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만이 가득 찬 학교는 져 가는 태양의 잔향을 불태우는 주홍색으로 물들어있다.

불은 꺼져가는 마지막이 가장 밝다고 하지만 서서히 타들어가 부질없는 잿더미가 되어가는 한순간이 아름답다고해서 그 결과가 전부 의미있지는 않을것이다.

그러니까 괴롭고 처절해지는 끝을, 바래지 않을 빛으로 들어찬 눈에 비추기 싫다면 눈이 부셔 화상을 입을것 같은 이 사랑의 절정부분만을 찢어내 선물하는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인지도 모른다.

"응, 코코로. 나 실은 너를 좋아해."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것 같은 말투로 타들어가 부서져, 무너져버린 부분을 숨겨 보여준 불꽃의 겉부분을 예상과 한치도 다르지 않게 기뻐 받아드는 모습은, 나와는 다른 온도.

이해하니까 같기를 바라지 않는 나는, 역시 겁쟁이인지도 모르지만 틀리지는 않았다.

"기뻐 미사키! 나도 미사키를 정말 좋아해!"

순수하게 맑은 빛은 너무나도 밝지만 온도를 띄지 않아서 언제까지라도 밝을, 나따위는 묻혀 눈에 띄지 않을게 분명한 영원의 광원.

거기에 무엇이 더해지든지 바래지 않을것을 아니까 나약한 나의 그을림이 미치더라도 괜찮을거라고 욕심을 품는다.

"그래, 나도 기뻐."

이것은 내가 다 타올라 자연히 소멸해버릴때까지의 연정.

아마 인생의 제일 화려하고도 가혹한 슬픔의 시작이다.




순조롭게 시작된 교제에서 어떤것을 해야하는지 하나도 모르는 코코로에게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것을 선택했다.

그저 내가 지금 가진 제일 소중하고 빛나는것들을 전하기에도 시간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보답을 바라지 않고 내 몸을 태우는것이 주는 고통은 더욱더 이 감정이 크고 격렬함을 느끼게 만들어주니까.

허기를 사랑스럽게 여겨버렸으니까.

"미사키-! 라이브에서 폭죽을 터뜨리는건 어때? 축제처럼 신날거야!"

"으음.. 그렇게 큰 규모로 터뜨리면 주위에 폐가 되겠지만.. 일단 되는지 물어볼게."

"와아! 다들 웃는얼굴이 되어줄까?"

헌신으로 충족되는 자존감이 가슴을 울려도 돌아오는 소리는 없는데, 이것에 행복을 느낀다니 나날이 하는 무리가 불러오는 피로도 너는 알수없길 바란다.

보이지 않게 흘린 한숨은 불과 함께 솟아오르는 뿌옇고 덧없는 연기.

그야말로 너의 눈에 비추지 않아도 될 더러운 그을음이었다.

"그럼 코코로, 돌아갈까?"

슬슬 내 주위에서 떠드는것에서 흥미를 잃었는지 밖을 내다보는 모습을 보고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남아있던 용무도 이미 없던것으로.

안보이는곳에서 하는 노력은 알아주지 않아도 라이브가 성공하면 항상 웃는얼굴로 포옹을 해주니까.

그게 비록 속에서 뜨겁게 타올라 문드러지는 겁쟁이가 아닌, 아무 온도도 품을 수 없는 빈껍질일지라도 나는 그것이 나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전하지 않는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나한테는 이정도의 가면이 어울렸다.

"저기, 미사키. 우리는 연인이 되었지만.. 그전과 아무것도 다르지 않은거 같아. 히나한테 들은것과는 다른걸?"

즐거움을 주체하지 못하는 빠른걸음은 여전히 나와는 맞추지 못하고 항상 앞을 달려나간다.

뒤돌아본 코코로가 내 동요를 눈치채지 않길 바래도 숨기는건 언제나 간파당했으니 미적지근한 진실을 담은 연기로 그 눈을 가린다.

"코코로가 언제나 말했잖아. 정해져 있는건 없다고. 우리도 다른 연인이랑은 다른거겠지."

"흐음.. 그것도 그렇네!"

안타깝게도 고백의 연기는 형편없는 모양이지만 둘러대는것은 꽤 재능이 있는지 약간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도 코코로는 도로 나에게서 눈을 돌려 앞을 쳐다본다.

어슴푸레한 밤의 기운이 침범하는 애매모호한 시간, 얼룩덜룩하여 사진으로 남기기에도 아까울 하루의 찌꺼기 같은 찰나를 보물같이 끌어모아 안도하며 자신을 태울 의지를 얻는건 내 그릇이 작은탓이겠지.

좀 더 반짝거리고 가치있는것이 바란다면 손에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삼켜져 완전히 꺼져버리는건 아닐까 쓸데없는 걱정에 그 손조차 잡지 못하는걸 코코로의 빠른 걸음속도의 탓으로 돌린다.

앞에서 흔들리는 흰 손의 감촉이 얼마나 부드럽고 매끄러운지.. 그러한 기억들은 이미 연소하여 사라진듯 떠오르지 않았다.

"코코로, 방금 떠오른거지만. 연인끼리는 같이 걸을때에 손을 잡기도 해. 한번.. 해볼래?"

내민 손은 조금, 떨리고 있는데다가 더위에 땀을 흘렸을지 모른다는게 생각났다.

반짝이며 이 볼품없는 굳은살이 박힌 손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가 무슨 평가를 내릴지, 코코로는 그런 아이가 아니란건 알고있는데도 모르는새에 손이 점차 아래로 침전하고 있었다.

순간의 충동으로 욕심을 내버렸다.

나의 더러운 부분.. 욕망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고백하기 이전부터 결심했는데.. 삐꺽이며 부러진 불속의 장작이 재투성이의 바닥을 구른다.

"하지만 그런건.. 연인이 되기 전에도 했는걸? 뭐가 다른거야?"

말랑한 감촉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양손으로 내 손을 잡고 고개를 기울이는 코코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시선으로 순수하게 호기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내가, 무슨 욕심을 내어도, 그게 영향을 줄 수 없는 존재라고 재차 인식하도록.

어떤 뜨거운 감정의 자락도 내비추지 않는 온도가 없는 빛의 덩어리.

모르는건 아니었다.

그냥. 내가 너에게 영향을 미칠수 있었으면 한 바램의 삐뚤어진 발로였다.

"연인이면, 이렇게. 손가락을 교차하도록.. 어때? 좀 더 특별한것 같아?"

"그렇구나.. 미사키! 이거 정말로 연인이란 느낌이네! 가슴이 두근두근거려."

심장을 쏘아 맞춰진 기분이었다.

기쁜듯 콧노래를 부르며 잡은 손을 당기는 모습에 얼핏 온기가 스민것도 같았다.

그럴리가 없다고 눈을 부비고 다시 쳐다보아도 잡은 손과 손으로 이어진 거리는 아까보다 훨씬 가까워져서 코코로의 귀가 석양에 물들어 붉어진게 아니란것을 알아버리게 된다.

보면 안되는것을 봐버린 기분이었다.

해선 안되는짓을 저질러버린 기분이었다.

"오늘도 즐거웠지만 미사키와 함께라면 어디서도 즐거우니까. 내일은 한층 더 미소가 될 수 있을것 같아."

온도가 없는 광원이라고 생각했던게 사실은 너무나도 투명한 물방울과 같아서 검은 욕망에 쉽게 흐려져 탁해버릴걸 알았다면 나는 욕심내지 않았을것이다.

그때서야 알아채버렸다.

내가 사랑한것은 나를 보아주지 않는 코코로였다고.

코코로가 보아주지 않아 텅비어가는 내 자신이었다고.

착각이 불러온 비극에서 눈을 돌려도 완전히 저물어 컴컴해지는 지평선은 답을 주지 않는다.





놀라울것도 없는 결론이었을지 모른다.

하는건 달라지지 않으니까.

나는 이대로.. 내가 가진 가장 뜨거운 감정을 불태워, 쓸모없는 부스러기로 만들어 그 하얀가루를 아름다운 금빛의 바다에 뿌려 흔적도 없이 가라앉히면 된다.

그러면 중간에 눈치채버린 추악한 내 모습이거나, 시간이 흐르면 잊혀질 빛나는 조각은 추억이란 이름의 심해에 묻혀 잊혀질테니.

"미사키. 오늘도 작곡 하는거야? 라이브가 끝난 직후인데."

코코로의 콧노래가 녹음된 레코더를 반복해서 들으며 악보에 옮겨가는 나의 등으로부터 덮쳐 안은 코코로가 어딘가 심기가 불편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언제 해도 상관없는 작업이었지만 코코로와 사귀기 시작하고 난 이후로는 코코로의 앞에서 하는 빈도가 늘어갔다.

달콤한 코코로의 향기라던가 밀접한 거리에서 느껴지는 숨소리나 체온, 살갗의 매끄러움도,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누군가에게 배운것도 아닌 독학의 작곡을 할때엔 신경쓰이지 않았다.

"요새, 코코로가 더 자주 콧노래를 부르잖아? 그러니까. 밀려버리지 않게 해둘려고."

주루룩. 재생목록을 내려보면 이상할정도로 늘어난 곡의 숫자는 알고싶지 않은 것들을 상기시킨다.

코코로는 명백히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라이브도. 곧 방학이 되니까 자주 할 수 있잖아. 내년이면 카오루씨나 카논씨는 대학교에 가버리니까, 올해가 아니면 역시.. 달라지겠지."

공부와 병행하면서도 하로하피활동을 진심으로 즐기는 그들은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미래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 순간을 더 즐길 용기도 가질 수 있었을텐데.

공허히 비어가는 감각을 사랑하는것은 갈구하며 무언가를 얻어 채워갈 여력이 더는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달라진다고 생각해? 카논도, 카오루도 하로하피를 좋아하는데다가 아직 세상은 미소로 가득 차지 않았는데."

 "물론 두명은 절대 하로하피를 그만둔다거나 하지 않겠지. 하지만.. 코코로 우리도 내년에는 3학년이야."

"3학년이 되는게 무언가 달라지는 이유가 되는거야?"

"...글쎄. 어쩌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지도 모르지."

같은반, 옆자리.

운명같은 우연이 만들어낸 기적을 코코로는 당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앞으로도 그럴거라고 믿고 있는것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것을 진작에 멈춰버린 나는, 홀로 먼 미래를 상상하며 지금을 필사적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코코로가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을 향유하도록, 카논씨와 카오루씨에게 최대한 서포트하겠다며 간절히 애원한 나의 작은 뒷모습은 알려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당연하게 꿈을 꿀 수 있는 그 모습이 아름답기에 지키고자 했던 내가 그 옆자리에서 사라지면, 너는 어떻게 변할까?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거야. 네가 말하는데로 이뤄질테니까."

내 자리를 누군가가 채우고 네가 그 사람의 옆이면 어디든 즐겁다고 말하는 장면이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떠올랐다.

치이익.. 어디선가 떨어진 물방울이 부질없이 기화해서 사라졌다.

아쉽게도 이정도로 꺼질 불이었으면, 타오르지도 않았겠지.

"미사키는.. 연인이 되고 나서가 오히려 멀어져버린것 같아."

꽈악.

나를 껴안고있던 팔에 힘이 들어가 나를 조여왔다.

따뜻한 체온이 옮겨와 나를 물들이는 감각이 왠지 무척 아이러니라고 생각했다.

심장이 굳어버린것처럼 차갑게 얼어붙어서 욱씬욱씬 전해지는 애정에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가슴팍에 걸쳐진 코코로의 손을 잡아 치우면서 뒤를 돌아보면 내가 제일 보고싶지 않았던 코코로가 나를 보고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전보다 좀 더 같이 있는 시간도 늘어났는데."

"하지만...하지만.....미사키, 최근 나를 봐주지 않잖아. 나와.. 이야기 하지 않잖아."

"내가? 전처럼 눈을 피하지도 않고 코코로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는데."

요즘 내 모든것은 코코로를 생각하여 돌아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 정도로 나는 내 의사도 구부려서 코코로에게 맞추고 있었다.

코코로가 싫어하지 않게 거짓아닌 부족한 진실로 감추고, 말리기보다 내가 무리하는 편을 선택했다.

원하는것을 들어주고, 좋아한다는 말을 빼먹지도 않았다.

내가 줄 수 있는 애정을 다 쏟아내고 있었다.

"그런걸 말하는게 아니야! 그런게.. 아니라구.."

숙여진 고개에 떨리는 말꼬리.. 부슬부슬 떨어지는 물방울이 화염에 집어 삼켜진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나는.. 가슴 속 어딘가에서는.. 나로 인해서 코코로가 정말로 바뀐다면 내가 스스로를 불태우는걸 멈출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놀라울정도로 나에게 아무 감상도 느끼게 하지 못했다.

눈치채면 이미 가슴 속에는 회색과 검정으로 점칠된 잿더미뿐.

"코코로. 뭘 말하고 싶은거야?"

"모르겠어..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전하고 싶은데.. 미사키, 알려줘. 언제나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어줬던 마법을 다시 한번 부려줘."

"..미안. 코코로는 모르는게 좋다고 생각해."

예상보다 빨리 연소한 감정의 잔재가 눈에서 흘러 나오는데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 희열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절망에 찬 코코로의 얼굴이 이렇게 아름답다고 느끼는건 이제 내 안에서 지켜주고 싶다는 맹세도 바램도 하얀가루가 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응. 코코로. 나 실은 너를 싫어해."

웃으면서 내뱉은 이별의 말은 처음에 다짐했던것들을 전부 어겼는데도 불구하고 매우 만족스런 억양을 띄고 있었다.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 타고 남은 자리에는 비로소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이기심이 싹터 꽃을 피웠다.

바닥을 기며 스스로를 태울 연료를 찾던 나날이 바보같을 정도로, 지쳐버려 모든것을 버릴 각오를 하고 나서야 가벼워졌다.

모르는새에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미사..키?"

놓아버리자고 생각하자 미움받는것도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싫어해서 원망한다면 전부 잊어버릴테니까 좋다고 생각했다.

미움받고 잊혀져 나를 모르게된다면 더욱 가벼워지겠지.

"그러니까. 헤어지자. 코코로는 나같은걸 잊고 더 좋은 사람을 찾는거야. 아직 모르는 그 감정은 그때에 이름붙이면 지금 이 시간도 어렸을적 치기로 남을 수 있겠지."

"미사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몰라도 괜찮아. 다 잊어버려도 돼. 내일부터 다시, 나를 인형옷 입는 사람으로 봐도 좋아. 아... 아니면 역시 그냥 다른 사람이 나을까?"

"미사키..미사키, 내가 무언가 잘못한거야?"

뚜욱 뚜욱.

떨어지는 물방울은 잿더미의 열기까지 식혀간다.

이대로 그 액체에 잔재를 실어서 먼 바다까지 흘려보내면 흔적도 남지 않고 내 목끝까지 치달았던 사랑의 이야기도 끝이 나겠지.

"코코로는 아무 잘못도 없어. 네가 옳아. 내가 나쁜거지. 그러니까. 잊어버리자, 코코로. 이렇게 널 아프게만 하는 사람은 잊어버리는게 나아. 좀 더 반짝반짝하고 두근거리는것들이 세상에는 잔뜩 있잖아?"

책상 위에 코코로의 콧노래가 담긴 레코더를 남긴채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쓰다만 악보도, 미셸의 장식이 붙은 샤프펜슬도 그대로 둔채 홀가분한 몸만을 일으키면 지나치게 가벼워져 깡통같이 울릴것 같은 가슴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더이상 열기도.. 빛나는것도 잃어버린 잿가루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 아픔이 혼자가 된다는 느낌이라면 매우 감미롭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가 외롭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모든것에 관대해질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작곡해서 모아둔 악보는 전부 주고 갈게. 작사는 원래 카논씨랑 같이 했었으니까 두명이서 하면 될거야. 라이브 장소를 구하는법이나.. 내가 알고있는 사람들에게도 사정은 설명해 둘테니까.."

자리를 떠나려는 나의 옷자락을 코코로가 붙잡고있어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코코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도 아무말없이 그 머리를 쓰다듬고 힘이 풀린 손을 떼어놓았다.

내가 없어져도 괜찮을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닫을 수 있었다.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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