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구원해주는 히어로, 어두운 밤을 밝히는 나의 태양, 미아가 되어버린 나를 이끄는 찬란한 북두칠성(길잡이).
이 세상 대부분의 것이 너였다는 걸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않았다.
모든 빛들이 너에게로 모여 나를 밝혔을 때 속절없이 무릎꿇어 감싸이고, 신의 세례를 받은 것처럼 내 세상이 달라졌다. 세상이 온갖 색채로 물들고, 감고 있던 눈이 떠져서 빛나는 새 세상을 갈증을 해소하듯 받아들였다.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에 시멘트 도로가 깔리고, 메마른 사막에 천막이 쳐진 오아시스가 발견되고, 온통 새하얀 눈밭에 한 길로 발자국이 새겨진다.
코코로. 믿겨져? 모두 한 순간이었어.
네가 내 히어로였다는 걸 알아챈 순간, 네가 내 가면에 입맞춤한 순간, 마법이 풀린 순간.
끝을 향해 쉼없이 달려가는 땅은 뒤집히고 물이 솟구쳐 올라 바다를 만들며 화산이 폭발했다. 저 혼자만 존재하던 세상이 순식간에 뒤흔들려 변화해갔다. 지구에서 몇 세기 동안 일어난 일들이 눈깜빡 할 새에 지나갔다.
그리고, 그리고...
너를 내 품 가득 안았을 때.
황폐한 땅에서 식물들이 살아나고 동물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숨을 쉬고 각자의 방법으로 소통하고 초원을 뛰어다녔다. 네가 뒤흔들어, 네가 일궈낸 나의 세계였다.
나에 대한 호기심, 호감, 신뢰 같은 것들. 겁쟁이인 너는 정면으로 부딪히고 도망치면서도 마지막엔 내 눈을 마주봐 주었기에 화려히 피어나게 만드는.
내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네게도 잔뜩 보여주고 싶어. 이 아름답고 찬란한 내 세계에 너를 초대하고 싶어.
사랑 이상의 단어를 알지 못하기에, 나는 이걸 사랑이라고 표현할거야.
.
달디 단 대화를 나누다 마침내 문 안으로 들어서서 언젠가 보았던 검은옷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거대한 홀을 지나 코코로의 손에 이끌린 채 기다란 복도를 걸어 방에 도달했다.
스테인드 글라스에 달빛이 들어오던 걸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보다 코코로의 방문을 닫았다. 코코로의 방. 이제껏 지나왔던 호화스러운 분위기와 다른 방은 그녀의 성격을 그대로 투영한 것처럼 느껴졌다.
커다랗지만 꾸밈이 없고, 고급스러우나 과하지 않았다.
" 시간이 좀 늦었으니까 집 구경은 내일 하도록 하자. 괜찮아? 욕실이나 화장실은 안에 있으니까 옷은 그 사이에 가져다 놔줄게. "
" 정말 고마워. 아, 옷은 코코로의 옷이야? "
" ... 아마도? 싫다면 검은옷 사람들이 새로 사올텐데. "
" 응... 괜찮아. 이 밤에 다녀오긴 힘드실거야. 그리고 코코로의 옷이라면 입어보고 싶어. 코코로의 향 정말 좋아해. 네게 안긴 기분이 날지도 몰라. "
정말 그렇다면 좋을텐데.
드레스룸을 살피러 가던 코코로의 발이 멈춰 움직이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은 그대로 모든 게 멈춘 코코로가 이상해서 가까이 다가가면 그녀가 천천히 얼굴을 쓸어 내렸다. 피곤한 걸까. 코코로의 얇은 허리에 팔을 둘러 껴안아 어깨에 턱을 괴었다. 한 순간 떨린 코코로의 몸을 깨닫는다.
" ... 미사키, 당신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솔직해졌네. "
" 미셸이랑 여객선 때 빼고는 항상 솔직했는 걸. 확신범 같은 느낌이었지만... 아, 그래도 역시 코코로가 숨기지 말라고 해줬기 때문인지도. "
" 알고는 있었구나. 그나저나 숨기지 말라 했다고 이렇게나, 응석 부리는거야? "
코코로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맑고 높은 웃음소리가 너무 예뻐서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가 쓰다듬어진다.
이상하다면 이상할지도.
방 전체에서, 바로 가까이에서 코코로의 체향이 가득해서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다. 태양이 내리쬐는 해바라기 밭에 왔다면 이런 기분일까. 빛이라곤 천장에서 빛나는 멋드러진 샹들리에뿐일 텐데도 그랬다.
돌연 코코로가 제 품에서 빠져나와 정면으로 마주선다. 단번에 불퉁해진 얼굴로 저를 빤히 노려보는 것에 영문을 몰라 고개를 기울였다.
" 안 아픈거야, 미사키? "
손을 뻗을까 말까 고민하는게 눈에 보였다. 눈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아챈 순간 미사키는 조금 쓰게 웃었다. 제 목이었다. 한 곳만 집중적으로 푸를 피부.
네가 나를 걱정해주는 게 이렇게나 기분 좋다니, 간사하고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아.
계속해서 아득해지려는 정신으로 미사키는 코코로의 손을 붙잡고 아주 조금, 정말 조금 힘을 주었다. 그리고 느리게 끌어당겨 제 목에 대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 네가 내 목을 조르는 상상.
그게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건 이상한 일일까. 손목의 도드라진 뼈를 뭉근히 매만지다 좀 더 올려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손 마디, 손 끝, 손등. 한 차례 한 차례 진득하니 입을 맞추고 엄지를 깨물고서야 떨어졌다.
코코로의 손은 제 손보다 작았다. 손가락 마디의 길이도 그랬고 손바닥의 크기도 그랬다.
" ... 미사키? "
" 코코로. "
그러한데도 저보다 훨씬 가늘어서 더 힘을 줘버리면 부러질지도 모른다. 그게 좋았다.
알고서도 제게 맞기는 그 손이.
의아함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돌아보며 담는 눈이 너무 좋아. 붉어진 얼굴도, 내 앞에서만 그랬으면 좋겠어. 미사키의 눈이 진득하니 가라앉아, 기묘한 소유욕을 담고 일렁였다.
코코로가 푹 파묻혀 잠에 들 침대가, 숙제나 다른 일을 하며 앉아있는 책상도, 수십 이상의 옷이 들어차 매번 고민에 빠질 드레스룸도, 부드럽게 밟힐 벨벳 쿠션이, 빛을 받아들여 눈을 찡그릴지도 모르는 커다란 창문도.
" 이상해질 정도로, 너무 좋아. "
너의 일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방이.
얼굴이 풀어지는 걸 알았다. 코코로가 숨을 들이키는 것까지 선연했다. 그러나 어떻게 풀어지지 않고 베길 수 있겠어. 언제까지도 선명하게 네 말을 기억해. 전력으로 전해오던 고백. 그리고, 물어보기도 전에 말하는 걸 폐라고 생각하지 말라던.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말을.
내 코코로, 너만이.
분명히 스스로도 너무 들떠서 어쩔 줄 모른다는 걸 알지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내려오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다. 숨기지 말라 한 건 너였다.
몇 차례 입을 달싹인 미사키는 부드럽게 낮아진 목소리로 귀 바로 옆에서 조곤조곤 속닥거렸다.
" 방 이곳저곳에 코코로가 한가득이야. 나, 인테리어나 가구를 잘 볼 줄은 모르지만. 코코로가 쓰는 방이라고 생각하니까 이제껏 본 방 중 최고라고 느껴져버렸어. "
" 네네... 간지러우니까. 부끄러운 말도 그만. "
" 그렇지만 코코로에게밖에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야? 코코로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곤란해. "
정적인 받아침에 코코로는 얼굴을 감쌌다. 앓는 소리가 그녀의 흥얼거림과 엇비슷하게 달콤했다. 그 사이로 보이는 귓가가 사정없이 달아올라 있어서, 미사키는 무심코 코코로의 귓볼을 쓸어보았다.
" ... ...흣!! "
홧, 하고 튀어오르는 몸에 무심코 한 발자국 물러선 미사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코코로는 제 귀를 감싸고서 물러났다. 덜덜 떨리는 동공이 곧바로 보였다.
그게 길 잃은 어린애처럼 처연한 동시에 사랑스러워서, 심장이 징징 거리며 울려댔다.
손가락이 닿은 작은 살결의 감촉이 선했다.
많은 감정들이 솟아올랐다. 너를 품에 안고 싶어. 껴안고 애정을 표하고 많은 말들을 속삭이고. 무심코 몇 번이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 미사키는, 코코로의 무릎에 나있는 상처를 발견했다. 크게 쓸려 흘러내린 핏줄기가 왜 몰랐나 싶을 정도로 하얀 피부 위에 확연하다.
언제?
느리게 시간을 되짚어보던 미사키의 머릿속에서 그녀의 정열적인 고백이 떠올랐다. 충동에 복받쳐 한심하게도 그녀를 넘어트린 자신마저. 뿌연 시야 속에서 홀로 선명하던 너를.
나였구나. 내가.
" 저, 저기 미사키. 음... 아까, 그런 말을 하긴 했고 미사키도 수긍했지만 역시 너무 갑작... "
내가 널 다치게 했어, 내 힘으로.
순신간에 창백해진 안색으로, 여전히 귀를 막고 서있는 코코로에게 다가선다. 코코로가 무심코 뒷걸음질쳤다. 미사키의 발걸음이 멈췄다.
진정해. 처참히 구겨지는 심정에 소리없이 제게 속삭였다.
치졸한 어린애처럼 굴지마. 그치만 어떻게?
네 옆에만 있으면 난 세상에서 제일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나의 히어로. 심지어 넌 내가 바라는 건 모두 이뤄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
미사키는 다시 움직였다. 천천히, 천천히. 미사키의 발걸음에 맞춰 뒷걸음 치던 코코로는 침대에 걸려 뒤로 넘어갔다. 시야가 휙 돌아, 정신을 차리면 미사키가 제 다리 사이에 차지하고 뒷통수를 받치고 있었다.
검은 머릿결이 볼을 간지럽혔다.
" 도망가지마. "
다정할 목소리가 긁힌 것처럼 튀어나와, 귓속에 들어서 스크래치를 남기고 빠져나간다.
커다란 동물이 으르렁 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약하게 일그러진 미간이 코코로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것만으로 천천히 풀어져간다. 내려가는 눈꼬리가 본인의 무해함을 표현하는 것 같아, 조금 기가 막혔다.
이런 자세로, 그런 목소리를 냈으면서 저런 얼굴을 하는거야?
허벅지에 닿은 온기가 생소해서 살짝 떨어지려고 몸을 움직이니 미사키의 손이 단단히 허벅지를 잡아왔다. 굳은살의 단단한 느낌에 코코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맨 피부에 닿은 온기가 뜨거웠다.
어딘가 터질 거 같았다. 이미 터졌을지도 몰라. 그치만 정말로? 고이는 침을 꿀꺽 삼켜 미사키와 시선을 마주했다.
" 나, 씻지도... 않았는데. "
" ... 알고 있어. 그치만 해주고 싶어. "
" 아니아니. 처음이고, 그러니까... 만반의 준비를, "
"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어? "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인 미사키를 마지막으로 코코로는 결국 눈을 꾹 감아버렸다.
이불자락이 스치는 소리, 허벅지에서부터 무릎까지 쓸어올리는 감각. 눈을 감으니 더 선명한 것들에 정신을 차릴 새 없이, 무릎에 물컹한 것이 닿는 즉시 쓰라림에 코코로는 번쩍 눈을 떴다.
당신.
샹들리에의 불빛이 반짝이고, 제 시야에서 청회색 눈을 내리뜬 채 오쿠사와 미사키는 의식할 수 없었던 코코로의 상처를 핥고 있었다.
잠깐, 대체.
고운 입술에서 야살스레 튀어나온 얇은 혀가 상처 위를 머물렀다. 부드럽고 정성스런 행위가 오히려 더 자극적이었다.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어. 쓰라림에 허리가 움찔 떨려 소리가 새려는 입을 꾹 다물고 코코로는 간신히 미사키의 머릿결 사이로 손을 비집어 넣었다. 미사키의 눈이 데구르르 굴러갔다.
" 당신, 대체... 읏. "
왜? 그 눈이 그런 의문을 담는 걸 모를 수 없었다.
악취미다. 의도한건지 실수인건지 쓸린 상처를 헤집는 행위가 지독스레 집요했다.
허벅지와 발목이 붙잡힌 채 허리가 뜨는대로 뒤로 물러나니, 등에 벽이 닿아 있었다. 이상하고 경험한 적 없는 체험에 어쩔 줄 모르고 바르작 거리며 미사키의 머리를 헤집었다. 오싹하니 어깨가 떨린다.
당신의 눈은 계속 나를 향해 있었다. 능숙히 움직이는 혀만큼이나 집요하게. 그 눈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미사키, 미사키, 미사키. 난 널 아직도 모르겠어.
당신은 내 손에 눈을 느리게 감고는 쪽, 소리와 함께 살며시 떨어졌다.
행위가 멈췄다.
멈췄다는 걸 자각한 순간 스스로가 굉장히 헐떡거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어디 하나 뜨겁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정작 이 모든 걸 행한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게 붉은 입술을 혀로 쓸고 있는데.
이상해.
시야에 들어온 당신의 웃음이 너무 야살스러웠다.
-----------
여우공책(Fox_nullnote)님이 써주셨습니다.
여우공책님 한마디:수없이 몰아치는 글에 정신이 가출했습니다.
이 세상 대부분의 것이 너였다는 걸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않았다.
모든 빛들이 너에게로 모여 나를 밝혔을 때 속절없이 무릎꿇어 감싸이고, 신의 세례를 받은 것처럼 내 세상이 달라졌다. 세상이 온갖 색채로 물들고, 감고 있던 눈이 떠져서 빛나는 새 세상을 갈증을 해소하듯 받아들였다.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에 시멘트 도로가 깔리고, 메마른 사막에 천막이 쳐진 오아시스가 발견되고, 온통 새하얀 눈밭에 한 길로 발자국이 새겨진다.
코코로. 믿겨져? 모두 한 순간이었어.
네가 내 히어로였다는 걸 알아챈 순간, 네가 내 가면에 입맞춤한 순간, 마법이 풀린 순간.
끝을 향해 쉼없이 달려가는 땅은 뒤집히고 물이 솟구쳐 올라 바다를 만들며 화산이 폭발했다. 저 혼자만 존재하던 세상이 순식간에 뒤흔들려 변화해갔다. 지구에서 몇 세기 동안 일어난 일들이 눈깜빡 할 새에 지나갔다.
그리고, 그리고...
너를 내 품 가득 안았을 때.
황폐한 땅에서 식물들이 살아나고 동물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숨을 쉬고 각자의 방법으로 소통하고 초원을 뛰어다녔다. 네가 뒤흔들어, 네가 일궈낸 나의 세계였다.
나에 대한 호기심, 호감, 신뢰 같은 것들. 겁쟁이인 너는 정면으로 부딪히고 도망치면서도 마지막엔 내 눈을 마주봐 주었기에 화려히 피어나게 만드는.
내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네게도 잔뜩 보여주고 싶어. 이 아름답고 찬란한 내 세계에 너를 초대하고 싶어.
사랑 이상의 단어를 알지 못하기에, 나는 이걸 사랑이라고 표현할거야.
.
달디 단 대화를 나누다 마침내 문 안으로 들어서서 언젠가 보았던 검은옷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거대한 홀을 지나 코코로의 손에 이끌린 채 기다란 복도를 걸어 방에 도달했다.
스테인드 글라스에 달빛이 들어오던 걸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보다 코코로의 방문을 닫았다. 코코로의 방. 이제껏 지나왔던 호화스러운 분위기와 다른 방은 그녀의 성격을 그대로 투영한 것처럼 느껴졌다.
커다랗지만 꾸밈이 없고, 고급스러우나 과하지 않았다.
" 시간이 좀 늦었으니까 집 구경은 내일 하도록 하자. 괜찮아? 욕실이나 화장실은 안에 있으니까 옷은 그 사이에 가져다 놔줄게. "
" 정말 고마워. 아, 옷은 코코로의 옷이야? "
" ... 아마도? 싫다면 검은옷 사람들이 새로 사올텐데. "
" 응... 괜찮아. 이 밤에 다녀오긴 힘드실거야. 그리고 코코로의 옷이라면 입어보고 싶어. 코코로의 향 정말 좋아해. 네게 안긴 기분이 날지도 몰라. "
정말 그렇다면 좋을텐데.
드레스룸을 살피러 가던 코코로의 발이 멈춰 움직이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은 그대로 모든 게 멈춘 코코로가 이상해서 가까이 다가가면 그녀가 천천히 얼굴을 쓸어 내렸다. 피곤한 걸까. 코코로의 얇은 허리에 팔을 둘러 껴안아 어깨에 턱을 괴었다. 한 순간 떨린 코코로의 몸을 깨닫는다.
" ... 미사키, 당신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솔직해졌네. "
" 미셸이랑 여객선 때 빼고는 항상 솔직했는 걸. 확신범 같은 느낌이었지만... 아, 그래도 역시 코코로가 숨기지 말라고 해줬기 때문인지도. "
" 알고는 있었구나. 그나저나 숨기지 말라 했다고 이렇게나, 응석 부리는거야? "
코코로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맑고 높은 웃음소리가 너무 예뻐서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가 쓰다듬어진다.
이상하다면 이상할지도.
방 전체에서, 바로 가까이에서 코코로의 체향이 가득해서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다. 태양이 내리쬐는 해바라기 밭에 왔다면 이런 기분일까. 빛이라곤 천장에서 빛나는 멋드러진 샹들리에뿐일 텐데도 그랬다.
돌연 코코로가 제 품에서 빠져나와 정면으로 마주선다. 단번에 불퉁해진 얼굴로 저를 빤히 노려보는 것에 영문을 몰라 고개를 기울였다.
" 안 아픈거야, 미사키? "
손을 뻗을까 말까 고민하는게 눈에 보였다. 눈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아챈 순간 미사키는 조금 쓰게 웃었다. 제 목이었다. 한 곳만 집중적으로 푸를 피부.
네가 나를 걱정해주는 게 이렇게나 기분 좋다니, 간사하고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아.
계속해서 아득해지려는 정신으로 미사키는 코코로의 손을 붙잡고 아주 조금, 정말 조금 힘을 주었다. 그리고 느리게 끌어당겨 제 목에 대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 네가 내 목을 조르는 상상.
그게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건 이상한 일일까. 손목의 도드라진 뼈를 뭉근히 매만지다 좀 더 올려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손 마디, 손 끝, 손등. 한 차례 한 차례 진득하니 입을 맞추고 엄지를 깨물고서야 떨어졌다.
코코로의 손은 제 손보다 작았다. 손가락 마디의 길이도 그랬고 손바닥의 크기도 그랬다.
" ... 미사키? "
" 코코로. "
그러한데도 저보다 훨씬 가늘어서 더 힘을 줘버리면 부러질지도 모른다. 그게 좋았다.
알고서도 제게 맞기는 그 손이.
의아함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돌아보며 담는 눈이 너무 좋아. 붉어진 얼굴도, 내 앞에서만 그랬으면 좋겠어. 미사키의 눈이 진득하니 가라앉아, 기묘한 소유욕을 담고 일렁였다.
코코로가 푹 파묻혀 잠에 들 침대가, 숙제나 다른 일을 하며 앉아있는 책상도, 수십 이상의 옷이 들어차 매번 고민에 빠질 드레스룸도, 부드럽게 밟힐 벨벳 쿠션이, 빛을 받아들여 눈을 찡그릴지도 모르는 커다란 창문도.
" 이상해질 정도로, 너무 좋아. "
너의 일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방이.
얼굴이 풀어지는 걸 알았다. 코코로가 숨을 들이키는 것까지 선연했다. 그러나 어떻게 풀어지지 않고 베길 수 있겠어. 언제까지도 선명하게 네 말을 기억해. 전력으로 전해오던 고백. 그리고, 물어보기도 전에 말하는 걸 폐라고 생각하지 말라던.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말을.
내 코코로, 너만이.
분명히 스스로도 너무 들떠서 어쩔 줄 모른다는 걸 알지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내려오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다. 숨기지 말라 한 건 너였다.
몇 차례 입을 달싹인 미사키는 부드럽게 낮아진 목소리로 귀 바로 옆에서 조곤조곤 속닥거렸다.
" 방 이곳저곳에 코코로가 한가득이야. 나, 인테리어나 가구를 잘 볼 줄은 모르지만. 코코로가 쓰는 방이라고 생각하니까 이제껏 본 방 중 최고라고 느껴져버렸어. "
" 네네... 간지러우니까. 부끄러운 말도 그만. "
" 그렇지만 코코로에게밖에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야? 코코로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곤란해. "
정적인 받아침에 코코로는 얼굴을 감쌌다. 앓는 소리가 그녀의 흥얼거림과 엇비슷하게 달콤했다. 그 사이로 보이는 귓가가 사정없이 달아올라 있어서, 미사키는 무심코 코코로의 귓볼을 쓸어보았다.
" ... ...흣!! "
홧, 하고 튀어오르는 몸에 무심코 한 발자국 물러선 미사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코코로는 제 귀를 감싸고서 물러났다. 덜덜 떨리는 동공이 곧바로 보였다.
그게 길 잃은 어린애처럼 처연한 동시에 사랑스러워서, 심장이 징징 거리며 울려댔다.
손가락이 닿은 작은 살결의 감촉이 선했다.
많은 감정들이 솟아올랐다. 너를 품에 안고 싶어. 껴안고 애정을 표하고 많은 말들을 속삭이고. 무심코 몇 번이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 미사키는, 코코로의 무릎에 나있는 상처를 발견했다. 크게 쓸려 흘러내린 핏줄기가 왜 몰랐나 싶을 정도로 하얀 피부 위에 확연하다.
언제?
느리게 시간을 되짚어보던 미사키의 머릿속에서 그녀의 정열적인 고백이 떠올랐다. 충동에 복받쳐 한심하게도 그녀를 넘어트린 자신마저. 뿌연 시야 속에서 홀로 선명하던 너를.
나였구나. 내가.
" 저, 저기 미사키. 음... 아까, 그런 말을 하긴 했고 미사키도 수긍했지만 역시 너무 갑작... "
내가 널 다치게 했어, 내 힘으로.
순신간에 창백해진 안색으로, 여전히 귀를 막고 서있는 코코로에게 다가선다. 코코로가 무심코 뒷걸음질쳤다. 미사키의 발걸음이 멈췄다.
진정해. 처참히 구겨지는 심정에 소리없이 제게 속삭였다.
치졸한 어린애처럼 굴지마. 그치만 어떻게?
네 옆에만 있으면 난 세상에서 제일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나의 히어로. 심지어 넌 내가 바라는 건 모두 이뤄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
미사키는 다시 움직였다. 천천히, 천천히. 미사키의 발걸음에 맞춰 뒷걸음 치던 코코로는 침대에 걸려 뒤로 넘어갔다. 시야가 휙 돌아, 정신을 차리면 미사키가 제 다리 사이에 차지하고 뒷통수를 받치고 있었다.
검은 머릿결이 볼을 간지럽혔다.
" 도망가지마. "
다정할 목소리가 긁힌 것처럼 튀어나와, 귓속에 들어서 스크래치를 남기고 빠져나간다.
커다란 동물이 으르렁 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약하게 일그러진 미간이 코코로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것만으로 천천히 풀어져간다. 내려가는 눈꼬리가 본인의 무해함을 표현하는 것 같아, 조금 기가 막혔다.
이런 자세로, 그런 목소리를 냈으면서 저런 얼굴을 하는거야?
허벅지에 닿은 온기가 생소해서 살짝 떨어지려고 몸을 움직이니 미사키의 손이 단단히 허벅지를 잡아왔다. 굳은살의 단단한 느낌에 코코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맨 피부에 닿은 온기가 뜨거웠다.
어딘가 터질 거 같았다. 이미 터졌을지도 몰라. 그치만 정말로? 고이는 침을 꿀꺽 삼켜 미사키와 시선을 마주했다.
" 나, 씻지도... 않았는데. "
" ... 알고 있어. 그치만 해주고 싶어. "
" 아니아니. 처음이고, 그러니까... 만반의 준비를, "
"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어? "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인 미사키를 마지막으로 코코로는 결국 눈을 꾹 감아버렸다.
이불자락이 스치는 소리, 허벅지에서부터 무릎까지 쓸어올리는 감각. 눈을 감으니 더 선명한 것들에 정신을 차릴 새 없이, 무릎에 물컹한 것이 닿는 즉시 쓰라림에 코코로는 번쩍 눈을 떴다.
당신.
샹들리에의 불빛이 반짝이고, 제 시야에서 청회색 눈을 내리뜬 채 오쿠사와 미사키는 의식할 수 없었던 코코로의 상처를 핥고 있었다.
잠깐, 대체.
고운 입술에서 야살스레 튀어나온 얇은 혀가 상처 위를 머물렀다. 부드럽고 정성스런 행위가 오히려 더 자극적이었다.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어. 쓰라림에 허리가 움찔 떨려 소리가 새려는 입을 꾹 다물고 코코로는 간신히 미사키의 머릿결 사이로 손을 비집어 넣었다. 미사키의 눈이 데구르르 굴러갔다.
" 당신, 대체... 읏. "
왜? 그 눈이 그런 의문을 담는 걸 모를 수 없었다.
악취미다. 의도한건지 실수인건지 쓸린 상처를 헤집는 행위가 지독스레 집요했다.
허벅지와 발목이 붙잡힌 채 허리가 뜨는대로 뒤로 물러나니, 등에 벽이 닿아 있었다. 이상하고 경험한 적 없는 체험에 어쩔 줄 모르고 바르작 거리며 미사키의 머리를 헤집었다. 오싹하니 어깨가 떨린다.
당신의 눈은 계속 나를 향해 있었다. 능숙히 움직이는 혀만큼이나 집요하게. 그 눈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미사키, 미사키, 미사키. 난 널 아직도 모르겠어.
당신은 내 손에 눈을 느리게 감고는 쪽, 소리와 함께 살며시 떨어졌다.
행위가 멈췄다.
멈췄다는 걸 자각한 순간 스스로가 굉장히 헐떡거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어디 하나 뜨겁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정작 이 모든 걸 행한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게 붉은 입술을 혀로 쓸고 있는데.
이상해.
시야에 들어온 당신의 웃음이 너무 야살스러웠다.
-----------
여우공책(Fox_nullnote)님이 써주셨습니다.
여우공책님 한마디:수없이 몰아치는 글에 정신이 가출했습니다.
'뱅드림 > ㅁㅅㅋㅋ'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사코코)안식처에서 마주잡은손-4 (0) | 2018.05.30 |
---|---|
(미사코코)성격리버스-15 (0) | 2018.05.29 |
(미사코코)안식처에서 마주잡은손-3 (0) | 2018.05.28 |
미사코코)성격리버스-13 (0) | 2018.05.27 |
(미사코코)성격리버스-12 (0) | 2018.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