없이 산산조각난 도자기들을 내려다 보았었다. 어머니가 저를 뒤로 물리고 손을 치료해주셨을 때야 아파서 울었다.

악력을 조절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꽉 쥐고 있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었다. 손목이 아프도록 쥐고 있어도 그대로 빠져나갈 것 같은 기분에 빠트려져서, 힘을 빼고 다니라는 말에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원상태. 힘을 빼지 않는다면 쉽게 망가진다는 걸 알고 있어. 조금의 힘으로도 많은 것들을 들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치만, 그치만 이렇게나 불안한 걸.

악력의 조절을 할 수 있게 된 건 동생이 태어나고 얼마 있지 않아서였다. 무심코 꽉 쥔 동생의 손이 붉게 짓물러졌을 때 미사키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죄책감이 몸을 짓눌러 그저 옆에 앉아 미안하다며 속삭여야했다. 아픔에 울고 있는 아기를 어떻게 하지도 못한 채 보았다.

차라리 누군가 다칠 바엔 내가 불안해지는게 좋겠어.

 " 또 힘 조절을 못했니? "

목 언저리를 보며 말씀하시는 어머니에게 미사키는 그저 헤실 웃어보였다.

숨이 막혀서 목을 움켜잡았다. 아무런 신경도 가감도 없이 꽉 짓누른 손아귀에, 손톱마저 파고들어 손자국이 푸르게 남았다. 꼭 스스로 목을 조른 것만 같은 자국이었으나, 자해가 아닌 걸 미사키도 어머니도 알았다. 어머니는 한숨과 함께 검은 초커를 건네주었다.

 " 이걸로 가릴 순 있을거야. 이 시기에 목도리나 머플러는 좀 어색하잖니. "


.


호러영화는 무섭다.

 영화의 감독이 의도한대로 깜짝 놀래키는 부분은 눈을 꾹 감아버리기도 하고, 배우의 비명은 무척 리얼해서 섬뜩했으며, 귀신 (흑막)의 무드있는 출연은 이야기를 파멸로 이끈다.

 그러니까 오쿠사와 미사키는, 굳이 말하자면 호러영화 자체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다만 이런쪽의 이야기는 리미랑 즐겁게 얘기할 수 있으니까, 단지 그것뿐.

 스피커에선 불길한 음이 점점 소리를 키우며 나오고, 커다란 스크린은 점점 어딘가를 클로즈업한다. 관객들은 소리를 죽였다. 어떻게 해도 뭔가가 나올 것 같은 기분에 미사키는 경직 된 채 결국 눈을 감아버렸다.

 " 너무 무서워하는데 괜찮은걸까? "

옆쪽에서 소곤소곤 전해져오는 목소리 안에 담긴 걱정을 깨달아 미사키는 눈을 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애매한 어둠 속에서도 코코로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어떻게 알았을까. 느리게 눈을 깜빡인 미사키는 그녀를 보고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섭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스크린 속 어두침침한 분위기, 배우의 실감나는 비명소리, 잔혹해 보이는 귀신의 모습도 아무렇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쪽을 살피는 눈이 노골적이었다. 너의 특별함이 날 어쩔 줄 모르게 해. 미사키는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기묘하게도 상향곡선을 그리는 기분에 목소리가 커질까 그녀의 귓가에 소근거렸다.

 " 괜찮아, 코코로. "

 " ...하지만. " 

 " 코코로가 불러줘서, 다 괜찮아졌어. "

 " 미사키는, "

아.
 말을 하다 말고 코코로는 짧은 감탄사를 내놓고는 다른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영화는 점점 하이라이트를 향해 가고 있었다. 잠깐 환한 불빛에 문득 코코로의 얼굴이 붉다는 걸 알아챘다. 

 " 역시, 코코로 오늘 열 있는거지? "

 " 아니 이건... "

코코로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눈에 강제로 담긴 부드러운 금발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심장에 쿵 떨어졌다. 말을 못할 정도로 아픈거야? 곳곳에서 비명이 귓가를 때리고, 미사키는 생각했다.

나 때문이야.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친 순간들이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필 오늘 만나자고 하지 않았다면, 만났을 때 알아차렸다면, 파스타를 먹고 열을 쟀을 때 왜 몰랐어, 영화를 보지 말고 바로 집으로 향했어야지. 심지어 점심때와 영화의 상영시간까지 시간차가 꽤 있었다.

무리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 

희게 질린 얼굴로 처연히 코코로를 바라보던 미사키는 의자 손걸이에 얌전히 놓여있는 손을 잡아  제 얼굴에 끌어당겼다. 불쾌해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지만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 코코로. "

스러져가듯 작은 목소리로 부른 이름에 너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사이에만 흐른 정적. 고요히 마주치는 금안이 어떠한 생각으로 가라앉았는지 미사키는 몰랐다. 사실 무슨 생각이든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뺨에 닿은 손이 꽤 따스해서 얼굴을 부볐다. 만약에 감기라면 내게 옮아줘, 지독한 열병이라도 좋아.

 코코로의 손에선 짠 팝콘 냄새가 옅게 풍겼다. 깊숙히 그 향을 들이마시면 손가락이 움찔, 하고 떨렸다.

 " 난 괜찮으니까, 아프면 무리하지 말고 집에 가자. "

속닥이며 나온 말에 또 한번 침묵이 흘렀다. 다시 한번 스크린 속 배우가 비명을 질렀다. 코코로의 얼굴이 곤란한 것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어간다. 제게 잡혀있는 손이 느리게 움직여, 미사키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는다.

 " 아무래도 지금 전혀 영화 집중을 못하고 있지? "

그야.

 " 미사키, 그럼 나가자. "

볼을 꼬집은 손에 힘이 풀려 피부를 살짝 쓰다듬는다. 그 감촉이 좋아 아무말없이 일어나는 그녀를 따라 나섰다. 의자 끄트머리에 걸친 관객에게 사과를 하고 넘어가 죽어가는 연극배우가 나오는 스크린에게서 등을 돌렸다. 


.


사람에게 귀랑 꼬리가 달려있다면 틀림없이 오쿠사와 미사키에겐 대형견의 그것들이 달려 있을 것이다.

몇 분에 한 번씩 격하게 흔들리다가, 축 늘어지는 꼬리의 환영.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태양이 꽤 아래로 내려가 있어서, 곧 어두워질 것 같았다. 슬슬 집에 가야 할 타이밍일까? 의견을 물으러 돌아보니 이쪽을 향해 있던 무덤덤한 시선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 위로 떠오르는 개의 환영.

 " 역시, 병원이라도 한 번... "

 " 정말로 안 아프니까 진정해줄래. "

당신의 전생은 개라도 되었을까나.

 " 하지만 그러네.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미사키, 이제 집에 갈까? "

 " 응...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코코로는 집에 어떻게 가? "

 " 나는. "

코코로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보통이라면 평범하게 검은옷 사람들이 차로 데리고 오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미사키는 혼자 남게 되는걸까. 홀로 서 있는 당신을 생각하니 어떻게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사키는 참을성 있게 코코로의 말을 기다렸다. 담담한 얼굴에 맺힌 작은 미소는 어떤 말을 해도 다 받아들일 것만 같아, 코코로는 어리광을 부리기로 했다.

 " 여기서 집까지 별로 안 멀어. 그러니까, 걸어가도 오케이. 혹시 미사키만 괜찮다면 끝까지 어울려줄래? "

몇 마디에 변명 끝에 솔직히 나온 진심에 미사키는 해맑게 웃었다.

 " 난 코코로의 말이면 뭐든 할 수 있어. "

그녀의 웃음과 동시에 홧 하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녀의 말은 마치 내가 가장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내 말이 대체 뭐라고. 웅얼거리듯 나온 소리를 못들었는지, 들었으면서도 모른 척 하는건지 미사키는 아주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아왔다.

한 발, 한 발. 천천히 걷기 시작하는 미사키의 발걸음에 맞춰 코코로도 걸었다. 져가는 석양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두 개의 그림자가 마냥 이어진 걸 빤히 바라봤다. 마음이 간질거려.

미사키가 말했던, -세상이 반짝반짝해- 라는 말을 아주 어렴풋 이해했다.

 " 코코로, 혹시 영화 내용 기억해? "

 " ... 아니. 저주의 내용이었던 건 알겠는데. "

 " 도중에 나와서 결말은 못봤지만, 신혼부부가 여행을 갔다가 호기심으로 오랜 지박령을 건드린 벌로 저주를 내린거야. 두 사람 사이에 거짓말이 쌓이면 쌓일수록 알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저주. "

 " 그거 결국 자업자득이란 말로 들리는데? "

 " 맞아. 남자가 불륜을 저질렀거든. "

미사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 불가항력도, 그 어떠한 변명이 될 요지도 없이 그냥. 그 순간의 유혹에 못 이겨서 일어난 일이지. 아내에게 늦게 온 변명을 거짓말로 둘러대고. 그 일 때문에 남자는 폐쇄된 감옥에 어쩌다 갇히게 돼.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간다. 좀 더 길게 늘어진 그림자에 마주잡은 손.

 " 거기서 헤매던 남자는 무서워 울고 있는 아내를 발견하게 돼. 나중에 나오는 회상씬에서 안거지만, 아내는 이미 남편의 불륜을 알고 있었고 모른 척 거짓말을 한거지. ... ...아, 혹시 재미 없었어? "

 " 아, 아니. 그렇게 무서워했는데 의외로 잘 보고 있었구나 싶어서. 대단하네. "

가만히 눈을 깜빡인 미사키가 '초반 부분인 걸' 하면서 또 웃었다.

당신은 모르겠지. 몰라야만 했다. 아주 조금,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했다.

다른 이의 조언이 있다 해도 시간을 들여 꾸민 오쿠사와 미사키, 분위기와 맛이 좋았던 점심과 동상이몽이라 해도 연인처럼 영화 스크린 앞에 내던져졌던 시간, 다정히 손을 잡아 언제까지고 느리게 걸어갈 걸음걸이가 도저히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 있지, 미사키. "

그리고, 칼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 미사키가 그런 저주에 걸린다면 어떡할거야? "

그 옆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어도 당신은 똑같이 할 거란 사실이. 다정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걱정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다른 이의 손을 잡아, 온갖 것들이 들어있는 눈으로 모르는 이를 바라보는.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아?

 " 어, 거짓말을 안하게 되지 않을까? "

 " 미사키처럼 터무니없는 거짓말쟁이가? "

분하고, 분하고, 너무 분해서- 나쁜 마음으로 가득차는 감정. 그러니까 이건 심술이다.

자기가 한 전과가 기억나는지 입을 딱 다문 미사키를 보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높은 톤의 웃음소리에 미사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좋은지, 저를 따라 기쁘게 웃었다.

맞잡은 손을 들어올려 꽉 쥐었다. 움찔 놀라는게 선연했다. 코코로는 가득 장난기를 담아 말했다.

 " 좋아, 터무니없는 거짓말쟁이씨. 당신은 저주에 걸렸습니다. 앞으로 거짓말을 한다면 벌 받을거야. "

에. 의문 어린 목소리에도 머릿속이 착착 정리해 들어갔다. 상냥한 당신이 내 속내를 알면서도 어울려 줄 것이란 건 알고 있어. 이거봐. 미사키는 이내 웃으며 수긍했다.

 " 자아, 그럼 뭘 물어보는 게 미사키를 곤란하게 하는데 탁월할까. "

 " 제가 곤란해지는 건 확정입니까, 코코로씨. "

 " 어쩔수 없어. 당신은 말하지 않는 것 투성이니까. "
 
해가 완전히 졌다. 어둑한 하늘 아래, 가로등 빛과 가정집 불빛들이 반짝였다. 동화 속 이야기처럼 쌀쌀하지 않는 날씨 속에서 둘이서만 걸었다.

 " 그럼 첫번째. "

 " ... 물어보는 게 여러개였어? "

 " 안돼? "

 " 아니, 돼. "

단호한 어조에 괜히 마음이 술렁였다. 꽉 잡은 당신의 손이 의식된다. 그러나 손은 항상 당신이 먼저 잡았다. 아주 조심스럽고, 힘을 주면 깨질 유리창처럼. 거기에 무슨 사연이나 생각이 있는지 코코로는 알지 못했다. 긴장으로 입 안에 침이 고여 삼켜냈다.

 " 미사키는, 어째서 내게 그렇게 잘해주는거야? "

기어코 입밖으로 꺼낸 문장이 되돌아와 코코로를 가격했다. 미사키는 곰곰히 말을 고르는 느낌이었다. 입을 몇차례나 달싹이다 이내 표정마저 부드러이 풀렸다.

 " 그건 코코로가 특별하기 때문이야. 어디에 있든 코코로는 반짝이지 않은 적이 없었어. 잘해주고 있는건지 사실 잘 모르겠지만, 코코로가 웃는다면 난 무척 기뻐. "

어쩐지 그건 달큰한 사랑의 속삭임처럼도 들렸다.

 " ... 고민하라고 질문했던건데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거야? 좋아, 두번째. "

치사하다는 것쯤은 깨닫는다. 고압적인 억지는 미사키가 맞춰주지 않는다면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도. 한없이 유치해지려는 스스로를 자각해, 들뜨려는 기분을 그저 진정한 척 해. 흐트러지는 발걸음마저 차분히했다.

 " 어렸을 적 얘기를 해줘. 미사키는 옛날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 걸. "

 " 내 어릴때? "

미사키는 머뭇거렸다. 마주잡은 손에서, 덤덤한 척 이쪽을 향하는 시선에서 당황스러움을 느끼지 못할리가 없었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한차례 달싹였다. 곤란히 눈썹을 찌푸린 미사키는 옆쪽으로 눈을 굴리다 곧 침착하게 시선을 바로 마주했다.

 " 동생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난 이것저것 물건을 많이 망가트렸어. 연필이나 책가방의 끈, 교과서나 리코더 같이 학교에서 자주 쓰는 것들. 왜냐면... 집에선 어머니가 어떤것도 잘 만지지 못하게 했었거든. "

발걸음이 멈췄다. 코너를 돌면 얼마 안 있어 츠루마키가 정문이 나왔다. 미사키는 무슨 생각인지 모를 낯으로 목에 두른 초커를 매만졌다.

 " 손에 힘을 빼는게 잘 안됐어. 꽉 쥐지 않아도 되는 걸 알았는데. 리코더의 구멍이 휘어 소리가 엉망이라 음악시간에 빵점 맞은게 아직도 기억나. "

 " 지금도 잘 안돼? "

 " 아니. 그런 힘으로 동생을 만지면 다친다 하셔서, 어떻게든 했어. "

미사키는 그 말을 끝으로 그림처럼 웃었다.

코코로는 그녀가 조금 울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마주잡은 손에 힘이라곤 전혀 들어가지 않아, 그럼에도 빠지지 않게 잡고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이런 닿음마저도 당신의 노력은 필사적이었을까. 누군가에게 닿기 위하여.

코코로는 지금 속을 엉망으로 만드는 무언가가 그녀를 향한 동정심인지 안타까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 ...마지막 세번째. "

그러니까다. 어떤 위로도 격려도 응원이나 칭찬조차 할 수 없어, 제 치졸한 심술을 속닥거렸다. 솔직하게 답해줘. 당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심연은 깊고 세심해서 시간을 가지고 지켜봐야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츠루마키 코코로의 인내심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기회가 있다면 단번에 들춰내고 싶어.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그런 걸로 내쳐버리기엔 아까웠고 안타까웠다.

 " 오늘, 같이 밤을 보낼래? "

그러니, 좀 더 내게 시간을 내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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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공책(Fox_nullnote)님이 써주셨습니다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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