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구원해주는 히어로, 어두운 밤을 밝히는 나의 태양, 미아가 되어버린 나를 이끄는 찬란한 북두칠성(길잡이).

이 세상 대부분의 것이 너였다는 걸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않았다. 

모든 빛들이 너에게로 모여 나를 밝혔을 때 속절없이 무릎꿇어 감싸이고, 신의 세례를 받은 것처럼 내 세상이 달라졌다. 세상이 온갖 색채로 물들고, 감고 있던 눈이 떠져서 빛나는 새 세상을 갈증을 해소하듯 받아들였다.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에 시멘트 도로가 깔리고, 메마른 사막에 천막이 쳐진 오아시스가 발견되고, 온통 새하얀 눈밭에 한 길로 발자국이 새겨진다. 

코코로. 믿겨져? 모두 한 순간이었어.

네가 내 히어로였다는 걸 알아챈 순간, 네가 내 가면에 입맞춤한 순간, 마법이 풀린 순간.

 끝을 향해 쉼없이 달려가는 땅은 뒤집히고 물이 솟구쳐 올라 바다를 만들며 화산이 폭발했다. 저 혼자만 존재하던 세상이 순식간에 뒤흔들려 변화해갔다. 지구에서 몇 세기 동안 일어난 일들이 눈깜빡 할 새에 지나갔다.

그리고, 그리고...

너를 내 품 가득 안았을 때.

황폐한 땅에서 식물들이 살아나고 동물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숨을 쉬고 각자의 방법으로 소통하고 초원을 뛰어다녔다. 네가 뒤흔들어, 네가 일궈낸 나의 세계였다.

나에 대한 호기심, 호감, 신뢰 같은 것들. 겁쟁이인 너는 정면으로 부딪히고 도망치면서도 마지막엔 내 눈을 마주봐 주었기에 화려히 피어나게 만드는.

내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네게도 잔뜩 보여주고 싶어. 이 아름답고 찬란한 내 세계에 너를 초대하고 싶어.

사랑 이상의 단어를 알지 못하기에, 나는 이걸 사랑이라고 표현할거야.


.


달디 단 대화를 나누다 마침내 문 안으로 들어서서 언젠가 보았던 검은옷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거대한 홀을 지나 코코로의 손에 이끌린 채 기다란 복도를 걸어 방에 도달했다.

스테인드 글라스에 달빛이 들어오던 걸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보다 코코로의 방문을 닫았다. 코코로의 방. 이제껏 지나왔던 호화스러운 분위기와 다른 방은 그녀의 성격을 그대로 투영한 것처럼 느껴졌다.

커다랗지만 꾸밈이 없고, 고급스러우나 과하지 않았다.

 " 시간이 좀 늦었으니까 집 구경은 내일 하도록 하자. 괜찮아? 욕실이나 화장실은 안에 있으니까 옷은 그 사이에 가져다 놔줄게. "

 " 정말 고마워. 아, 옷은 코코로의 옷이야? "

 " ... 아마도? 싫다면 검은옷 사람들이 새로 사올텐데. "

 " 응... 괜찮아. 이 밤에 다녀오긴 힘드실거야. 그리고 코코로의 옷이라면 입어보고 싶어. 코코로의 향 정말 좋아해. 네게 안긴 기분이 날지도 몰라. "

정말 그렇다면 좋을텐데.

 드레스룸을 살피러 가던 코코로의 발이 멈춰 움직이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은 그대로 모든 게 멈춘 코코로가 이상해서 가까이 다가가면 그녀가 천천히 얼굴을 쓸어 내렸다. 피곤한 걸까. 코코로의 얇은 허리에 팔을 둘러 껴안아 어깨에 턱을 괴었다. 한 순간 떨린 코코로의 몸을 깨닫는다.

 " ... 미사키, 당신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솔직해졌네.  "

 " 미셸이랑 여객선 때 빼고는 항상 솔직했는 걸. 확신범 같은 느낌이었지만... 아, 그래도 역시 코코로가 숨기지 말라고 해줬기 때문인지도. "

 " 알고는 있었구나. 그나저나 숨기지 말라 했다고 이렇게나, 응석 부리는거야? "

코코로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맑고 높은 웃음소리가 너무 예뻐서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가 쓰다듬어진다.

이상하다면 이상할지도.

 방 전체에서, 바로 가까이에서 코코로의 체향이 가득해서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다. 태양이 내리쬐는 해바라기 밭에 왔다면 이런 기분일까. 빛이라곤 천장에서 빛나는 멋드러진 샹들리에뿐일 텐데도 그랬다.

돌연 코코로가 제 품에서 빠져나와 정면으로 마주선다. 단번에 불퉁해진 얼굴로 저를 빤히 노려보는 것에 영문을 몰라 고개를 기울였다.

 " 안 아픈거야, 미사키? "

손을 뻗을까 말까 고민하는게 눈에 보였다. 눈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아챈 순간 미사키는 조금 쓰게 웃었다. 제 목이었다. 한 곳만 집중적으로 푸를 피부.

네가 나를 걱정해주는 게 이렇게나 기분 좋다니, 간사하고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아.

 계속해서 아득해지려는 정신으로 미사키는 코코로의 손을 붙잡고 아주 조금, 정말 조금 힘을 주었다. 그리고 느리게 끌어당겨 제 목에 대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 네가 내 목을 조르는 상상.
 그게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건 이상한 일일까. 손목의 도드라진 뼈를 뭉근히 매만지다 좀 더 올려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손 마디, 손 끝, 손등. 한 차례 한 차례 진득하니 입을 맞추고 엄지를 깨물고서야 떨어졌다.

코코로의 손은 제 손보다 작았다. 손가락 마디의 길이도 그랬고 손바닥의 크기도 그랬다.

 " ... 미사키? "

 " 코코로. "

그러한데도 저보다 훨씬 가늘어서 더 힘을 줘버리면 부러질지도 모른다. 그게 좋았다.
 알고서도 제게 맞기는 그 손이.

의아함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돌아보며 담는 눈이 너무 좋아. 붉어진 얼굴도, 내 앞에서만 그랬으면 좋겠어. 미사키의 눈이 진득하니 가라앉아, 기묘한 소유욕을 담고 일렁였다.

코코로가 푹 파묻혀 잠에 들 침대가, 숙제나 다른 일을 하며 앉아있는 책상도, 수십 이상의 옷이 들어차 매번 고민에 빠질 드레스룸도, 부드럽게 밟힐 벨벳 쿠션이, 빛을 받아들여 눈을 찡그릴지도 모르는 커다란 창문도.

 " 이상해질 정도로, 너무 좋아. "

너의 일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방이.

얼굴이 풀어지는 걸 알았다. 코코로가 숨을 들이키는 것까지 선연했다. 그러나 어떻게 풀어지지 않고 베길 수 있겠어. 언제까지도 선명하게 네 말을 기억해. 전력으로 전해오던 고백. 그리고, 물어보기도 전에 말하는 걸 폐라고 생각하지 말라던.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말을.

내 코코로, 너만이.

분명히 스스로도 너무 들떠서 어쩔 줄 모른다는 걸 알지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내려오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다. 숨기지 말라 한 건 너였다.

몇 차례 입을 달싹인 미사키는 부드럽게 낮아진 목소리로 귀 바로 옆에서 조곤조곤 속닥거렸다.

 " 방 이곳저곳에 코코로가 한가득이야. 나, 인테리어나 가구를 잘 볼 줄은 모르지만. 코코로가 쓰는 방이라고 생각하니까 이제껏 본 방 중 최고라고 느껴져버렸어. "

 " 네네... 간지러우니까. 부끄러운 말도 그만. "

 " 그렇지만 코코로에게밖에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야? 코코로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곤란해. "

정적인 받아침에 코코로는 얼굴을 감쌌다. 앓는 소리가 그녀의 흥얼거림과 엇비슷하게 달콤했다. 그 사이로 보이는 귓가가 사정없이 달아올라 있어서, 미사키는 무심코 코코로의 귓볼을 쓸어보았다.

 " ... ...흣!! "

홧, 하고 튀어오르는 몸에 무심코 한 발자국 물러선 미사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코코로는 제 귀를 감싸고서 물러났다. 덜덜 떨리는 동공이 곧바로 보였다.

 그게 길 잃은 어린애처럼 처연한 동시에 사랑스러워서, 심장이 징징 거리며 울려댔다.

 손가락이 닿은 작은 살결의 감촉이 선했다.

많은 감정들이 솟아올랐다. 너를 품에 안고 싶어. 껴안고 애정을 표하고 많은 말들을 속삭이고. 무심코 몇 번이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 미사키는, 코코로의 무릎에 나있는 상처를 발견했다. 크게 쓸려 흘러내린 핏줄기가 왜 몰랐나 싶을 정도로 하얀 피부 위에 확연하다.

 언제?

 느리게 시간을 되짚어보던 미사키의 머릿속에서 그녀의 정열적인 고백이 떠올랐다. 충동에 복받쳐 한심하게도 그녀를 넘어트린 자신마저. 뿌연 시야 속에서 홀로 선명하던 너를.

나였구나. 내가.

 " 저, 저기 미사키. 음... 아까, 그런 말을 하긴 했고 미사키도 수긍했지만 역시 너무 갑작... "

내가 널 다치게 했어, 내 힘으로.

 순신간에 창백해진 안색으로, 여전히 귀를 막고 서있는 코코로에게 다가선다. 코코로가 무심코 뒷걸음질쳤다. 미사키의 발걸음이 멈췄다.

진정해. 처참히 구겨지는 심정에 소리없이 제게 속삭였다.

 치졸한 어린애처럼 굴지마. 그치만 어떻게?

 네 옆에만 있으면 난 세상에서 제일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나의 히어로. 심지어 넌 내가 바라는 건 모두 이뤄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

 미사키는 다시 움직였다. 천천히, 천천히. 미사키의 발걸음에 맞춰 뒷걸음 치던 코코로는 침대에 걸려 뒤로 넘어갔다. 시야가 휙 돌아, 정신을 차리면 미사키가 제 다리 사이에 차지하고 뒷통수를 받치고 있었다.

검은 머릿결이 볼을 간지럽혔다.

 " 도망가지마. "

다정할 목소리가 긁힌 것처럼 튀어나와, 귓속에 들어서 스크래치를 남기고 빠져나간다.

커다란 동물이 으르렁 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약하게 일그러진 미간이 코코로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것만으로 천천히 풀어져간다. 내려가는 눈꼬리가 본인의 무해함을 표현하는 것 같아, 조금 기가 막혔다.

이런 자세로, 그런 목소리를 냈으면서 저런 얼굴을 하는거야?

허벅지에 닿은 온기가 생소해서 살짝 떨어지려고 몸을 움직이니 미사키의 손이 단단히 허벅지를 잡아왔다. 굳은살의 단단한 느낌에 코코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맨 피부에 닿은 온기가 뜨거웠다.

어딘가 터질 거 같았다. 이미 터졌을지도 몰라. 그치만 정말로? 고이는 침을 꿀꺽 삼켜 미사키와 시선을 마주했다.

 " 나, 씻지도... 않았는데. "

 " ... 알고 있어. 그치만 해주고 싶어. "

 " 아니아니. 처음이고, 그러니까... 만반의 준비를, "

 "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어? "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인 미사키를 마지막으로 코코로는 결국 눈을 꾹 감아버렸다.

이불자락이 스치는 소리, 허벅지에서부터 무릎까지 쓸어올리는 감각. 눈을 감으니 더 선명한 것들에 정신을 차릴 새 없이, 무릎에 물컹한 것이 닿는 즉시 쓰라림에 코코로는 번쩍 눈을 떴다.

당신.

샹들리에의 불빛이 반짝이고, 제 시야에서 청회색 눈을 내리뜬 채 오쿠사와 미사키는 의식할 수 없었던 코코로의 상처를 핥고 있었다.

 잠깐, 대체.

고운 입술에서 야살스레 튀어나온 얇은 혀가 상처 위를 머물렀다. 부드럽고 정성스런 행위가 오히려 더 자극적이었다.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어. 쓰라림에 허리가 움찔 떨려 소리가 새려는 입을 꾹 다물고 코코로는 간신히 미사키의 머릿결 사이로 손을 비집어 넣었다. 미사키의 눈이 데구르르 굴러갔다.

 " 당신, 대체... 읏. "

왜? 그 눈이 그런 의문을 담는 걸 모를 수 없었다.

악취미다. 의도한건지 실수인건지 쓸린 상처를 헤집는 행위가 지독스레 집요했다.

허벅지와 발목이 붙잡힌 채 허리가 뜨는대로 뒤로 물러나니, 등에 벽이 닿아 있었다. 이상하고 경험한 적 없는 체험에 어쩔 줄 모르고 바르작 거리며 미사키의 머리를 헤집었다. 오싹하니 어깨가 떨린다.

당신의 눈은 계속 나를 향해 있었다. 능숙히 움직이는 혀만큼이나 집요하게. 그 눈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미사키, 미사키, 미사키. 난 널 아직도 모르겠어.

당신은 내 손에 눈을 느리게 감고는 쪽, 소리와 함께 살며시 떨어졌다.

행위가 멈췄다.

멈췄다는 걸 자각한 순간 스스로가 굉장히 헐떡거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어디 하나 뜨겁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정작 이 모든 걸 행한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게 붉은 입술을 혀로 쓸고 있는데.

이상해.
 시야에 들어온 당신의 웃음이 너무 야살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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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공책(Fox_nullnote)님이 써주셨습니다.
여우공책님 한마디:수없이 몰아치는 글에 정신이 가출했습니다.
Posted by 백오판다
,
3.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채로 올려다보는 코코로는 지금까지 봐왔던 어떤때보다도 연약하게 보였다.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러질거 같은 아름다운 유리공예품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거친 입술을 지분거렸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부디 들리지 않기를 바랬지만 코코로의 시선이 향하는곳이 어디인지 뜨거울 정도로 느껴져서 숨기는건 무리라고 알아챘다.

"미사키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니까 우리는 연인사이인거지?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거야..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면 행복할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가 싫어졌다는 말이야? 아니면.. 다시 잊고싶다는.."

가슴이 꾹 조인다는 이유로 이름조차 잊혀졌던 옛날이 생각나서 눈앞이 하얘져버렸다.

다시 그런일이 일어난다면 마음의 한자락이 아닌 전부를 줘버린 지금은 스스로 일어나 떠나버리는것조차 할 수 없을것 같았다.

"그럴리가 없잖아! 나는 이제 미사키를 잊는건 상상 할 수도 없어. 미사키가 없으면 웃을수조차 없는걸! 하지만 미사키는 다르잖아."

뚜욱 뚜욱 결국 수위를 높여가던 코코로의 눈물샘이 무너져서 서러움을 터뜨려버렸다.
웃는 얼굴만 보고 싶은데 어째서 이렇게 나는 너를 슬프게 하고 힘들게하는 감정을 가르쳐버리는걸까.

"미사키는 다른 사람이라도 괜찮은거지? 그러니까 내 대신이 될 사람을 찾은거잖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거잖아. 나는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사키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땀으로 축축한 옷의 가슴팍부분을 붙들려 끌어 당겨져서 노려보는 코코로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목이 졸린것도 아닌데 마른숨만 들이키고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왜 나를 두고 다른 사람이랑 사귄거야? 그 사람에게도 어젯밤 나에게 한것같은 녹아버릴것처럼 달콤한 눈으로 키스를 했어? 아니면 나랑도 하지 않은 더 깊은 관계도 가진거야? 말해줘 미사키.."

코코로는 질투를 하고있다.

질투를 해주고 있다.

떨어지지 말라고 꽉 필사적으로 옷자락을 쥐고 있는 손이 새하얗게 변할정도로 힘을 주고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을 보고 있다.
지금 코코로의 세상에는 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험악한 분위기인데도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을 수 없었다.
우울하고 슬프고 괴로운 여러가지 부정적인 감정이 들어있던 판도라의 상자에는 질투조차 들어가 있어서 그것이 나의 독점욕을 충족시켜주고 있었다.

보물을 발견한것 같았다.

"무엇을 말해줄까? 고백받은 횟수? 아니면 사귀었던 다른 사람의 숫자? 키스라던가 밤을 보낸 기분이 어땟는지? 뭐든 말해줄 수 있지만 그걸로 코코로는 만족 할 수 있는거야?"

숨겨져 있던 소유욕이 솟구쳐서 옷자락을 쥐고 있는 코코로의 손목에 자국이 남도록 꽉 힘주어서 잡았다.

평소에 부러지지 않을까 상처받지 않을까 내심 긴장하면서 살살 힘을 빼서 손을 잡던것과 확연히 다른 그 악력에 당황한 코코로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어? 결국 무슨 방법을 써도 어디로 도망쳐도 잊을 수 없었는데. 계속. 계속 코코로만을 원했어. 가질 수 없는것을 바라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을텐데.."

적당히 보통이 최고라고 스스로에게 몇번이고 되뇌이던 무기력한 자신을 데일 정도로 강렬한 열기에 휩싸이게 한 주제에 스스로가 무슨짓을 했는지 모르다니.

굶주리고 목마른자에게 함부로 손을 뻣으면 어떻게 되는지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거야?

코코로의 손목에 남은 붉은 손자국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가 그대로 키스마크를 남겼다.

사실은 이런 시계를 채우면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마킹이 아니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장소라도 남기고 싶지만 나는 아직도 코코로가 무서워서 싫다고 거절하는걸 두려워했다.

"그러면 전부 가져버리면 되잖아. 엉망진창 누구라도 미사키의 것이라고 알도록 한군데도 빠짐없이 바래도 괜찮아. 나는 내 모든것을 미사키에게 줘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걸."

내려다본 코코로는 꾸욱 입을 다물고 걱정과는 달리 전혀 겁을먹은 기색이 없이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참을 필요가 없는것이 아니냐는 유혹적인 울림이 뇌리에 퍼져나간다.

어느새 잡은 손목을 그대로 코코로의 머리위로 찍어누르고 숨결이 다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다시 코코로를 응시했다.

한계까지 자극당한 이성이 그르르 목울림을 내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게 될거야. 소중히 아껴주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을거 같거든. 지금이 아니면 절대 멈출 수 없을테니까."

그러니까 얼른 예의도 없는 짐승을 떠밀어버리라고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너에게 심장이라도 빼줄 수 있는 나라면 한마디 말만으로 통제 할 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허락의 말이 떨어지면 향기로운 살결도 비단처럼 고운 머리칼도 앙증맞은 입술까지 전부 남김없이 탐내기 전까지 멈출 수 없겠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을때라면 달콤함을 모르겠지만 한입이라도 먹는 순간 멈출 수 없는 극락의 과실을 마다 할 자제력이 나에게 존재했더라면 내가 나 스스로를 경계해서 미국으로 떠날 일도 없었을것이다.

"멈추지 않아도 좋아. 소중히하지 않아도 나는 없어지거나 부서지지 않으니까 힘껏 사랑해주면 좋겠어. 아플정도로 꽉 껴안고 숨이 막힐정도로 깊게 키스해서 미사키말고는 아무것도 생각 할 수 없게 해준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것 같아."

굶주려서 가죽밖에 남지 않은 늑대가 눈앞에서 침을 흘리며 눈을 번뜩이는데 붙잡힌 가엽은 공주님은 그것이야말로 바랬던것이라고 눈을 빛내며 활짝 웃었다.

눈꼬리에 남은 질투의 잔재인 투명한 눈물방울을 입술로 훑어 없애버리면 남은것은 해피엔딩을 기다리는 아가씨의 웃는얼굴.

참지 못하고 사랑스러운 말을 하는 그 입술을 막아버려 마음껏 들이마시면 끊어져버린 이성에 뇌세포까지 이상을 일으켰는지 미쳐버린 미각으로 달콤하다는 착각을 하는 혀가 녹아버릴것 같았다.

고른 치열을 따라서 자극을 하면 코코로가 숨을 들이키는게 느껴졌다.

츠루마키가의 당주가 되기 위해서 후계자 수업에 매진한 코코로와 디제잉과 테니스, 여행같은 아웃도어인 활동을 한 나와의 사이에 폐활량의 차이가 생겼는지 입술을 떼어내자마자 허억허억 숨을 들이쉬는 코코로는 그것만으로 추욱 힘이 빠져버렸다.

"벌써 지친거야 아가씨?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이러면 큰일인데.."

숨을 몰아쉬는 코코로의 목에 얼굴을 묻고 향기를 맡는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살살 이로 자극을 가하다가 살갗을 빨아들여 누구라도 보이는 장소에 이 손에 닿지 않을거 같았던 아가씨가 내거라는 증거를 남겨둔다.

하나로는 만족 할 수 없어서 두어개를 더 남기고서 어차피 힘으로는 나를 이길 수 없는 코코로는 도망갈 수 없을테니까 손목을 놓고서 조금 떨어져서 내가 만든 작품을 감상했다.

조금 살이 그을린 나랑은 달리 햇빛에 타지 않은 코코로의 하얀 피부에 남은 붉은 자국이 시리도록 눈에 박혀들어온다.

"좀 더 해주지 않는거야? 카스미랑 히나에게 듣기로는 이게 끝이 아닌거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부추긴건 그쪽에서 정보를 얻었기 때문인가.. 안그래도 멈출 생각은 이미 없으니까."

소파의 좁지도 넓지도 않은 불안정한 넓이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꽉 안아붙을 수 밖에 없다.

소파와 코코로사이의 비좁은 틈 사이로 손을 비집어 넣어서 옆구리를 더듬으면 낯간지러운지 몸을 비튼다.

눈꺼풀에 연신 키스를 해주면 코코로가 후후후 웃음을 흘리며 등 뒤에 팔을 돌려 힘껏 자신쪽으로 끌어당겼다.

버티려면 끌려가지 않을 힘이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 나는 무게가 코코로에게 실리지 않도록 한쪽 팔을 소파의 등받이 부분에 의지한채로 가까워졌다.

"그런데 나도 미사키를 가지고 싶으니까 가만히 주기만 할 생각은 없는걸. 아무것도 모른다고 방심하면 미사키가 먹힐지도 몰라? 나는 금방 배우는 사람인데다가 몇년동안 염원했던건 나라도 마찬가지이니까."

그러고보니 밖에서 돌아온 뒤에 씻지도 못하고 이런 상황이 되버린 바람에 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랑 흘린 땀으로 끈적한 옷 그대로였다.

이제와서 신경이 쓰이는 자신의 행색에 꼼짝도 못하는 사이에 옷사이로 들어온 코코로의 손이 등을 매만지다가 옆구리를 지나서 배를 매만진다.

"미사키의 배는 조금 단단하고 복근이 있네. 내가 옆에 없는 사이에도 노력하고 있었다는걸 알 수 있어."

"뭐, 몸 움직이는건 싫어하지 않으니까.. 그보다 코코로 나 땀을 엄청 흘렸는데.. 기분나쁘지 않아?"

돌연 찾아온 이성이 소중히 아껴주려고 했던 상대의 처음을 불안정하게 비좁은 소파에서 취하려고 했다는걸 깨닫게 했다.

내가 코코로가 가진 값진것보다 더 좋은걸 줄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결혼식장의 예약부터 초대장까지 척척 준비해서 완벽하게 치장한 행복을 선물로 주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상한건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는다는거였다.

자신의 겁쟁이인 부분까지 전부 코코로를 사랑하는걸 멈추고 싶어하지 않다고 외치고 있었다.

"기분 나쁠리가 없잖아. 미사키가 노력하는 모습도 흘린 땀도 전부 좋아해."

꽈악 끌어안아 밀착한 코코로가 목에다가 코를 묻고 숨을 쉬는게 느껴져서 간지럽고 부끄러웠다.

이럴줄 알았으면 땀을 닦고 제한제도 뿌린 다음에 코코로를 맞이하러 갈걸.

이럴줄 알았으면 좀더 행색이 괜찮을때에 코코로를 안을걸.

이제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것들은 귓바퀴를 따라 혀를 굴리는 코코로의 진득한 애무에 허공으로 날라가버렸다.

"그러니까 좀 더 꽉 안아줘. 미사키."

나도 몰랐던 약점인 귀에 애정과 유혹이 잔뜩 담긴 낮은 목소리로 불린 이름은 그 자체로 심장에서 흐르는 혈류를 빠르게하는 미약과도 같아서 몸 전체를 울리는 박동에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결국 해버렸나- 하고 깨달았을때는 아직 어스름하지만 해가 떠오르는게 어렴풋이 느껴지는 새벽과 아침의 사이였다.

마주보는 자세로 무릎위에 앉아서 내 어깨에 턱을 올려둔 상태이던 코코로는 커텐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나의 눈의 색이라고 흐리게 웃고는 그대로 지쳐서 잠들어버렸다.

코코로는 처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나는 질투심과 사랑의 증거를 가지고 싶다는 코코로의 부추김에 있는 힘껏 휘둘려서 그만이라던가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에도 전혀 멈추지 않았다.

"바보같을 정도로 푹 빠져있으니까 말이지.. 아아.. 정말로 앞으로 어떻게 하지.."

하얀 피부의 여기저기에 온통 키스마크 투성이여서 사랑을 받았다기보다 이정도면 어딘가 안타까울 정도인 코코로는 행복한 표정으로 자고있는데 나는 이걸로도 만족하지 못했다.

한번도 하지 않았을때는 아껴주자고 웃으며 생각했는데 한번 하자마자 이정도라니 정말 나약한 정신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고 자조하면서 잠든 코코로를 꽉 끌어안았다.

"..코코로가 일어나면 뭐라고 말하지? 좋았다고? 아니면 그냥 평범하게 인사? 아름다웠다든가 귀여웠다던가하는 칭찬의 말을 해야하는건가.. 나, 처음도 아니면서 뭐라고 해야할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

이때까지 꽤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이렇게 두근거린적도 뭐라고 말을 해야하나 고민한적도 없었다.

이성을 잃을 정도로 격렬하게랄까.. 지치지 않는 정도로 상대가 만족하게하는 행위만 적당히 해치운 이제와서는 왜 욕을 먹지 않았나 싶은 의욕이 없는 사람인 자신이 했다고 믿을 수가 없지만 떠오르는 여러가지 밤의 기억이 부정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보다 처참한건 내 독점욕으로 가득한 코코로의 몸뿐만이 아니라 지금 앉아있는 소파도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어느새 새걸로 교체되거나 아니면 깨끗히 청소가 될거라는건 알고있지만 정사의 흔적이 남에게 보인다는건 견딜 수 없을만큼 부끄러울것 같았다.

뭐, 소중한 츠루마키가의 당주가 언제 어느때 위험상황에 처할지 모르니까 이 방에 도청기같은게 설치되어있을 가능성은 높아서 했다는거 자체는 이미 들켰겠지만..

"하여튼 일단은 잠들어버린 코코로를 씻기고.. 침대에 눕힌 다음에 치우자.."

불타오를 정도로 빨개진 얼굴을 아무도 못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가능한 코코로의 맨몸을 응시하지 않으면서 욕실로 향한다.

점점 밝아오는 하늘과 함께 보이는 코코로의 몸을 응시할 수 없다니 어젯밤에 그렇게 질리도록 키스하고 쓰다듬고 껴안으면서 눈을 감아도 기억할 정도면서 한심한 일이다..

직접 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씻기지?하는걸 깨달은건 욕실에서 샤워스펀지에 거품을 내었을때였다.





일어나자마자 기지개를 펴는데 온몸이 뻐근하고 당겨서 무심코 움츠러들었다.

침대에서 멀리 떨어진 화장대의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목에 붉은 반점이 매우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손가락으로 만져보려고 팔을 들어올리면 어느새 갈아입혀진 잠옷은 난처해하던 미사키와 같이 샀던 2개가 세트인 커플잠옷이었다.

부끄럼쟁이 미사키가 이렇게 온통 독점욕과 소유욕으로 얼룩진 키스마크와 잇자국, 손자국투성이인 자신을 남의 시선에 노출되게 놔둘리가 없으니까 내가 잠든 후에 직접 씻기고 옷을 입힌걸까?

고뇌한 흔적인지 잠옷의 단추가 어긋나게 잠겨있어서 조금 웃음이 났다.

어긋난 단추를 다시 제대로 잠그려고 풀어내려가면서 옆을 바라보면 색만 다른 잠옷을 입은 미사키가 이쪽 방향으로 몸을 돌려서 자고 있었다.

"정말 아직도 나는 모르는것 투성이네. 어째서 어제는 그렇게 부글부글 끓고 꾸욱 조이면서 찢어질듯 아팠던 기분이 이렇게 포만감이 들 정도로 행복하게 바뀌어버린걸까."

미사키가 살던 방과 달리 넓은 이 집에는 방이 몇개나 있으니까 처음 둘러볼때에 각자의 방을 정하려던 미사키에게 고집을 부려 같은 방을 사용한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지쳐서 움직일 힘이 없을 정도로 실컷 사랑받은 다음날이라도 아침에 눈을 떳을때에 옆에 미사키가 없다면 이런 행복한 기분보다는 불안함이 앞섰을지도 모른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걱정을 하는건 나쁜 습관이라고 미사키를 다그쳐왔지만 지금은 미사키보다 내가 훨씬더 자주 겁쟁이가 되버린다.

"미사키가 이렇게 계속 옆에 있어주면 좋을텐데.. 테니스동아리랑 아르바이트.. 또 대학교도 졸업학년이지만 가끔은 직접 가야 할 일도 있다고 그랬어."

단추를 채우면서 옆을 돌아보면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표정을 찡그리고 있는 미사키가 보여서 손을 꽉 잡아주면 무의식적으로 꾸욱 힘을주어 잡아오는 미사키의 손과 미간의 주름이 풀리고 희미하게 웃는 표정이 강한 충족감을 일으켰다.

"코코로.."

웃으면서 내 이름을 부르는 미사키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어지고 달콤하게 낮은 목소리로 이름이 불리는것만으로 두근거려서 참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미사키의 품에 파고들었다.

"음....아. 코코로..지금 몇시야?"

내가 품에 비집고 들어가는걸로 잠에서 깨버렸는지 낮게 긁힌 목소리로 시간을 물어보면서 미사키가 팔을 돌려 안아주었다.

미사키가 노력해서 흘린 땀의 냄새도 좋아하지만 같이 살면서 나랑 같은 샴푸의 향기와 섞인 체향도 좋아한다.

눈이 부신지 한쪽 눈만을 가늘게 뜨고 있는 미사키의 목에 코를 박고 향기를 맡으면 푸흐흐하고 낯간지러워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미사키는 나를 떼어놓지 않고 등에 돌리고 있던 한손을 올려 나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주었다.

"아직 6시밖에 안됐으니까 더 자도 괜찮아. 그러니까 이대로 조금 더 있어도 될까?"

"얼마든지. 그런데 코코로 몸은 괜찮아? 나.. 코코로가 처음인데도 너무 가감없이 해버린것같은데.."

확실히 움직일때마다 멈칫거리게 될 정도로 허리가 아프고 근육통에 걸린것 같았지만 적당히 하지 못할 정도로 미사키가 나에게 열중했다는 증거니까 오히려 이 통증마저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걱정스레 꾸욱꾸욱 등 뒤를 지압하는 미사키의 입술에 쪽 뽀뽀를 하면 순식간에 빨간얼굴이 되어버려서 그 얼굴의 이곳저곳에 좀 더 뽀뽀를 해줬다.

"아니, 아니. 코코로 그만 좀 해봐. 으앗. 그런데 왜 단추는 절반이나 풀려있고 속옷도 안입은거야?! 앗...아...속옷은 내가 못입혔지.."

크으으..하고 신음을 내면서 스스로의 얼굴을 한손으로 가리는 미사키는 귀가 붉게 익어있어서 어제 그렇게 집요하게 나를 울것같을 정도로 기분좋게 강요해오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째서 한군데도 빠짐없이 만지고 키스했으면서 부끄러워 하는거야? 이렇게 키스마크까지 듬뿍 남겼으면서.."

슬쩍 잠옷의 자락을 들추면 도대체 언제 이렇게까지 남겼는지 모르겠는 숫자로 붉은 자국들이 점점이 찍혀있었다.

"...이래저래 복잡한거야. 으윽.. 어젯밤의 나 너무 폭주했잖아.."

푹 배개에 얼굴을 처박은채로 부들부들 떠는 미사키의 등을 토닥여줬다.

이해할 수 없지만 미사키가 부끄럽다니까 배개에서 얼굴을 들기 전에 단추는 스스로 채워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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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밖으로 말을 꺼내고 갑자기 이거라면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같이 밤을 보낼래라니 집에 놀러오지 않을래도 아니고 오해할 여지가 너무 많은 단어선택에 스스로에게 당혹감을 느낀다.

"좋아! 하지만 우선 친구집에서 자고 간다고 어머니께 연락드려야겠어. 저녁에는 돌아간다고 말해놨었거든. 조금 기다려줄래?"

금방이라도 사라질것같은 흐릿한 그림자처럼 웃던 표정이 일변해서 함박웃음으로 가득 차버렸다.

말실수에 당황해서 굳어버린 내게 정정할 시간도 주지 않고 눈앞에서 전화하기 시작한 미사키는 동요하거나 망설이지도 않고 이 수상쩍은 제안을 수락해버렸다.

아직 사귀지도 않는데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거야? 혹시 나만 이렇게 의식할뿐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은 말이었던걸까.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같이 밤을 보낼래는 이상하잖아?! 뭐라도 조금 물어보라고! 도대체 내가 물어보는대로 다 대답하는것도 이상하지만 왜 하나도 거절하지 않는건지..혹시 다른사람한테도 이러나? ..저 성격이면 그럴지도 몰라.."

카오루씨의 덧없는 라이브에 찬성표를 던지고 진지하게 생각하거나 하구미가 미셸의 머리를 등반해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거나..

그러고보면 학교에서 반애들이 부탁하는것을 거절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그래도 이런..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미사키가 거절을 하는지 다 받아주는지 본적이 없으니까..애초에 내가 과도하게 해석할뿐 미사키는 평범하게 자고 가지 않을래?하는 친구사이의 제안으로 받아들였을지 모르고.

확실히 이쪽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 순간 안심함과 동시에 조금 아깝다는 기분이 들어서 스스로가 믿을 수 없었다.

"많이 기다렸지? 어머니께서 괜찮데. 그런데 왜 그렇게 노려보는거야? 내가 뭔가 잘못했어?"

"...아니. 잘못했다면 그건 나일지도..하아."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미소에 조금이라도 기대해버린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미사키에게 그럴의도는 아마 하나도 없겠지 쓸데없이 의식하는 내가 아니라면 친구가 놀러온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백의 말도 할 수 없는 나도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는거니까 조금 실망한 기분을 내비치지 않고 친구집에 초대받아서 기쁘다는 기분을 전면에 내비치고 있는 미사키의 손을 잡아서 집으로 향한다.

이 와중에 손을 잡았다는거에 붉어지는 내 하얀피부가 원망스럽다.





항상 어딘가에서 대기하고 있는 SP에게 부탁하면 차를 타고 금방 저택에 도착할 수 있겠지만 느긋하게 천천히 미사키와 걸어서 돌아가는것은 언제라도 있는 기회는 아니니까 조금 욕심을 부리기로 했다.

도심의 별빛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을 바탕으로 가로등의 불빛에 그림자가 진 미사키의 뒷모습은 사라져 없어질것 같으니까 무심코 아까까지 잡고있었던 내 손보다 조금 큰 미사키의 손을 다시금 꽉 쥐었다.

뒤돌아보는 미사키의 눈은 지금이 새까맣게 어두운 밤이 아니라 밤과 새벽의 중간인 이른 아침의 시간이었더라면 진짜로 하늘에 녹아 사라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할만큼 미사키의 눈동자에는 하늘이 새겨져있었다.

"코코로의 눈동자는 꼭 지금 하늘의 달빛을 담아놓은것 같아."

혹시 내 마음을 읽었나 싶을 정도의 타이밍으로 미사키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갑작스런 찬사에 몸둘바를 모르게되어서 고개를 돌리면 내쪽에서 잡았던 손인데 도리어 미사키가 끌어 당겨서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처음봤을때부터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했어. 항상 지루한 표정인데도 흥얼거리는 콧노래나 창밖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빛나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하로하피에 끌어들인 지금이 너무 즐거워서 무심코 코코로에게는 응석을 부리는것 같아."

응석? 짐작이 가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돌연 설명도 없이 라이브를 하자고 하는 일은 지금도 가끔 있지만 그건 응석이라기보다 하로하피 활동 목적에 부합하는 일이니까 계속 밴드활동을 같이 하겠다고 정한 지금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응석이라고 할까.. 미사키에게 신세를 지는건 이쪽이 해야 할 말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사양하지 않고 질문하거나 집에 초대하는 일 같은건 해본적이 없었다.

재력과 권위가 뒤따라붙는 츠루마키가의 차기 후계자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의도하지 않아도 상대에게 위압을 줘버려서 거절할 수 없게 만드니까 결국은 무엇을 말해도 강제적이 되버릴수 있다는게 너무 무겁게 다가왔었다.

"오히려 응석을 부리는건 내가 아닐까. 잔뜩 싫다고 했던 주제에 하로하피의 모두는 너를 돕고 싶어 한다느니 너같이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면 잔뜩 모순을 지적당했을거라고."

"나는.. 전혀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야 코코로."

의외롭게도 한번도 먼저 시선을 피한적이 없는 미사키가 고개는 커녕 몸전체를 돌려서 앞서 걸어갔다.

여전히 잡은 손은 놓지 않았지만 빠른 속도로 걷는 미사키를 뒤쫓는것만으로 힘에 부칠어서 그 얼굴을 보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나는 코코로가 생각하는것만큼 마냥 좋은 사람도 아니고 긍정적이기만 한것도 아니야. 상처도 받고 다른 누구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것도 있고 특별하다 여기는 사람도 있어."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너는 무슨 얼굴을 하고 있어?

어째서 내 앞에서 그렇게 폭력적일 정도로 솔직한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내가 바라는 둘만이 서로 세상에서 제일 특별할 수 있는 관계를 혹시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착각하게 하는 말을 계속 내뱉는건 기대해도 된다고 나를 안심시키려는거야?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가르쳐줘.

여러가지 생각이 빙빙 머릿속을 뒹굴어서 어느것도 꺼낼 수 없게 뒤엉켜서 혼란스러워졌다.

그런 내 마음을 대변하듯이 빠른 속도에 따라갈 수 없었던 내 발이 뒤엉켜서 휘청하고 앞으로 기울어졌다.

"미안. 미안해. 억지로 끌어당기면 안된다고 알고있는데.. 또 너한테 의지해버렸어. 왜 네 앞에서는 이렇게 충동적이 되버리는걸까."

넘어져서 바닥에 스친 무릎보다 내 앞에서 무릎꿇고 울고있는 너의 눈물이 신경쓰였다.

닦아주려고 다가가면 흠칫 무서워하는것처럼 뒤로 물러서는 네가 제일 경계하는건 스스로도 다칠정도로 제어하지 못하는 힘때문일까?

눈물을 닦는 대신에 나를 다치게 할까봐 막지도 못하는 너의 목에 감긴 초커를 낚아채서 떼어내버렸다.

"언제 생긴 자국이야 그거.. 왜 나에게 숨기고 있는거고."

"..걱정할까봐 그랬어. 정말 별거 아니야. 그냥.. 그냥 가끔 이렇게 무심코 힘을 주체 못할때는 있는데. 진심으로 목을 조른건 아니고.."

어머니가 준비해줬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가족도 알고있는 일이니까 조금 친할 타인일뿐인 나에게 참견할 자격이 없다는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상대가 이렇게 의도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목을 조른적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그런 와중에도 내가 걱정할까봐 숨겼다는게 슬퍼서 말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이런때마저도 타인과 같이 너를 나에게서 숨기려고 하지 말아달라고 하려면 내가 너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너의 히어로라고 말하면서 왜 숨기려고 하는거야? 웃는 얼굴로 만들어주길 바라면 네가 그렇게 슬플 수 밖에 없는 이유라도 전부 나에게 보여줘야지. 제발 나한테만큼은 숨기지 말아줘.. 물어보기 전에 말하는걸 폐라고 생각하지 말아줘."

자신도 그럴 용기는 없으면서 미사키에게 요구하는게 얼마나 간사한 일인지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여튼 타인을 사랑한다는건 결국 소유욕이라든가 독점욕이 따를 수 밖에 없는 아주 이기적인 일이니까 말해버리기로 한 이상 나는 지금 이 순간은 세계에서 제일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로 했다.

받기 싫어하는 너에게 줄 수 있는걸 전부 떠안겨주고 주고싶어하기만 하는 너에게서 네 자신을 달라고 외쳐버릴거니까.

"왜.. 다들 지금까지 아무도 그렇게 말해준적이 없는데 코코로는 나를 웃는 얼굴로 만들려고 하는거야?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도 꿈을 같이 이뤄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바보같은 생각이라고 나를 버리고 갔는데.. 그리고 누구보다도 내가 나 자신을 믿지 않는데.."

스스로의 목으로 가는 노력하고 땀흘려 거칠어진 손을 아무에게도 의지하지도 의지해지기도 싫어서 기피해온 깨끗하게 굳은살 하나 없는 내 손으로 잡아 멈춘다.

힘의 차이는 명확한데 상대를 상처주고 싶어하지 않는 미사키의 손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얼굴로 구제를 바라는.. 아니 자신을 희생 할 정도로 소중히 해 온 꿈을 부정당해와서 그것이 죄라고 생각해버리게 된 죄인의, 처단을 바라는 간절한 시선을 보내온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세상에서 제일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다른 누구보다도 내 눈앞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소중했다.

"미사키가 바란다면 미사키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언제라도 세상을 웃는 얼굴로 가득 채운다는 터무니없는 소원을 진심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거야. 무엇을 바라든지 그게 진짜라고 믿을 수 있고 전력으로 이루려고 할 자신이 있어. 이래봬도 바라지 않았지만 재력이나 권력은 넘치도록 가지고 있으니까 바보같은 일도 해낼 수 있다구?"

이미 사랑이란 독에 침범 당해서 이제까지 한번도 꺼려져서 해본적 없는 억지를 SP에게 명령한적도 있으니까 이제와서 고민할것도 없는 사실만을 전했다.

타인의 감정이 무엇인지는 모르면서 직시해버리는 미사키의 앞에서 거짓말은 오해만을 부르고 그랬다가는 일생일대의 고백 전부가 엉망으로 되버릴테니까 나는 지금 정말 필사적이었다.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일을 한다는건 정신력 심신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지 말을 하는것 뿐인데 숨이 차오른다.

그래도 밴드의 보컬을 하고 있는데 한심한 폐활량에 한숨이 나올뻔한다.

"그러니까 나는 미사키 네가 너를 사랑하는것보다 더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거야. 내가 가진 무엇을 줘도 상관없다고 생각할만큼.. 네 바보같은 꿈보다 더 바보같을지도 모르지만.."

기세좋게 말해버린거치고 끝이 얼버무리듯 끝난 고백에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수가 없었다.

이래서 단숨에 말해버릴려고 했는데 숨이 차서 중간에 멈춘 바람에 그 사이에 조금 식어버린 머리에 돌아온 이성이 소중한 사람이 스스로를 아끼지 않는다는 분함보다 부끄러움이 이겨버렸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넘어진 자세 그대로인 나는 말하는건 순전히 재력과 권력에 취해 오만한 아가씨인것 같은 말인데 나보다 키가 조금 큰 미사키를 올려다보면서 말하니까 하나도 카리스마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애절하달까 필사적인 표정까지 합해져서 애걸하는 모양새가 심히 볼품없어 보일것 같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어가고 싶어진다..

"코코로가 이렇게 정열적인 고백을 해줄줄은 몰랐어.. 하게 된다면 내가 말하게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감격에 찬 목고리가 자책에 몰린 나의 귓가에 맴돌았다.

나보다 조금 높은 체온이 담뿍 안겨들어와서 그 무게에 뒤로 넘어질뻔 했지만 든든한 손이 머리를 받쳐 안아주었다.

"..그, 그게 무슨 뜻이야? 미사키도 나를 좋아한다는거야?"

꼬옥 안겨서 느껴지는 온기에 녹아버릴것 같은 기분에도 확실한 둘만의 연결을 느끼고 싶었다.

미사키의 입으로 토해낸 말을 듣고 싶었다.

"어라, 한번도 말하지 않았나? 오늘 코코로를 권한것도 밴드에 들어오길 바란것도 모두 내가 코코로를 다른 어떤 사람보다 특별하게 여겼기 때문이야. 그런 기분을 사랑이라고 말하는게 아닐까?"

거의 포기하고 있었던 꿈과 같은 전개가 눈앞에서 펼쳐지는것 같았다.

전심전령을 건 고백이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미사키라면 이런 심장을 강타하는 확답은 받을 수 없을거라고 미리 포기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한 미사키의 두눈에 흐르는 애정을 직접적으로 느껴서 어떤 귀중한 보물을 얻더라도 느끼지 못할 행복이 저절로 나를 웃게 만들었다.

"그럼.. 미사키는 처음부터 나를 좋아했다는거지? 이건 착각이라던가 오해같은게 아니지? 그런 기분을 가지고 같이 밤을 보내자는 말에 허락을 한거잖아?"

오해의 여지가 충분하다못해 넘쳐흐를 말에 흔쾌히 허락한 미사키가 오해도 착각도 아니고 진짜로 그럴 의도로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꽉 가슴을 두근거리며 조이게 만들었다.

초조감과 기대감이 뒤섞여서 당장이라도 그 입술에 입맞추고 싶었다.

누가 지나갈지 모르는 인도의 한가운데에 꿇어 앉은 나와 내려보는 미사키는 분명 누가 보더라도 이상한 광경이겠지만 지금 이 황홀하게 나를 매혹하는 행복감에 찬 순간만큼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쓰이지도 않았다.

그저 미사키의 얇은 입에서 나올 긍정의 답을 애타게 그리는 눈은 열정적이게 빛나고 있었다.

"코코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도 내가 코코로에게 거부 할 제안같은건 존재하지 않아. 무슨 말을해도 전부 들어주고 싶을거야. 전부 주고 싶을거야. 코코로가 나에게 주고싶은 마음만큼 나도 코코로에게 주고 싶어. 이걸로는..전해지지 않는걸까?"

눈물이 나올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말실수에서 시작되었지만 확실한 허락이 내려진 지금은 차라리 오해받은게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몇걸음도 남지 않은 저택까지의 여정이 정말 길게 느껴져서 역시 SP에게 부탁해서 차를 타고 이동하는게 나은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분명 지금처럼 미사키와 서로 사랑을 이야기하고 연인사이가 되어서 손을 꽉 잡고 걷는 일 없이 저택에 도착해도 꿈같은 밤을 보내기보다 그저 친구가 집에서 자고가는 평범한 하루가 되었겠지만 사람은 역시 가져도 가져도 끝없는 욕심쟁이인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코코로의 집에 오게 되서 갈아입을 옷같은게 없는데.."

곤란한 얼굴의 미사키가 혹시라도 그런 이유로 집에 돌아간다고 이야기할까봐 얼른 SP에게 이미 준비시켰다는 말을 해줬다.

긴장감으로 끈적한 땀이 흐르는것 같은 손이 미사키에게 들키진 않았을까 신경쓰이지만 잡은 손을 도착할때까지 놓아줄 생각이 없어보이고 땀흘린 손이 싫지않다면 나도 놓고싶지는 않았다.

"코코로네 집은 엄청나게 넓네. 분수가 있는 정원이 있다니 영화에서 본 것 같은 저택이야. 대단한걸?"

"봄에는 온통 벚꽃이 펴서 정말 아름다워. 내년 봄에는 같이 꽃놀이를 할까?"

"그것도 좋겠다. 모두 즐거워할거야."

실없는 이야기를 하는것만으로 행복으로 가득채워지지만 이후에 있을 일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않고 얼굴이 붉어지는것 같아서 가로등의 빛에 속여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쪽을 보고 활짝 웃는 미사키가 내 새빨간 얼굴을 눈치채고 웃는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마찬가지로 가로등의 빛에 물들어버린 미사키의 얼굴도 매우 발갛게 익은듯이 보였다.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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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지는 파열음. 사방으로 흩어지는 도자기 조각. 새어나오는 붉은 줄기.

어머니가 사다주신 귀여운 곰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 컵이 결국 깨어져 추락했다. 어린 미사키는 어머니가 소리를 듣고 올 때까지 하염없이 산산조각난 도자기들을 내려다 보았었다. 어머니가 저를 뒤로 물리고 손을 치료해주셨을 때야 아파서 울었다.

악력을 조절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꽉 쥐고 있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었다. 손목이 아프도록 쥐고 있어도 그대로 빠져나갈 것 같은 기분에 빠트려져서, 힘을 빼고 다니라는 말에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원상태. 힘을 빼지 않는다면 쉽게 망가진다는 걸 알고 있어. 조금의 힘으로도 많은 것들을 들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치만, 그치만 이렇게나 불안한 걸.

악력의 조절을 할 수 있게 된 건 동생이 태어나고 얼마 있지 않아서였다. 무심코 꽉 쥔 동생의 손이 붉게 짓물러졌을 때 미사키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죄책감이 몸을 짓눌러 그저 옆에 앉아 미안하다며 속삭여야했다. 아픔에 울고 있는 아기를 어떻게 하지도 못한 채 보았다.

차라리 누군가 다칠 바엔 내가 불안해지는게 좋겠어.

 " 또 힘 조절을 못했니? "

목 언저리를 보며 말씀하시는 어머니에게 미사키는 그저 헤실 웃어보였다.

숨이 막혀서 목을 움켜잡았다. 아무런 신경도 가감도 없이 꽉 짓누른 손아귀에, 손톱마저 파고들어 손자국이 푸르게 남았다. 꼭 스스로 목을 조른 것만 같은 자국이었으나, 자해가 아닌 걸 미사키도 어머니도 알았다. 어머니는 한숨과 함께 검은 초커를 건네주었다.

 " 이걸로 가릴 순 있을거야. 이 시기에 목도리나 머플러는 좀 어색하잖니. "


.


호러영화는 무섭다.

 영화의 감독이 의도한대로 깜짝 놀래키는 부분은 눈을 꾹 감아버리기도 하고, 배우의 비명은 무척 리얼해서 섬뜩했으며, 귀신 (흑막)의 무드있는 출연은 이야기를 파멸로 이끈다.

 그러니까 오쿠사와 미사키는, 굳이 말하자면 호러영화 자체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다만 이런쪽의 이야기는 리미랑 즐겁게 얘기할 수 있으니까, 단지 그것뿐.

 스피커에선 불길한 음이 점점 소리를 키우며 나오고, 커다란 스크린은 점점 어딘가를 클로즈업한다. 관객들은 소리를 죽였다. 어떻게 해도 뭔가가 나올 것 같은 기분에 미사키는 경직 된 채 결국 눈을 감아버렸다.

 " 너무 무서워하는데 괜찮은걸까? "

옆쪽에서 소곤소곤 전해져오는 목소리 안에 담긴 걱정을 깨달아 미사키는 눈을 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애매한 어둠 속에서도 코코로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어떻게 알았을까. 느리게 눈을 깜빡인 미사키는 그녀를 보고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섭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스크린 속 어두침침한 분위기, 배우의 실감나는 비명소리, 잔혹해 보이는 귀신의 모습도 아무렇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쪽을 살피는 눈이 노골적이었다. 너의 특별함이 날 어쩔 줄 모르게 해. 미사키는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기묘하게도 상향곡선을 그리는 기분에 목소리가 커질까 그녀의 귓가에 소근거렸다.

 " 괜찮아, 코코로. "

 " ...하지만. " 

 " 코코로가 불러줘서, 다 괜찮아졌어. "

 " 미사키는, "

아.
 말을 하다 말고 코코로는 짧은 감탄사를 내놓고는 다른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영화는 점점 하이라이트를 향해 가고 있었다. 잠깐 환한 불빛에 문득 코코로의 얼굴이 붉다는 걸 알아챘다. 

 " 역시, 코코로 오늘 열 있는거지? "

 " 아니 이건... "

코코로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눈에 강제로 담긴 부드러운 금발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심장에 쿵 떨어졌다. 말을 못할 정도로 아픈거야? 곳곳에서 비명이 귓가를 때리고, 미사키는 생각했다.

나 때문이야.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친 순간들이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필 오늘 만나자고 하지 않았다면, 만났을 때 알아차렸다면, 파스타를 먹고 열을 쟀을 때 왜 몰랐어, 영화를 보지 말고 바로 집으로 향했어야지. 심지어 점심때와 영화의 상영시간까지 시간차가 꽤 있었다.

무리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 

희게 질린 얼굴로 처연히 코코로를 바라보던 미사키는 의자 손걸이에 얌전히 놓여있는 손을 잡아  제 얼굴에 끌어당겼다. 불쾌해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지만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 코코로. "

스러져가듯 작은 목소리로 부른 이름에 너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사이에만 흐른 정적. 고요히 마주치는 금안이 어떠한 생각으로 가라앉았는지 미사키는 몰랐다. 사실 무슨 생각이든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뺨에 닿은 손이 꽤 따스해서 얼굴을 부볐다. 만약에 감기라면 내게 옮아줘, 지독한 열병이라도 좋아.

 코코로의 손에선 짠 팝콘 냄새가 옅게 풍겼다. 깊숙히 그 향을 들이마시면 손가락이 움찔, 하고 떨렸다.

 " 난 괜찮으니까, 아프면 무리하지 말고 집에 가자. "

속닥이며 나온 말에 또 한번 침묵이 흘렀다. 다시 한번 스크린 속 배우가 비명을 질렀다. 코코로의 얼굴이 곤란한 것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어간다. 제게 잡혀있는 손이 느리게 움직여, 미사키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는다.

 " 아무래도 지금 전혀 영화 집중을 못하고 있지? "

그야.

 " 미사키, 그럼 나가자. "

볼을 꼬집은 손에 힘이 풀려 피부를 살짝 쓰다듬는다. 그 감촉이 좋아 아무말없이 일어나는 그녀를 따라 나섰다. 의자 끄트머리에 걸친 관객에게 사과를 하고 넘어가 죽어가는 연극배우가 나오는 스크린에게서 등을 돌렸다. 


.


사람에게 귀랑 꼬리가 달려있다면 틀림없이 오쿠사와 미사키에겐 대형견의 그것들이 달려 있을 것이다.

몇 분에 한 번씩 격하게 흔들리다가, 축 늘어지는 꼬리의 환영.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태양이 꽤 아래로 내려가 있어서, 곧 어두워질 것 같았다. 슬슬 집에 가야 할 타이밍일까? 의견을 물으러 돌아보니 이쪽을 향해 있던 무덤덤한 시선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 위로 떠오르는 개의 환영.

 " 역시, 병원이라도 한 번... "

 " 정말로 안 아프니까 진정해줄래. "

당신의 전생은 개라도 되었을까나.

 " 하지만 그러네.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미사키, 이제 집에 갈까? "

 " 응...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코코로는 집에 어떻게 가? "

 " 나는. "

코코로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보통이라면 평범하게 검은옷 사람들이 차로 데리고 오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미사키는 혼자 남게 되는걸까. 홀로 서 있는 당신을 생각하니 어떻게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사키는 참을성 있게 코코로의 말을 기다렸다. 담담한 얼굴에 맺힌 작은 미소는 어떤 말을 해도 다 받아들일 것만 같아, 코코로는 어리광을 부리기로 했다.

 " 여기서 집까지 별로 안 멀어. 그러니까, 걸어가도 오케이. 혹시 미사키만 괜찮다면 끝까지 어울려줄래? "

몇 마디에 변명 끝에 솔직히 나온 진심에 미사키는 해맑게 웃었다.

 " 난 코코로의 말이면 뭐든 할 수 있어. "

그녀의 웃음과 동시에 홧 하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녀의 말은 마치 내가 가장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내 말이 대체 뭐라고. 웅얼거리듯 나온 소리를 못들었는지, 들었으면서도 모른 척 하는건지 미사키는 아주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아왔다.

한 발, 한 발. 천천히 걷기 시작하는 미사키의 발걸음에 맞춰 코코로도 걸었다. 져가는 석양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두 개의 그림자가 마냥 이어진 걸 빤히 바라봤다. 마음이 간질거려.

미사키가 말했던, -세상이 반짝반짝해- 라는 말을 아주 어렴풋 이해했다.

 " 코코로, 혹시 영화 내용 기억해? "

 " ... 아니. 저주의 내용이었던 건 알겠는데. "

 " 도중에 나와서 결말은 못봤지만, 신혼부부가 여행을 갔다가 호기심으로 오랜 지박령을 건드린 벌로 저주를 내린거야. 두 사람 사이에 거짓말이 쌓이면 쌓일수록 알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저주. "

 " 그거 결국 자업자득이란 말로 들리는데? "

 " 맞아. 남자가 불륜을 저질렀거든. "

미사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 불가항력도, 그 어떠한 변명이 될 요지도 없이 그냥. 그 순간의 유혹에 못 이겨서 일어난 일이지. 아내에게 늦게 온 변명을 거짓말로 둘러대고. 그 일 때문에 남자는 폐쇄된 감옥에 어쩌다 갇히게 돼.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간다. 좀 더 길게 늘어진 그림자에 마주잡은 손.

 " 거기서 헤매던 남자는 무서워 울고 있는 아내를 발견하게 돼. 나중에 나오는 회상씬에서 안거지만, 아내는 이미 남편의 불륜을 알고 있었고 모른 척 거짓말을 한거지. ... ...아, 혹시 재미 없었어? "

 " 아, 아니. 그렇게 무서워했는데 의외로 잘 보고 있었구나 싶어서. 대단하네. "

가만히 눈을 깜빡인 미사키가 '초반 부분인 걸' 하면서 또 웃었다.

당신은 모르겠지. 몰라야만 했다. 아주 조금,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했다.

다른 이의 조언이 있다 해도 시간을 들여 꾸민 오쿠사와 미사키, 분위기와 맛이 좋았던 점심과 동상이몽이라 해도 연인처럼 영화 스크린 앞에 내던져졌던 시간, 다정히 손을 잡아 언제까지고 느리게 걸어갈 걸음걸이가 도저히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 있지, 미사키. "

그리고, 칼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 미사키가 그런 저주에 걸린다면 어떡할거야? "

그 옆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어도 당신은 똑같이 할 거란 사실이. 다정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걱정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다른 이의 손을 잡아, 온갖 것들이 들어있는 눈으로 모르는 이를 바라보는.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아?

 " 어, 거짓말을 안하게 되지 않을까? "

 " 미사키처럼 터무니없는 거짓말쟁이가? "

분하고, 분하고, 너무 분해서- 나쁜 마음으로 가득차는 감정. 그러니까 이건 심술이다.

자기가 한 전과가 기억나는지 입을 딱 다문 미사키를 보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높은 톤의 웃음소리에 미사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좋은지, 저를 따라 기쁘게 웃었다.

맞잡은 손을 들어올려 꽉 쥐었다. 움찔 놀라는게 선연했다. 코코로는 가득 장난기를 담아 말했다.

 " 좋아, 터무니없는 거짓말쟁이씨. 당신은 저주에 걸렸습니다. 앞으로 거짓말을 한다면 벌 받을거야. "

에. 의문 어린 목소리에도 머릿속이 착착 정리해 들어갔다. 상냥한 당신이 내 속내를 알면서도 어울려 줄 것이란 건 알고 있어. 이거봐. 미사키는 이내 웃으며 수긍했다.

 " 자아, 그럼 뭘 물어보는 게 미사키를 곤란하게 하는데 탁월할까. "

 " 제가 곤란해지는 건 확정입니까, 코코로씨. "

 " 어쩔수 없어. 당신은 말하지 않는 것 투성이니까. "
 
해가 완전히 졌다. 어둑한 하늘 아래, 가로등 빛과 가정집 불빛들이 반짝였다. 동화 속 이야기처럼 쌀쌀하지 않는 날씨 속에서 둘이서만 걸었다.

 " 그럼 첫번째. "

 " ... 물어보는 게 여러개였어? "

 " 안돼? "

 " 아니, 돼. "

단호한 어조에 괜히 마음이 술렁였다. 꽉 잡은 당신의 손이 의식된다. 그러나 손은 항상 당신이 먼저 잡았다. 아주 조심스럽고, 힘을 주면 깨질 유리창처럼. 거기에 무슨 사연이나 생각이 있는지 코코로는 알지 못했다. 긴장으로 입 안에 침이 고여 삼켜냈다.

 " 미사키는, 어째서 내게 그렇게 잘해주는거야? "

기어코 입밖으로 꺼낸 문장이 되돌아와 코코로를 가격했다. 미사키는 곰곰히 말을 고르는 느낌이었다. 입을 몇차례나 달싹이다 이내 표정마저 부드러이 풀렸다.

 " 그건 코코로가 특별하기 때문이야. 어디에 있든 코코로는 반짝이지 않은 적이 없었어. 잘해주고 있는건지 사실 잘 모르겠지만, 코코로가 웃는다면 난 무척 기뻐. "

어쩐지 그건 달큰한 사랑의 속삭임처럼도 들렸다.

 " ... 고민하라고 질문했던건데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거야? 좋아, 두번째. "

치사하다는 것쯤은 깨닫는다. 고압적인 억지는 미사키가 맞춰주지 않는다면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도. 한없이 유치해지려는 스스로를 자각해, 들뜨려는 기분을 그저 진정한 척 해. 흐트러지는 발걸음마저 차분히했다.

 " 어렸을 적 얘기를 해줘. 미사키는 옛날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 걸. "

 " 내 어릴때? "

미사키는 머뭇거렸다. 마주잡은 손에서, 덤덤한 척 이쪽을 향하는 시선에서 당황스러움을 느끼지 못할리가 없었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한차례 달싹였다. 곤란히 눈썹을 찌푸린 미사키는 옆쪽으로 눈을 굴리다 곧 침착하게 시선을 바로 마주했다.

 " 동생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난 이것저것 물건을 많이 망가트렸어. 연필이나 책가방의 끈, 교과서나 리코더 같이 학교에서 자주 쓰는 것들. 왜냐면... 집에선 어머니가 어떤것도 잘 만지지 못하게 했었거든. "

발걸음이 멈췄다. 코너를 돌면 얼마 안 있어 츠루마키가 정문이 나왔다. 미사키는 무슨 생각인지 모를 낯으로 목에 두른 초커를 매만졌다.

 " 손에 힘을 빼는게 잘 안됐어. 꽉 쥐지 않아도 되는 걸 알았는데. 리코더의 구멍이 휘어 소리가 엉망이라 음악시간에 빵점 맞은게 아직도 기억나. "

 " 지금도 잘 안돼? "

 " 아니. 그런 힘으로 동생을 만지면 다친다 하셔서, 어떻게든 했어. "

미사키는 그 말을 끝으로 그림처럼 웃었다.

코코로는 그녀가 조금 울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마주잡은 손에 힘이라곤 전혀 들어가지 않아, 그럼에도 빠지지 않게 잡고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이런 닿음마저도 당신의 노력은 필사적이었을까. 누군가에게 닿기 위하여.

코코로는 지금 속을 엉망으로 만드는 무언가가 그녀를 향한 동정심인지 안타까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 ...마지막 세번째. "

그러니까다. 어떤 위로도 격려도 응원이나 칭찬조차 할 수 없어, 제 치졸한 심술을 속닥거렸다. 솔직하게 답해줘. 당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심연은 깊고 세심해서 시간을 가지고 지켜봐야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츠루마키 코코로의 인내심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기회가 있다면 단번에 들춰내고 싶어.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그런 걸로 내쳐버리기엔 아까웠고 안타까웠다.

 " 오늘, 같이 밤을 보낼래? "

그러니, 좀 더 내게 시간을 내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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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공책(Fox_nullnote)님이 써주셨습니다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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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정리한 후에 이곳을 찾아온것은 단순히 미사키가 없는 넓은 저택에서 혼자라는 사실이 무언가 뭉게뭉게한 기분이 들게 했기 때문이다.

외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또 흥미도 섞인 감정에 불안함도 포함해서 미사키가 오늘은 아르바이트가 빨리 끝난다고 기다려 달라고 했던 말도 지킬 생각이 사라졌다.

그렇게 많은 사랑이 담긴 노래와 가사를 만들어 받아도 가슴 속 무한히 퍼진 빈공간이 채워지지 않아서 코코로는 역시 자신은 미사키의 말대로 세계 제일의 욕심쟁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말 미사키가 다른 무슨 이유보다도 더 자신이 소중해서 절대 떠나지 않는다는 확신은 어떻게 얻으면 좋은걸까.

"히나랑 카스미가 말한대로 해도 미사키는 손대주지 않았어. 어떻게해야 하는 걸까?"

이미 연인이 있는 두명의 조언을 들었는데 미사키는 전혀 그런 분위기를 내지도 않았다.

사랑스럽다는 얼굴로 잔뜩 키스를 해줬지만 코코로는 이정도로 만족 할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서로를 소유하는 방법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실행해야할지 도저히 알수가 없었다.

이런때에는 항상 미사키가 목적을 이룰수 있는 수단을 알려줬지만 이번에는 그럴수가 없었다.

많은것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미사키는 겁쟁이인 부분이 완전히 사라진것은 아니고 없어질 수 없는 두명의 격차에 질투는 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부담은 느끼는것 같다.

미사키가 부담을 느끼는 모든것을 버려서도 얻고싶은것은 단지 미사키 하나뿐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그랬다가는 전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것은 어딘지 모르게 이해했다.

미사키가 떠난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고있다.

코코로에게는 미사키의 존재와 비교도 할 수 없는것들이 미사키에게는 스스로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자신으로 인해 잃을것을 염려한거겠지.

그리고 정도는 줄었어도 여전히 미사키는 코코로의 행복을 걱정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도 제일 특별한건 미사키라는 말도 통하지 않는다면 좀 더 이 마음을 전하는데 적당한 단어가 존재한다는걸까? 미사키가 알려주면 좋을텐데."

이것저것 섞여서 엉망진창으로 마블을 그리는 감정을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보게된 미사키의 디제잉을 하는 모습은 좀 더 강렬하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아. 오늘은 매우 컨디션이 좋은가본데? 아가씨가 찾아와서 내심 좋아하는걸 숨기지도 못하더니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는거 같군. 사랑받고 있잖아 아가씨."

다소 거친말투를 하는 미사키가 매니저라고 부른 남자가 흡족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외견도 그리 상냥하게 생기지 않은 투박한 인상의 이 남자도 코코로의 기분이 좋지 않은데에 한 몫을 하는것 같았다.

자신이 모르는 미사키를 알고있다는 사람이 있는 그 사실만으로 이런 기분이 든다는걸 미사키가 안다면 어떤 얼굴을 할까?

조금 궁금해져서 집에 돌아가서 한번 말해보는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확 나아져버렸다.

미사키는 여기에 없는데 생각하는것만으로 웃는얼굴이 될 수 있는데 어떨때는 생각하는것만으로 기분이 나빠지기도해서 미사키가 알려준 사랑이란 감정은 코코로에게 너무나도 어려웠다.

"하여튼 의욕에 넘쳐보이니까 즐겨주라구. 무슨 트러블이라도 있으면 바로 말해줘. 음.. 그때 봤던 무서운 보디가드들이 여전히 있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을거같은데 미카엘은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니까 최대한 도와주지."

이만 자신도 일을 해야겠다고 떠나는 남자와 미사키의 사이에는 이야기 하지 않은 부분까지도 알아채서 행동할 정도로 신뢰가 있는것 같았다.

나는 연인이 된 지금도 미사키의 본심을 알 수 있어도 어떻게 하면 그 불안함이나 죄책감을 닮은 감정을 없애줄 수 있는지 모르는데 간사하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가슴이 꾸욱 통증을 느끼고 부글부글 끓는 느낌을 지우려고 아무 칵테일이나 받아든 후 어딘가 안심해서 힘이 빠진 얼굴로 웃으며 디제잉을 하는 미사키를 올려다본다.

"히나가 왜 나를 부러워했다고 했는지 알겠어. 마주보고 있어도 이렇게 힘든 일을 미사키는 언제나 내 등뒤에서 노력해주고 있었구나."

미사키가 떠난 이유를 다 알았다고 생각해버린것은 지독한 오만이었던것 같다.

아직도 전부를 알았다고 하기에는 모르는것이 이렇게나 많은데.. 예전에는 이런 깨닫는일도 순수하게 즐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안타까움만이 몰려온다.

몰라서 놓쳐버린 여러가지것이 정말로 소중했던 보물이었다는게 잃어버리고 되찾을 수 없게 되어서야 알았으니까.

내가 미사키의 옆에 없었을때의 모습들을 전부 알고싶다고, 아니 그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전부 나였었다면 좋았을거라고 생각하는건 이상한일일까.

이제와서 바꿀수도 없는 옛날일을 부러워하는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었을텐데.

문득 정신이 피로해져서 미사키가 잘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우울한 기분 때문에 맛도 느껴지지 않는 칵테일잔을 기울였다.

"저.. 실례합니다. 옆자리, 비었나요?"

리드미컬한 곡이 흐르는 펍이라는 장소에서는 어울리지 않아서 반대로 튈 정도로 단정한 차림에 염색이나 화장기도 없는 여자가 머뭇대면서 허락을 구했다.

옆자리에 앉았으면 좋은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으니까 코코로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 흔들었다.

"다행이다. 오랜만에 노래를 들으러 왔는데 미카엘이 저번주에 쉬는 바람에 오늘 평소보다 사람이 많더라구요. 사람이 북적이는 곳은 익숙하지 않아서.."

화아악

주변이 밝게 느껴지도록 순한인상의 여자가 웃었다.

이런 웃는얼굴에도 아무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미사키가 옆에 없기 때문이니까 얼른 다시 돌아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미사키의 모습인 미카엘을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듯한 여자에게서 미사키가 부끄럽다며 알려주지 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기회를 얻었다.

이번만큼은 미사키가 옆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분명 별거 아닌 이야기라며 말하지 못하게 막았을테니까.

"오랜만이라니 예전에도 미카엘의 디제잉을 본 적이 있는 거야?"

"네. 인터넷에서 동영상으로 처음 보고 반했거든요. DJ라고 하면 뭐랄까.. 조금 일반인이 접하기엔 무서운 이미지인데 미카엘의 노래는 사랑이나 일상의 아름다움같은걸 표현하니까 일종의 갭을 느꼈다고 할까요?"

즐겁게 좋아하는점을 나열하는 여자는 말하는것은 다른 팬들과 다름이 없었지만 눈동자에는 기묘한 열기를 담고 있었다.
그것이 몹시 신경쓰이고...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떠올리면 추운곳에 혼자 남겨진것같이 시리고 아파서 잊어버리고 있던 사실이 생각나버렸다.

나에게는 미사키밖에 없고 앞으로도 다른 사람은 없을테지만 미사키는 그렇지 않았다는건 생각만해도 심장이 찢어지는것 같은 불쾌함을 느낀다.

심지어 그것이 자신을 잊기 위해서 한 일이란것을 그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어렴풋이 알수있으니까 더 최악의 기분이었다.

"그런데 왜 오랜만에 찾아온거야? 바빴었어?"

최악의 기분에 무심코 신경질적인 말을 해버리고서 알아챘다.

미사키에 대한 화제라는게 이렇게 나에게 민감한 문제인줄 알았다면 차라리 처음보는 남에게 물어보는건 자제했어야 했는데.

폭주하는 기분을 가라않혀줄 유일한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분위기에 취했는지 땀을 흘려 습기를 띈 머리칼응 흩날리며 스크래치로 음악에 감정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사실 제가 이 자리에 앉아도 되냐고 물은것은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에요."

갑자기 분위기가 변한 여자가 진지한 눈으로 이쪽을 응시한다.
어쩐지 이 비슷한 기분을 전에도 느낀적이 있는것 같았다.

"미사키가 저렇게 변한건 당신이 한 일이죠? 아까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은 처음인데."

어째서 미사키가 미카엘이란걸 알고 있는 거야?
항상 싫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니 어서 아르바이트 시간이 끝나서 미사키가 돌아와줬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미사키랑 관련이 있다고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모르겠어."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서 무슨 말이 나와도 지고 싶지 않았다.

미사키가 헤어지자고 말해도 놓쳐줄 생각이 없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절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후후후.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되요.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 온거니까요. 애초에 미사키는 한번도 사랑한다던가 하는 말도 해주지 않았으니까 이제와서 제가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여유가 하나도 없는데 상대는 그렇지 않은지 흐르는 노래에 맞춰 콧노래까지 부르니까 저절로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아무래도 예상대로 미사키의 과거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참견하러 온 것은 아닌것 같았다.

"제가 애원해서 거절을 못한거에요. 그렇게 상심하지 않아도 지금까지 미사키 옆에서 오래 사귄 사람은 한명도 없었으니까 한번도 당신을 잊을 수 없었던거겠죠."

기쁘지만 슬프기도 했다.

저런 극단적인 방법으로도 미사키의 안에서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는건 조금 안심감을 줬지만 나에게만 미사키가 매력적으로 보이는게 아니라는 새로운 사실이 괴로웠다.

언제까지 똑같은 매일이야말로 세상의 모두가 웃는얼굴이 되는것만큼 어려운일이다.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어도 내일은? 1년뒤는? 그때까지도 계속 함께라고 정해진게 아닌데 심지어 우리사이에는 남들보다도 장애물이 많아서 서로가 노력하지 않으면 마주잡은 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저만 받는 관계에 좌절해서 제가 포기해버렸어요. 그때 먼저 손을 놓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고맙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말이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저는 자격을 스스로 내팽개쳤으니까.."

"미사키는 상냥하니까. 헤어졌다고해도 당신을 신경쓰고 있을거야. 그런 누구에게나 친절한부분도 좋아하지만 가끔 너무 불안하고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어."

"이런. 그냥 감사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괜한 말이었나 보네요.."

"그리고 당신도 이렇게 상냥하니까 분명 당신같은 사람이라면 미사키는 이렇게 외국으로 떠날 필요도 없었을거야. 그러면 원래 미사키가 바랬던대로 평온하고 적당적당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겠지. 미사키의 동생도 언니랑 헤어질 필요도 없었을거야."

만나러왔는데도 이만큼이나 떨어진 거리에선 내 말이 미사키에게 닿을 일도 없으니까 알코올의 기운이 돌아서 실언이라는걸 알면서도 도저히 멈출수가 없었다.

미사키가 나와 헤어져야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의 수만큼 내가 미사키에게서 빼앗은 일상이 이렇게나 많았다.

물질적인것이라면 얼마든지 보상해줄 수 있는데 잃어버린 시간같은건 어떻게해도 되찾아줄 수 없다.

"하지만 결국 미사키는 저를 선택하지도 다른 누구를 사랑하지도 않고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잖아요. 뭐가 그렇게 불아.. 이런 무서운 곰씨가 와버렸네요. 저는 이만 가보도록할게요."

상냥한 미소를 가지고 있던 이름도 못들은 사람이 떠나자마자 허겁지겁 달려온 미사키가 어리둥절하게 내 앞에 널부러진 칵테일잔들을 살펴봤다.

끝나자마자 달려왔는지 아직 땀도 닦지 못한 미사키에게서 땀이 뚝뚝 떨어지고 미셸에 들어갔던 고등학교 때부터 냄새를 신경쓰느라 사용하던 제한제의 향이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심이되고 동시에 두근두근하게 되는 미사키의 향기가 났다.

"코코로 왜 이렇게 많이 마신거야? 그리고 아까 이야기하던 사람은 도대체 누구고?"

고개를 휙휙 돌려서 둘러보던 미사키가 그녀를 발견하는게 싫어서 한손으로 미사키의 손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동요로 흔들흔들 물결치는 겨울의 하늘을 닮은 눈동자에 다른 사람을 비추게하고 싶지 않아서 떼어 놓으려고 몸을 뒤로 젖히는 미사키의 목에 양팔을 둘러서 떨어지지 못하게 좀 더 가까이 달라붙었다.

"읍..큿...흐읏..코코, 로 잠깐! 잠깐 여기 사람들 많다고!!"

깜짝놀랐을때라면 모를까 힘을 비교하면 미사키를 이길 수 없다는걸 알고 있었지만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는지 수근수근 주변에서 이쪽을 보고 이야기하는게 느껴진다.

새빨개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으윽 신음을 하던 미사키는 주머니에서 대충 지폐를 꺼내 내가 마신 음료의 가격은 훨씬 넘는 금액을 두고서 서둘러 나를 공주님안기로 들어올려 자리를 벗어났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써서 이쪽을 바라봐주지 않는건 살짝 기분이 좋지 않지만 밀착한 품에서 쪽쪽 립음이 울리도록 미사키의 목과 뺨에 연신 키스를 해주면 꽈악 나를 받히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게 느껴져서 만족스러웠다.

"젠장. 미리 자동차 면허라도 따둘걸.. 아니지 검은옷의 사람들이 있지 않아? 코코로 좀 불러줄래?"

계단을 한번에 뛰어 넘듯이 내려가서 건물 밖으로 나오면 덥고 습한 여름의 바람이 불어와서 더욱 열기를 띄게 만든다.

늦은밤 아까까지 소란스러운 펍에 있어서인지 더욱 더 정적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두근거리는 미사키의 심장소리까지 들려오는것 같아서 아무도 방해하지 않기를 바랬다.

"글쎄. 늦은시간이니까 퇴근한게 아닐까? 저택까지는 멀지 않으니까 걸어서도 갈 수 있잖아."

미사키는 눈치채지 못한 뒤에서 검은옷의 사람이 정중히 인사를 하곤 해산했다.
기본적인 경호인원을 남기고는 다 떠났을것이다.

"뭐? 그 사람들이 없을때도 있는거였어? 으으.. 그럼 코코로 조금 땀냄새가 날지도 모르겠지만 이대로 집에 가도 될까? 윽. 잠깐.. 깨물지는 말아줄래.."

양손으로 나를 안아올리고 있으니까 전혀 가려지지 않은 귓불이 불타오를것처럼 빨갛게 익어있었다.
고등학교때는 없었던 은빛의 피어스가 아직도 내가 모르는 미사키가 더 있다고 비아냥대는것 같아서 괜시리 잘근잘근 이빨을 살짝 세워 귀를 지분거렸다.

내 콧노래를 들으며 작곡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미사키는 청각이 예리한 편이라서 바람을 불거나 가까이서 이름을 부르면 깜짝 놀라는 반응이 재밌어서 자주 장난을 쳤었던게 기억난다.

"미사키."

훅 하고 바람을 불면 역시나 움찔 어깨의 근육이 튀는게 느껴졌다.
걸음도 살짝 빨라져서 이대로면 저택에 도착하는것도 금방일거 같았다.

"코코로, 무언가 고민거리 있었어? 술을 마시고 취한다니 혹시 옆자리에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기분나쁜 말이라도 한거야?"

전혀 이쪽을 봐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미사키는 디제잉을 하는 도중에도 내가 누군가랑 대화를 하고 있었다는걸 보고 있었나보다.

검은옷의 사람이 주변에서 지키고 있다고 생각할텐데도 나를 보살피려고 하거나 지키려고 하는 미사키를 보면 내가 안전하다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은 욕심이 들었다.

미사키의 목에 질근 이빨을 꼿아서 자국을 내어도 며칠뒤에는 사라진다는게 아쉬워서 없어지지 않는 흉터라도 남기고 싶었다.

"아얏! 나에게 불만이 있는거면 집에가서 들어줄테니까. 그래! 내일은 아르바이트도 없고 휴일인데 무엇을 할지 생각하고 있어. 금방 도착할거야."

놀라울 정도로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내일은 온종일 미사키랑 둘만 있을 수 있다는건 무엇보다도 매혹적인 제안으로 심술로 짗씹어서 붉게 변한 살갗을 슬슬 손가락으로 쓸어주면서 무엇을 할지 어디를 갈지 떠올려본다.

미사키가 노래에 담은 장소들을 둘러보며 처음에 봤을때의 추억을 물어보는것도 좋을것이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았던때에는 여러가지 시행착오도 많고 문화가 다르니까 난처했던 일들도 있다던것을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다.
분명 재미있고 내가 곁에 없었을때의 미사키를 알 수 있겠지.

미사키가 찍은 사진을 구경하는것도 재미있을것이다.
미사키의 시선으로 본 세계를 찍어낸 그것들을 보면서 즐거운 기분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면 미사키는 곤란한 얼굴을 하면서도 악보에 옮겨줄것이다.
같이 노래를 부르는것도 좋겠지.

그래도 제일로 바라는것은..

"돌아올때마다 생각하는건데 두명이서 살기에는 너무 넓은 집인거 아니야? 게다가 이제 1학기 밖에 남지 않았는데.. 좁더라도 역시 원래 살던 방에서 사는게 나았을지도.. 아, 그래도 두명이 살기에 거긴 너무 부대꼈을려나? 침대도 싱글이었고.."

"미사키는 나랑 붙어있는것은 싫어?"

지금도 얼른 나를 떼어두려고 전력으로 달려서 아르바이트 후라 힘들었을텐데 무리하고 있다.

키스를 할때에 금방 몸을 뒤로 젖혀서 피해버린다.

나는 시간이랑 사정이 허락하는한 계속, 미사키의 약간 서늘한 체온과 내 어린아이같은 따끈한 체온이 뒤섞여서 미지근해질 정도로 껴안고 있고 싶은데 미사키는 그렇지 않은걸까?

조금 슬픈 기분이 들었다.
억울하다는 느낌이나 화가 난다거나.
이것저것 뒤섞여서 어째선지 눈에서 방울방울 서러움이 넘쳐 흘러버린다.

나를 소파위에 내려놓을려던 자세 그대로 미사키가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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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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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트리스가 가져다준 해물파스타와 크림파스타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며 돌아다닌 수고에 충분할 정도로 맛있어보였다.

평소에 이런 장소에서 파스타를 먹는 일은 없었으니까 사실 조금 긴장했지만 아름다울 정도로 식사 예법을 지키는 코코로의 모습을 보니 저절로 감탄과 함께 역시 이런 장소보다는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한 연회장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밴드에 이끌기는 했지만 역시 코코로는 하늘 위의 별과 같이 내 투박한 손으로는 닿지 못할 존재라고 이러한 부분에서 느낄때가 있다.

하지만 내 기분이 즐겁다라던가 행복과는 멀어진 답답하고 초조한 부정적인 감각에 가까운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왜 그렇게 빤히 보고 있어? 혹시 크림파스타도 먹어보고 싶은거야?"

얼굴이 붉어진채로 코코로가 이쪽을 외면하면서 물어봤다.
그렇게 오랫동안 응시했나?
그래도 부끄러워하는 코코로가 내가 아무말도 없자 포크에 자신의 크림파스타를 휘감아 내밀어주는건 기뻐하며 먹기로 하였다.

다행히 느끼하지 않고 양질의 재료가 사용된것 같은 크림파스타는 고심해서 고른 가게답게 맛있어서 코코로도 이정도면 싫진 않겠지하고 안심했다.

"가끔 보면 미사키는 사양이라던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부분에서 아무렇지도 않은거 같아.."

"그런가? 보통으로 느끼는거 같은데.. 아, 코코로도 해물파스타 먹어볼래? 비리지 않고 맛있어. 자!"

나만 코코로가 시킨 음식을 맛보는건 어딘지 미안하고 여러가지 맛있는걸 먹어보는건 즐거운일이니까 공유하고 싶어서 나도 포크를 코코로 쪽으로 내밀었다.

아까도 조금 홍조가 돌긴 했지만 포크를 원수처럼 째려보는 코코로는 이젠 귓불까지 토마토처럼 빨개져있었다.

어딘가 몸상태라도 안좋은데 억지로 어울려주는건 아니겠지?
이따가 틈을 봐서 열은 없는지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서 먹지 않으면 흘릴거 같은데.. 아니면 혹시 해산물은 싫어해?"

먹기 싫은 음식을 강요하는건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슬그머니 손을 돌리려고 했다.

나라도 고수풀이 들어간 음식을 코코로가 먹어볼래 하고 권한다면 순수하게 선의를 담아 권유한 코코로 대신 음식물을 노려봤을지도 모른다.

"나도 고수풀이 들어간 음식은 정말 싫어하니까. 해산물이 싫다면 말해주면 될텐데."

그대로 내 입으로 가져가려던 포크를 든 손을 돌연 코코로가 한손으로 휙 낚아채서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깜짝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라보면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아무것도 묻지 않은 입을 왠지 냅킨으로 닦는 코코로가 보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싫어하는 음식은 딱히 없어. 하아.. 내가 먼저 했는데 왜 내가 더 부끄러워 하는 거지.. 무의식이란 정말 무서워."

다행히 싫었던건 아니었는지 해물파스타도 맛있네하고 짤막하게 감상을 말해줬다.

이런 사소한 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니 아직 집에 돌아가기까지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이번 약속이 끝나는게 아쉬워질 정도였다.

아직 만나서 식사밖에 안했는데 다음 약속을 정하는건 너무 빠르니까 헤어질때에 또 같이 놀자고 말해봐야겠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코코로도 나처럼 다음 약속을 바랄 정도로 즐거운 하루가 되어야겠지.

"코코로, 파스타 다 먹으면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카논씨라면 수족관의 해파리수조, 하구미라면 소프트볼의 경기를 구경하러 간다거나 카오루씨라면 연극을 보러가면 좋아할거라고 떠오르지만 나는 코코로의 좋아하는게 무엇인지 몰랐다.

항상 교실의 창문근처의 자리에서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은 모든게 지루하다고 말하고 있는것 같아서 밴드에 이끌었지만 휴일의 코코로는 다를지도 모르니까.

평소에는 무엇을 하는지 알고싶었다.

"으음.. 갑자기 물어봐도.. 영화라도 보러갈까?"

"좋아! 영화 보는거 좋아하는구나. 나도 리미랑 자주 영화관을 가는데 혼자서 보는거랑은 역시 기분이 다르지. 지금은 무슨 영화가 상영중일까..검색해볼게."

"..딱히 엄청 좋아하는건 아니지만 좋은지 싫은지를 따지자면 좋아하는쪽일까."

좋아하는지만 물어봤는데 어째서 그렇게 불만스런 얼굴을 하는 걸까?
내가 무언가 마음에 안드는 말이나 행동을 했는지 고민해도 알수없었다.

그래도 상영중인 영화의 목록을 보여주기에 마주보는 자리는 불편했으니까 건너편으로 넘어가 옆에서 가까이 보여주며 볼 영화를 정할때는 다시 아까처럼 얼굴이 붉었으니까 역시 몸상태가 나빠서 기분이 안좋았을지도 모른다.





평소에도 기본 웃는얼굴인 미사키이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특히나 즐거워하는것 같다.

게다가 이건 내가 자초한 일이지만 서로 먹여주기를 한다거나, 스마트폰을 넘겨서 보여주던가 말로 설명해도 될텐데 근처까지 다가오니까 도저히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다.

심지어 가게에서 나온 지금은 혹시 열이 나지 않냐고 이마를 맞대다니 이 거리는 하나사키가와의 학생도 많이 놀러다니는 인기장소인데 혹시 누군가 볼까봐 무서울 지경이었다.

"열은 없는것 같은데.. 아까 얼굴이 붉고 기분도 나빠보였으니까 몸상태가 안좋은줄 알았어. 혹시 오늘 부른거 폐가 됐었나 하고.."

시무룩하게 축 늘어진 눈썹이 나에게 어서 사과하라고 재촉하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기 기분에 휘둘려서 미사키를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니 미사키의 잘못도 아닌데..

친구가 준 도움에 고마워하며 답례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을 이런식으로 무시해서는 친구로써도 실격일지 모른다.

"전혀 그런게 아니야! 알다싶이.. 내가 조금 학교 아이들에게 기피되고 있잖아? 뭐, 내가 그렇게 되도록 만든거나 마찬가지지만.. 하여튼 그렇다보니까 이런 경험이 없어서 조금 긴장한거뿐이야."

이런 말을 평소엔 절대 하지 않겠지만 슬퍼보이는 미사키의 얼굴을 보면 내가 부끄럽다던가 하는 그런 기분은 아주 가볍게 날라가버리고 그런 표정을 치우기 위해서 얼마든지 말해버릴거 같았다.

이제와서이지만 나는 미사키가 이렇게 슬프거나 우울해보이면 곰인형탈을 대신쓰고 묘기라도 부릴지 모를 수준으로 푹 빠져버린거같다..

"그래? 다행이다.. 후후 그러면 코코로가 긴장하지 않고 즐길 수 있을때까지 앞으로도 자주 같이 놀러나가자. 앗! 그러고보니 그러면 내가 코코로의 첫번째 친구인거야? 기쁜데~."

싱글싱글 웃고 있는 미사키가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영화관으로 향한다.
처음의 친구라는 말에 가슴이 욱씬 상했다.

절대 내가 생각하는 좋아해와는 다른 감정이라고 이런식으로 확신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심지어 상대는 내가 어떤 기분인지도 모르고 순수하게 애정을 담아 말한것뿐인데 이렇게 아프다니.

혹시 만약에 내가 고백을 했다가 그 곤란한 웃는 얼굴로 거절당해버리면 나라는 존재가 산산이 부서져버리지 않는가 걱정되었다.

"그런데 코코로는 호러영화 아무렇지도 않은거야? 이거 꽤 무섭다는 평이 있는데.."

영화의 티켓을 끊어놓고 팝콘과 음료를 사들고서 미사키가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내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어도 상대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결국 허탈해져서 영화의 포스터를 살펴본다.

가까운 미사키의 얼굴과 하구미가 말하기로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향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주체할 수 없이 심장이 뛰는 향기, 평소와는 다른 복장등이 머릿속을 꽉 채워서 인기있다는 말에 대충 그럼 그걸 보자고 해버렸는데 호러영화였나보다.

하지만 어차피 아까 가게에서도 그랬듯이 맛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온통 미사키에게 가버릴거라고 한심할 정도로 자각하고 있는 나에게는 영화내용이 기억에 남기라도 하면 다행일것이다.

뭐, 영화가 끝나고 미사키가 감상을 말할때 맞장구를 칠 수 있을 정도로 내용을 알아두지 않으면 또 슬프게 할테니까 신경써서 봐두도록 해야지.

"영화니까 다 가짜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무섭지는 않을것 같은데. 혼자서 본다면 모를까 인기가 많다면 상영관 안에 다른 사람들도 한가득 있을거잖아?"

순간 실수했다고 깨달았다.
영화를 같이 보러 온 사람한테 다 가짜라느니 하는 말을 하다니 기대하고 있는 사람한테는 매우 무례한 발언일텐데 미사키에게는 무언가 무심코 생각한것을 여과없이 말해버리는 일이 있어서 곤란했다.

말실수를 해버린걸 알자마자 미사키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다.
슬퍼하거나 실망한 얼굴을 봐버리면 사과의 말을 하기도 전에 죄책감에 입을 열수도 없을거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미사키가 나에게 실망하는게 더 무서웠으니까 눈을 꽉 감고 사과하려고 했다.

"미..미안!"

"그렇구나 그런 방법도 있네! 코코로는 대단해."

어라..?
미사키는 실망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담은 반짝반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양손에 음료와 팝콘을 들고있지 않았다면 미셸일때와 같이 달려들어 포옹할 기세로 웃는 얼굴이다.

"사실 말하지 않았지만 호러영화 좋아하긴 하는데 무섭긴하거든.. 좋아하는데 무서워하다니 조금 바보같은가?"

곤란한 얼굴로 웃는 미사키는 내가 걱정했던거랑 달리 기분이 좋아보였다.

"좋아하면 상관없지 않아? 아니, 오히려 호러영화니까 그게 더 맞는 즐기는 방법인거 같은데."

그보다 호러영화가 무섭다니 꽤 귀여운 정보를 얻은것 같았다.

자신감이 좀 부족한걸 빼면 미사키는 무언가 약점이 없다는 느낌이었는데 고수풀이 들어간 음식은 싫어한다던가 호러영화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새로 알수있어서 그것만으로 즐거워졌다.

..내가 모르는 미사키와 친한 누군가의 존재를 알게된 것은 그다지 기분좋은 일은 아니지만 고백을 할 자신도 없는 사람이 질투해도 아무 의미도 없겠지.

"혹시 내가 이 영화가 어떻냐고 물어봐서 그냥 보기로 한거야? 코코로 영화에 별로 관심있어보이지 않는걸."

영화 상영시간이 10분 남았을때 조용했던 미사키가 말했다.
기운이 없어보이는 작은 목소리였다.

어째서 그렇게 하나하나 남의 기분에 따라서 본인까지 우울해하는걸까.
마치 우리가 특별한 사이라도 되는것처럼 착각하게 될것같지만 미사키는 누구라도 웃는 얼굴로 만들고 싶으니까 상대가 즐겁기를 바라는것 뿐이겠지.

하지만 내가 아니였다면 이런 미사키를 탓하는 감정은 커녕 미사키가 바라는대로 즐겁게 오늘을 즐겼을테니까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코코로가 괜찮다면 다음에는 코코로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자."

"엇.. 상관은 없는데.."

"그렇다면 이번엔 갑자기 정하지말고 미리 조사해야겠는걸. 영화말고는 뭐가 좋아? 카논씨는 수족관을 좋아하고 하구미랑은 소프트볼을 해보고싶고.. 아, 이 인원수로는 안되려나? 카오루씨는 연극을 보고싶어 할거같은데.. 코코로는 뭐가 좋아?"

다시 두명이서 놀러가는 약속을 하는건가 기대한 내가 잘못한걸까.
이건 누구라도 조금 오해할거같은 발언이 아닐까?

하나하나 기대하고 실망하는 나에게 더 배려해줬으면 한다.
하지만 하로하피의 모두를 소중히 생각하는건 알고있던 일이고 즐거운걸 찾는걸 좋아한다는것도 알고 있으니까 거절 할 마음이 들리가 없다.

"내가 가고 싶은곳도 좋지만 미사키가 가고 싶은 곳도 확실히 생각해둬. 나 말고도 모두 물어보려고 할걸? 이제 모두 미사키가 타인만 신경쓰는거 가만 둘 생각없으니까."

"아~. 그렇네.. 모두가 가고 싶은곳에 나도 가고 싶다는 안되겠지.."

하로하피의 밴드활동은 억지인 강행수단을 잔뜩 쓰는 주제에 이렇게 미사키가 즐거워질 수 있는걸 물으면 조용해져버린다.

아마 관련된 대화가 없었다면 고수풀이 들어간 요리라도 아무렇지 않은척 먹어버려서 싫어하는지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가고 싶은 곳은 모르겠는데 양모펠트를 좋아하니까 나중에 같이 해볼래? 어렵지 않은 간단한것도 많으니까."

잘못하면 듣지 못하고 지나쳐버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미사키가 수줍게 말했다.
하는 행동은 과격하기 그지없는데 이렇게 미사키에 대해서 물어보면 사실은 매우 섬세한 성격인것 같았다.

세상의 모두를 웃는얼굴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는 주제에 이렇게 본인이 웃는얼굴이 되는건 수줍어한다니 반칙급으로 귀여워서 마주볼수가 없다.

그런데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성격의 사람이 등에 상처를 입고 자신의 웃는얼굴을 포기할 정도로 한계에 처해있었을까.

미사키는 자신에 대해서는 도통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부러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하로하피의 모두에게도 과거는 묻지 않는다.

인형탈을 벗겨놔도 겹겹이 감싼 껍질에 아직도 모르는부분이 있다는게 속상했다.
그러는 나 자신도 내 사정을 말하진 않으면서..

"나 손재주가 그렇게 좋지 않으니까 잘 알려줘야해."

그래도 지금은 내 한마디에 금새 밝게 웃는 미사키의 얼굴을 보며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꽤 오랜 교제가 될테니까 차근차근 알아가면 언젠가는 나도 고백할 용기가 생기겠지.
Posted by 백오판다
,
이상해.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오쿠사와 미사키는 문득 제 가슴께를 꾹 짓눌렀다. 먹물을 잔뜩 머금은 붓으로 획을 긋기도 전에 도화지에 실수로 한 방울 떨어트린다면 이런 기분일까.

손에 들렸던 까만 봉투가 부스럭거리며 흔들렸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반짝반짝한 날이었을텐데.

아침 일찍 일어나 어머니의 식사준비를 돕고, 동생과 현실적인 소꿉놀이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시간이 남아 고아원의 봉사활동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잃은 카논을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하구미네에 들러 고로케를 한 가득 사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가 마주친 카오루의 연극 상대 연습이 되기도 했다.

미사키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얀 도화지 위에 퍼진 까만 먹이 점점 그 크기를 늘려가 마음을 잠식한다.

약한 호흡곤란에 기침을 하다 목을 꽉 누르고 누구의 집인지 모를 담벼락에 기대었다.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힘이 빠졌다. 무릎을 굽혀 주저앉았다.

" 아. "

추워.

천천히 봄이 끝나가고 초여름에 가까운 계절이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날씨는 피부마저 끈적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뱉어내는 숨은 차가운 겨울의 한기가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목에 점점 더 힘을 주었다. 이대로 더 머물다간,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버릴텐데. 춥다고 해서 손에 들린 것들까지 춥게 만드는 마법을 부리지 못한다.

초코맛 아이스크림을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릴 동생이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가뿐하게 발에 힘을 줘 일어서려던 미사키는 다시 구멍 뚫린 풍선처럼 주저앉았다. 손아귀의 힘도 저절로 풀렸다. 졸렸다 풀어진 목에 컥컥 거렸다.

정말 이상하네, 힘이 나지 않아.

말 그대로 통제할 수 없는 탈력감이었다. 망연히 모자를 푹 눌러써 하늘을 올려다본 미사키는, 가장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었다.

도심의 밝음에 묻혀져가던 별 사이로 가장 눈부신 빛. 별의 이야기에 대해 겉핡기식으로만 아는 미사키는 저게 북두칠성인지, 사실은 지구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인공위성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저 시선이 빼앗겨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양한 색채로 생동감 있게 반짝이던 세상의 모든 것들이 파렛트에 묻은 물감을 씻어내는 것처럼 사라져간다.

색채가 사라진 잿빛세상은 어쩐지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어서 너는 그렇게 재미없는 얼굴을 했던걸까. 그저 의미없는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무덤덤히 익숙해져 가, 기어코 외로운 얼굴을 미사키는 기억한다.

코코로.

...코코로.

" 코코로. "

그 이름엔 이루말할 수 없는 따스함이 감돌았다. 세 음절 안에 세상 모든 색채가 다 들어있었다.
 추위가 걷히고나서야 미사키는 깨달았다.


 나의 영웅, 가장 찬란히 빛나는 북두칠성.


오늘은 당신을 보지 못했구나.

마치 제 스스로가 배터리가 된 기분이었다. 낮동안 모든 걸 방출하다가 시간이 지나 방전되어버리는. 그럼에도 신기하게,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를 받아 무릎을 똑바로 폈다.

봉투 속 아이스크림이 다 녹았다. 내일이면 너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간지럽게 다가왔다.

마음 속에 황금 나비가 있는 것 같았다.




.




츠루마키 코코로는 어쩌면 한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을지도 모른다.

착용자의 좀 더 나은 환경을 위한 인형탈을 만들어 제공하는 건 가벼운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답례로 밥을 사겠다고 했을 때도, 정말 답례 차원이라 생각했기에 바로 긴장을 놓아버릴 수 있었다.

바로라고 해도 사실 약속시간 30분 전까지였지만.

당신은 역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서, 몇 시간이나 색다른 코디에 도전하려던 코코로는 혼자 오버한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고, 평소의 빨간 줄무늬 셔츠와 쇼츠 멜빵이라는 평상복을 택했다.

이 정도면 무난하겠지?

그리고 그런 생각은 약속 장소에 나가는 순간 산산조각났다.

1시인 약속시간 10분 전, 도착한 약속 장소엔 언제부턴가 와있었는지 모를 미사키가 기둥에 기대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단추가 두어개 풀어진 얇은 화이트 셔츠, 긴 기장을 자연스럽게 밀어넣은 청색 핫팬츠 아래로 캐주얼한 스니커즈. 말도 안돼. 여객선 파티의 그녀를 생각하자면 후드티 하나 달랑 걸치고 올 줄 알았는데.

무심코 멈춘 발걸음을 인지했는지, 이쪽을 돌아보는 미사키의 모습이 문득 낯설었다. 눈이 마주치고, 단정히 빗어내린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하얀 얼굴이 말간 웃음을 자아낸다.

" 일찍 왔네, 코코로. "
 
거짓말처럼 생기가 가득 웃음에 담겼다. 몸을 완전히 돌린 미사키의 목에는, 단조로운 검은색 초커가 둘러져 있었다.
조금은, 두꺼운. 이상하게도 그걸 본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악세사리를 꺼려한다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스스로의 심정을 알지 못해, 코코로는 빤히 미사키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복장만으로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어? 심지어 시원하게 맡아지는 워터 향은 그녀를 어른스럽게 보이게 만들었다.
 
" ... ...당신, 누구? "

" 에. "
 
곤란히 눈썹을 찡그린 미사키는 곧게 눈을 맞춰왔다.
 
" 미사키. 오쿠사와 미사키입니다, 코코로씨. "
 
목소리가 낮고 다정한 울림을 선사했다. 털털한 후드를 입고 있을 때도 생각했지만, 오쿠사와 미사키는 꽤 단정한 얼굴이었다. 꾸민 지금에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눈꼬리가 상냥히 휘어 눈이 접히고 눈웃음을 그려냈을 때 코코로는 제 얼굴 가득 퍼지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신, 행색이 나쁘다.
 
" 자, 코코로. 배고프지 않아?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다면 지금 말해줘. "

" ... 배가 고프긴 하지만, 특별히 먹고 싶은 건 없네. "

" 응~ 그럼 알아봐둔 파스타집이 있어. 괜찮아? "
 
괜찮아. 고개를 끄덕인 코코로는 미사키의 자연스러운 에스코트를 따라 나섰다.
 
 


벚꽃잎이 잔뜩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 사이를 나란히 걸어, 붐비는 차도를 건너고, 아직 한산한 음식점들을 지나 멈춘 곳은 목조 인테리어의 양식점.
 
칸막이가 쳐진 창가 구석자리로 안내받아 각각 해물 파스타와 크림 파스타를 시켰다.

얼마 걷지 않은 시간동안 삼켰던 물음들이 목 언저리에서 울렁인다. 마른 목에 물을 한모금 마시고 약간 필사적일 정도로 창밖을 바라보던 코코로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쭉 바라보고 있었던지 금방 눈이 마주쳤다.
 
저를 담아내는 은청색이 기분 좋게 휘어진다. 그 시선 안속에, 하고싶은 말 잔뜩인 얼굴이 있었다.
그 숨겨지지 않는 얼굴에 코코로는 항복한다.
 
 " ... 오늘의 미사키는, 뭔가 굉장히 분위기가 다르네. 옷도 평소 입던거랑 전혀 다르고. 당신은 편안한 옷을 선호한다고 생각했는데. "

이건, 그러니까, 어쩐지, 데이트 같지 않아?

차마 말하지 못한 말이 어색하게 뒷목을 쓰는 미사키를 보고 들어갔다. 자기를 따라 물을 마시는 모습이 묘하게 걸렸다. 긴장하고 있어?

 " 그게, 오늘 코코로와 만나는 걸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더니. 어머니가 그렇게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좀 더 꾸미고 가야하지 않겠니~ 라고. 이 옷도 나름 편안하기도 하고. "

 " 아. "

 " 동생도 멋지게 차려입은 언니를 보고싶다고 해서, 반짝반짝한 얼굴로 바라보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었어. ...혹시, 많이 이상해? "

 " ... 아니, 잘 어울려. 교복이랑 후드만 입은 당신만 봤는데 새로운 당신도 괜찮다고 생각해. "

정말로.
그저 깜빡거리는 시야에 미사키의 손이 목에 두른 초커를 쓸고 지나 책상 위로 내려온 게 들어왔다.

 " 그치만, 그 초커는 정말 의외네. "

 " ... 어쩐지, 하고싶어져서. "

 " 그래도 잘 어울려. "

조금 어색한 몸짓이었다. 뻑뻑하게 굳어있던 몸짓이 풀어져 두 손이 마주 잡는다.

 " 코코로도, 정말 귀여워. "

단정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귓가가 발갛다. 생각보다 목이 얇았고 말라서 쇠골이 두드러졌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이쪽을 향하는 미소는 행복해보이기까지 했다.

당신, 정말 오늘 행색이 나빠.

홧홧히 뜨거운 뺨에 손등을 대었다. 이게 그걸까나. 좋은 얼굴로, 좋은 옷차림으로 좋은 말만 해준다는. 그게, 그러니까, 호스트?

 " 처음엔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가져오셔서 입었는데, 한참 보시더니 몸 좀 함부러 굴리지 말라며 뺏어가셨어. "

 " 어째서? "

 " 우응~, 등쪽에 다친 자국이 있어서 그게 보인걸까 싶지만. "

코코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미사키는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은건지, 그녀답게 안 좋은 이야기는 좋은 분위기를 망친다고 생각하는건지 모르겠다.

아직도 당신은 말하지 않는 게 많구나.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의도치 않은 침묵을 버티고 있을 때, 돌연 미사키가 팔을 뻗어 탁자를 두드리는 손가락 사이로 손을 들이밀었다.

 " 뭐야? "

 " 내 손이 두드리기 더 좋을거야. "

 " 응...? "

 " 탁자보단 부드러울걸. "

사르르, 올라가는 입꼬리와 다정한 장난기를 담은 눈에 그제야 지나가는 농담인 걸 알아챘다.

그게뭐람. 반쯤 쑥쓰러운 기분으로 미사키의 손바닥을 톡톡 쳤다. 얼굴에 기분 좋은 웃음이 번진다. 간지러운지 살착 움츠러 들던 손이 조심스레 제 손가락을 잡아왔다.

 " 이제야 웃어주는구나, 코코로. "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잡아오는 손길엔 아주 약간의 힘이 들어가, 제 손바닥을 느리게 쓸어내는 손끝.

코코로는 어쩐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미사키는 손바닥에 은밀히 단어를 한 자 한 자 쓴다. 무엇을 쓰는지 코코로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저를 향하는 은청색엔 많은 게 들어 있었다.

 " 오늘... 하늘이 아주 맑아. 날씨도 기분 좋은 정도로 따뜻해. 떨어진 벚꽃잎이 예쁘고, 피어난 꽃들이 향기로워. 사람들은 생기가 가득하고, 그들이 짓는 웃음은 마음이 따듯해져. 그렇게 소중한 것들로 가득한 세상은 색색으로 반짝이고 있어. "

그건 어쩌면 모든 노래가락이었나.

 " 그치만 가끔, 정말 가끔 그게 전부 의미가 없어질 때가 있어. 똑같이 모든 게 아름답게 반짝이는데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때가 있었어. 예전엔 그래도 계속 뛰기만 했는데. "

팔을 당겨, 제 손마저 끌고가 오쿠사와 미사키는 그림같은 미소로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손등에 입을 맞췄다. 닿아온 입술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도록 뜨거웠다.

 " 지금은 코코로를 보면 마법같이 모두 괜찮아져. "

고마워.

스러질듯 아주 작았으나 손에 잡힐듯 선명한 음색이었다. 단조로운 말에 진심이 가득 담겼다. 이름모를 감정들에 파묻혀서 이 자리를 서둘러 피하고 싶은데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드러난 피부가 모두 붉어져, 가슴 한쪽이 뜨거웠다. 결국 잡혀있지 않은 손으로 눈가를 가린 코코로는 절로 앓는 소리를 냈다. 당신 진짜 오늘 행색 너무 나쁘단 말야. 시선만 올려 이쪽을 향하는 눈엔 그녀가 말했던 것들이 담겨서 찬란하다.
 
하늘, 날씨, 벚꽃, 화려하게 핀 꽃, 사람들, 웃음, 세상 모든 것. 그 눈은 모든 게 특별하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착각하지마, 츠루마키 코코로.


미사키의 말마따라 츠루마키 코코로의 세상도 어쩌면 그렇게 반짝일 기미가 있는지도 몰랐다.

이런 날에 하늘이 맑은게 기쁘고, 덥지 않은 날씨에 안심하고, 떨어진 벚꽃잎은 꽤 낭만 있었으며 피어난 꽃들의 향은 늦봄에 취하기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부 당신에게서 빌려온 것들. 내것이 아닌 것들은 모두 당신이 있기에 가치를 발휘한다.

그러니까, 착각하지마.

그런 눈으로, 그런 말로, 그런 분위기로 나를 현혹하지 말아줘. 당신에게 내가 특별하다는 암시를 주지마. 잘못해서 오해해, 착각하게 되어버리면 그보다도 부끄러운게 있을까.

친구사이라기엔 조금 과한 스킨십도 모든 색채들이 넘쳐나는 말을 직접 듣는것도 어쩐지 특별 취급 당하는 것도 모두 당신이기 때문에- 로 함축했다.

그러니까, 이건 그저 아무나라도 좋았던거야. 당신을 웃게 만들었다면 그 누구라도 좋았을 허울 좋은 얘기.


똑똑, 하고 웨이트리스가 들어왔다.

칸막이 너머로 그림자가 비춘 순간 화들짝 손을 때버린 코코로는 멀쩡한 척하며 제 앞에 놓이는 크림 파스타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사랑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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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공책님(@null_note)님이 써주셨습니다
Posted by 백오판다
,
평소에 나는 긴장같은건 잘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몇년째 하고 있는 하로하피의 곰인형 DJ도 예전과 달리 유명세를 타서 어디를 가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지만 난처하긴해도 긴장한적은 없고 최근의 우리가 했던 라이브 중 가장 규모가 컸었던 라이브를 하기 직전에도 오히려 카논씨를 진정시키는 여유까지 보였었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손이 덜덜 떨리는지 알 수 없다.

"미사키, 야경이 정말 아름다워! 이런 좋은곳에 데려와주다니 고마워!"

"으응.. 평소에 너에게 받는거에 비하면 이정도쯤은.."

사귀기 시작하고 나서도 코코로의 상식이 무너질것같은 금전감각에는 여전히 놀라는일만으로 조금 잘보이려고 분발해 본 이 장소도 코코로에겐 별거 아니겠지.

커다란 유리창 밖의 야경은 카오루씨가 추천해준대로 환상적이었지만 그 역시도 은은한 조명에 비치는 금사같은 코코로의 머리칼에 비하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성인이 되면서 더욱 요염함을 늘린 지체는 매혹적인 붉은 벨벳에 휩싸여 외국의 피가 섞여서인지 뒤늦게 맞이한 성장기로 이제는 나보다 키도 커서 아직도 나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생각이든다.

"미사키, 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어. 오랜만에 둘만의 데이트인데 다른 생각이라도 하는 거야?"

어느새 창문에 딱 붙어서 밖을 구경하던 코코로가 내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서 볼을 부풀린채로 코코로는 검지손가락만을 내밀어 슥슥 내 미간을 문질러 폈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행동에 어린아이같은 순수함이라던가 귀여움이 묻어나오는것 같았다.

하지만 우선은 심통이 나면 꽤 곤란한 장난을 저지르는 코코로를 달래는게 우선이었다.

특히 이렇게 자신 앞에서 다른것을 생각한 후에는 한계까지 짖궂은 방식으로 한계까지 몰아붙이니까 안그래도 휘둘리는 미사키는 매회 이런때에는 필사적일 수 밖에 없다.

"그냥.. 나는 상당히 솔직하지 못했구나하고 새삼 깨달아서. 과거의 내가 지금 이렇게 너랑 함께 있는 장면을 본다면 분명 부정했을거야."

"그렇네. 하지만 나에겐 지금도 미사키는 상당히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해. 지금도 말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서 이렇게 멋부린 장소를 준비한거겠지?"

싱긋 웃으면서 미간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코끝을 툭 친다.

철저하게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것도 코코로는 이미 전부 알고 그럼에도 전부 괜찮다고 받아들여준다.

하지만 그런 코코로와 몇년을 같이 있으면서 용기를 받아도 좀 더, 조금 더 달라고 강청하니까 코코로에게 나는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어리광쟁이로 보이는걸까.

"..그런 이유가 없는것은 아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에는 무드도 중요하다고 할까.. 최대한 멋진 장소에서 하고 싶었어."

언제 눈치챈지 모를 검은옷의 사람들이 훨씬 대단한 장소도 많이 제안해줬지만 역시 누군가를 의지하면 의미가 없으니까.

아쉬워하는 그녀들에겐 미안하지만 전부 거절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인기있는 장소라서 예약을 차지하는것도 꽤나 곤란했지만 기뻐할 코코로를 생각하며 노력했는데 가혹한 평가를 받아버렸다.
아까부터 긴장해서 떨리는 손이 식은땀으로 차게 식어가는것 같았다.

"흐음-. 미사키가 무슨 말을 해도 어떤것을 하자고해도 안된다거나 못한다거나 하는 말이 아니면 나는 한번도 거절한적이 없는데 어째서 그렇게 겁을 먹는거야?"

"그러니까 더 무서운걸지도.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코코로는 받아들이니까 혹시 그로인해서 코코로가 상처받거나 슬퍼진다고 생각하면 말 한마디조차 너무 무거워서.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코코로에게 용기를 받지 않고 내 힘으로 말하고 싶은거야."

"..미사키가 그렇다고 말하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미사키의 슬픈 얼굴을 보면 가슴이 꾸욱하고 조여서 괴로워져.."

울상이 된 얼굴로 가슴을 한손으로 누르고있는 코코로는 절대 오늘만큼은 웃게만 해주고 싶었던 나에게 치명적인 정신적대미지를 줘서 역시 나는 자격이 없는게 아닐까하난 자책을 되풀이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미사키. 우리 술을 마시자. 술을 마시면 솔직해지거나 좀 더 대담해지잖아? 그렇다면 미사키는 혼자 힘으로 말 할 수 있을거야!"

"엣..? 아, 아니! 그정도로 마시면 좀 곤란해지는데?!"

좋은 생각이 났다고 생각하면 순식간에 실행해버리는 코코로답게 이미 중후한 인상의 웨이터를 호출해서 이곳의 와인셀러를 털어버릴 기세로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여러곳을 물어봐서 제일 적당한 가게였기 때문에 너무 비싼 와인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두명이서 그렇게까지 마실 수는 없다고할지 취할때까지 마시면 오늘까지 노력한게 전부 물거품..
아니 저렇게 즐거워하는 코코로를 봤으니까 조금 호화로운 데이트를 했다고 생각하면 될까..

절반 정도는 목적을 포기해버린 나는 코코로가 멋대로 시킨 와인과 여러가지 칵테일들의 화려한모습에 조금 질려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마실 수 없을텐데 나머지는 전부 어떻게 되는 걸까?

"정말 종류가 많네! 미사키는 어느걸 마셔보고 싶어?"

"나, 그다지 술은 잘몰라서.. 너무 쓴건 싫지만.."

이미 술을 마시자고한 이유는 머릿속에서 사라졌는지 코코로가 쓴건 싫다는 내게 화이트와인을 권유해왔다.

딱히 거절 할 필요도 없으니까 건네받아 한입 마셔보면 달달한맛이 거부감없이 술술 넘어갔다.

평소 가끔씩 마시는 값싼 맥주랑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한 느낌이 어쩐지 술에서조차 급의 차이를 느끼는거 같아서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미사키가 마음에 들어하는것 같아서 다행이야. 좀처럼 술은 마시지 않으니까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까 했는데."

"그러고보면 코코로는 상당히 다른사람이랑 모임에서 마시는편이지. 취해서 돌아오면 달라붙으니까 조금 곤한한데요-."

"어머, 미사키 싫진 않잖아?"

활짝 웃는 표정이 거짓말은 용서하지 않을 분위기를 풍겨서 나는 아무말도 못했다.

술에 취해서 검은옷의 사람들이 데려오는 코코로는 안전의식은 어디갔는지 무서울정도로 걱정되지만 그런 코코로를 보살피는것은 꽤 마음에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물을 주면 후와악 꽃이 피는것 같이 웃어준다던가 안아올려서 옮길때에 목에 팔을 걸어 의지해준다던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을 코코로의 모습을 보면 내가 코코로에게 정말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좀 더 소중히 하고 싶어진다.

"음. 싫진 않은데.. 걸즈 밴드 파티 모임 때에 폭주하는것은 멈추자. 이치가야씨 저번에 좋은 위장약 아냐고 나한테 물어봤으니까."

"그걸 왜 미사키에게 묻는 걸까? 미사키는 의사가 아니잖아."

정말로 모르는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코코로가 다음에 만날때도 자제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이해했다.

미사키는 조용히 아리사의 위건강에 묵념을 했다.

거침없이 술잔을 비우는 코코로는 결코 술에 약한것은 아니다.

하지만 즐거운것을 정말 좋아하는 코코로는 맛있는것도 알코올에 취하는 기분도 좋아하기 때문에 참을 생각을 하지 않을 뿐이다.

정말 자신의 기분에 솔직한것은 부럽지만 자신은 절대 저렇게는 살 수 없겠지.

"그러고보니 미사키가 취한 모습은 한번도 본 적 없는것 같아. 미사키는 술에 강한 걸까?"

"생각해본적 없는데. 그렇게 많이 마셔본적도 없고.."

"미사키의 술주정도 한번 보고 싶은데! 저번에 카오루가 취해서 치짱을 찾는 모습은 정말 귀여웠어요. 미사키, 취해 보지않을래?"

"하아? 취한다는거 일부러 하는 행동은 아니지.."

흥미진진 이쪽을 쳐다보는 코코로에게는 미안하지만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는 미사키에게 취한다는 무방비인 일을 한다는건 어려운 일이었다.

뭐, 내가 술에 취했을때 어떤 주정을 부리는지는 좀 흥미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코코로는 우리가 왜 지금 술을 마시게 됐는지 이유는 기억하고 있을까.

이번에는 붉은 와인의 향을 음미하는중인 코코로가 여길 보고있진 않은지 흘끗 확인하고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반지곽을 만지작거렸다.

건네줄 반지와 생각해둔 프로포즈의 말도 막상 행동에 옮기려면 역시 용기가 나지 않는다.

역시 아직 나는 코코로와 함께가 되는건 이른게 아닌지 침울해져도 이미 코코로의 관심은 다른데도 가버려서 미사키는 괜히 분한 마음에 근처에 있던 술잔을 집어 확인도 하지 않고 벌컥벌컥 들이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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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는 미사키는 수척해져 있었다. 기울이는 잔을 든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일렁이는 붉은 액체 너머로 보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에 마음이 편하지 않아, 저절로 미간이 좁아졌다. 잔에 시선이 쏠린 상대방은 알아차리지 못했겠지, 알아차려도 술이 쓰다하고 넘기면 되는 일이였다.

빙글, 잔을 돌리는 데로 안의 액체는 요동쳤다. 테이블 위에 즐비해있는 병과 잔들을 보며 너무 많이 시켰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다 마시지 않을 거지만 말이다. 잔 끝 모양을 따라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딱히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잘 취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지만 마시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아마 어릴적부터 칵테일이나 샴페인들을 파티가 있을때마다 마셔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가끔 선물로 와인이 들어오기도 하니깐, 술을 마시면 가져다 줄거라 생각하는 고양감은 내게는 즐겁지 않았다. 술을 즐길려고 마시는 사람들을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는 거겠지, 탕, 청명하지도 탁하지도 않은 울림이 컵안에 작에 일렁였다. 울림을 따라 손톱이 잘게 떨린다.

그렇다고해서 술자리는 마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마실 필요가 없는 자리라면 더욱이 거부할 필요는 없다. 사람을 만나는건 싫어하지 않으니깐, 오히려 좋아하니깐,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과 마시다보면 주체를 하지 못해서 날뛰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주로 카스미랑 하구미 일까, 그때마다 챙겨주는 아리사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술을 마셨다는 핑계를 델 수있으니깐...

아, 얼굴에 열이 올라올까 손등을 볼에 데어본다. 생각만으로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인상 쓰다 웃다가 아무래도 제정신은 아닌거 같다. 술기운때문일까, 움직임에 따라 요동치는 액체를 보다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부루퉁한 모습으로 연거푸 술을 거머넣는 미사키가 보였다.

사귀는 동안 미사키가 술을 마시고 취하는걸 본 기억이 없어서 반쯤 농담으로 취해보라고 권했지만...저렇게 마시면 걱정이 된다. 가끔 미사키 집에 가면 부엌 한켠에 찌그러진 은색의 알류미늄 캔을 보면 술을 즐겨 마시지않는 거 같았다. 그런 미사키에게 다양한 술을 알려줄 수 있다는 들뜬 마음에 여러 종류를 시켰다. 지금의 미사키를 보면 맛을 보는게 아니라 억지로 마시고 있는 거 같았다.

정말로 취할 생각인걸까, 마주 앉은 미사키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탁, 천이 깔린 테이블 위에 작은 소음이 생겼다. 연노랑을 띠는 투명한 액체가 잔 안에서 요동쳤다. 지금 미사키는 무슨 생각일까, 눈꺼풀에 가려져있던 청회색의 눈동자가 빛을 받아 반짝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애틋한 시선이 얽혔다.

알 수 없는 울렁임이 느껴져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마주친 시선에 담긴 의문에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이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방금...조금..., 검은 색이 완연한 하늘에 창은 거울이 되어 안을 비추고 있었다. 수많은 빛들이, 동공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시큰한 느낌에 눈꺼풀을 내려 빛을 가렸다. 흐릿한 시야에는 거울 너머가 보였다.

가로등에 만들어진 주황 빛의 길이 보였다. 그 길 주변을 가득채운 건물들과 그 위를 달리는 붉은 차들이 자아내는 모습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이런 곳을 예약할려면 꽤나 힘들었을 텐데, 노력한 흔적이 보여 작게 웃었다. 내가 웃는 모습에 의아한 눈동자가 이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왜 그래?'

'아무것도'

입모양으로 물어보는 것에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금새 다른 곳을 향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창문을 보는 척하며 미사키의 흔적을 쫓았다. 얼핏 한숨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내가 추천한 화이트 와인 외에도 테이블에 놓인 칵테일로 손을 뻗는 게 보였다. 술을 마셔서 얼굴이 붉어졌을 줄 알았는데...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흠...턱을 괴고 자세히 들여다봤다. 숨이 가쁜지 호흡을 고르며 눈을 감는 게 보였다.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괜찮은 걸까ㅡ,

"미사키, 너무 급하게 마시는거 아니야?"

"...어?"

"취하라고 했다고 정말로 취할 생각이였던거야?,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돼"

별 말 없이 고개를 숙여 본인의 손에 들린 분홍색의 액체를 본다. 멍하다, 본인이 얼마나 마신건지 자각하지 못했던 걸까, 살짝 웃었다. 황급히 잔을 내려놓는 손이 보였다.

"아...미안, 나 잠시...자리 좀..."

드륵, 불쾌한 마찰음이 일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녀는 정돈되지 않은 걸음으로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걸까, 금새라도 쓰러질거 같은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검은 옷입은 사람이 따라가는게 보였다. 불편하게 뻗었던 몸을 의자에 묻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빈 잔을 드니, 언제온 것인지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와인을 따라주었다.

빠른 속도로 일정량을 채워진 와인은 잔 안을 배회했다. 손 안에서만 잔을 가지고 놀다 도로 테이블 위에 놓았다. 식어버린 흥미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창문 위에, 미사키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떠올랐다. 문득 그 위로 자는 미사키의 얼굴이 덧씌워졌다.

언제였더라, 술을 마신채로 억지부려 미사키의 집에서 잔적이 있었다. 갈증으로 새벽에 잠이 깼을 때, 옆에 누운 미사키를 바라봤었다. 하얗게 질린 채로 잠든 얼굴은 위태로워보였다. 일이 힘든 걸까... 끙, 소리를 내며 미간을 구겼다. 안좋은 꿈이라도 꾸는 걸까, 좁혀진 미간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사키가 잠에서 깨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톡하고 눌렀다.

미사키 주름생겨, 작게 속삭였다. 잠을 자면서도 들은 건지 주름은 이내 사라졌다. 그 모습에 작게 웃었다. 손가락이 닿은 김에 천천히 미사키의 얼굴을 손끝으로 어루었다. 가끔 이렇게 지친 모습을 볼때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한다는 점도 불만이였다. 하지만 미사키가 일을 하는 걸 내가 막을 수는 없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니깐...

미사키가 나와의 차이에 부담을 느낄때 마다, 그녀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불안감을 느낀 적도 있었다. 콧대를 따라 손가락이 움직였다. 사귀기 전부터 두려움에 본인을 숨겼던 미사키때문일까, 사귄지 오래되었음에도 불안감은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녀도 마찬가지겠지, 그런 그녀에게 반지를 선물 한적있었다. 본인은 원하지 않아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시선이 가끔 내 손에 자리잡은 반지를 쫓는 걸 안다. 손을 잡을 때마다, 반지의 감각에 살짝 웃는 것도 안다. 만날때 마다, 나랑 같이 있는 게 꿈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것도 안다. 참, 그렇게 보면 미사키도 바보다. 괜한 마음에 코를 꾹하고 눌렀다. 작게 오물거리며 불평하는 입에 살짝 웃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위안을 얻는 건 나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너를 싫어할리 없잖아, 답을 바라고 말한건 아니였다. 얼굴을 쓸던 손을 내려 비어있는 미사키의 손을 맞잡았다. 손 안에 퍼지는 체온에 작게 웃음지었다. 손가락을 만지다 느껴지는 이물감에 알 수 없는 만족감이 쏟아났다. 미소지었다. 오늘은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것만 같았다. 아, 이럴때 하는 말이 뭐더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음... 그냥 미사키 생각?"

아... 내 말에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언제 돌아왔던걸까, 민망한지 목을 풀며 앞에 놓인 물을 마시는게 보였다. 아까보다는 혈색이 돌아와있었다. 머리에서 기억 속의 미사키가 지워지지 않아 멍하니 앞에 앉은 미사키를 바라보았다. 미사키도 적은 양을 마신게 아니지만 술이 쎈걸까,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리는게 보였다.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나는 믿고 있다. 미사키가 두려움에 눈을 감고 피하더라도 언젠가는 답을 들고 올거라는 걸, 항상 그렇게 해왔고 그게 미사키를 강하게 만든 다는 걸 알고 있으니깐 말이다. 테이블 위를 방황하던 손가락들이 멈추고 굳게 다물어졌던 입이 열리는 순간이 온다는걸,

"코코로, 할 말이 있는데..."

알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화려한 곳보다도 더 아름다운걸 내게 선사할거라는 걸,

"어머, 드디어 미사키가 말해주는 걸까? 기대되는 걸"

결심에 찬 청회색의 눈동자가 나를 올곧이 바라본다. 울림이 더욱 커져만 간다. ...아, 생각났다. 이럴때 하는 말, 가볍게 입맞추며 속삭였던 말

"나, 오쿠사와 미사키는..."

미사키, 사랑해
.
.
.
너가 마주한 나는 어떻니?


--------

“아…미안, 나 잠시…자리 좀…”

코코로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술을 마시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상당한 양을 마신 듯 얼굴이 뜨겁고 균형을 잡기가 힘들다.
맞지 않는 초점을 두 손가락으로 미간을 눌러 맞추고 코코로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게 최대한 괜찮아 보이도록 걸어 나오려고 했지만 내가 봐도 내 발걸음은 이 사람은 금새라도 쓰러질 것 만 같이 보였다. 발걸음 조차도 내 뜻대로 안되는구나. 그게 괜히 서러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방금 전과는 다른 목적으로 미간을 눌렀다. 평소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데 역시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신 걸까

야경이 아름답다고 유명한 곳이기 때문인지 레스토랑은 한 쪽에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테라스가 존재했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테라스로 통하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의자에 앉아 숨을 내쉬자 속에 고여 있던 열이 입을 통해 밖으로 내보내지는 것 같았다. 새하얀 입김이 공중에 천천히 흩어지다가 강한 바람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알코올에 의해 뜨겁고 멍한 머리가 차가운 바람을 맞고 점점 식혀지는게 느껴졌다. 힘없이 반쯤 감고 있던 눈이 떠지고 알코올에 의해 멈춰 있던 사고가 움직이며 열기에 흐려진 이성이 돌아왔다. 냉정한 사고가 가능해진 나는 머리를 쥐어 잡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뭐하는 거야 오쿠사와 미사키…”

오늘이 어떤 날인데 긴장을 했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이렇게 중요한 날에 과음하고, 코코로를 걱정시키고, 술 깨기 위해 코코로를 혼자 두고 자리를 비우다니. 아, 최악이다.
머리를 쥐고 있던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리고 의자 등받이에 완전히 몸을 맡기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 속에 넣어 둔 정사각형의 반지 케이스가 만져졌다. 눈을 감으며 손에 닿은 반지 케이스를 만지니 이 날을 위해 준비했던 일들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힘들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조언해주는 사람들이,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무엇보다도 나의 말을 들었을 때 기뻐하는 코코로의 모습을 떠올랐기에 힘들어도, 지쳐도, 도망하고 싶어도 버틸 수 있었다.
그래, 무엇을 걱정하고 있던 걸까. 정말이지 나는 아직도 겁쟁이인 모양이다.

“미사키님, 머리를 식히는 것은 좋으나 찬바람이 강합니다. 슬슬 안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비틀거리며 자리를 벗어난 내가 걱정되었던 걸까 어느새 따라와 내 뒤에 자리 잡아 서있던 검은 옷의 사람이 말했다. 솔직히 좀 놀랐다. 따라오고 있다고 느끼지 못 했는데… 아까 전의 나는 정말 많이 취해 있었구나. 과음하고 있는 걸 멈춰준 코코로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게 된 원인도 코코로지만.
크게 심호흡을 하고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자리에서 일어난 몸은 테라스에 오기전과는 다르게 비틀거리지 않았고 초점도 똑바로 맞으며 발걸음도 평소와 같이 반듯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추운 것보다는 코코로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으니까.
테라스에서 돌아오니 홀로 와인을 마시고 있는 코코로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빛의 두 눈은 먼 산을 보는 것처럼 어디에도 시선을 두지않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음… 그냥 미사키 생각?”

의자에 앉으며 묻자 내가 온 것을 눈치챈 코코로가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너는 항상 그렇게 부끄러운 말을 휙휙 내뱉는구나. 알코올에 의한 열과는 다른 열이 올라와 겨우 식혀 놨던 얼굴이 다시 뜨거워지는게 느껴졌다.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꽉 조여 놨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빈 컵을 내려놓고 코코로와 시선을 마주치자 마자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게 마치 처음 레스토랑에 들어왔을 때로 되돌아온 것 같다. 테라스에서 다짐을 했는데도 막상 코코로의 앞에만 서면 이렇게 긴장되고 손을 가만히 놔두는게 불가능 했다.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숨이 막혔다. 깍지를 낀 손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아 무릎에 문지른 뒤 주먹을 꽉 쥐고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놔두고 다시 코코로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고개를 들어보지만 상냥한 황금빛이 보일 때 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린다. 잠깐이지만 보인 부드럽게 웃으며 가만히 나를 보는 코코로의 모습에서 의심 없는 신뢰가 전해져 오는 것 같아 이대로 자리를 피하고 싶어 졌다. 하지만 그래도 피하지 않아 도망가지도 않아. 그렇게 다짐했으니까.

“코코로, 할 말이 있는데….”

아래로 내려가 있던 시선을 올려 겨우 시선을 맞췄다.

“어머, 드디어 미사키가 말해주는 걸까? 기대되는 걸”

기대감에 반짝반짝 빛나는 너의 두 눈. 눈부시고 아름다워 나 같은 사람이 계속 눈을 맞추고 있어도 될까 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봤다. 부드럽게 웃는 표정이 잘 했다고 말한 기분이 들었다.

“나, 오쿠사와 미사키는…”

진심을 전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보고.
어디선가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주머니속을 몰래 확인하고 심호흡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만 해보지도 않았는데 걱정부터 하는 버릇은 여전하고,”

내가 일어난 것에 의해 같이 자리에서 일어난 코코로의 곁으로 한 발자국 내딛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겁먹어 미리 도망가려는 틈을 만드는 겁쟁이지만,”

심장이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다.
마른 침을 삼킨 후 한 박자 쉬고 심호흡.
힘이 풀릴 것 같은 다리에 다시 힘을 주고 한 발자국 내딛었다.

“당신을, 츠루마키 코코로를, 사랑합니다. 당신의 옆에 나란히 서서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을까, 혀를 씹지 않았을까, 말을 정확히 했는지 불안해졌다.
하지만 크게 뜬 눈망울이 나의 불안은 필요 없는 불안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당신과 같은 길을 걸어가는 건 자신에게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 바보같은 사람입니다만”

긴장에 덜덜 떨리는 손을 한 번 꽉 쥐고 한 쪽 무릎을 꿇고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다시 한 번 심호흡. 마른 침을 삼키고 숙여지려는 고개에 힘을 줘 코코로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용기를 주는 너에게
언제나 기다려 주는 너에게
언제나 나를 이끌어주는 너에게
언제나 사랑스러운 너에게 전하고 싶은 말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코코로는 나와 시선을 마주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 말이 없는 코코로에 계속 억누르고 있던 불안이 점점 커졌다. 고개가 점점 내려가고 손이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역시 너무 서두른 걸까.
등 뒤로 식은 땀이 흐르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뭔가 말을 해야

“코코…로…!?

쿵-하고 몸에 충격이 왔다. 한 쪽 무릎을 꿇은 상태라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충격에 의해 손에서 날아간 반지 케이스를 검은 옷의 사람이 서둘러 잡으려는 모습과 시야 끝에 비단같이 흩날리는 금발이 보였다.
딱딱한 바닥에 넘어진 것 때문에 엉덩이는 물론이고 내 몸의 무게를 버틴 양 손도 저릿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것보다 내 품에서 나를 꽉 끌어 안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코코로의 모습이 더 중요했다.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지만 기쁨이 묻어나는 웃음을 지은 상태로 나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고 있다.
커진 불안감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지금은 그 입에서 나올 말이 너무나도 듣고 싶어졌다. 저릿한 손을 들어 한번 주먹을 쥐었다 피고 코코로를 끌어 안았다. 다른 손으로는 눈물을 닦아주고 볼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천천히 코코로가 느낀 걸 말하면 돼. 코코로의 말을 듣고 해석하는 건 내 전문이니까.”

코코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두 손을 모으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 미사키. 나 너무나도 행복한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와. 이건 슬픈 걸까? 하지만 슬프다고 하기에는 계속 원하던 걸 얻었을 때와 같이 세상이 반짝이고 웃음이 나와”
“코코로, 눈물은 기쁠 때도 나오는 거야. 그러니까 코코로는 지금 너무나도 기쁘다고 생각해”
“그렇구나 역시 이건 기쁨이구나! 고마워 미사키! 사랑해!”

꽉 끌어 안아오는 코코로를 나도 끌어안으며 슬슬 올라오려는 입고리를 숨기기 위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코코로, 나 아직 제대로 된 답변을 못 들은 것 같은데”

“어머, 그랬던가?”

“코코로….”

“후후, 농담이야! 미사키, 다시 한 번 더 말해줄래?”

“한 번 더 라니….”

뭐, 괜찮으려나.
전과는 다르게 많이 긴장되지 않았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네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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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합작
초반-백오판다(@tnals1055)
중반-sigma/냐흠 (@ sigma_ow)
후반-가루렌 @garuren_FGO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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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커튼 사이로 비치는 아침햇살에 눈을 뜨니 보이는 별빛을 머금은듯한 머리카락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아서 깜짝 놀란다.
천개가 달린 침대도 조금 싫은 기억이 있는 침대의 기둥이나 고급스런 가구들도 쓸 때마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라고 생각하지만 평생을 이 아가씨에게 잡힌 몸으로써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겠지.

보드라운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서려고 몸을 돌리려는데 가는 팔이 배에 돌려져 다시 침대로 이끌었다.

"코코로 오늘 카논씨랑 하구미, 카오루씨가 오기로 했잖아. 잊어버린건 아니지?"

미국에서 돌아온지 며칠되지 않았지만 하로하피의 활동재개을 위한 라이브의 준비를 시작하기로 했다.
기다려준 팬들이나 걱정시킨 걸즈밴드파티 멤버들을 위해서도 성실히 노력하기로 마음속으로 다짐했는데 리더인 코코로는 오늘 아침을 즐기고 싶으신 모양이다.

스멀스멀 올라온 손이 배를 매만지는것이 심상치않았다.
행복을 주는만큼 배로 돌려주고 싶어하는 코코로가 어제밤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잠든것을 경계했어야 했는데 같이 밤을 샌 만큼 나도 졸린 바람에 눈치채지 못했다.

"후후후. 미사키. 약속은 오후잖아.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지않아?"

순식간에 침대에 푹 깔려버린 태세는 키를 추월당해버린 지금은 코코로인데도 위압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게다가 이글이글 불타는 사자와 같은 맹수의 눈이 이대로 놓칠 마음이 없다는것을 보여주고있었다.

결혼식을 하고 미국에서 같이 동거하는 동안 배려해야 하는 부분과 사양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을 나름 파악한 코코로는 내 적절한 한계선을 정의한 이후로는 상당히 가감이 없어졌다.
지금조차 안된다고 말리기는 하지만 정맣 싫은 기분은 아니란걸 알면서 하는것이니까 이길 수가 없다.

"그래도 연습이 있으니까..읏.. 적당히 하고 끝내야해."

말하는 도중에도 집요하게 배를 문지르는 손이 얄미웠다.
아무래도 대학생이 된 후 운동이나 아르바이트, 여행과 같은 액티브한 활동을 많이해서인지 단련이 된 몸이 코코로의 기호에 맞았는지 이런때가 아니라도 스킨쉽은 많은 편이었다.
그래도 감질날 정도로 계속 배만 만지작되는건 처음에 거절하려던 말에 삐졌던걸까.

"언제나 내가 먼저 지쳐서 잠들때마다 조금 치사하다는 기분이 들어. 미사키한테 내가 처음이 아니란게 기분이 나쁘다는 이 느낌은 뭘까? 무언가 매우.. 가슴이 조여들고.. 미사키를 꽁꽁 묶어버리고 싶어져."

"윽.."

귓가에 가까이 다가간 코코로가 귓불을 핥더니 그대로 고개를 내려서 어깨를 콱 물었다.
꽤 힘을 담아서 물었는지 피부가 조금 까진것 같았다.
게다가 그 부분을 코코로가 혀로 핥아서 쓰라림이 직통으로 느껴졌다.

내가 코코로나 하로하피를 두고 떠났던것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지 이런식으로 코코로가 모르는 나랑 떨어져있던 사이의 영향이 수면으로 떠오르면 이렇게 소유욕을 나타냈다.
하지만 내가 코코로에게 필요로해진다는 이 느낌을 나도 싫어하지는 않아서 나도 그런 코코로의 등에 팔을 돌려서 꽉 안아줬다.

어쩌면 이런것을 다른 사람은 삐뚤어진 관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서로가 만족하면 된것이 아닐까.

"이런 기분이 질투라는것은 알고 있는데. 그래도 생각하는것을 멈출 수가 없어. 그런데 또 다시 그때처럼 내가 미사키를 묶어버리면 도망칠지도 모르니까 할 수 없어.. 어떻게 하면 좋은걸까. 미사키는 방법을 알고있어?"

답이 없는 질문에 방법을 생각하는게 항상 내가 하는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좋아하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소중하고 언제까지나 함께 하고 싶지만 미래는 모르니까.

그러니까 나는 그런 코코로를 조금이라도 안심하게하기 위해서 내 사랑을 전한다.
겉으로는 내키지않는척 하던 내가 갑자기 솔선해서 키스를 하니 코코로는 놀란듯 굳었지만 곧 어울려왔다.
이어진 은실 너머로 아직 전희일 뿐인데도 포만감에 가득찬 얼굴을 하고 있는 코코로를 보니 벌써 고민따위는 날아간것같았다.

"역시 미사키는 나만의 마법사네. 일순간으로 전부 안좋은 기분이 날라가버렸어. 미사키라면 마음만 먹으면 바로 세상의 모두를 웃는 얼굴로 만들 수 있는게 아닐까?"

"아-. 이것은 사랑하는 사이 밖에.. 크흠..그..그러니까 코코로에게 밖에 못쓰는 마법이니까. 세상을 웃는 얼굴로 만드는건 하로하피에서 하도록 하자."

난처한 나머지 돌렸던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향하자 전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었던건지 도리어 내 말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이런 권모술수에 능해진 코코로는 가끔 자신이 원하는 말을 듣기 위해서 이런식으로 나를 유도할때가 있었다.

단순히 사랑한다는 말에서부터 너밖에 없다는 말까지 예전이라면 절대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을 깊은 속까지 다 웃는 얼굴로 꺼내버리는 코코로가 아니라면 나는 이런 낯간지러운 말은 전할 수 없었겠지.

"나도 미사키가 그 마법을 다른 사람에게 쓰는건 싫으니까 어쩔 수 없네! 그래도 하로하피의 모두라면 마법같은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세상을 웃는 얼굴로 만들 수 있을테니까."

만족했는지 멈춰있던 손이 스르륵 움직임을 재개한다.
결국 듣고 싶었던건 이미 기억도 안나는 얼굴모를 누군가를 견제한거겠지.

보일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진한 키스마크를 남기는것은 좀 봐줬으면 하지만 말려도 듣지 않을것을 아니까 조금이라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하고 싶어서 코코로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무리 내가 말로 안심시키려고 해도 코코로 스스로가 납득하지 않으면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는 걸까.

어떻게하면 남아버린 상처자국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미국에 가서 나를 걱정해주던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난 이후에 바로 코코로와 함께 할 수 있는 환경을 정돈했었다.

일단 혼자 살던 방에서 이사할 집을 찾는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연하다는듯 짐만 가지고 오라는 코코로의 말에 따라간곳은 일본의 츠루마키저택과 비슷할 정도로 큰 저택이 있는데다가 이미 내 방까지 마련되어서 들어가 살기만 하면 되게끔 준비되어있었다.

"미사키, 어때? 마음에 들어? 아빠가 준비해준 집이야. 여기 미사키에게 전해달라는 편지도 있어."

검은옷의 사람이 말한대로 코코로의 아버지는 내가 코코로의 옆에 있는데에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내가 본 코코로도 내가 없었을때의 코코로보다 훨씬 나아보였던 상태였는지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랐었으니까.

어디선가 지켜봤을 검은옷의 사람이 전해준걸까?
편지에는 결혼은 어디에서 하고 싶은지같은 이미 결혼하는 사실 자체는 정해진 모양이다.
불만은 없지만 억울한 기분은 어디에서 풀어야할지..

"일본은 법적으로 무리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허가된 곳도 많으니까 문제없어. 하지만 그러려면 준비가 필요하니까 미리 정해줄 필요가 있는 모양이라 바로는 할 수 없다고해서 조금 아쉬워."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래도 다른 사람들도 초대하려면 그게 사정이 더 좋지 않을까? 카논씨나 카오루씨의 휴일이라던지 하구미도 대학생이고.. 코코로도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거잖아."

이치가야씨나 토야마씨는 같은 대학이라니까 이치가야씨한테 물어봐두면 되려나.
이번에 신세를 진 다른 밴드들에도 권유해보고 싶지만 로젤리아나 파스파레는 안올지도 모르겠네..

누구를 초대할지 코코로가 즐거워 할 만한 이벤트를 넣을지 아니면 진지한 약속을 나누는 장소에서 그건은 NG가 아닌지 고민하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코코로가 빤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아. 우리 가족도 딱히 거부감은 없는거 같으니까 결혼식에는 와줄거같아. 조금 놀라시긴했지만 일본에 돌아올거라는데에 기쁘신 모양이라.."

"놀랐어. 미사키라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다든가해서 둘만으로 결혼식을 하자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일에서 코코로는 놀라고 있었다.

"어째서? 코코로는 별로 알려지고 싶지 않은거야?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가족은..으억"

"아니. 미사키 너무 좋아-!"

달려들어 안기는 코코로를 넘어지지 않게 마주 안아주고 한숨을 쉰다.
빈도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돌연 뛰어들어 안기는 코코로가 다치지는 않을지 항상 긴장한다.

게다가 지금은..그 사귀는 사이기도 하고.. 조금은 의식하는 이쪽을 배려해주기를 바란다.

"미사키도 모두에게 우리 사이를 알리고 싶어 해 줄줄은 몰랐어. 하지만 나는 미사키가 나와 특별한 사이라고 모두가 알아줬으면 했으니까 어떻게 말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거든. 미사키가 싫어하는 방법은 이제 쓰고 싶지 않으니까.."

"아-. 확실히 마음이 알던 나라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네. 그때는 주위를 너무 신경써서 솔직하지 못했으니까. 지금도 아예 그렇지 않는가 하면 다르겠지만.. 그래도 나도 보통으로 코코로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와 특별한 사이인것을 알리고 싶은 기분 정도는 있으니까."

"같은 마음이라 기뻐! 으음.. 하지만 곤란하네. 자꾸 자꾸 즐거운 기분이 흘러나오는데 이대로라면 결혼식에서 모두 들려줄 수 없는 양이 되어버릴거같아."

"그렇다면 나머지는 너와 나 둘이서 듣자. 역시 전부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도 무언가 아까운 기분이 들거든."

같은 집으로 향하면서 밝은 얼굴로 흐르는 콧노래를 이번은 녹음하지 않고 내 머릿속에 저장한다.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않는 코코로와 나만의 감정이 담긴 노래정도는 둘만 간직해도 되지 않을까.

행복해져서 저절로 웃는 얼굴이 되는 파격적인 효과의 마법이지만 누구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아져서 코코로에게는 너도 마법을 부릴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너무나도 다른 우리가 항상 마주보고 있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었다.
일단 사귀기 시작하자마자 탐내는건 너무 그런 목적인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에 어차피 당장이라도 결혼으로 골인할 생각인 코코로를 보면 그때까지 기다릴까 생각했었다.

물론 즐거운거 아주 좋아를 표명하고 다니는 코코로에게 그런 미적지근한 기피는 통할리가 없어서 새로운 보금자리에 이사를 끝낸 새벽에 굿나잇 키스를 하자마자 침대에 눕혀졌다.
진짜 겨우 도착했다-. 하고 이제 자는 일만 남았다고 방심한 사이 일어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너무나도 가까운 코코로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 할 수 밖에 없었다.

"미사키 굿나잇 키스도 귀여워서 좋지만 좀 더 많은걸 원하는건 욕심인걸까?"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당당한 얼굴로 허락을 구할 생각도 없으면서 일단 의견을 물어본다는 느낌이 견딜 수 없다.
그래도 이것이 코코로 나름의 최대한 배려한 행동인것도 알고 침대에 쓰러진 순간 내 머리를 받히고 있는 손은 아마 혹시라도 내가 다치지 않을까 생각한 행동이겠지.

그리고 이때 나는 코코로에게 일체 그러한 경험은 없다는걸 알고 있었으니까 많은거라고 해도 좀 더 자잘한 여러번의 키스라던가 뭐 그런 종류의 애정의 교류같은 스킨쉽이라도 생각해버렸다.
말하자면 하나도 티가 나지 않지만 처음으로 하는 관계에 직접 권유를 한 긴장하고있던 코코로에게 실컷 기대만 하게 하고 잠들어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편견이란걸 알아도 코코로가 직접 그러한 일을 하자고 말한다는걸 떠올리지도 못했던 내가 그때 코코로가 얼마나 상심했는지도 물론 알리가 없었다.

"아! 얼굴을 공개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니 이제 가면은 쓰지 않는가 보구나. 그런데.. 처음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러 왔을때 봤던 얼굴과는 한참 다른 분위기인걸. 돌아가서 좋은 일이 있었나보군."

오랜만의 아르바이트에 나는 가면을 쓰고 가지 않았다.
미카엘과 미셸은 아쉽지만 이제 나에게는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약한 겁쟁이인 나를 위해서 털의 빛이 바래도록 노력해준 미셸과 던져 날라가서 산산조각이 된 도피의 증거인 미카엘은 이제 편안히 쉬어주기로 했다.

성대하게 장례식을 하려는 코코로를 막는것은 조금 식은땀이 날정도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또 다른 나라고까지 생각했던 인형옷과 가면이긴 하지만 장례식은 조금 다른것 같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은게 아니라 아직도 어딘가에서는 세상을 웃는 얼굴로 만들기 위해서 열심히 돕고 있을거라고 생각해버렸기 때문이다.

"네. 뭐.. 그래서 말인데요. 아르바이트를 올해까지만 하고 그만둬야 할 것 같아서요. 계속 일해줄 수 없는가 하는 제안은 고마웠지만요.."

"아아.. 어차피 차일걸 알고 한 제안이니까. 그도그럴게 너 처음이랑은 완전히 달라졌잖아? 마지막보루같은 얼굴을 하고 왔을때는 여기서 영원히 묻혀버리고 싶은것 같았지만 최근의 너는 다시 날아오를 자리를 찾는 날개의 상처가 나아가는 새 같았어. 떠날걸 알고있었지."

유쾌하게 그렇게 말하고는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악수를 나눴다.
아직 올해가 지나가기에는 한참남았는데 농담 삼은 악수를 나눈 후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도망친 장소에서 살 방법으로 미련이 남았던 DJ를 하기 위해서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하려고해도 수상한 곰탈을 쓰고 디제잉을 한다고 말하면 번번히 퇴짜를 당했었다.
그럴때 한번 해보라고 기회를 준 사람이 이 매니저였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때는 저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거든요. 모든걸 다 버렸다고.. 그래도 잊어버리기는 싫었으니까 생활비를 번다고 핑계를 붙여서 찾아다녔는데 여기가 아니었으면 결국 그만뒀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랬으면 이런 행복한 결말은 맞이 할 수 없었을것이다.
브레멘에 향하는 여정을 계속하면서 소중한 동료와 특멸한 사람도 함께하는 옛날이야기가 현실이 될줄은 그 당시에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미사키! 짐도 다 정리해버려서 구경하러 와버렸어!"

"으앗..! 코코로 뒤에서 갑자기 달려들면 위험하다고 했잖아.. 아, 매니저님 이 아이는 코코로라고.."

"아, 찾으러간다던 소중한게 이 분이셨군. 하하하 너 아주 잡혀살거 같은데?"

무언가 수상한 기류가 코코로와 매니저의 사이에서 흘렀다.
어디서 만난적이라도 있는 걸까?
나중에 한번 코코로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들고있던 헤드폰을 걸치고 일을 하러 디제잉기기 앞에 선다.

"그럼 코코로 지루하면 먼저 집에 가도 되니까. 나는 일하고 올게."

"기다릴게! 미사키의 디제잉 기대하고 있으니까 질릴리가 없잖아?"

방긋 웃는 코코로를 혼자 두고가기에는 불안하지만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검은옷의 사람이라거나 매니저님도 신경써주려는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하고 가보라는 손짓을 하였다.
이래저래 사람들에게 참견하길 좋아하는 매니저니까 이상한걸 물어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코코로에게 다가오는 다른 사람들을 막아줄테니까 안심했다.

성인이 된 코코로는 누가 봐도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비율 좋은 몸매에 프로의 손질이 미치지 않은 부분이 없는 지체에 아름다운 샴페인 골드의 머리카락과 빛나는 금안까지 마치 신이 빚어낸 걸작같으니까.
소시민인 나는 손대기를 주저하지만 이런 장소엔 절벽위는 커녕 하늘위의 별이라도 더럽히기를 원하는 무리도 있으니까.

"그러면 갔다 올테니까 기다려줘. 같이 집에 가자."

"응! 미가키도 일 노력해!"

솔직하게 기다려달라고 말한 나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는 코코로를 뒤로하고 DJ부스에 들어간다.
처음으로 일 하는 모습을 보이는거니까 무언가 좀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눈치채고 부끄러워져서 뜨거워진 얼굴을 손으로 덮어 가린다.

"완전히 팔불출이 되버렸잖아.. 하아. 뭐 원래부터 코코로가 하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든 해내려고 하는것부터 이미 구제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빠져있던거겠지."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서조차 지키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자기애보다 깊이 타인을 사랑하다니 코코로를 만나기 전의 자신이라면 지금의 나를 보고 한심하다거나 이렇게 변하는걸 무서워할지도 몰랐다.

밑에서 올려다보게끔 위층에 설치된 DJ부스는 아래의 상황이 전부 보여서 텐션조절을 하기에 유용하다.
저 밑에서 코코로가 한손으로는 어느새 바텐더에게 받았는지 칵테일잔을 들고 한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그것만으로 오랜만에 이 자리에 선대다가 여기서는 처음으로 미카엘의 가면을 벗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어깨근육이 풀리니까 신기했다.

"자아, 그럼 첫번째 곡을 시작해볼까?"

이빨이 삐죽삐죽한 곰가면을 쓰지 않은 여자아이가 미카엘의 목소리로 시작을 알리자 사람들이 보내던 의혹의 시선이 내 손 아래서 이뤄지는 현란한 스크래치에 금새 환호성을 지르며 미카엘을 연호한다.
나도 덩달아 들뜨는 감정에 왠지 오늘은 즐거운곡만 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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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키는 내가 얼마나 심한짓을 했는지 들려주고 싶었던걸까?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감정이 담긴 노래에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자책이 담겨있었다.
잘못한것은 나인데. 어째서 그렇게 스스로에게 채찍을 치는지 이해 할 수 없다.

"이런 공주님 주인공은 늦게 등장한다지만 오지 않는줄 알고 마중을 나갈뻔 했군. 손수건 필요하니?"

화려함 가면을 쓴 괴도 하로하피.. 아니, 이제와서 속아줄 필요는 없으니까.
가면을 쓴 카오루가 나타났다.

"필요없어. 그보다 공주님의 제안을 걷어찬 괴도씨는 여기에 무슨 볼일로?"

카논 다음으로 찾아간 카오루는 하로하피를 부활시키자는 이야기에는 기뻐했지만 미셸도 다시 돌아올거라는 말에 표정을 굳히고 바로 거절당했었다.
분명 카오루도 미셸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이 마음에 안들었던걸까.

"무대를 내려가 역할을 벗은 연기자에게 연기하기를 강요하는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지. 끝난 역할을 붙잡아 다음의 연기에 영향을 주는것도 그리 좋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미사키에게 미셸을 다시 덮어씌우는게 싫었다는거야? 카오루도 미셸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미셸은 아직도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미사키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서가지 붙잡고 싶지는 않으니까. 너무 오래 의지하기만 했으니 이번에는 내가 도움이 되려고 생각한거야."

돌연 왕자님같은 말투를 벗어던지고 이쪽을 바라보는 카오루는 가면으로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어떤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것 같았다.

"왕자역할은 그만둔지 한참 되었어. 더이상 나에게 가면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코코로 인정해. 모두가 과거에 돌아가기엔 이미 많이 변해버렸다는걸."

"어째서? 다들 그렇게 하로하피를 그리워했는데. 미사키가 떠났다는걸 알았을때는 슬퍼하면서 찾으러 다녔는데. 왜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을 포기하라는거야?"

"포기하라는게 아니야. 미사키를 믿으라는거지. 미사키가 코코로와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을 믿어줘. 미사키는 떠나고 싶어서 떠난게 아니니까 그런 억지스런 방법이 아니라도 코코로와 함께 있을거야."

아무 확증도 없는 꿈같은 이야기를 하는 카오루는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것 같았다.
하지만 카오루는 카페에서의 미사키가 나와 함께하지 못하는 수많은 이유를 울면서 털어놓던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저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반짝반짝을 가르쳐준다던 미사키가 들려준 곡은 나로 인해서 상처받아 자책하는 스스로의 모습.. 도저히 내 옆에 남아줄거라고 생각할 수 없다.

"미사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듣지도 않은 카오루는 모르잖아. 미사키는 여전히 겁이 많고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 내 생각을 강요하는것 말고는 소통하는 방법을 몰라. 아직도 가면 속에 숨어서 설득하려는 카오루와 같지."

작사와 작곡을 하는 실력은 전에 비해서 늘었더라도, 그것을 자발적으로 하게 됐더라도 여전히 관중의 앞에서는 가면을 쓰는 미사키와 상대의 사정보다 옆에 있고 싶은 기분이 앞서서 수갑을 채워 가둔 나.

시간이 지났어도 바뀌지 않은 부분이 똑같은 결말을 부를까봐 무서웠다.

"흠.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이런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특정하려고 한다면 연기자에게 언제까지나 속을 수 밖에 없어. 코코로는 특별함을 알아버려 잃는게 두려워진 나머지 상대의 진심을 보는 능력은 잃어버렸구나."

음악이 절정에 치다르고 괴도 하로하피는 스스로의 망토를 펄럭여 눈 앞을 가린다.
슬쩍 망토를 들어올리고 있는 손의 반대쪽의 손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화려한 괴도의 가면을 벗는다.

"처음부터 이 괴도의 가면에 의지 할 생각은 없었어. 옛날의 코코로라면 알아챘을지도 모르겠는 단순한 연기. 기사님의 활약을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한 광대의 놀음이지. 우리는 이제.. 과거에 남아있을 수는 없어."

손을 휙 내림과 동시에 걷히는 망토자락 너머로 어느새 끝난 노랫소리를 알아챔과 동시에 미카엘의 가면을 벗어던진 미사키와 시선이 마주쳤다.

떠나버린 미사키를 다시 찾아냈을때 형태는 다르지만 너도 나와 같이 예전의 우리의 사이를 그리워한다고 생각하게 했던 마지막 고리가 부수어졌다.
미사키는 이미 과거의 나와 어떤 연결도 가지지 않게 되었다.

"어째서.. 미사키도 웃어주게 되었었잖아. 소중한게 아니었어?"

눈물이 한방울씩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미사키를 다시 옆으로 데리고 오도록 노력해왔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이제 미사키에게 나는 필요없는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떠돈다.
그리고 사실 미사키가 떠났던것은 전부 나에게서, 미셸에게서, 하로하피에서 벗어나고 싶었던게 아닐까하고 생각하면 울음을 멈출수가 없다.

"..기사님에게 혼나겠군. 코코로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르겠지만. 서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으니까. 그때는 그러지 못했지만 지금의 코코로는 듣고 싶은거지? 미사키가 왜 떠났고 어째서 그대로 평온한 관계에 머물지 않았는지. 그렇다면 외면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도록하자."

이곳을 달려나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도망칠 힘도 남지 않아서 그대로 털썩 자리에 앉아버렸다.
어차피 도망가도 그곳에 미사키가 없다면 아무것도 색을 가지지않은 회색빛의 풍경만이 펼쳐질테니 적어도 남은 짧은 시간만큼은 더 미사키의 모습을 눈에 담으려고 했다.

조명 아래의 미사키는 긴장에 떨리고있지만 결심에 굳은 눈은 겨울하늘처럼 맑게 이쪽을 보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 잊어버리는것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기분이 전해져왔다.




가면을 벗은 얼굴에 닿는 공기가 열을 식혀준다.
관중들의 시선이 직접적으로 느껴져서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처음으로 아무것도 덮어쓰지 않고 올라간 무대위에서 이 넓은 공간에 나 혼자만 있는거같은 기분은 조금 쓸쓸하지만 후련했다.

아직도 나에게서 시선을 떼어놓지 못하는 코코로는 어딘가 상처받은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 아직 서 있다.

"안녕하세요. 아무 가면도 인형탈도 쓰지 않고 무대 위에 서는건 처음 있는 일이라 떨리네요. 미셸이자 미카엘인 오쿠사와 미사키라고 합니다."

이때까지 한번도 밝혀지지 않았던 미셸 속의 사람이 공개된것은 꽤 충격적인 일이었는지 미셸의 이름이 혼란스러운 관중 속에서 몇번씩 튀어나온다.
역시 아직도 미셸은 사랑받고 있었던거 같다.

"언제나 모두의 미셸이었지만 죄송합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서 스스로를 들어낸것은 이번 곡은 오직 단 한사람을 위해서 만든 노래이기 때문이에요. 미셸이나 미카엘로써가 아니라 오쿠사와 미사키가 츠루마키 코코로에게 전하고 싶은 감정을 담은 노래입니다."

의외로 시원스럽게 나온 말들에 덤덤하게 움직이는 자신이 믿을 수가 없었다.
줄곧 고등학교때부터 어제까지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얼굴을 들어내고 무대위에 서는 행동을 할 용기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나보다 더 겁을 먹은 코코로의 얼굴을 보면 이상하게 망설임없이 행동 할 수 있었다.

코코로는 본인의 이름이 내 입에서 나올줄은 상상도 못했는지 더더욱 움츠러들었다.
과거의 코코로와 과거의 내가 지금 이 광경을 봤다면 믿을 수 없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와버렸다.
나와 코코로가 바뀌어버렸다면 이곡으로 코코로는 웃는 얼굴을 되찾을 수 밖에 없을테니까.

아무런 꾸밈도 없이 내가 보고 느낀것들의 아름다움을 서술하는듯한 노래는 직전의 노래를 들은 후라면 놀랄 정도로 같은 사람의 노래치고는 담겨있는 감정이 명확히 달랐다.

지치고 지쳐서 그래도 사랑하기에 널 향한 원망도 나 자신에게 돌려 자학하는 비참한 감정과 달리 세상을 여행하며 모든것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노래는 그럼에도 옆에 네가 없다는 그리움과 이 모두와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의 사랑을 네게서 느낀다는 내용이 담겨져있어서 내 감정을 가감없이 상대에게 전하는 러브송이었다.

줄곧 이 노래를 전할 기회는 영원히 없을거라고 생각했지만, 묻어서 잊힐때까지 꺼내려고 했지만 코코로가 웃는얼굴이 되는데 필요하다면 부끄러워도 말해야한다고 이번만큼은 내가 용기를 내야한다고 다짐했다.
일생일대의 내 전부를 담은 사랑의 세레나데에 드디어 말 할 수 있었다는 충족감에 가슴이 벅찼다.

화려한 음도 기교도 없는 노래였지만 오늘 라이브에서 제일 큰 박수를 받고 앵콜요청을 받았지만 급히 사과의 말을 남긴 후에 자리를 떠났다.

내가 라이브를 한 이유인 코코로를 만나기 위해서 달렸다.
내 안에서 제일 반짝반짝한 소중한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숨이 차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코코로가 이 노래를 듣고 이 자리에 남아있지 않을거라고 나는 이미 알고있었다.
옛날의 겁쟁이인 내가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때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한 기분도 믿을 수 없어서 도망쳐버리고는 한다.
혹시 이게 진실이 아니라던가 잃을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애초에 가지는걸 두려워해버리니까.

나도 그랬으니까 알수있었다.
몇년을 떨어져 지내고서야 너도 나와 같이 두려움이라던가 걱정, 후회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걸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나도 과거의 너처럼 무모함과 용기, 상대를 웃는 얼굴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걸 깨달았다.

네가 모르겠다면 전부 가르쳐줄게 그러니까 너도 내가 모르는걸 가르쳐줘.
지금이라면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어떠한 보증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했다.

"오쿠사와님 아가씨께서 부르고 계십니다."

대문의 초인종을 누르자 나를 도망치게 해주려던 검은옷의 사람이 마중을 나왔다.
다행히 짤리지도 않았고 감봉같은 처벌도 받지 않았나보다.

"저희는 사실.. 아가씨도 오쿠사와님도 믿지 못했던거 같군요. 두분도 고등학교때의 당장 무너질것 같던 어린아이가 아니게 되었는데도.. 과한 참견이었습니다. 아가씨를 잘부탁드립니다."

코코로의 방문 앞에서 허리까지 숙여 인사하는 검은옷의 사람은 일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리 두명을 걱정해줬던거겠지.
그야말로 자신이 딸같이 소중히 여기는 아가씨의 명령을 배반할 정도로 생각해줬던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이 사람 역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억지로 미셸을 뒤집어 씌웠을때는 확실히 아가씨의 분부대로 나를 강제했겠지만 필요이상으로 업그레이드 되던 미셸에는 나에대한 걱정과 배려가 묻어나왔었다.

나도 마주 인사하고 방문을 열었다.

방안에서는 여전히 코코로에게서도 나는 달콤한 향기가 흐르고 있어서 예전에는 그렇게도 안절부절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안심이 되어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가 수갑에 묶였던 천개가 달린 침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숨지도 도망치지도 못하는 그 모습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르지만 가까이 가면 불나방처럼 타오를까봐 겁을 먹은 옛날의 나.

그리고 그런 코코로를 알고 있어도 망설임없이 걸어서 그 공간에 비집고 들어가는나는 옛날의 너.

마주한 얼굴은 열기가 느껴질정도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사키는 바보야.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저런 정열적인 고백을 할 수 있어? 나 당황해서 부끄러워서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어."

삐진거처럼 고개를 휙 돌리고 코코로가 말했다.
다시 이름으로 불러주는게 기뻐서 무심코 소리를 내 웃어버리면 이쪽을 째려봤다.
정말 스스로도 무서울정도로 코코로가 귀여워보여서 무심코 놀리고 싶어져버린다.

"하지만 전부 내 본심이니까. 코코로가 말했었잖아? 스스로에게 거짓말하는건 그만두라고. 해보니까 엄청 후련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어. 무엇보다 지금 코코로의 그 얼굴을 보면 잘했다고 나를 칭찬하고 싶은데."

"미사키 오늘따라 심술쟁이같아. 하지만 모두 용서해줄게."

그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매달려있었다.
활짝 웃는 얼굴에 눈물은 어울리지 않아서 무심결에 다가간 나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쓸어 닦아버렸다.

"그런데 왜 울고 있는거야? 이제 아무것도 문제될게 없는데. 나도 코코로를 사랑하고 코코로도 이제 그 마음을 알아챈거잖아."

주변의 사정도 전부 이미 코코로가 처리해버려서 남은것은 해피엔딩으로 걸어가는길 뿐인데.
진심으로 웃는 얼굴이 되었어도 여전히 코코로는 울고있었다.

"특별한것이 생기는게 이렇게 괴로운일이라고 미사키는 먼저 알고있었던거야? 미사키의 라이브, 사랑이 곧바로 전해져서 마음이 따끈해졌으니까 용서할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면 미사키 떠나버리는거잖아."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의 방울마다 곤혹한 내 얼굴이 맺힌다.
나와 코코로는 서로에 대해서 이해하면서 너무나도 닮아버린것 같았다.

특별한게 생겨서 잃는것부터 생각해버리다니 전의 코코로라면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럼 변해버린 나도 과거에는 할 수 없었던 말을 꺼낼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코로. 나는 아직 미국에 남기고 온 일들이 있어서 바로 돌아올 수 없으니까. 이번은 코코로가 나를 따라와. 그리고 내가 코코로와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풍경들을 전부 같이 보러가자.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서 다음은 세상의 모두에게 알려주는거야."

벌써 성인이 되버린 나와 코코로에게는 터무니없는 옛날이야기 같은 말을 나는 있는 힘껏 웃으면서 말했다.
코코로는 깜짝 놀라서 할 말도 잃고 멍해졌지만 눈물은 잦아들었다.

"세상은 넓고 우리가 웃는 얼굴로 만들어야 할 사람들은 정말 많으니까 어쩌면 평생 세상을 웃는 얼굴로 만드는 활동은 끝나지 않겠지. 그러면 코코로도 나도 언제까지나 손을 잡고 그 길을 걸어야할거야. 가끔 이렇게 불안해지거나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때도 있을 수 있어."

점점 빗나가서 결국 떨어져나가고서야 뒤돌아본 우리는 그제서야 서로를 마주 봤지만 또다시 엇나갈수도 있다.
단단히 마주잡은 손이 무슨 일을 계기로 놓게될 줄 알수없다.

"하지만 그럴때는 다시 이렇게 노래를 불러줄게. 코코로도 콧노래든 그림이든 좋으니까 너의 기분을 알려주는거야. 한번했던 일이니까 또 한번 더라도 할 수 있겠지. 뭐.. 그래도 다음은 다른 사람들을 말려들게 하지 않는 정도로만 하자.."

아직도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 코코로를 보며 하하..마른 웃음을 흘린다.
전력으로 생각해낸 방법이지만 수갑으로 묶어두고 싶을 정도로 두려워했던 코코로에게는 만족하지 못할 수단인지도 모른다.

"좋은 생각이야 미사키! 몇년동안 전혀 떠오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콧노래가 나올것 같아. 하지만 나는 전할 수단이 없으니까 미사키가 또 곡으로 만들어줄거지?"

벌떡 일어나서 내 손을 붙잡은 코코로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어느새 대기하고 있던 검은옷의 사람에게 녹음기와 종이의 준비를 시켰다.
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데 필요할때에 그곳에 있는 검은옷의 사람에게서 그리움을 느꼈다.

무슨 곡을 만들까 신이나서 이것저것 나에게 말해오는 코코로도 슬픈 기분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졌는지 예전의 그때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전과 확실히 다르다는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제는 억지로 팔을 잡아끄는게 아니라 꽉 마주잡은 손을 재촉하듯 이끌어간다.

"하아.. 그렇게 급하게 하지 않아도 같이 미국에 가주려는거지? 그러면 오늘은 조금 쉬게해줬으면 좋겠는데.."

어제 뛰어다니며 교섭하고 오늘은 처음으로 본모습을 나타내고 라이브를 했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자 단번에 몰려오는 피로감에 당장이라도 자버리고 싶었다.

"물론 미사키의 정열적인 프로포즈는 감동적이었어. 그러니까 이 기쁨을 결혼식장에서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으니까! 시간에 맞추려면 지금 당장 시작해도 늦어!"

"하아?! 결혼식! 처음듣는 이야기인데 그거!"

갑자기 코코로의 입에서 나오는 청천벽력의 소식에 깜짝놀라 지친 다리의 힘이 풀릴뻔 했다.

"하지만 미사키.. 불안할때도 이해하기 힘든때도 서로 의지하면서 세상의 모두를 웃는 얼굴로 만들자고 했잖아. 그건 결혼하자는 말이 아니었어?"

의아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츠루마키 코코로씨에게 돌려줄 말이 없었다.
결혼을 생각한적 없지만 들어보면 확실히 부부사이를 명시하는 말과 같았다.
하여튼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 평생을 이야기한다는건.. 음. 당황했지만 싫다고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는것은 나도 코코로와 닮아 많이 바뀌어버린것 같았다.

"미사키는 언제나 내가 웃을 수 있는 마법같은 계획을 가져와주는구나. 역시 마법사인게 틀림없어! 미사키는 내일 돌아가야하고 나도 당주의 일이 있어서 당장은 안돼지만 미사키의 소중한 말을 거절할 생각은 없으니까. 같이 결혼식을 계획해보자!"

"네에네에. 그래도 너무 이상한 계획은 할 수 없으니까 실현가능한걸로 부탁해. 수중결혼식이라든가 덧없는 결혼식같은거 말고 그냥 행복한 결혼식이었으면 좋겠는데.."

검은옷이 가져온 새하얀 종이에 즐겁고 행복한 웃는얼굴 투성이의 미래를 그려넣는 코코로를 보면서 나도 쓴웃음으로 어떻게 이뤄줄지 고민한다.
우리는 바뀌었지만 서로 손을 마주잡고 다시 앞으로 걸어나간다.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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