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트리스가 가져다준 해물파스타와 크림파스타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며 돌아다닌 수고에 충분할 정도로 맛있어보였다.

평소에 이런 장소에서 파스타를 먹는 일은 없었으니까 사실 조금 긴장했지만 아름다울 정도로 식사 예법을 지키는 코코로의 모습을 보니 저절로 감탄과 함께 역시 이런 장소보다는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한 연회장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밴드에 이끌기는 했지만 역시 코코로는 하늘 위의 별과 같이 내 투박한 손으로는 닿지 못할 존재라고 이러한 부분에서 느낄때가 있다.

하지만 내 기분이 즐겁다라던가 행복과는 멀어진 답답하고 초조한 부정적인 감각에 가까운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왜 그렇게 빤히 보고 있어? 혹시 크림파스타도 먹어보고 싶은거야?"

얼굴이 붉어진채로 코코로가 이쪽을 외면하면서 물어봤다.
그렇게 오랫동안 응시했나?
그래도 부끄러워하는 코코로가 내가 아무말도 없자 포크에 자신의 크림파스타를 휘감아 내밀어주는건 기뻐하며 먹기로 하였다.

다행히 느끼하지 않고 양질의 재료가 사용된것 같은 크림파스타는 고심해서 고른 가게답게 맛있어서 코코로도 이정도면 싫진 않겠지하고 안심했다.

"가끔 보면 미사키는 사양이라던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부분에서 아무렇지도 않은거 같아.."

"그런가? 보통으로 느끼는거 같은데.. 아, 코코로도 해물파스타 먹어볼래? 비리지 않고 맛있어. 자!"

나만 코코로가 시킨 음식을 맛보는건 어딘지 미안하고 여러가지 맛있는걸 먹어보는건 즐거운일이니까 공유하고 싶어서 나도 포크를 코코로 쪽으로 내밀었다.

아까도 조금 홍조가 돌긴 했지만 포크를 원수처럼 째려보는 코코로는 이젠 귓불까지 토마토처럼 빨개져있었다.

어딘가 몸상태라도 안좋은데 억지로 어울려주는건 아니겠지?
이따가 틈을 봐서 열은 없는지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서 먹지 않으면 흘릴거 같은데.. 아니면 혹시 해산물은 싫어해?"

먹기 싫은 음식을 강요하는건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슬그머니 손을 돌리려고 했다.

나라도 고수풀이 들어간 음식을 코코로가 먹어볼래 하고 권한다면 순수하게 선의를 담아 권유한 코코로 대신 음식물을 노려봤을지도 모른다.

"나도 고수풀이 들어간 음식은 정말 싫어하니까. 해산물이 싫다면 말해주면 될텐데."

그대로 내 입으로 가져가려던 포크를 든 손을 돌연 코코로가 한손으로 휙 낚아채서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깜짝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라보면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아무것도 묻지 않은 입을 왠지 냅킨으로 닦는 코코로가 보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싫어하는 음식은 딱히 없어. 하아.. 내가 먼저 했는데 왜 내가 더 부끄러워 하는 거지.. 무의식이란 정말 무서워."

다행히 싫었던건 아니었는지 해물파스타도 맛있네하고 짤막하게 감상을 말해줬다.

이런 사소한 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니 아직 집에 돌아가기까지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이번 약속이 끝나는게 아쉬워질 정도였다.

아직 만나서 식사밖에 안했는데 다음 약속을 정하는건 너무 빠르니까 헤어질때에 또 같이 놀자고 말해봐야겠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코코로도 나처럼 다음 약속을 바랄 정도로 즐거운 하루가 되어야겠지.

"코코로, 파스타 다 먹으면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카논씨라면 수족관의 해파리수조, 하구미라면 소프트볼의 경기를 구경하러 간다거나 카오루씨라면 연극을 보러가면 좋아할거라고 떠오르지만 나는 코코로의 좋아하는게 무엇인지 몰랐다.

항상 교실의 창문근처의 자리에서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은 모든게 지루하다고 말하고 있는것 같아서 밴드에 이끌었지만 휴일의 코코로는 다를지도 모르니까.

평소에는 무엇을 하는지 알고싶었다.

"으음.. 갑자기 물어봐도.. 영화라도 보러갈까?"

"좋아! 영화 보는거 좋아하는구나. 나도 리미랑 자주 영화관을 가는데 혼자서 보는거랑은 역시 기분이 다르지. 지금은 무슨 영화가 상영중일까..검색해볼게."

"..딱히 엄청 좋아하는건 아니지만 좋은지 싫은지를 따지자면 좋아하는쪽일까."

좋아하는지만 물어봤는데 어째서 그렇게 불만스런 얼굴을 하는 걸까?
내가 무언가 마음에 안드는 말이나 행동을 했는지 고민해도 알수없었다.

그래도 상영중인 영화의 목록을 보여주기에 마주보는 자리는 불편했으니까 건너편으로 넘어가 옆에서 가까이 보여주며 볼 영화를 정할때는 다시 아까처럼 얼굴이 붉었으니까 역시 몸상태가 나빠서 기분이 안좋았을지도 모른다.





평소에도 기본 웃는얼굴인 미사키이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특히나 즐거워하는것 같다.

게다가 이건 내가 자초한 일이지만 서로 먹여주기를 한다거나, 스마트폰을 넘겨서 보여주던가 말로 설명해도 될텐데 근처까지 다가오니까 도저히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다.

심지어 가게에서 나온 지금은 혹시 열이 나지 않냐고 이마를 맞대다니 이 거리는 하나사키가와의 학생도 많이 놀러다니는 인기장소인데 혹시 누군가 볼까봐 무서울 지경이었다.

"열은 없는것 같은데.. 아까 얼굴이 붉고 기분도 나빠보였으니까 몸상태가 안좋은줄 알았어. 혹시 오늘 부른거 폐가 됐었나 하고.."

시무룩하게 축 늘어진 눈썹이 나에게 어서 사과하라고 재촉하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기 기분에 휘둘려서 미사키를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니 미사키의 잘못도 아닌데..

친구가 준 도움에 고마워하며 답례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을 이런식으로 무시해서는 친구로써도 실격일지 모른다.

"전혀 그런게 아니야! 알다싶이.. 내가 조금 학교 아이들에게 기피되고 있잖아? 뭐, 내가 그렇게 되도록 만든거나 마찬가지지만.. 하여튼 그렇다보니까 이런 경험이 없어서 조금 긴장한거뿐이야."

이런 말을 평소엔 절대 하지 않겠지만 슬퍼보이는 미사키의 얼굴을 보면 내가 부끄럽다던가 하는 그런 기분은 아주 가볍게 날라가버리고 그런 표정을 치우기 위해서 얼마든지 말해버릴거 같았다.

이제와서이지만 나는 미사키가 이렇게 슬프거나 우울해보이면 곰인형탈을 대신쓰고 묘기라도 부릴지 모를 수준으로 푹 빠져버린거같다..

"그래? 다행이다.. 후후 그러면 코코로가 긴장하지 않고 즐길 수 있을때까지 앞으로도 자주 같이 놀러나가자. 앗! 그러고보니 그러면 내가 코코로의 첫번째 친구인거야? 기쁜데~."

싱글싱글 웃고 있는 미사키가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영화관으로 향한다.
처음의 친구라는 말에 가슴이 욱씬 상했다.

절대 내가 생각하는 좋아해와는 다른 감정이라고 이런식으로 확신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심지어 상대는 내가 어떤 기분인지도 모르고 순수하게 애정을 담아 말한것뿐인데 이렇게 아프다니.

혹시 만약에 내가 고백을 했다가 그 곤란한 웃는 얼굴로 거절당해버리면 나라는 존재가 산산이 부서져버리지 않는가 걱정되었다.

"그런데 코코로는 호러영화 아무렇지도 않은거야? 이거 꽤 무섭다는 평이 있는데.."

영화의 티켓을 끊어놓고 팝콘과 음료를 사들고서 미사키가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내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어도 상대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결국 허탈해져서 영화의 포스터를 살펴본다.

가까운 미사키의 얼굴과 하구미가 말하기로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향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주체할 수 없이 심장이 뛰는 향기, 평소와는 다른 복장등이 머릿속을 꽉 채워서 인기있다는 말에 대충 그럼 그걸 보자고 해버렸는데 호러영화였나보다.

하지만 어차피 아까 가게에서도 그랬듯이 맛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온통 미사키에게 가버릴거라고 한심할 정도로 자각하고 있는 나에게는 영화내용이 기억에 남기라도 하면 다행일것이다.

뭐, 영화가 끝나고 미사키가 감상을 말할때 맞장구를 칠 수 있을 정도로 내용을 알아두지 않으면 또 슬프게 할테니까 신경써서 봐두도록 해야지.

"영화니까 다 가짜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무섭지는 않을것 같은데. 혼자서 본다면 모를까 인기가 많다면 상영관 안에 다른 사람들도 한가득 있을거잖아?"

순간 실수했다고 깨달았다.
영화를 같이 보러 온 사람한테 다 가짜라느니 하는 말을 하다니 기대하고 있는 사람한테는 매우 무례한 발언일텐데 미사키에게는 무언가 무심코 생각한것을 여과없이 말해버리는 일이 있어서 곤란했다.

말실수를 해버린걸 알자마자 미사키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다.
슬퍼하거나 실망한 얼굴을 봐버리면 사과의 말을 하기도 전에 죄책감에 입을 열수도 없을거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미사키가 나에게 실망하는게 더 무서웠으니까 눈을 꽉 감고 사과하려고 했다.

"미..미안!"

"그렇구나 그런 방법도 있네! 코코로는 대단해."

어라..?
미사키는 실망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담은 반짝반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양손에 음료와 팝콘을 들고있지 않았다면 미셸일때와 같이 달려들어 포옹할 기세로 웃는 얼굴이다.

"사실 말하지 않았지만 호러영화 좋아하긴 하는데 무섭긴하거든.. 좋아하는데 무서워하다니 조금 바보같은가?"

곤란한 얼굴로 웃는 미사키는 내가 걱정했던거랑 달리 기분이 좋아보였다.

"좋아하면 상관없지 않아? 아니, 오히려 호러영화니까 그게 더 맞는 즐기는 방법인거 같은데."

그보다 호러영화가 무섭다니 꽤 귀여운 정보를 얻은것 같았다.

자신감이 좀 부족한걸 빼면 미사키는 무언가 약점이 없다는 느낌이었는데 고수풀이 들어간 음식은 싫어한다던가 호러영화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새로 알수있어서 그것만으로 즐거워졌다.

..내가 모르는 미사키와 친한 누군가의 존재를 알게된 것은 그다지 기분좋은 일은 아니지만 고백을 할 자신도 없는 사람이 질투해도 아무 의미도 없겠지.

"혹시 내가 이 영화가 어떻냐고 물어봐서 그냥 보기로 한거야? 코코로 영화에 별로 관심있어보이지 않는걸."

영화 상영시간이 10분 남았을때 조용했던 미사키가 말했다.
기운이 없어보이는 작은 목소리였다.

어째서 그렇게 하나하나 남의 기분에 따라서 본인까지 우울해하는걸까.
마치 우리가 특별한 사이라도 되는것처럼 착각하게 될것같지만 미사키는 누구라도 웃는 얼굴로 만들고 싶으니까 상대가 즐겁기를 바라는것 뿐이겠지.

하지만 내가 아니였다면 이런 미사키를 탓하는 감정은 커녕 미사키가 바라는대로 즐겁게 오늘을 즐겼을테니까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코코로가 괜찮다면 다음에는 코코로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자."

"엇.. 상관은 없는데.."

"그렇다면 이번엔 갑자기 정하지말고 미리 조사해야겠는걸. 영화말고는 뭐가 좋아? 카논씨는 수족관을 좋아하고 하구미랑은 소프트볼을 해보고싶고.. 아, 이 인원수로는 안되려나? 카오루씨는 연극을 보고싶어 할거같은데.. 코코로는 뭐가 좋아?"

다시 두명이서 놀러가는 약속을 하는건가 기대한 내가 잘못한걸까.
이건 누구라도 조금 오해할거같은 발언이 아닐까?

하나하나 기대하고 실망하는 나에게 더 배려해줬으면 한다.
하지만 하로하피의 모두를 소중히 생각하는건 알고있던 일이고 즐거운걸 찾는걸 좋아한다는것도 알고 있으니까 거절 할 마음이 들리가 없다.

"내가 가고 싶은곳도 좋지만 미사키가 가고 싶은 곳도 확실히 생각해둬. 나 말고도 모두 물어보려고 할걸? 이제 모두 미사키가 타인만 신경쓰는거 가만 둘 생각없으니까."

"아~. 그렇네.. 모두가 가고 싶은곳에 나도 가고 싶다는 안되겠지.."

하로하피의 밴드활동은 억지인 강행수단을 잔뜩 쓰는 주제에 이렇게 미사키가 즐거워질 수 있는걸 물으면 조용해져버린다.

아마 관련된 대화가 없었다면 고수풀이 들어간 요리라도 아무렇지 않은척 먹어버려서 싫어하는지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가고 싶은 곳은 모르겠는데 양모펠트를 좋아하니까 나중에 같이 해볼래? 어렵지 않은 간단한것도 많으니까."

잘못하면 듣지 못하고 지나쳐버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미사키가 수줍게 말했다.
하는 행동은 과격하기 그지없는데 이렇게 미사키에 대해서 물어보면 사실은 매우 섬세한 성격인것 같았다.

세상의 모두를 웃는얼굴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는 주제에 이렇게 본인이 웃는얼굴이 되는건 수줍어한다니 반칙급으로 귀여워서 마주볼수가 없다.

그런데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성격의 사람이 등에 상처를 입고 자신의 웃는얼굴을 포기할 정도로 한계에 처해있었을까.

미사키는 자신에 대해서는 도통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부러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하로하피의 모두에게도 과거는 묻지 않는다.

인형탈을 벗겨놔도 겹겹이 감싼 껍질에 아직도 모르는부분이 있다는게 속상했다.
그러는 나 자신도 내 사정을 말하진 않으면서..

"나 손재주가 그렇게 좋지 않으니까 잘 알려줘야해."

그래도 지금은 내 한마디에 금새 밝게 웃는 미사키의 얼굴을 보며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꽤 오랜 교제가 될테니까 차근차근 알아가면 언젠가는 나도 고백할 용기가 생기겠지.
Posted by 백오판다
,
이상해.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오쿠사와 미사키는 문득 제 가슴께를 꾹 짓눌렀다. 먹물을 잔뜩 머금은 붓으로 획을 긋기도 전에 도화지에 실수로 한 방울 떨어트린다면 이런 기분일까.

손에 들렸던 까만 봉투가 부스럭거리며 흔들렸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반짝반짝한 날이었을텐데.

아침 일찍 일어나 어머니의 식사준비를 돕고, 동생과 현실적인 소꿉놀이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시간이 남아 고아원의 봉사활동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잃은 카논을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하구미네에 들러 고로케를 한 가득 사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가 마주친 카오루의 연극 상대 연습이 되기도 했다.

미사키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얀 도화지 위에 퍼진 까만 먹이 점점 그 크기를 늘려가 마음을 잠식한다.

약한 호흡곤란에 기침을 하다 목을 꽉 누르고 누구의 집인지 모를 담벼락에 기대었다.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힘이 빠졌다. 무릎을 굽혀 주저앉았다.

" 아. "

추워.

천천히 봄이 끝나가고 초여름에 가까운 계절이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날씨는 피부마저 끈적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뱉어내는 숨은 차가운 겨울의 한기가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목에 점점 더 힘을 주었다. 이대로 더 머물다간,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버릴텐데. 춥다고 해서 손에 들린 것들까지 춥게 만드는 마법을 부리지 못한다.

초코맛 아이스크림을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릴 동생이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가뿐하게 발에 힘을 줘 일어서려던 미사키는 다시 구멍 뚫린 풍선처럼 주저앉았다. 손아귀의 힘도 저절로 풀렸다. 졸렸다 풀어진 목에 컥컥 거렸다.

정말 이상하네, 힘이 나지 않아.

말 그대로 통제할 수 없는 탈력감이었다. 망연히 모자를 푹 눌러써 하늘을 올려다본 미사키는, 가장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었다.

도심의 밝음에 묻혀져가던 별 사이로 가장 눈부신 빛. 별의 이야기에 대해 겉핡기식으로만 아는 미사키는 저게 북두칠성인지, 사실은 지구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인공위성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저 시선이 빼앗겨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양한 색채로 생동감 있게 반짝이던 세상의 모든 것들이 파렛트에 묻은 물감을 씻어내는 것처럼 사라져간다.

색채가 사라진 잿빛세상은 어쩐지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어서 너는 그렇게 재미없는 얼굴을 했던걸까. 그저 의미없는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무덤덤히 익숙해져 가, 기어코 외로운 얼굴을 미사키는 기억한다.

코코로.

...코코로.

" 코코로. "

그 이름엔 이루말할 수 없는 따스함이 감돌았다. 세 음절 안에 세상 모든 색채가 다 들어있었다.
 추위가 걷히고나서야 미사키는 깨달았다.


 나의 영웅, 가장 찬란히 빛나는 북두칠성.


오늘은 당신을 보지 못했구나.

마치 제 스스로가 배터리가 된 기분이었다. 낮동안 모든 걸 방출하다가 시간이 지나 방전되어버리는. 그럼에도 신기하게,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를 받아 무릎을 똑바로 폈다.

봉투 속 아이스크림이 다 녹았다. 내일이면 너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간지럽게 다가왔다.

마음 속에 황금 나비가 있는 것 같았다.




.




츠루마키 코코로는 어쩌면 한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을지도 모른다.

착용자의 좀 더 나은 환경을 위한 인형탈을 만들어 제공하는 건 가벼운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답례로 밥을 사겠다고 했을 때도, 정말 답례 차원이라 생각했기에 바로 긴장을 놓아버릴 수 있었다.

바로라고 해도 사실 약속시간 30분 전까지였지만.

당신은 역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서, 몇 시간이나 색다른 코디에 도전하려던 코코로는 혼자 오버한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고, 평소의 빨간 줄무늬 셔츠와 쇼츠 멜빵이라는 평상복을 택했다.

이 정도면 무난하겠지?

그리고 그런 생각은 약속 장소에 나가는 순간 산산조각났다.

1시인 약속시간 10분 전, 도착한 약속 장소엔 언제부턴가 와있었는지 모를 미사키가 기둥에 기대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단추가 두어개 풀어진 얇은 화이트 셔츠, 긴 기장을 자연스럽게 밀어넣은 청색 핫팬츠 아래로 캐주얼한 스니커즈. 말도 안돼. 여객선 파티의 그녀를 생각하자면 후드티 하나 달랑 걸치고 올 줄 알았는데.

무심코 멈춘 발걸음을 인지했는지, 이쪽을 돌아보는 미사키의 모습이 문득 낯설었다. 눈이 마주치고, 단정히 빗어내린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하얀 얼굴이 말간 웃음을 자아낸다.

" 일찍 왔네, 코코로. "
 
거짓말처럼 생기가 가득 웃음에 담겼다. 몸을 완전히 돌린 미사키의 목에는, 단조로운 검은색 초커가 둘러져 있었다.
조금은, 두꺼운. 이상하게도 그걸 본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악세사리를 꺼려한다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스스로의 심정을 알지 못해, 코코로는 빤히 미사키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복장만으로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어? 심지어 시원하게 맡아지는 워터 향은 그녀를 어른스럽게 보이게 만들었다.
 
" ... ...당신, 누구? "

" 에. "
 
곤란히 눈썹을 찡그린 미사키는 곧게 눈을 맞춰왔다.
 
" 미사키. 오쿠사와 미사키입니다, 코코로씨. "
 
목소리가 낮고 다정한 울림을 선사했다. 털털한 후드를 입고 있을 때도 생각했지만, 오쿠사와 미사키는 꽤 단정한 얼굴이었다. 꾸민 지금에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눈꼬리가 상냥히 휘어 눈이 접히고 눈웃음을 그려냈을 때 코코로는 제 얼굴 가득 퍼지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신, 행색이 나쁘다.
 
" 자, 코코로. 배고프지 않아?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다면 지금 말해줘. "

" ... 배가 고프긴 하지만, 특별히 먹고 싶은 건 없네. "

" 응~ 그럼 알아봐둔 파스타집이 있어. 괜찮아? "
 
괜찮아. 고개를 끄덕인 코코로는 미사키의 자연스러운 에스코트를 따라 나섰다.
 
 


벚꽃잎이 잔뜩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 사이를 나란히 걸어, 붐비는 차도를 건너고, 아직 한산한 음식점들을 지나 멈춘 곳은 목조 인테리어의 양식점.
 
칸막이가 쳐진 창가 구석자리로 안내받아 각각 해물 파스타와 크림 파스타를 시켰다.

얼마 걷지 않은 시간동안 삼켰던 물음들이 목 언저리에서 울렁인다. 마른 목에 물을 한모금 마시고 약간 필사적일 정도로 창밖을 바라보던 코코로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쭉 바라보고 있었던지 금방 눈이 마주쳤다.
 
저를 담아내는 은청색이 기분 좋게 휘어진다. 그 시선 안속에, 하고싶은 말 잔뜩인 얼굴이 있었다.
그 숨겨지지 않는 얼굴에 코코로는 항복한다.
 
 " ... 오늘의 미사키는, 뭔가 굉장히 분위기가 다르네. 옷도 평소 입던거랑 전혀 다르고. 당신은 편안한 옷을 선호한다고 생각했는데. "

이건, 그러니까, 어쩐지, 데이트 같지 않아?

차마 말하지 못한 말이 어색하게 뒷목을 쓰는 미사키를 보고 들어갔다. 자기를 따라 물을 마시는 모습이 묘하게 걸렸다. 긴장하고 있어?

 " 그게, 오늘 코코로와 만나는 걸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더니. 어머니가 그렇게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좀 더 꾸미고 가야하지 않겠니~ 라고. 이 옷도 나름 편안하기도 하고. "

 " 아. "

 " 동생도 멋지게 차려입은 언니를 보고싶다고 해서, 반짝반짝한 얼굴로 바라보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었어. ...혹시, 많이 이상해? "

 " ... 아니, 잘 어울려. 교복이랑 후드만 입은 당신만 봤는데 새로운 당신도 괜찮다고 생각해. "

정말로.
그저 깜빡거리는 시야에 미사키의 손이 목에 두른 초커를 쓸고 지나 책상 위로 내려온 게 들어왔다.

 " 그치만, 그 초커는 정말 의외네. "

 " ... 어쩐지, 하고싶어져서. "

 " 그래도 잘 어울려. "

조금 어색한 몸짓이었다. 뻑뻑하게 굳어있던 몸짓이 풀어져 두 손이 마주 잡는다.

 " 코코로도, 정말 귀여워. "

단정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귓가가 발갛다. 생각보다 목이 얇았고 말라서 쇠골이 두드러졌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이쪽을 향하는 미소는 행복해보이기까지 했다.

당신, 정말 오늘 행색이 나빠.

홧홧히 뜨거운 뺨에 손등을 대었다. 이게 그걸까나. 좋은 얼굴로, 좋은 옷차림으로 좋은 말만 해준다는. 그게, 그러니까, 호스트?

 " 처음엔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가져오셔서 입었는데, 한참 보시더니 몸 좀 함부러 굴리지 말라며 뺏어가셨어. "

 " 어째서? "

 " 우응~, 등쪽에 다친 자국이 있어서 그게 보인걸까 싶지만. "

코코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미사키는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은건지, 그녀답게 안 좋은 이야기는 좋은 분위기를 망친다고 생각하는건지 모르겠다.

아직도 당신은 말하지 않는 게 많구나.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의도치 않은 침묵을 버티고 있을 때, 돌연 미사키가 팔을 뻗어 탁자를 두드리는 손가락 사이로 손을 들이밀었다.

 " 뭐야? "

 " 내 손이 두드리기 더 좋을거야. "

 " 응...? "

 " 탁자보단 부드러울걸. "

사르르, 올라가는 입꼬리와 다정한 장난기를 담은 눈에 그제야 지나가는 농담인 걸 알아챘다.

그게뭐람. 반쯤 쑥쓰러운 기분으로 미사키의 손바닥을 톡톡 쳤다. 얼굴에 기분 좋은 웃음이 번진다. 간지러운지 살착 움츠러 들던 손이 조심스레 제 손가락을 잡아왔다.

 " 이제야 웃어주는구나, 코코로. "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잡아오는 손길엔 아주 약간의 힘이 들어가, 제 손바닥을 느리게 쓸어내는 손끝.

코코로는 어쩐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미사키는 손바닥에 은밀히 단어를 한 자 한 자 쓴다. 무엇을 쓰는지 코코로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저를 향하는 은청색엔 많은 게 들어 있었다.

 " 오늘... 하늘이 아주 맑아. 날씨도 기분 좋은 정도로 따뜻해. 떨어진 벚꽃잎이 예쁘고, 피어난 꽃들이 향기로워. 사람들은 생기가 가득하고, 그들이 짓는 웃음은 마음이 따듯해져. 그렇게 소중한 것들로 가득한 세상은 색색으로 반짝이고 있어. "

그건 어쩌면 모든 노래가락이었나.

 " 그치만 가끔, 정말 가끔 그게 전부 의미가 없어질 때가 있어. 똑같이 모든 게 아름답게 반짝이는데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때가 있었어. 예전엔 그래도 계속 뛰기만 했는데. "

팔을 당겨, 제 손마저 끌고가 오쿠사와 미사키는 그림같은 미소로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손등에 입을 맞췄다. 닿아온 입술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도록 뜨거웠다.

 " 지금은 코코로를 보면 마법같이 모두 괜찮아져. "

고마워.

스러질듯 아주 작았으나 손에 잡힐듯 선명한 음색이었다. 단조로운 말에 진심이 가득 담겼다. 이름모를 감정들에 파묻혀서 이 자리를 서둘러 피하고 싶은데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드러난 피부가 모두 붉어져, 가슴 한쪽이 뜨거웠다. 결국 잡혀있지 않은 손으로 눈가를 가린 코코로는 절로 앓는 소리를 냈다. 당신 진짜 오늘 행색 너무 나쁘단 말야. 시선만 올려 이쪽을 향하는 눈엔 그녀가 말했던 것들이 담겨서 찬란하다.
 
하늘, 날씨, 벚꽃, 화려하게 핀 꽃, 사람들, 웃음, 세상 모든 것. 그 눈은 모든 게 특별하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착각하지마, 츠루마키 코코로.


미사키의 말마따라 츠루마키 코코로의 세상도 어쩌면 그렇게 반짝일 기미가 있는지도 몰랐다.

이런 날에 하늘이 맑은게 기쁘고, 덥지 않은 날씨에 안심하고, 떨어진 벚꽃잎은 꽤 낭만 있었으며 피어난 꽃들의 향은 늦봄에 취하기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부 당신에게서 빌려온 것들. 내것이 아닌 것들은 모두 당신이 있기에 가치를 발휘한다.

그러니까, 착각하지마.

그런 눈으로, 그런 말로, 그런 분위기로 나를 현혹하지 말아줘. 당신에게 내가 특별하다는 암시를 주지마. 잘못해서 오해해, 착각하게 되어버리면 그보다도 부끄러운게 있을까.

친구사이라기엔 조금 과한 스킨십도 모든 색채들이 넘쳐나는 말을 직접 듣는것도 어쩐지 특별 취급 당하는 것도 모두 당신이기 때문에- 로 함축했다.

그러니까, 이건 그저 아무나라도 좋았던거야. 당신을 웃게 만들었다면 그 누구라도 좋았을 허울 좋은 얘기.


똑똑, 하고 웨이트리스가 들어왔다.

칸막이 너머로 그림자가 비춘 순간 화들짝 손을 때버린 코코로는 멀쩡한 척하며 제 앞에 놓이는 크림 파스타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사랑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단 말이야.


------------------
여우공책님(@null_note)님이 써주셨습니다
Posted by 백오판다
,
평소에 나는 긴장같은건 잘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몇년째 하고 있는 하로하피의 곰인형 DJ도 예전과 달리 유명세를 타서 어디를 가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지만 난처하긴해도 긴장한적은 없고 최근의 우리가 했던 라이브 중 가장 규모가 컸었던 라이브를 하기 직전에도 오히려 카논씨를 진정시키는 여유까지 보였었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손이 덜덜 떨리는지 알 수 없다.

"미사키, 야경이 정말 아름다워! 이런 좋은곳에 데려와주다니 고마워!"

"으응.. 평소에 너에게 받는거에 비하면 이정도쯤은.."

사귀기 시작하고 나서도 코코로의 상식이 무너질것같은 금전감각에는 여전히 놀라는일만으로 조금 잘보이려고 분발해 본 이 장소도 코코로에겐 별거 아니겠지.

커다란 유리창 밖의 야경은 카오루씨가 추천해준대로 환상적이었지만 그 역시도 은은한 조명에 비치는 금사같은 코코로의 머리칼에 비하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성인이 되면서 더욱 요염함을 늘린 지체는 매혹적인 붉은 벨벳에 휩싸여 외국의 피가 섞여서인지 뒤늦게 맞이한 성장기로 이제는 나보다 키도 커서 아직도 나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생각이든다.

"미사키, 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어. 오랜만에 둘만의 데이트인데 다른 생각이라도 하는 거야?"

어느새 창문에 딱 붙어서 밖을 구경하던 코코로가 내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서 볼을 부풀린채로 코코로는 검지손가락만을 내밀어 슥슥 내 미간을 문질러 폈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행동에 어린아이같은 순수함이라던가 귀여움이 묻어나오는것 같았다.

하지만 우선은 심통이 나면 꽤 곤란한 장난을 저지르는 코코로를 달래는게 우선이었다.

특히 이렇게 자신 앞에서 다른것을 생각한 후에는 한계까지 짖궂은 방식으로 한계까지 몰아붙이니까 안그래도 휘둘리는 미사키는 매회 이런때에는 필사적일 수 밖에 없다.

"그냥.. 나는 상당히 솔직하지 못했구나하고 새삼 깨달아서. 과거의 내가 지금 이렇게 너랑 함께 있는 장면을 본다면 분명 부정했을거야."

"그렇네. 하지만 나에겐 지금도 미사키는 상당히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해. 지금도 말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서 이렇게 멋부린 장소를 준비한거겠지?"

싱긋 웃으면서 미간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코끝을 툭 친다.

철저하게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것도 코코로는 이미 전부 알고 그럼에도 전부 괜찮다고 받아들여준다.

하지만 그런 코코로와 몇년을 같이 있으면서 용기를 받아도 좀 더, 조금 더 달라고 강청하니까 코코로에게 나는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어리광쟁이로 보이는걸까.

"..그런 이유가 없는것은 아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에는 무드도 중요하다고 할까.. 최대한 멋진 장소에서 하고 싶었어."

언제 눈치챈지 모를 검은옷의 사람들이 훨씬 대단한 장소도 많이 제안해줬지만 역시 누군가를 의지하면 의미가 없으니까.

아쉬워하는 그녀들에겐 미안하지만 전부 거절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인기있는 장소라서 예약을 차지하는것도 꽤나 곤란했지만 기뻐할 코코로를 생각하며 노력했는데 가혹한 평가를 받아버렸다.
아까부터 긴장해서 떨리는 손이 식은땀으로 차게 식어가는것 같았다.

"흐음-. 미사키가 무슨 말을 해도 어떤것을 하자고해도 안된다거나 못한다거나 하는 말이 아니면 나는 한번도 거절한적이 없는데 어째서 그렇게 겁을 먹는거야?"

"그러니까 더 무서운걸지도.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코코로는 받아들이니까 혹시 그로인해서 코코로가 상처받거나 슬퍼진다고 생각하면 말 한마디조차 너무 무거워서.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코코로에게 용기를 받지 않고 내 힘으로 말하고 싶은거야."

"..미사키가 그렇다고 말하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미사키의 슬픈 얼굴을 보면 가슴이 꾸욱하고 조여서 괴로워져.."

울상이 된 얼굴로 가슴을 한손으로 누르고있는 코코로는 절대 오늘만큼은 웃게만 해주고 싶었던 나에게 치명적인 정신적대미지를 줘서 역시 나는 자격이 없는게 아닐까하난 자책을 되풀이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미사키. 우리 술을 마시자. 술을 마시면 솔직해지거나 좀 더 대담해지잖아? 그렇다면 미사키는 혼자 힘으로 말 할 수 있을거야!"

"엣..? 아, 아니! 그정도로 마시면 좀 곤란해지는데?!"

좋은 생각이 났다고 생각하면 순식간에 실행해버리는 코코로답게 이미 중후한 인상의 웨이터를 호출해서 이곳의 와인셀러를 털어버릴 기세로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여러곳을 물어봐서 제일 적당한 가게였기 때문에 너무 비싼 와인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두명이서 그렇게까지 마실 수는 없다고할지 취할때까지 마시면 오늘까지 노력한게 전부 물거품..
아니 저렇게 즐거워하는 코코로를 봤으니까 조금 호화로운 데이트를 했다고 생각하면 될까..

절반 정도는 목적을 포기해버린 나는 코코로가 멋대로 시킨 와인과 여러가지 칵테일들의 화려한모습에 조금 질려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마실 수 없을텐데 나머지는 전부 어떻게 되는 걸까?

"정말 종류가 많네! 미사키는 어느걸 마셔보고 싶어?"

"나, 그다지 술은 잘몰라서.. 너무 쓴건 싫지만.."

이미 술을 마시자고한 이유는 머릿속에서 사라졌는지 코코로가 쓴건 싫다는 내게 화이트와인을 권유해왔다.

딱히 거절 할 필요도 없으니까 건네받아 한입 마셔보면 달달한맛이 거부감없이 술술 넘어갔다.

평소 가끔씩 마시는 값싼 맥주랑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한 느낌이 어쩐지 술에서조차 급의 차이를 느끼는거 같아서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미사키가 마음에 들어하는것 같아서 다행이야. 좀처럼 술은 마시지 않으니까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까 했는데."

"그러고보면 코코로는 상당히 다른사람이랑 모임에서 마시는편이지. 취해서 돌아오면 달라붙으니까 조금 곤한한데요-."

"어머, 미사키 싫진 않잖아?"

활짝 웃는 표정이 거짓말은 용서하지 않을 분위기를 풍겨서 나는 아무말도 못했다.

술에 취해서 검은옷의 사람들이 데려오는 코코로는 안전의식은 어디갔는지 무서울정도로 걱정되지만 그런 코코로를 보살피는것은 꽤 마음에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물을 주면 후와악 꽃이 피는것 같이 웃어준다던가 안아올려서 옮길때에 목에 팔을 걸어 의지해준다던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을 코코로의 모습을 보면 내가 코코로에게 정말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좀 더 소중히 하고 싶어진다.

"음. 싫진 않은데.. 걸즈 밴드 파티 모임 때에 폭주하는것은 멈추자. 이치가야씨 저번에 좋은 위장약 아냐고 나한테 물어봤으니까."

"그걸 왜 미사키에게 묻는 걸까? 미사키는 의사가 아니잖아."

정말로 모르는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코코로가 다음에 만날때도 자제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이해했다.

미사키는 조용히 아리사의 위건강에 묵념을 했다.

거침없이 술잔을 비우는 코코로는 결코 술에 약한것은 아니다.

하지만 즐거운것을 정말 좋아하는 코코로는 맛있는것도 알코올에 취하는 기분도 좋아하기 때문에 참을 생각을 하지 않을 뿐이다.

정말 자신의 기분에 솔직한것은 부럽지만 자신은 절대 저렇게는 살 수 없겠지.

"그러고보니 미사키가 취한 모습은 한번도 본 적 없는것 같아. 미사키는 술에 강한 걸까?"

"생각해본적 없는데. 그렇게 많이 마셔본적도 없고.."

"미사키의 술주정도 한번 보고 싶은데! 저번에 카오루가 취해서 치짱을 찾는 모습은 정말 귀여웠어요. 미사키, 취해 보지않을래?"

"하아? 취한다는거 일부러 하는 행동은 아니지.."

흥미진진 이쪽을 쳐다보는 코코로에게는 미안하지만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는 미사키에게 취한다는 무방비인 일을 한다는건 어려운 일이었다.

뭐, 내가 술에 취했을때 어떤 주정을 부리는지는 좀 흥미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코코로는 우리가 왜 지금 술을 마시게 됐는지 이유는 기억하고 있을까.

이번에는 붉은 와인의 향을 음미하는중인 코코로가 여길 보고있진 않은지 흘끗 확인하고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반지곽을 만지작거렸다.

건네줄 반지와 생각해둔 프로포즈의 말도 막상 행동에 옮기려면 역시 용기가 나지 않는다.

역시 아직 나는 코코로와 함께가 되는건 이른게 아닌지 침울해져도 이미 코코로의 관심은 다른데도 가버려서 미사키는 괜히 분한 마음에 근처에 있던 술잔을 집어 확인도 하지 않고 벌컥벌컥 들이켜버렸다.



----------

오랜만에 보는 미사키는 수척해져 있었다. 기울이는 잔을 든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일렁이는 붉은 액체 너머로 보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에 마음이 편하지 않아, 저절로 미간이 좁아졌다. 잔에 시선이 쏠린 상대방은 알아차리지 못했겠지, 알아차려도 술이 쓰다하고 넘기면 되는 일이였다.

빙글, 잔을 돌리는 데로 안의 액체는 요동쳤다. 테이블 위에 즐비해있는 병과 잔들을 보며 너무 많이 시켰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다 마시지 않을 거지만 말이다. 잔 끝 모양을 따라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딱히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잘 취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지만 마시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아마 어릴적부터 칵테일이나 샴페인들을 파티가 있을때마다 마셔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가끔 선물로 와인이 들어오기도 하니깐, 술을 마시면 가져다 줄거라 생각하는 고양감은 내게는 즐겁지 않았다. 술을 즐길려고 마시는 사람들을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는 거겠지, 탕, 청명하지도 탁하지도 않은 울림이 컵안에 작에 일렁였다. 울림을 따라 손톱이 잘게 떨린다.

그렇다고해서 술자리는 마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마실 필요가 없는 자리라면 더욱이 거부할 필요는 없다. 사람을 만나는건 싫어하지 않으니깐, 오히려 좋아하니깐,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과 마시다보면 주체를 하지 못해서 날뛰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주로 카스미랑 하구미 일까, 그때마다 챙겨주는 아리사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술을 마셨다는 핑계를 델 수있으니깐...

아, 얼굴에 열이 올라올까 손등을 볼에 데어본다. 생각만으로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인상 쓰다 웃다가 아무래도 제정신은 아닌거 같다. 술기운때문일까, 움직임에 따라 요동치는 액체를 보다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부루퉁한 모습으로 연거푸 술을 거머넣는 미사키가 보였다.

사귀는 동안 미사키가 술을 마시고 취하는걸 본 기억이 없어서 반쯤 농담으로 취해보라고 권했지만...저렇게 마시면 걱정이 된다. 가끔 미사키 집에 가면 부엌 한켠에 찌그러진 은색의 알류미늄 캔을 보면 술을 즐겨 마시지않는 거 같았다. 그런 미사키에게 다양한 술을 알려줄 수 있다는 들뜬 마음에 여러 종류를 시켰다. 지금의 미사키를 보면 맛을 보는게 아니라 억지로 마시고 있는 거 같았다.

정말로 취할 생각인걸까, 마주 앉은 미사키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탁, 천이 깔린 테이블 위에 작은 소음이 생겼다. 연노랑을 띠는 투명한 액체가 잔 안에서 요동쳤다. 지금 미사키는 무슨 생각일까, 눈꺼풀에 가려져있던 청회색의 눈동자가 빛을 받아 반짝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애틋한 시선이 얽혔다.

알 수 없는 울렁임이 느껴져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마주친 시선에 담긴 의문에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이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방금...조금..., 검은 색이 완연한 하늘에 창은 거울이 되어 안을 비추고 있었다. 수많은 빛들이, 동공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시큰한 느낌에 눈꺼풀을 내려 빛을 가렸다. 흐릿한 시야에는 거울 너머가 보였다.

가로등에 만들어진 주황 빛의 길이 보였다. 그 길 주변을 가득채운 건물들과 그 위를 달리는 붉은 차들이 자아내는 모습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이런 곳을 예약할려면 꽤나 힘들었을 텐데, 노력한 흔적이 보여 작게 웃었다. 내가 웃는 모습에 의아한 눈동자가 이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왜 그래?'

'아무것도'

입모양으로 물어보는 것에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금새 다른 곳을 향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창문을 보는 척하며 미사키의 흔적을 쫓았다. 얼핏 한숨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내가 추천한 화이트 와인 외에도 테이블에 놓인 칵테일로 손을 뻗는 게 보였다. 술을 마셔서 얼굴이 붉어졌을 줄 알았는데...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흠...턱을 괴고 자세히 들여다봤다. 숨이 가쁜지 호흡을 고르며 눈을 감는 게 보였다.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괜찮은 걸까ㅡ,

"미사키, 너무 급하게 마시는거 아니야?"

"...어?"

"취하라고 했다고 정말로 취할 생각이였던거야?,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돼"

별 말 없이 고개를 숙여 본인의 손에 들린 분홍색의 액체를 본다. 멍하다, 본인이 얼마나 마신건지 자각하지 못했던 걸까, 살짝 웃었다. 황급히 잔을 내려놓는 손이 보였다.

"아...미안, 나 잠시...자리 좀..."

드륵, 불쾌한 마찰음이 일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녀는 정돈되지 않은 걸음으로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걸까, 금새라도 쓰러질거 같은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검은 옷입은 사람이 따라가는게 보였다. 불편하게 뻗었던 몸을 의자에 묻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빈 잔을 드니, 언제온 것인지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와인을 따라주었다.

빠른 속도로 일정량을 채워진 와인은 잔 안을 배회했다. 손 안에서만 잔을 가지고 놀다 도로 테이블 위에 놓았다. 식어버린 흥미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창문 위에, 미사키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떠올랐다. 문득 그 위로 자는 미사키의 얼굴이 덧씌워졌다.

언제였더라, 술을 마신채로 억지부려 미사키의 집에서 잔적이 있었다. 갈증으로 새벽에 잠이 깼을 때, 옆에 누운 미사키를 바라봤었다. 하얗게 질린 채로 잠든 얼굴은 위태로워보였다. 일이 힘든 걸까... 끙, 소리를 내며 미간을 구겼다. 안좋은 꿈이라도 꾸는 걸까, 좁혀진 미간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사키가 잠에서 깨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톡하고 눌렀다.

미사키 주름생겨, 작게 속삭였다. 잠을 자면서도 들은 건지 주름은 이내 사라졌다. 그 모습에 작게 웃었다. 손가락이 닿은 김에 천천히 미사키의 얼굴을 손끝으로 어루었다. 가끔 이렇게 지친 모습을 볼때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한다는 점도 불만이였다. 하지만 미사키가 일을 하는 걸 내가 막을 수는 없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니깐...

미사키가 나와의 차이에 부담을 느낄때 마다, 그녀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불안감을 느낀 적도 있었다. 콧대를 따라 손가락이 움직였다. 사귀기 전부터 두려움에 본인을 숨겼던 미사키때문일까, 사귄지 오래되었음에도 불안감은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녀도 마찬가지겠지, 그런 그녀에게 반지를 선물 한적있었다. 본인은 원하지 않아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시선이 가끔 내 손에 자리잡은 반지를 쫓는 걸 안다. 손을 잡을 때마다, 반지의 감각에 살짝 웃는 것도 안다. 만날때 마다, 나랑 같이 있는 게 꿈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것도 안다. 참, 그렇게 보면 미사키도 바보다. 괜한 마음에 코를 꾹하고 눌렀다. 작게 오물거리며 불평하는 입에 살짝 웃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위안을 얻는 건 나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너를 싫어할리 없잖아, 답을 바라고 말한건 아니였다. 얼굴을 쓸던 손을 내려 비어있는 미사키의 손을 맞잡았다. 손 안에 퍼지는 체온에 작게 웃음지었다. 손가락을 만지다 느껴지는 이물감에 알 수 없는 만족감이 쏟아났다. 미소지었다. 오늘은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것만 같았다. 아, 이럴때 하는 말이 뭐더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음... 그냥 미사키 생각?"

아... 내 말에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언제 돌아왔던걸까, 민망한지 목을 풀며 앞에 놓인 물을 마시는게 보였다. 아까보다는 혈색이 돌아와있었다. 머리에서 기억 속의 미사키가 지워지지 않아 멍하니 앞에 앉은 미사키를 바라보았다. 미사키도 적은 양을 마신게 아니지만 술이 쎈걸까,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리는게 보였다.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나는 믿고 있다. 미사키가 두려움에 눈을 감고 피하더라도 언젠가는 답을 들고 올거라는 걸, 항상 그렇게 해왔고 그게 미사키를 강하게 만든 다는 걸 알고 있으니깐 말이다. 테이블 위를 방황하던 손가락들이 멈추고 굳게 다물어졌던 입이 열리는 순간이 온다는걸,

"코코로, 할 말이 있는데..."

알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화려한 곳보다도 더 아름다운걸 내게 선사할거라는 걸,

"어머, 드디어 미사키가 말해주는 걸까? 기대되는 걸"

결심에 찬 청회색의 눈동자가 나를 올곧이 바라본다. 울림이 더욱 커져만 간다. ...아, 생각났다. 이럴때 하는 말, 가볍게 입맞추며 속삭였던 말

"나, 오쿠사와 미사키는..."

미사키, 사랑해
.
.
.
너가 마주한 나는 어떻니?


--------

“아…미안, 나 잠시…자리 좀…”

코코로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술을 마시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상당한 양을 마신 듯 얼굴이 뜨겁고 균형을 잡기가 힘들다.
맞지 않는 초점을 두 손가락으로 미간을 눌러 맞추고 코코로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게 최대한 괜찮아 보이도록 걸어 나오려고 했지만 내가 봐도 내 발걸음은 이 사람은 금새라도 쓰러질 것 만 같이 보였다. 발걸음 조차도 내 뜻대로 안되는구나. 그게 괜히 서러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방금 전과는 다른 목적으로 미간을 눌렀다. 평소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데 역시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신 걸까

야경이 아름답다고 유명한 곳이기 때문인지 레스토랑은 한 쪽에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테라스가 존재했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테라스로 통하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의자에 앉아 숨을 내쉬자 속에 고여 있던 열이 입을 통해 밖으로 내보내지는 것 같았다. 새하얀 입김이 공중에 천천히 흩어지다가 강한 바람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알코올에 의해 뜨겁고 멍한 머리가 차가운 바람을 맞고 점점 식혀지는게 느껴졌다. 힘없이 반쯤 감고 있던 눈이 떠지고 알코올에 의해 멈춰 있던 사고가 움직이며 열기에 흐려진 이성이 돌아왔다. 냉정한 사고가 가능해진 나는 머리를 쥐어 잡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뭐하는 거야 오쿠사와 미사키…”

오늘이 어떤 날인데 긴장을 했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이렇게 중요한 날에 과음하고, 코코로를 걱정시키고, 술 깨기 위해 코코로를 혼자 두고 자리를 비우다니. 아, 최악이다.
머리를 쥐고 있던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리고 의자 등받이에 완전히 몸을 맡기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 속에 넣어 둔 정사각형의 반지 케이스가 만져졌다. 눈을 감으며 손에 닿은 반지 케이스를 만지니 이 날을 위해 준비했던 일들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힘들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조언해주는 사람들이,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무엇보다도 나의 말을 들었을 때 기뻐하는 코코로의 모습을 떠올랐기에 힘들어도, 지쳐도, 도망하고 싶어도 버틸 수 있었다.
그래, 무엇을 걱정하고 있던 걸까. 정말이지 나는 아직도 겁쟁이인 모양이다.

“미사키님, 머리를 식히는 것은 좋으나 찬바람이 강합니다. 슬슬 안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비틀거리며 자리를 벗어난 내가 걱정되었던 걸까 어느새 따라와 내 뒤에 자리 잡아 서있던 검은 옷의 사람이 말했다. 솔직히 좀 놀랐다. 따라오고 있다고 느끼지 못 했는데… 아까 전의 나는 정말 많이 취해 있었구나. 과음하고 있는 걸 멈춰준 코코로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게 된 원인도 코코로지만.
크게 심호흡을 하고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자리에서 일어난 몸은 테라스에 오기전과는 다르게 비틀거리지 않았고 초점도 똑바로 맞으며 발걸음도 평소와 같이 반듯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추운 것보다는 코코로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으니까.
테라스에서 돌아오니 홀로 와인을 마시고 있는 코코로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빛의 두 눈은 먼 산을 보는 것처럼 어디에도 시선을 두지않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음… 그냥 미사키 생각?”

의자에 앉으며 묻자 내가 온 것을 눈치챈 코코로가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너는 항상 그렇게 부끄러운 말을 휙휙 내뱉는구나. 알코올에 의한 열과는 다른 열이 올라와 겨우 식혀 놨던 얼굴이 다시 뜨거워지는게 느껴졌다.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꽉 조여 놨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빈 컵을 내려놓고 코코로와 시선을 마주치자 마자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게 마치 처음 레스토랑에 들어왔을 때로 되돌아온 것 같다. 테라스에서 다짐을 했는데도 막상 코코로의 앞에만 서면 이렇게 긴장되고 손을 가만히 놔두는게 불가능 했다.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숨이 막혔다. 깍지를 낀 손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아 무릎에 문지른 뒤 주먹을 꽉 쥐고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놔두고 다시 코코로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고개를 들어보지만 상냥한 황금빛이 보일 때 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린다. 잠깐이지만 보인 부드럽게 웃으며 가만히 나를 보는 코코로의 모습에서 의심 없는 신뢰가 전해져 오는 것 같아 이대로 자리를 피하고 싶어 졌다. 하지만 그래도 피하지 않아 도망가지도 않아. 그렇게 다짐했으니까.

“코코로, 할 말이 있는데….”

아래로 내려가 있던 시선을 올려 겨우 시선을 맞췄다.

“어머, 드디어 미사키가 말해주는 걸까? 기대되는 걸”

기대감에 반짝반짝 빛나는 너의 두 눈. 눈부시고 아름다워 나 같은 사람이 계속 눈을 맞추고 있어도 될까 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봤다. 부드럽게 웃는 표정이 잘 했다고 말한 기분이 들었다.

“나, 오쿠사와 미사키는…”

진심을 전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보고.
어디선가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주머니속을 몰래 확인하고 심호흡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만 해보지도 않았는데 걱정부터 하는 버릇은 여전하고,”

내가 일어난 것에 의해 같이 자리에서 일어난 코코로의 곁으로 한 발자국 내딛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겁먹어 미리 도망가려는 틈을 만드는 겁쟁이지만,”

심장이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다.
마른 침을 삼킨 후 한 박자 쉬고 심호흡.
힘이 풀릴 것 같은 다리에 다시 힘을 주고 한 발자국 내딛었다.

“당신을, 츠루마키 코코로를, 사랑합니다. 당신의 옆에 나란히 서서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을까, 혀를 씹지 않았을까, 말을 정확히 했는지 불안해졌다.
하지만 크게 뜬 눈망울이 나의 불안은 필요 없는 불안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당신과 같은 길을 걸어가는 건 자신에게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 바보같은 사람입니다만”

긴장에 덜덜 떨리는 손을 한 번 꽉 쥐고 한 쪽 무릎을 꿇고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다시 한 번 심호흡. 마른 침을 삼키고 숙여지려는 고개에 힘을 줘 코코로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용기를 주는 너에게
언제나 기다려 주는 너에게
언제나 나를 이끌어주는 너에게
언제나 사랑스러운 너에게 전하고 싶은 말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코코로는 나와 시선을 마주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 말이 없는 코코로에 계속 억누르고 있던 불안이 점점 커졌다. 고개가 점점 내려가고 손이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역시 너무 서두른 걸까.
등 뒤로 식은 땀이 흐르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뭔가 말을 해야

“코코…로…!?

쿵-하고 몸에 충격이 왔다. 한 쪽 무릎을 꿇은 상태라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충격에 의해 손에서 날아간 반지 케이스를 검은 옷의 사람이 서둘러 잡으려는 모습과 시야 끝에 비단같이 흩날리는 금발이 보였다.
딱딱한 바닥에 넘어진 것 때문에 엉덩이는 물론이고 내 몸의 무게를 버틴 양 손도 저릿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것보다 내 품에서 나를 꽉 끌어 안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코코로의 모습이 더 중요했다.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지만 기쁨이 묻어나는 웃음을 지은 상태로 나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고 있다.
커진 불안감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지금은 그 입에서 나올 말이 너무나도 듣고 싶어졌다. 저릿한 손을 들어 한번 주먹을 쥐었다 피고 코코로를 끌어 안았다. 다른 손으로는 눈물을 닦아주고 볼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천천히 코코로가 느낀 걸 말하면 돼. 코코로의 말을 듣고 해석하는 건 내 전문이니까.”

코코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두 손을 모으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 미사키. 나 너무나도 행복한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와. 이건 슬픈 걸까? 하지만 슬프다고 하기에는 계속 원하던 걸 얻었을 때와 같이 세상이 반짝이고 웃음이 나와”
“코코로, 눈물은 기쁠 때도 나오는 거야. 그러니까 코코로는 지금 너무나도 기쁘다고 생각해”
“그렇구나 역시 이건 기쁨이구나! 고마워 미사키! 사랑해!”

꽉 끌어 안아오는 코코로를 나도 끌어안으며 슬슬 올라오려는 입고리를 숨기기 위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코코로, 나 아직 제대로 된 답변을 못 들은 것 같은데”

“어머, 그랬던가?”

“코코로….”

“후후, 농담이야! 미사키, 다시 한 번 더 말해줄래?”

“한 번 더 라니….”

뭐, 괜찮으려나.
전과는 다르게 많이 긴장되지 않았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네 기꺼이!”


--------------------
3인합작
초반-백오판다(@tnals1055)
중반-sigma/냐흠 (@ sigma_ow)
후반-가루렌 @garuren_FGO
Posted by 백오판다
,

1.



커튼 사이로 비치는 아침햇살에 눈을 뜨니 보이는 별빛을 머금은듯한 머리카락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아서 깜짝 놀란다.
천개가 달린 침대도 조금 싫은 기억이 있는 침대의 기둥이나 고급스런 가구들도 쓸 때마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라고 생각하지만 평생을 이 아가씨에게 잡힌 몸으로써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겠지.

보드라운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서려고 몸을 돌리려는데 가는 팔이 배에 돌려져 다시 침대로 이끌었다.

"코코로 오늘 카논씨랑 하구미, 카오루씨가 오기로 했잖아. 잊어버린건 아니지?"

미국에서 돌아온지 며칠되지 않았지만 하로하피의 활동재개을 위한 라이브의 준비를 시작하기로 했다.
기다려준 팬들이나 걱정시킨 걸즈밴드파티 멤버들을 위해서도 성실히 노력하기로 마음속으로 다짐했는데 리더인 코코로는 오늘 아침을 즐기고 싶으신 모양이다.

스멀스멀 올라온 손이 배를 매만지는것이 심상치않았다.
행복을 주는만큼 배로 돌려주고 싶어하는 코코로가 어제밤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잠든것을 경계했어야 했는데 같이 밤을 샌 만큼 나도 졸린 바람에 눈치채지 못했다.

"후후후. 미사키. 약속은 오후잖아.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지않아?"

순식간에 침대에 푹 깔려버린 태세는 키를 추월당해버린 지금은 코코로인데도 위압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게다가 이글이글 불타는 사자와 같은 맹수의 눈이 이대로 놓칠 마음이 없다는것을 보여주고있었다.

결혼식을 하고 미국에서 같이 동거하는 동안 배려해야 하는 부분과 사양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을 나름 파악한 코코로는 내 적절한 한계선을 정의한 이후로는 상당히 가감이 없어졌다.
지금조차 안된다고 말리기는 하지만 정맣 싫은 기분은 아니란걸 알면서 하는것이니까 이길 수가 없다.

"그래도 연습이 있으니까..읏.. 적당히 하고 끝내야해."

말하는 도중에도 집요하게 배를 문지르는 손이 얄미웠다.
아무래도 대학생이 된 후 운동이나 아르바이트, 여행과 같은 액티브한 활동을 많이해서인지 단련이 된 몸이 코코로의 기호에 맞았는지 이런때가 아니라도 스킨쉽은 많은 편이었다.
그래도 감질날 정도로 계속 배만 만지작되는건 처음에 거절하려던 말에 삐졌던걸까.

"언제나 내가 먼저 지쳐서 잠들때마다 조금 치사하다는 기분이 들어. 미사키한테 내가 처음이 아니란게 기분이 나쁘다는 이 느낌은 뭘까? 무언가 매우.. 가슴이 조여들고.. 미사키를 꽁꽁 묶어버리고 싶어져."

"윽.."

귓가에 가까이 다가간 코코로가 귓불을 핥더니 그대로 고개를 내려서 어깨를 콱 물었다.
꽤 힘을 담아서 물었는지 피부가 조금 까진것 같았다.
게다가 그 부분을 코코로가 혀로 핥아서 쓰라림이 직통으로 느껴졌다.

내가 코코로나 하로하피를 두고 떠났던것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지 이런식으로 코코로가 모르는 나랑 떨어져있던 사이의 영향이 수면으로 떠오르면 이렇게 소유욕을 나타냈다.
하지만 내가 코코로에게 필요로해진다는 이 느낌을 나도 싫어하지는 않아서 나도 그런 코코로의 등에 팔을 돌려서 꽉 안아줬다.

어쩌면 이런것을 다른 사람은 삐뚤어진 관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서로가 만족하면 된것이 아닐까.

"이런 기분이 질투라는것은 알고 있는데. 그래도 생각하는것을 멈출 수가 없어. 그런데 또 다시 그때처럼 내가 미사키를 묶어버리면 도망칠지도 모르니까 할 수 없어.. 어떻게 하면 좋은걸까. 미사키는 방법을 알고있어?"

답이 없는 질문에 방법을 생각하는게 항상 내가 하는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좋아하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소중하고 언제까지나 함께 하고 싶지만 미래는 모르니까.

그러니까 나는 그런 코코로를 조금이라도 안심하게하기 위해서 내 사랑을 전한다.
겉으로는 내키지않는척 하던 내가 갑자기 솔선해서 키스를 하니 코코로는 놀란듯 굳었지만 곧 어울려왔다.
이어진 은실 너머로 아직 전희일 뿐인데도 포만감에 가득찬 얼굴을 하고 있는 코코로를 보니 벌써 고민따위는 날아간것같았다.

"역시 미사키는 나만의 마법사네. 일순간으로 전부 안좋은 기분이 날라가버렸어. 미사키라면 마음만 먹으면 바로 세상의 모두를 웃는 얼굴로 만들 수 있는게 아닐까?"

"아-. 이것은 사랑하는 사이 밖에.. 크흠..그..그러니까 코코로에게 밖에 못쓰는 마법이니까. 세상을 웃는 얼굴로 만드는건 하로하피에서 하도록 하자."

난처한 나머지 돌렸던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향하자 전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었던건지 도리어 내 말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이런 권모술수에 능해진 코코로는 가끔 자신이 원하는 말을 듣기 위해서 이런식으로 나를 유도할때가 있었다.

단순히 사랑한다는 말에서부터 너밖에 없다는 말까지 예전이라면 절대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을 깊은 속까지 다 웃는 얼굴로 꺼내버리는 코코로가 아니라면 나는 이런 낯간지러운 말은 전할 수 없었겠지.

"나도 미사키가 그 마법을 다른 사람에게 쓰는건 싫으니까 어쩔 수 없네! 그래도 하로하피의 모두라면 마법같은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세상을 웃는 얼굴로 만들 수 있을테니까."

만족했는지 멈춰있던 손이 스르륵 움직임을 재개한다.
결국 듣고 싶었던건 이미 기억도 안나는 얼굴모를 누군가를 견제한거겠지.

보일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진한 키스마크를 남기는것은 좀 봐줬으면 하지만 말려도 듣지 않을것을 아니까 조금이라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하고 싶어서 코코로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무리 내가 말로 안심시키려고 해도 코코로 스스로가 납득하지 않으면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는 걸까.

어떻게하면 남아버린 상처자국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미국에 가서 나를 걱정해주던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난 이후에 바로 코코로와 함께 할 수 있는 환경을 정돈했었다.

일단 혼자 살던 방에서 이사할 집을 찾는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연하다는듯 짐만 가지고 오라는 코코로의 말에 따라간곳은 일본의 츠루마키저택과 비슷할 정도로 큰 저택이 있는데다가 이미 내 방까지 마련되어서 들어가 살기만 하면 되게끔 준비되어있었다.

"미사키, 어때? 마음에 들어? 아빠가 준비해준 집이야. 여기 미사키에게 전해달라는 편지도 있어."

검은옷의 사람이 말한대로 코코로의 아버지는 내가 코코로의 옆에 있는데에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내가 본 코코로도 내가 없었을때의 코코로보다 훨씬 나아보였던 상태였는지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랐었으니까.

어디선가 지켜봤을 검은옷의 사람이 전해준걸까?
편지에는 결혼은 어디에서 하고 싶은지같은 이미 결혼하는 사실 자체는 정해진 모양이다.
불만은 없지만 억울한 기분은 어디에서 풀어야할지..

"일본은 법적으로 무리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허가된 곳도 많으니까 문제없어. 하지만 그러려면 준비가 필요하니까 미리 정해줄 필요가 있는 모양이라 바로는 할 수 없다고해서 조금 아쉬워."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래도 다른 사람들도 초대하려면 그게 사정이 더 좋지 않을까? 카논씨나 카오루씨의 휴일이라던지 하구미도 대학생이고.. 코코로도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거잖아."

이치가야씨나 토야마씨는 같은 대학이라니까 이치가야씨한테 물어봐두면 되려나.
이번에 신세를 진 다른 밴드들에도 권유해보고 싶지만 로젤리아나 파스파레는 안올지도 모르겠네..

누구를 초대할지 코코로가 즐거워 할 만한 이벤트를 넣을지 아니면 진지한 약속을 나누는 장소에서 그건은 NG가 아닌지 고민하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코코로가 빤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아. 우리 가족도 딱히 거부감은 없는거 같으니까 결혼식에는 와줄거같아. 조금 놀라시긴했지만 일본에 돌아올거라는데에 기쁘신 모양이라.."

"놀랐어. 미사키라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다든가해서 둘만으로 결혼식을 하자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일에서 코코로는 놀라고 있었다.

"어째서? 코코로는 별로 알려지고 싶지 않은거야?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가족은..으억"

"아니. 미사키 너무 좋아-!"

달려들어 안기는 코코로를 넘어지지 않게 마주 안아주고 한숨을 쉰다.
빈도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돌연 뛰어들어 안기는 코코로가 다치지는 않을지 항상 긴장한다.

게다가 지금은..그 사귀는 사이기도 하고.. 조금은 의식하는 이쪽을 배려해주기를 바란다.

"미사키도 모두에게 우리 사이를 알리고 싶어 해 줄줄은 몰랐어. 하지만 나는 미사키가 나와 특별한 사이라고 모두가 알아줬으면 했으니까 어떻게 말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거든. 미사키가 싫어하는 방법은 이제 쓰고 싶지 않으니까.."

"아-. 확실히 마음이 알던 나라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네. 그때는 주위를 너무 신경써서 솔직하지 못했으니까. 지금도 아예 그렇지 않는가 하면 다르겠지만.. 그래도 나도 보통으로 코코로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와 특별한 사이인것을 알리고 싶은 기분 정도는 있으니까."

"같은 마음이라 기뻐! 으음.. 하지만 곤란하네. 자꾸 자꾸 즐거운 기분이 흘러나오는데 이대로라면 결혼식에서 모두 들려줄 수 없는 양이 되어버릴거같아."

"그렇다면 나머지는 너와 나 둘이서 듣자. 역시 전부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도 무언가 아까운 기분이 들거든."

같은 집으로 향하면서 밝은 얼굴로 흐르는 콧노래를 이번은 녹음하지 않고 내 머릿속에 저장한다.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않는 코코로와 나만의 감정이 담긴 노래정도는 둘만 간직해도 되지 않을까.

행복해져서 저절로 웃는 얼굴이 되는 파격적인 효과의 마법이지만 누구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아져서 코코로에게는 너도 마법을 부릴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너무나도 다른 우리가 항상 마주보고 있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었다.
일단 사귀기 시작하자마자 탐내는건 너무 그런 목적인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에 어차피 당장이라도 결혼으로 골인할 생각인 코코로를 보면 그때까지 기다릴까 생각했었다.

물론 즐거운거 아주 좋아를 표명하고 다니는 코코로에게 그런 미적지근한 기피는 통할리가 없어서 새로운 보금자리에 이사를 끝낸 새벽에 굿나잇 키스를 하자마자 침대에 눕혀졌다.
진짜 겨우 도착했다-. 하고 이제 자는 일만 남았다고 방심한 사이 일어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너무나도 가까운 코코로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 할 수 밖에 없었다.

"미사키 굿나잇 키스도 귀여워서 좋지만 좀 더 많은걸 원하는건 욕심인걸까?"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당당한 얼굴로 허락을 구할 생각도 없으면서 일단 의견을 물어본다는 느낌이 견딜 수 없다.
그래도 이것이 코코로 나름의 최대한 배려한 행동인것도 알고 침대에 쓰러진 순간 내 머리를 받히고 있는 손은 아마 혹시라도 내가 다치지 않을까 생각한 행동이겠지.

그리고 이때 나는 코코로에게 일체 그러한 경험은 없다는걸 알고 있었으니까 많은거라고 해도 좀 더 자잘한 여러번의 키스라던가 뭐 그런 종류의 애정의 교류같은 스킨쉽이라도 생각해버렸다.
말하자면 하나도 티가 나지 않지만 처음으로 하는 관계에 직접 권유를 한 긴장하고있던 코코로에게 실컷 기대만 하게 하고 잠들어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편견이란걸 알아도 코코로가 직접 그러한 일을 하자고 말한다는걸 떠올리지도 못했던 내가 그때 코코로가 얼마나 상심했는지도 물론 알리가 없었다.

"아! 얼굴을 공개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니 이제 가면은 쓰지 않는가 보구나. 그런데.. 처음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러 왔을때 봤던 얼굴과는 한참 다른 분위기인걸. 돌아가서 좋은 일이 있었나보군."

오랜만의 아르바이트에 나는 가면을 쓰고 가지 않았다.
미카엘과 미셸은 아쉽지만 이제 나에게는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약한 겁쟁이인 나를 위해서 털의 빛이 바래도록 노력해준 미셸과 던져 날라가서 산산조각이 된 도피의 증거인 미카엘은 이제 편안히 쉬어주기로 했다.

성대하게 장례식을 하려는 코코로를 막는것은 조금 식은땀이 날정도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또 다른 나라고까지 생각했던 인형옷과 가면이긴 하지만 장례식은 조금 다른것 같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은게 아니라 아직도 어딘가에서는 세상을 웃는 얼굴로 만들기 위해서 열심히 돕고 있을거라고 생각해버렸기 때문이다.

"네. 뭐.. 그래서 말인데요. 아르바이트를 올해까지만 하고 그만둬야 할 것 같아서요. 계속 일해줄 수 없는가 하는 제안은 고마웠지만요.."

"아아.. 어차피 차일걸 알고 한 제안이니까. 그도그럴게 너 처음이랑은 완전히 달라졌잖아? 마지막보루같은 얼굴을 하고 왔을때는 여기서 영원히 묻혀버리고 싶은것 같았지만 최근의 너는 다시 날아오를 자리를 찾는 날개의 상처가 나아가는 새 같았어. 떠날걸 알고있었지."

유쾌하게 그렇게 말하고는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악수를 나눴다.
아직 올해가 지나가기에는 한참남았는데 농담 삼은 악수를 나눈 후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도망친 장소에서 살 방법으로 미련이 남았던 DJ를 하기 위해서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하려고해도 수상한 곰탈을 쓰고 디제잉을 한다고 말하면 번번히 퇴짜를 당했었다.
그럴때 한번 해보라고 기회를 준 사람이 이 매니저였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때는 저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거든요. 모든걸 다 버렸다고.. 그래도 잊어버리기는 싫었으니까 생활비를 번다고 핑계를 붙여서 찾아다녔는데 여기가 아니었으면 결국 그만뒀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랬으면 이런 행복한 결말은 맞이 할 수 없었을것이다.
브레멘에 향하는 여정을 계속하면서 소중한 동료와 특멸한 사람도 함께하는 옛날이야기가 현실이 될줄은 그 당시에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미사키! 짐도 다 정리해버려서 구경하러 와버렸어!"

"으앗..! 코코로 뒤에서 갑자기 달려들면 위험하다고 했잖아.. 아, 매니저님 이 아이는 코코로라고.."

"아, 찾으러간다던 소중한게 이 분이셨군. 하하하 너 아주 잡혀살거 같은데?"

무언가 수상한 기류가 코코로와 매니저의 사이에서 흘렀다.
어디서 만난적이라도 있는 걸까?
나중에 한번 코코로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들고있던 헤드폰을 걸치고 일을 하러 디제잉기기 앞에 선다.

"그럼 코코로 지루하면 먼저 집에 가도 되니까. 나는 일하고 올게."

"기다릴게! 미사키의 디제잉 기대하고 있으니까 질릴리가 없잖아?"

방긋 웃는 코코로를 혼자 두고가기에는 불안하지만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검은옷의 사람이라거나 매니저님도 신경써주려는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하고 가보라는 손짓을 하였다.
이래저래 사람들에게 참견하길 좋아하는 매니저니까 이상한걸 물어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코코로에게 다가오는 다른 사람들을 막아줄테니까 안심했다.

성인이 된 코코로는 누가 봐도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비율 좋은 몸매에 프로의 손질이 미치지 않은 부분이 없는 지체에 아름다운 샴페인 골드의 머리카락과 빛나는 금안까지 마치 신이 빚어낸 걸작같으니까.
소시민인 나는 손대기를 주저하지만 이런 장소엔 절벽위는 커녕 하늘위의 별이라도 더럽히기를 원하는 무리도 있으니까.

"그러면 갔다 올테니까 기다려줘. 같이 집에 가자."

"응! 미가키도 일 노력해!"

솔직하게 기다려달라고 말한 나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는 코코로를 뒤로하고 DJ부스에 들어간다.
처음으로 일 하는 모습을 보이는거니까 무언가 좀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눈치채고 부끄러워져서 뜨거워진 얼굴을 손으로 덮어 가린다.

"완전히 팔불출이 되버렸잖아.. 하아. 뭐 원래부터 코코로가 하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든 해내려고 하는것부터 이미 구제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빠져있던거겠지."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서조차 지키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자기애보다 깊이 타인을 사랑하다니 코코로를 만나기 전의 자신이라면 지금의 나를 보고 한심하다거나 이렇게 변하는걸 무서워할지도 몰랐다.

밑에서 올려다보게끔 위층에 설치된 DJ부스는 아래의 상황이 전부 보여서 텐션조절을 하기에 유용하다.
저 밑에서 코코로가 한손으로는 어느새 바텐더에게 받았는지 칵테일잔을 들고 한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그것만으로 오랜만에 이 자리에 선대다가 여기서는 처음으로 미카엘의 가면을 벗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어깨근육이 풀리니까 신기했다.

"자아, 그럼 첫번째 곡을 시작해볼까?"

이빨이 삐죽삐죽한 곰가면을 쓰지 않은 여자아이가 미카엘의 목소리로 시작을 알리자 사람들이 보내던 의혹의 시선이 내 손 아래서 이뤄지는 현란한 스크래치에 금새 환호성을 지르며 미카엘을 연호한다.
나도 덩달아 들뜨는 감정에 왠지 오늘은 즐거운곡만 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Posted by 백오판다
,



미사키는 내가 얼마나 심한짓을 했는지 들려주고 싶었던걸까?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감정이 담긴 노래에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자책이 담겨있었다.
잘못한것은 나인데. 어째서 그렇게 스스로에게 채찍을 치는지 이해 할 수 없다.

"이런 공주님 주인공은 늦게 등장한다지만 오지 않는줄 알고 마중을 나갈뻔 했군. 손수건 필요하니?"

화려함 가면을 쓴 괴도 하로하피.. 아니, 이제와서 속아줄 필요는 없으니까.
가면을 쓴 카오루가 나타났다.

"필요없어. 그보다 공주님의 제안을 걷어찬 괴도씨는 여기에 무슨 볼일로?"

카논 다음으로 찾아간 카오루는 하로하피를 부활시키자는 이야기에는 기뻐했지만 미셸도 다시 돌아올거라는 말에 표정을 굳히고 바로 거절당했었다.
분명 카오루도 미셸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이 마음에 안들었던걸까.

"무대를 내려가 역할을 벗은 연기자에게 연기하기를 강요하는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지. 끝난 역할을 붙잡아 다음의 연기에 영향을 주는것도 그리 좋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미사키에게 미셸을 다시 덮어씌우는게 싫었다는거야? 카오루도 미셸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미셸은 아직도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미사키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서가지 붙잡고 싶지는 않으니까. 너무 오래 의지하기만 했으니 이번에는 내가 도움이 되려고 생각한거야."

돌연 왕자님같은 말투를 벗어던지고 이쪽을 바라보는 카오루는 가면으로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어떤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것 같았다.

"왕자역할은 그만둔지 한참 되었어. 더이상 나에게 가면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코코로 인정해. 모두가 과거에 돌아가기엔 이미 많이 변해버렸다는걸."

"어째서? 다들 그렇게 하로하피를 그리워했는데. 미사키가 떠났다는걸 알았을때는 슬퍼하면서 찾으러 다녔는데. 왜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을 포기하라는거야?"

"포기하라는게 아니야. 미사키를 믿으라는거지. 미사키가 코코로와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을 믿어줘. 미사키는 떠나고 싶어서 떠난게 아니니까 그런 억지스런 방법이 아니라도 코코로와 함께 있을거야."

아무 확증도 없는 꿈같은 이야기를 하는 카오루는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것 같았다.
하지만 카오루는 카페에서의 미사키가 나와 함께하지 못하는 수많은 이유를 울면서 털어놓던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저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반짝반짝을 가르쳐준다던 미사키가 들려준 곡은 나로 인해서 상처받아 자책하는 스스로의 모습.. 도저히 내 옆에 남아줄거라고 생각할 수 없다.

"미사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듣지도 않은 카오루는 모르잖아. 미사키는 여전히 겁이 많고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 내 생각을 강요하는것 말고는 소통하는 방법을 몰라. 아직도 가면 속에 숨어서 설득하려는 카오루와 같지."

작사와 작곡을 하는 실력은 전에 비해서 늘었더라도, 그것을 자발적으로 하게 됐더라도 여전히 관중의 앞에서는 가면을 쓰는 미사키와 상대의 사정보다 옆에 있고 싶은 기분이 앞서서 수갑을 채워 가둔 나.

시간이 지났어도 바뀌지 않은 부분이 똑같은 결말을 부를까봐 무서웠다.

"흠.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이런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특정하려고 한다면 연기자에게 언제까지나 속을 수 밖에 없어. 코코로는 특별함을 알아버려 잃는게 두려워진 나머지 상대의 진심을 보는 능력은 잃어버렸구나."

음악이 절정에 치다르고 괴도 하로하피는 스스로의 망토를 펄럭여 눈 앞을 가린다.
슬쩍 망토를 들어올리고 있는 손의 반대쪽의 손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화려한 괴도의 가면을 벗는다.

"처음부터 이 괴도의 가면에 의지 할 생각은 없었어. 옛날의 코코로라면 알아챘을지도 모르겠는 단순한 연기. 기사님의 활약을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한 광대의 놀음이지. 우리는 이제.. 과거에 남아있을 수는 없어."

손을 휙 내림과 동시에 걷히는 망토자락 너머로 어느새 끝난 노랫소리를 알아챔과 동시에 미카엘의 가면을 벗어던진 미사키와 시선이 마주쳤다.

떠나버린 미사키를 다시 찾아냈을때 형태는 다르지만 너도 나와 같이 예전의 우리의 사이를 그리워한다고 생각하게 했던 마지막 고리가 부수어졌다.
미사키는 이미 과거의 나와 어떤 연결도 가지지 않게 되었다.

"어째서.. 미사키도 웃어주게 되었었잖아. 소중한게 아니었어?"

눈물이 한방울씩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미사키를 다시 옆으로 데리고 오도록 노력해왔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이제 미사키에게 나는 필요없는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떠돈다.
그리고 사실 미사키가 떠났던것은 전부 나에게서, 미셸에게서, 하로하피에서 벗어나고 싶었던게 아닐까하고 생각하면 울음을 멈출수가 없다.

"..기사님에게 혼나겠군. 코코로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르겠지만. 서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으니까. 그때는 그러지 못했지만 지금의 코코로는 듣고 싶은거지? 미사키가 왜 떠났고 어째서 그대로 평온한 관계에 머물지 않았는지. 그렇다면 외면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도록하자."

이곳을 달려나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도망칠 힘도 남지 않아서 그대로 털썩 자리에 앉아버렸다.
어차피 도망가도 그곳에 미사키가 없다면 아무것도 색을 가지지않은 회색빛의 풍경만이 펼쳐질테니 적어도 남은 짧은 시간만큼은 더 미사키의 모습을 눈에 담으려고 했다.

조명 아래의 미사키는 긴장에 떨리고있지만 결심에 굳은 눈은 겨울하늘처럼 맑게 이쪽을 보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 잊어버리는것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기분이 전해져왔다.




가면을 벗은 얼굴에 닿는 공기가 열을 식혀준다.
관중들의 시선이 직접적으로 느껴져서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처음으로 아무것도 덮어쓰지 않고 올라간 무대위에서 이 넓은 공간에 나 혼자만 있는거같은 기분은 조금 쓸쓸하지만 후련했다.

아직도 나에게서 시선을 떼어놓지 못하는 코코로는 어딘가 상처받은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 아직 서 있다.

"안녕하세요. 아무 가면도 인형탈도 쓰지 않고 무대 위에 서는건 처음 있는 일이라 떨리네요. 미셸이자 미카엘인 오쿠사와 미사키라고 합니다."

이때까지 한번도 밝혀지지 않았던 미셸 속의 사람이 공개된것은 꽤 충격적인 일이었는지 미셸의 이름이 혼란스러운 관중 속에서 몇번씩 튀어나온다.
역시 아직도 미셸은 사랑받고 있었던거 같다.

"언제나 모두의 미셸이었지만 죄송합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서 스스로를 들어낸것은 이번 곡은 오직 단 한사람을 위해서 만든 노래이기 때문이에요. 미셸이나 미카엘로써가 아니라 오쿠사와 미사키가 츠루마키 코코로에게 전하고 싶은 감정을 담은 노래입니다."

의외로 시원스럽게 나온 말들에 덤덤하게 움직이는 자신이 믿을 수가 없었다.
줄곧 고등학교때부터 어제까지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얼굴을 들어내고 무대위에 서는 행동을 할 용기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나보다 더 겁을 먹은 코코로의 얼굴을 보면 이상하게 망설임없이 행동 할 수 있었다.

코코로는 본인의 이름이 내 입에서 나올줄은 상상도 못했는지 더더욱 움츠러들었다.
과거의 코코로와 과거의 내가 지금 이 광경을 봤다면 믿을 수 없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와버렸다.
나와 코코로가 바뀌어버렸다면 이곡으로 코코로는 웃는 얼굴을 되찾을 수 밖에 없을테니까.

아무런 꾸밈도 없이 내가 보고 느낀것들의 아름다움을 서술하는듯한 노래는 직전의 노래를 들은 후라면 놀랄 정도로 같은 사람의 노래치고는 담겨있는 감정이 명확히 달랐다.

지치고 지쳐서 그래도 사랑하기에 널 향한 원망도 나 자신에게 돌려 자학하는 비참한 감정과 달리 세상을 여행하며 모든것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노래는 그럼에도 옆에 네가 없다는 그리움과 이 모두와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의 사랑을 네게서 느낀다는 내용이 담겨져있어서 내 감정을 가감없이 상대에게 전하는 러브송이었다.

줄곧 이 노래를 전할 기회는 영원히 없을거라고 생각했지만, 묻어서 잊힐때까지 꺼내려고 했지만 코코로가 웃는얼굴이 되는데 필요하다면 부끄러워도 말해야한다고 이번만큼은 내가 용기를 내야한다고 다짐했다.
일생일대의 내 전부를 담은 사랑의 세레나데에 드디어 말 할 수 있었다는 충족감에 가슴이 벅찼다.

화려한 음도 기교도 없는 노래였지만 오늘 라이브에서 제일 큰 박수를 받고 앵콜요청을 받았지만 급히 사과의 말을 남긴 후에 자리를 떠났다.

내가 라이브를 한 이유인 코코로를 만나기 위해서 달렸다.
내 안에서 제일 반짝반짝한 소중한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숨이 차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코코로가 이 노래를 듣고 이 자리에 남아있지 않을거라고 나는 이미 알고있었다.
옛날의 겁쟁이인 내가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때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한 기분도 믿을 수 없어서 도망쳐버리고는 한다.
혹시 이게 진실이 아니라던가 잃을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애초에 가지는걸 두려워해버리니까.

나도 그랬으니까 알수있었다.
몇년을 떨어져 지내고서야 너도 나와 같이 두려움이라던가 걱정, 후회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걸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나도 과거의 너처럼 무모함과 용기, 상대를 웃는 얼굴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걸 깨달았다.

네가 모르겠다면 전부 가르쳐줄게 그러니까 너도 내가 모르는걸 가르쳐줘.
지금이라면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어떠한 보증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했다.

"오쿠사와님 아가씨께서 부르고 계십니다."

대문의 초인종을 누르자 나를 도망치게 해주려던 검은옷의 사람이 마중을 나왔다.
다행히 짤리지도 않았고 감봉같은 처벌도 받지 않았나보다.

"저희는 사실.. 아가씨도 오쿠사와님도 믿지 못했던거 같군요. 두분도 고등학교때의 당장 무너질것 같던 어린아이가 아니게 되었는데도.. 과한 참견이었습니다. 아가씨를 잘부탁드립니다."

코코로의 방문 앞에서 허리까지 숙여 인사하는 검은옷의 사람은 일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리 두명을 걱정해줬던거겠지.
그야말로 자신이 딸같이 소중히 여기는 아가씨의 명령을 배반할 정도로 생각해줬던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이 사람 역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억지로 미셸을 뒤집어 씌웠을때는 확실히 아가씨의 분부대로 나를 강제했겠지만 필요이상으로 업그레이드 되던 미셸에는 나에대한 걱정과 배려가 묻어나왔었다.

나도 마주 인사하고 방문을 열었다.

방안에서는 여전히 코코로에게서도 나는 달콤한 향기가 흐르고 있어서 예전에는 그렇게도 안절부절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안심이 되어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가 수갑에 묶였던 천개가 달린 침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숨지도 도망치지도 못하는 그 모습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르지만 가까이 가면 불나방처럼 타오를까봐 겁을 먹은 옛날의 나.

그리고 그런 코코로를 알고 있어도 망설임없이 걸어서 그 공간에 비집고 들어가는나는 옛날의 너.

마주한 얼굴은 열기가 느껴질정도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사키는 바보야.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저런 정열적인 고백을 할 수 있어? 나 당황해서 부끄러워서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어."

삐진거처럼 고개를 휙 돌리고 코코로가 말했다.
다시 이름으로 불러주는게 기뻐서 무심코 소리를 내 웃어버리면 이쪽을 째려봤다.
정말 스스로도 무서울정도로 코코로가 귀여워보여서 무심코 놀리고 싶어져버린다.

"하지만 전부 내 본심이니까. 코코로가 말했었잖아? 스스로에게 거짓말하는건 그만두라고. 해보니까 엄청 후련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어. 무엇보다 지금 코코로의 그 얼굴을 보면 잘했다고 나를 칭찬하고 싶은데."

"미사키 오늘따라 심술쟁이같아. 하지만 모두 용서해줄게."

그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매달려있었다.
활짝 웃는 얼굴에 눈물은 어울리지 않아서 무심결에 다가간 나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쓸어 닦아버렸다.

"그런데 왜 울고 있는거야? 이제 아무것도 문제될게 없는데. 나도 코코로를 사랑하고 코코로도 이제 그 마음을 알아챈거잖아."

주변의 사정도 전부 이미 코코로가 처리해버려서 남은것은 해피엔딩으로 걸어가는길 뿐인데.
진심으로 웃는 얼굴이 되었어도 여전히 코코로는 울고있었다.

"특별한것이 생기는게 이렇게 괴로운일이라고 미사키는 먼저 알고있었던거야? 미사키의 라이브, 사랑이 곧바로 전해져서 마음이 따끈해졌으니까 용서할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면 미사키 떠나버리는거잖아."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의 방울마다 곤혹한 내 얼굴이 맺힌다.
나와 코코로는 서로에 대해서 이해하면서 너무나도 닮아버린것 같았다.

특별한게 생겨서 잃는것부터 생각해버리다니 전의 코코로라면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럼 변해버린 나도 과거에는 할 수 없었던 말을 꺼낼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코로. 나는 아직 미국에 남기고 온 일들이 있어서 바로 돌아올 수 없으니까. 이번은 코코로가 나를 따라와. 그리고 내가 코코로와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풍경들을 전부 같이 보러가자.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서 다음은 세상의 모두에게 알려주는거야."

벌써 성인이 되버린 나와 코코로에게는 터무니없는 옛날이야기 같은 말을 나는 있는 힘껏 웃으면서 말했다.
코코로는 깜짝 놀라서 할 말도 잃고 멍해졌지만 눈물은 잦아들었다.

"세상은 넓고 우리가 웃는 얼굴로 만들어야 할 사람들은 정말 많으니까 어쩌면 평생 세상을 웃는 얼굴로 만드는 활동은 끝나지 않겠지. 그러면 코코로도 나도 언제까지나 손을 잡고 그 길을 걸어야할거야. 가끔 이렇게 불안해지거나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때도 있을 수 있어."

점점 빗나가서 결국 떨어져나가고서야 뒤돌아본 우리는 그제서야 서로를 마주 봤지만 또다시 엇나갈수도 있다.
단단히 마주잡은 손이 무슨 일을 계기로 놓게될 줄 알수없다.

"하지만 그럴때는 다시 이렇게 노래를 불러줄게. 코코로도 콧노래든 그림이든 좋으니까 너의 기분을 알려주는거야. 한번했던 일이니까 또 한번 더라도 할 수 있겠지. 뭐.. 그래도 다음은 다른 사람들을 말려들게 하지 않는 정도로만 하자.."

아직도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 코코로를 보며 하하..마른 웃음을 흘린다.
전력으로 생각해낸 방법이지만 수갑으로 묶어두고 싶을 정도로 두려워했던 코코로에게는 만족하지 못할 수단인지도 모른다.

"좋은 생각이야 미사키! 몇년동안 전혀 떠오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콧노래가 나올것 같아. 하지만 나는 전할 수단이 없으니까 미사키가 또 곡으로 만들어줄거지?"

벌떡 일어나서 내 손을 붙잡은 코코로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어느새 대기하고 있던 검은옷의 사람에게 녹음기와 종이의 준비를 시켰다.
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데 필요할때에 그곳에 있는 검은옷의 사람에게서 그리움을 느꼈다.

무슨 곡을 만들까 신이나서 이것저것 나에게 말해오는 코코로도 슬픈 기분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졌는지 예전의 그때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전과 확실히 다르다는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제는 억지로 팔을 잡아끄는게 아니라 꽉 마주잡은 손을 재촉하듯 이끌어간다.

"하아.. 그렇게 급하게 하지 않아도 같이 미국에 가주려는거지? 그러면 오늘은 조금 쉬게해줬으면 좋겠는데.."

어제 뛰어다니며 교섭하고 오늘은 처음으로 본모습을 나타내고 라이브를 했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자 단번에 몰려오는 피로감에 당장이라도 자버리고 싶었다.

"물론 미사키의 정열적인 프로포즈는 감동적이었어. 그러니까 이 기쁨을 결혼식장에서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으니까! 시간에 맞추려면 지금 당장 시작해도 늦어!"

"하아?! 결혼식! 처음듣는 이야기인데 그거!"

갑자기 코코로의 입에서 나오는 청천벽력의 소식에 깜짝놀라 지친 다리의 힘이 풀릴뻔 했다.

"하지만 미사키.. 불안할때도 이해하기 힘든때도 서로 의지하면서 세상의 모두를 웃는 얼굴로 만들자고 했잖아. 그건 결혼하자는 말이 아니었어?"

의아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츠루마키 코코로씨에게 돌려줄 말이 없었다.
결혼을 생각한적 없지만 들어보면 확실히 부부사이를 명시하는 말과 같았다.
하여튼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 평생을 이야기한다는건.. 음. 당황했지만 싫다고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는것은 나도 코코로와 닮아 많이 바뀌어버린것 같았다.

"미사키는 언제나 내가 웃을 수 있는 마법같은 계획을 가져와주는구나. 역시 마법사인게 틀림없어! 미사키는 내일 돌아가야하고 나도 당주의 일이 있어서 당장은 안돼지만 미사키의 소중한 말을 거절할 생각은 없으니까. 같이 결혼식을 계획해보자!"

"네에네에. 그래도 너무 이상한 계획은 할 수 없으니까 실현가능한걸로 부탁해. 수중결혼식이라든가 덧없는 결혼식같은거 말고 그냥 행복한 결혼식이었으면 좋겠는데.."

검은옷이 가져온 새하얀 종이에 즐겁고 행복한 웃는얼굴 투성이의 미래를 그려넣는 코코로를 보면서 나도 쓴웃음으로 어떻게 이뤄줄지 고민한다.
우리는 바뀌었지만 서로 손을 마주잡고 다시 앞으로 걸어나간다.
Posted by 백오판다
,


무사히 다른 밴드의 허락도 얻어냈다는 연락을 받고 집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해가 져서 어둑해져있었다.
로젤리아를 만나러가기 전에 한번 들러서 짐을 가져갔으므로 그때 늦는다고 전해뒀기에 걱정은 끼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셨을까.

정말 오랜만에 얼굴을 보이면서 하루종일 밖에서 돌아다녔으니 서운할지도 모르겠다.

"언니, 역시 이번에 돌아온거 언니가 떠났던 이유랑 관련있지?"

그중에서도 제일 서운해하고 있는 동생이 얼굴을 온통 찡그리고 물어왔다.
이유도 모른채 어른의 사정이라고 속여져 사이좋던 언니를 몇년간 보지도 못했던 동생은 아직도 그때의 일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도망가느라 상처입힌 상대가 여기에도 있었다는걸 발견한건 어쩌면 오히려 다행인일인지도 몰랐다.

"관련이 있다고 할까.. 떠나면서 방치해뒀던 대가를 치루는 중이지. 어쩌다보니 라이브도 하게 됐고."

한숨을 푹쉬었다.

아르바이트를 쉬면서까지 왔는데 첫날 빼고는 납치됐다사 도망쳤다가 교섭하러 달리기까지 하고 생각보다 지친거같았다.

"라이브..흐음. 그러고보니 미셸이었지. 언니가 떠난 후에 미셸을 찾으러 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는 나, 언니가 미셸인거 이해하지 못했어서 떠났다고 말해주지 못했었는데."

"뭐?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예상한 사람이라면 어린아이의 기억이더라도 잊지 못했을거라고 확신했다.
한눈에도 잊지 못 할 만큼 강렬한 인상이었을테니까.

"금발에 금안이어서 외국인인줄 알았는데 일본어가 유창했어. 인형옷 입는 사람에게 미셸을 불러달라고 부탁하려 왔다고 했는데 그때 언니가 떠난지 얼마 안됐어서 나, 조금 무례하게 대답했을지도 몰라."

"어떤 말을 했는지 혹시 기억이 나?"

"으음.. 그때는 누구든 탓하고 싶을 정도로 슬펐으니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도 그랬을지 몰라. 다시 만난다면 사과하고 싶네."

코코로가 정확히 언제 집에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인형옷을 입는 사람이라고 불렀다면 내가 떠났다는걸 인식한 후일것이다.

자만이 아니라 납치되어서 수갑까지 채워질 정도로 사실은 내가 코코로에게 특별히 소중한 사람이었다면 가족에게서 너 때문에 떠났다는 소리를 들었을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코코로가 웃음을 잃은것은 단순히 내가 떠났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은 기분은 항상 잊어버리려는 코코로가 언제나 웃는 얼굴인것은 즐겁고 행복한 일들만 생각해도 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부정적인것은 얼마든지 배제하고 원하는건 뭐든 실현되는 세상에서 무언가가 제일 특별해질 수 없었던것은 당연할것이다.
코코로에게는 어떤것이라도 대체할 수 있고 없앨수도 있었을테니까.

"하지만 나라는 존재도 바꿔넣을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했다는건 나는 코코로에게 특별했던걸까."

몇년이 지나도록 마음 한켠에 박혀서 지속적으로 외면할 수 없는 아픔을 주던 과거가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했던 감정이 되살아나는것 같았다.
추억으로 묻어버리려고 했는데 바보같은 나는 잊는것도 제대로 못해서 결국 떠났던것도 내가 틀렸다고 생각해버린다.

하지만 멀리서 되돌아보았기에 이렇게 생각 할 수 있는거겠지.

그당시에 자신의 감정을 주체못했던 내가 그대로 그 장소에 있었다면 이렇게 코코로를 구하자같은 생각은 절대 하지 못했을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마냥 자신이 죄인같고 차라리 일말의 가능성도 없이 거절당했으면 하다가도 그런 말을 들으면 내가 세상에서 머물곳은 없어지는게 아닌지 생각했을 정도로 여유가 없었으니까.

"너무 가까워서 서로가 보이지 않았던걸까. 무엇이 정답이었을지는 결국 생각하기 나름이고."

코코로는 이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저런 강행수단을 취해서라도 과거로 돌아가려고 했던거겠지.
현실적으로 시간을 되돌리는건 불가능하니까 남는건 허무함만일텐데 폭주하는 내가 떠난 후 코코로의 옆에서 그것을 알려줄 사람은 없었던것일까.

절대 그런 생각은 하면 안된다고 알고있어도 되살아나서 두근두근 뛰는 심장이 기쁘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로하피처럼 활동을 중지하지 않았던 다른 밴드들의 인기는 순조롭게 높아져가서 지금은 프로라고 당당히 말해도 될 정도로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라도 몇년째 해외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분위기에 매료되도록 만들어야하는 일을 하고 왔으니까 조금 긴장되지만 장소가 바뀐것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오늘 내가 할 일은 모두를 흥겹게하는게 아닌 단 한사람에게 세상이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는 즐거운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 다시 떠오르게 하는거니까.
본의 아니게 그 방법을 나에게 알려준 네가 잃어버렸으니까 아직도 찬란하게 빛나던 그때의 너를 기억하는 내가 다시 찾아줄게.

"미사키짱 오늘은 미셸이 아니네? 그것도 멋지지만!"

라이브를 제일 첫순서로 마친 포핀파티의 토야마씨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그 뒤를 이어서 다가오는 이치가야씨는 오랜만인데도 반갑다는 분위기보단 못마땅한이 듬뿍 담긴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있다.

"오늘은 하로하피를 위한 라이브이니까. 하로하피의 멤버엔 미셸도 포함되어있잖아? 그러니까 나는, 나인채로 찾아온 즐거운것을 보여주려고."

먼지투성이로 빛이 바랜 미셸은 속이 텅 빈채이지만 관객석에 앉아있었다.
코코로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 대신에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앞을 바라봐야한다면 나는 내가 버리고 떠나버린 나의 과거를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쿠사와씨, 나 이래봬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친한친구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친구에게 한마디도 안하고 사라질 정도로였다면 돌와온 이유도 그만큼 중요한거지? 실패하면.. 용서하지 않을거니까 말이야."

고개를 픽 돌려버린 이치가야씨의 본심이 그런게 아니란것은 옆에서 너무하다고 외치는 토야마씨랑 달리 사고방식이 비슷한 나에게는 전해졌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고맙다고 말로 전하는건 센스없는 행동이겠지.

오늘은 코코로를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이치가야씨가 느꼈던 슬픔도 사라질만큼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것이 그들에게 전해진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끄럽지만 아마 내가 쓴 곡 중에서 제일로 마음이 담긴 노래라고 생각해. 이치가야씨가 만족할 수 있으면 좋겠네."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이치가야씨는 흥하고 고개를 돌리고서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귓불이 붉은것은 친구의 의리로 못본 척 해주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미사키짱 용케 로젤리아도 시간을 양보해줬네. 지금은 예전보다 둥글어졌다는 느낌이지만 여전히 타협은 하지 않는다!하는 느낌이잖아?"

토야마씨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관심을 가져왔다.
하긴 나도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해서 미카엘로 늘상 해왔던걸 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미카엘 꽤 인기있잖아? 미사키짱이 어제 밤에 로젤리아에 허락받은거 들은 다음에 나 조금 호기심에 조사해봤는데 팬들 수도 많았고.."

리미가 보내는 존경의 시선에 부끄러워져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로하피에서는 떠났지만 멀리에서라도 코코로의 세상 모두를 웃음으로 만들자는 꿈에 조금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는 대리만족으로 인터넷에 올린 여행사진과 거기서 느낀 감정을 노래한 영상들은 조회수가 꽤 되는 편이었다.

로젤리아가 주목한건 그런 부분이 아니겠지만 꾸준히 해왔던 일들이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전해져서 긍정적인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도망쳐도 미련에 젖어 너를 생각하며 했던 일들이 이렇게 내가 너를 도울 수 있는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느껴진다.

"사실 어제는 깜짝 놀라서 못했지만 미사키짱이 갑자기 사라졌을때에 다시 만나면 나도 화를 내려고 했었는데 그 노래들을 들으니까 그럴 마음이 사라졌어."

"아.. 화내도 어쩔 수 없는짓을 했으니까. 근데 왜 사라졌다는거야?"

"미사키짱 하로하피에 들어가서 즐겁다고 말했지만 언제나 다른 사람의 기분을 전하고 미셸을 연기하니까 미사키짱은 항상 배후자였잖아. 이 노래를 들으면 미사키짱 스스로의 감정이 전해져와서 드디어 피어났다라는.. 그런 느낌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여버렸다.
모두에게 내가 느낀 감정이 전달되기를 바라며 작곡하지만 정면에서 이렇게 감상을 들으면 도리어 내가 나 자신을 긍정받은 느낌이 들어서 언제나 얼굴을 붉히게 되버린다.

"그러니까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전해질거라고 생각해. 힘내!"

"맞아. 지금 코코로짱은 지쳐있지만 마음이 듬뿍 담긴 미사키짱의 노래를 들으면 다시 반짝반짝해질테니까!"

리미와 토야마씨는 힘껏 나에게 응원을 해주고서 의상을 갈아입으러 탈의실에 갔다.
어느새 파스텔팔레트까지 연주가 끝나고 내 차례가 되어 있던것 같다.

긴장으로 떨리는 손에 들린 미카엘의 얼굴을 흘끔 내려다보다가 미카엘의 가면을 쓴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무대로 나갔다.




미사키가 준 라이브티켓은 내가 스스로 내던져버린 하로하피를 다시금 생각나게 했다.
떠나면서도 유지할 수 있게 여러가지 준비를 해둔 미사키의 바람대로 계속 활동했다면 이 티켓에는 하로하피의 이름도 쓰여져있었겠지.

지금 느끼는 아쉬움도 포함해서 전부 미사키가 없을때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감정이다.
가장 특별한게 돌아오니 서서히 주변의 보이지 않았던것들이 다시 보여오는 느낌은 다시 과거의 나로 돌아가는것 같아서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미사키가 나를 위해 즐거운것들을 가르쳐준다고 준비한 라이브는 기쁘지만 알고싶지 않았다.

"코코로짱은 라이브 보러가지 않는거야?"

돌연 라이브의 의상을 입은채로 히나가 나타났다.
아마 라이브가 끝나자마자 바로 이곳으로 온것일까?
그렇다면 슬슬 미사키의 차례가 되었겠지.

"응.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기분이니까."

"코코로짱는 의외로 싫은것에는 곧바로 도망쳐버리지. 세상을 모두 웃음으로 만든다는 터무니없는 꿈은 자신있게 말하면서."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건지 웃는 얼굴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하는 친구에게서 외면한다.
마음이 맡는 부분이 있는만큼 서로가 읽기도 쉬우니까 내가 모른척 잊어버리는 부분조차 들키고 있을것이다.

"그거알아? 고등학교때 코코로짱을 정말로 부러워했어.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질투라던가 부러워한 일이 없었는데. 자랑은 아니지만 무엇을 하든 잘했거든."

"그러면 무엇을 부러워했다는 거야?"

안그래도 낭떠러지 앞에 홀로 서있던 기분을 뜻밖에도 줄곧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 친구가 나락으로 떨어뜨리려고 하는걸 참을 수 없었다.
잘못하고 있는건 알고있지만 도대체 어디까지 나를 추적하는걸까.

차라리 사형선고를 하더라도 미사키가 좋다고 생각하는게 이상했다.

"바로 지금 이런 행동말이야. 코코로짱 지금 미사키짱이 무슨 일을 하든 이해하지 않아도 상대가 결국 자신을 버리지 못할거라고 확신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묶어둔다는 강행에도 나올 수 있지."

"무슨 말일까? 나는 미사키의 부탁을 들어서 놓아준거야. 어차피 들어도 의미가 없으니까 라이브를 보지 않은것뿐."

닫혀 있는 문에 울려서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대에서 미사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자기소개를 하고 있을까?
미셸도 미사키의 본래목소리보다 낮은 음이 울린다.

"내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상대가 이해해주려고 한다니 나는 그런건 기대할 수 없었으니까. 여기서 손을 놓으면 바로 떨어져나갈지도 모르는 관계는 안심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코코로짱은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여도 전부 미사키짱이 이해하려고 필사적이었잖아? 그런거 부럽다-는. 그런 생각을 했었어."

휙 뒤로 돌아선 히나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수는 없지만 같은 방향을 쳐다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걸까.

"하지만 그런 관계는 상대가 포기하면 바로 끊어지는거라구? 서로 마주잡지 않으면 놓자마자 멀어지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부럽지 않아. 안쓰럽다고 생각해."

고개만 돌려서 이쪽을 보는 히나의 눈은 조금 슬퍼보였다.
내가 무모한 행동을 하는걸 말릴때에 미사키가 하는 표정과 같았다.
이런 말을 하면 상대가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알면서도 상대를 걱정해서 말하는 상냥한 표정.

"라이브. 끝나기 전에 보는게 좋아. 어쩌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놓치는건 아깝잖아. 미사키짱이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자신의 기분을 말하는건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보다 전하고 싶은 기분이 이긴거니까. ..음. 나는 아직도 코코로짱이 조금 부러울지도?"

그대로 걸어서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히나를 보면서 나도 역시 히나를 부러워하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과거의 히나는 이해하려고 노력해서 지금은 서로가 서로를 놓치지 않도록 손을 마주잡고 있으니까.

이미 잃은적이 있는 나는 두려워서 보고싶지 않은것을 망설임없이 다가갈수 있으니까.
상처받기 무서워서 움츠린 미사키에게 일갈하던 나는 이제 스스로 상처받기 무서워 미사키의 필사적인 진심조차 외면하려고 했다.

"미사키가 바라는 장소를 만들겠다고 했으면서 결국 내가 안심할 수 있는 관계를 원했구나. 그게 정답이 아닌것을 이미 알고있는데도 반복하다니 히나에게 혼나는것도 당연하네."

지금 제일 혐오하는 과거의 자신과 다름없는 선택을 또 하려고 했다는걸 깨달았다.
미사키에게 미셸의 굴레를 씌워 하로하피라는 책임감을 지워서 내 옆을 떠나지 못하게 묶는다니.
지금의 미사키가 바라는걸 전혀 고려하지 않은 내 미련이 덕지덕지 묻은 새장이었다.

다시 한번 내 잘못의 흔적인 라이브티켓을 내려다본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외면하고 싶은 과거가 아닌 미사키가 고민하고 슬퍼하며 만들어낸 나를 위한 상냥한 미래였다.
미사키가 나에게 준것들은 언제나 나를 웃게 만들었으니까 나는 조금 긴장하면서도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라이브 바로 전날에 갑자기 추가된 일정을 팜플렛에 추가할 시간은 없었으니까 내 등장은 아무도 몰랐던 깜짝 게스트 취급이 되었다.
일단 적당히 해외에서 유명한 DJ였고 속에 들어있는건 걸즈밴드파티 소속이었던 하로하피의 미셸이니까 눈치채는 사람들도 있겠지.

하지만 타임테이블에 없던 인물이 나타난 라이브회장은 무슨 일인가 하는 호기심이 가득 차 있으니까 그것을 흥미에서 즐거움으로 바꾸는게 내가 하는 일이다.
목적은 라이브의 성공이 아니지만 시간을 빌렸으니까 그만큼은 띄워주는게 예의겠지.

"안녕~! 오늘의 특별 게스트 미카엘이라고해! 여기있는 사람중에 내 친척 미셸을 아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네!"

미셸이라는 이름에 순간 조금의 술렁임이 일어났다.
하로하피가 활동을 그만둔 뒤에도 기다리고 있다는 응원과 격려가 담긴 메시지가 여전히 방치된 어카운트에 쌓이고 있었으니까 그중에 누군가일지도 모른다.
이 사람들 또한 내가 떠나면서 상처받은 사람들이겠지.

"나는 미국에서 디제잉 하고 있지만 이곳의 사람들도 내 추억이 담겨있는 노래를 들어줬으면해서 찾아왔어! 이건 인터넷에도 공개된적 없고 어디서도 연주한적 없으니까 모두가 제일 처음으로 들어주는거네. 잘부탁해."

몇년전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했을때 가장 슬플때에 주체못하는 코코로에 대한 마음을 쏟아넣은 누구에게도 들려준적 없는 노래였다.
제일 정제되지 않은, 그야말로 아무도 없는 허공이기 때문에 외칠 수 있는 본심이 가득한 고백과 참회가 담겨서 사실이라면 밝은 파스파레 라이브 직후에 부르기에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나는 이게 제일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듯 머뭇대던 관중도 서서히 익숙해지면 마치 노래의 광기에 미친것같은 흥분응 보여준다.
적당한 템포조절은 펍에서는 필수이지만 이 노래에는 그런게 없다.
뒤는 생각하지 않고 끝없이 내달리는 음은 그때에 내가 얼마나 여유가 없었는지 나타내고 있었다.

"들어줘서 고마워-! 이 곡은 누구에게도 공개 할 생각이 없었지만 내 마음을 알아주는데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곡은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 아직 보지도 않은 미래가 혹시 슬픈 결말을 맞이할지 모른다고 두려워 미리 포기하는건 더이상 하면 안되겠지."

왜냐하면 도망쳐도 저절로 찾아오는 해피엔딩같은건 없다는걸 이미 알아버렸으니까.
닥쳐올지도 모르는 미래보다 네가 침체하는 과거가 더 무서우니까 있는지도 몰랐던 용기가 솟아올랐다.

알고있다.
너만 과거에 묶여있는게 아니라 사실 나도 아직 즐거웠던 고등학교때의 하로하피를 잊지못하고 있다.
나도 또 다른 이유를 붙여서 그때를 유지하려고 해왔다.

얼굴을 덮어가리는 미카엘의 가면을 벗어 던진다.
달라지려면 우선 내가 바뀌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마주보기를 두려워하기만 해서는 안되니까.
객석의 네가 두눈을 크게 뜨는게 보였다.
Posted by 백오판다
,
허억허억 토해내는 숨이 습기를 띄어 공기가 끈적이는거 같았다.
뜨거운 열과 함께 점차 돌아오는 정신에 냉수를 얻어맞은것 같은 싸늘한 기운이 척추를 흐른다.

"미..사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열띈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사람은 내가 그동안 제일 경계하고 있던 최악의 상황이 일어난것을 뇌리에 때려박았다.
쓰라리다 못해 질척하고 따끈한 액체가 목덜미를 흐르는 기분은 끔찍한 방식으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후후후. 그런 얼굴 하지마.. 미사키라면 괜찮아?"

그렇게 관대하게 웃지 말아줬으면, 차라리 나를 매도하고 탓해줬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무겁지는 않을텐데.
어리석은 짐승에게 미래를 저당잡혀버린 밝은 태양은 어디까지나 따뜻하게 뚝뚝 떨어지는 내 눈물을 입술로 받아마셨다.

차라리 신성하다고도 말 할 수 있을만큼 애정이 담긴 얼굴을 나는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것이라도 본 얼굴로 외면 할 수 밖에 없었다.





세상은 세가지의 두번째 성별로 나뉘어져 돌아가고 있다.
중학교때 시행된 검사에서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부모의 사이에서 특이하게 알파로써 태어났다는걸 알게된 그날부터 나는 적당한것이 최고라는 좌우명을 가지게 된걸지도 모른다.

무엇을해도 능숙할 수 있다는게 나에게는 자랑이 아니었다.
내가 누군가의 자리를 박탈해버린다는 생각을 버릴수가 없었다.
베타들의 사이에서 나만이 툭 튀어나온 못같은 존재로 보여서 참을 수가 없는데 본능에 휘둘려 누군가를 상처입힐수도 있다니 그야말로 짐승이아닌가.

"하지만 알파는 우수한 존재란다. 낮은 확률을 뚫고 태어난 너는 사회의 최상층에 올라갈 자질을 가진거야."

"오메가쪽이 억제제를 복용하는건 당연한 일이니까 알파인 너는 딱히 걱정 할 일이 없을거란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알파의 재능을 펼쳐보는게 어떠니? 무슨 일이든 네가 관심을 가진 분야에서 최고가 될텐데."

그런거 이쪽에서 바란적도 없는데 멋대로 줘버리고서 쓸데없는 기대감을 지운다.
희생되는 누군가가 더 신경이 쓰여버리는건 베타 사이에서 태어난 바람에 알파의 사고방식을 가지지 못한 내가 잘못한걸까.

"어째서 테니스에 전부를 건 내가 아닌 네가 레귤러가 된거야? 너는 그저 날 따라서 입부한거 뿐이잖아!"

사회의 최상층이라던가 누군가를 밟고 올라갈 선천적인 재능같은것을 바란적도 없었다고 울면서 나를 원망해오는 테니스부의 친구를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어차피 모든게 태어날때부터 DNA에 새겨진 승자의 유전정보 때문이라면 더이상 나 때문에 타인의 노력을 깎아내리는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인생은 적당적당이 최고지. 평범하게 살거야."

그다지 불행하다는 기분은 하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으면 당연히 거북하고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는건 당연하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알파나 오메가는 흔한 존재가 아니었고 일반학교에서 마주치긴 극히 어려웠다.
대부분이 베타인 세상에서 제2의 성별따위 신경써봤자 어차피 너도 베타, 나도 베타인것을 굳이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일부러 숨길 필요도 없었다.

"세상 모두를 미소로 만들자! 미셸, 즐거운것을 많이 찾는거야."

"네에~네에-. 어쩔 수 없으니 어울려줄까.."

하지만 그런 내 앞에 나타난 오메가의 부잣집 아가씨는 완전히 예상밖으로 언제나 내 기대를 쳐부수는 사람으로 그 존재조차 나의 적당, 평범이라는 바람이랑은 정반대지만 함께 웃으며 하로하피 활동을 하는 나날이 회색빛의 예전과는 달리 너무나 빛이 나서 나약한 나는 스스로 벗어나지조차 못했다.

하지만 오메가인 주제에 검은옷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켜진것 때문인지 너무나도 무방비한 코코로는 세상이 오메가에게 채운 목줄도 보는 사람이 웃는 얼굴이 되지 못한다고 하지 않으니까 언제나 걱정했었는데..

이런짓을 저지른 내가 걱정한다고해도 아무 보상도 되지 않겠지만.

"왜 우는거야 미사키? 슬픈 일이 있었다면 말해줘. 나는 미사키의 미소가 보고 싶어."

"아니, 달라. 슬픈 일은 내가 아니라 코코로가 당한거잖아. 나같은건 미소가 될 자격은 없어. 없어져버렸어."

나에게 감화된듯이 찡그린 표정이 되어버린 코코로의 목덜미는 보는것도 처참할 정도로 소유욕으로 가득 차서 가감도 하지 않은 잇자국이 남아있어 눈을 감고 싶어졌다.
하지만 시선을 피해도 내 죄가 사라지는게 아니란것을 몇년동안 이런 일이 일어날 경우를 염려해왔던 나는 잘 알고있었다.

"누구도 미소가 되면 안된다는 이유같은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미사키가 웃지 않게된다면 나도 웃을 수 없게 될거같아. 그래! 자격같은건 생각할 수 없을 미사키도 나도, 모두가 웃을만한 즐거운것을 찾으러 가자."

나보다 더 슬픈 얼굴로 코코로는 그러니까 해피, 럭키, 스마일이라고 자신을 범한 짐승에게까지 그 폭력적일 정도로 상냥함을 발휘했다.
어떻게 이럴때까지 상대를 웃게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슬퍼졌다.

"하..하하.... 너는 정말로 터무니없어.."

"터무니없다니 무엇을 이야기하는 걸까? 그런데 미사키.. 나는 졸려져서.. 미사키가 웃을 수 있는 즐거운것은.. 조금 있다가 찾으러가기로.."

갑자기 찾아온 처음의 히트사이클에 엉망진창 휘둘린건 역시 바보같이 무진장한 코코로라도 버틸 수 없었는지 억지로 각인해버린 상대를 두고 무방비로 잠들어버렸다.
다시 내 죄를 직시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코코로를 방치하고 도망갈만큼 악 할 수도 없는 겁쟁이는 스스로가 편해질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다.

나는 흐트러진 코코로의 복장을 정돈한 후에 나를 심판하기에 적당한 사람들에게 내 죄를 고하러 갔다.

"아가씨의 히트사이클이 갑자기 찾아온건 예상밖의 일이었지만 오쿠사와님을 막지 않은건 츠루마키가의 의사였습니다."

무자비한 사실이 덮쳐올줄 꿈에도 모르고 사죄할 방법을 요구하던 나는 바닥에 무릎 꿇은채에 비정한 현실을 들었다.

마냥 세상을 웃음으로 가득하게 만든다는 철없는 꿈을 꾸는 아가씨라고 생각했던 코코로를 둘러싼 어른의 사정이 지독하게도 스스로를 절제못한 죄인을 처벌하지도 않게 만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막을 수 있었는데도 저에게서 코코로를 지키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생각해보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알파가 다른 사람보다 우수한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다고해도 아무 훈련도 받지 않은 일개의 여고생이 굴지의 재벌이 고용한 보디가드 3명을 이길리가 없는데 항상 코코로를 지키고있을 검은옷의 사람들이 나를 막지 않았다는건..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서 고용되었긴 하지만 우리는 츠루마키가에 고용된 몸.. 외동인데다가 오메가인 아가씨가 이용당하기 전에 그럴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 나타난것을 츠루마키가로써는 환영할 일이었다는것이죠."

죄송합니다.하고 오히려 사과를 받은 나는 그러면 도대체 누가 나를 처벌해주는지 알수없게 되었다.




떼어놓을 수 없는 죄책감이 들러붙은 목덜미는 제대로 된 처치로 지금은 하얀 붕대에 감싸여있다.
흥분을 주체못한 코코로가 있는 힘껏 깨물었는지 상당히 깊은 상처였지만 내 잘못의 대가라고 생각하면 이보다 더 심했어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미사키도 이 저택에서 생활하게 된다니 기뻐! 좀 더 함께 있을 수 있다니 즐거운것을 잔뜩 찾을 수 있을거같아."

"그렇네. 작곡도 하기 편해질지도."

반면에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내 자제력이 일했는지 코코로의 상처는 금새 나을거라고 했다.
그렇다고 이미 이어진 각인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각인을 맺은 알파와 오메가는 알파측에서 각인을 끊을 수 있지만 그렇다면 오메가가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죽을 수도 있다.
제2의 성별 검사에서 알파판정을 받고 기본적인 교육으로 가르쳐받은 사실은 내가 코코로에게서 떨어질 수 없게 만들었다.

죄책감이란 가시덩굴로 둘러싸인채 너의 웃는얼굴조차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니까 이미 나는 알파라는 동물적인 부분에 휘둘려 어쩔 수 없는 인간 이하가 된걸지도 모른다.

"미사키는 나랑 같이 살게 된게 기쁘지 않은 거야? 웃지 않고 있는데."

"으음.. 조금 지친걸지도. 같이 사는데에 불만은 없어. 동생이 걱정되긴 하지만."

각인을 맺은 후의 다른 알파와 오메가의 사이는 어떻게 바뀌는비 모르겠지만 코코로는 전혀 어떤 영향도 받지 않은것처럼 평소와 같았다.
여전히 즐거운것을 찾자고 나를 끌고 다니며 하로하피 연습에도 열중하고 세상을 웃음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이대로가 가장 좋은걸지도 모른다.

"미사키의 동생은 미사키를 아주 좋아하니까 자주 찾아가는게 어떨까? 나만이 미사키를 독점하면 미사키의 동생이 미소가 될 수 없어."

"아-. 그래. 부모님도 걱정이 많으시니까 연락도 자주 할거야. 갑자기 여기서 살게 됐다고 했으니까 많이 놀라시기도 했고.."

세상의 모두가 특별해서 그 사이의 차이를 아직 모르는 코코로는 내가 상대라도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언제까지나 그렇다고 할 수 없었다.
하로하피가 결성되고 코코로도 많은 여러가지를 학습하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제2 성별 따위에 멋대로 정해진 나같은게 아닌 진정한 코코로의 특별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만 옆에서 내가 지켜주는게 내가 할 수 있는 속죄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 상대와 새로 각인을 맺을 수는 없겠지만 내가 어딘가로 떠나서 근처에 나타나지만 않는다면 코코로는 그 특별인 상대와 같이 있을 수 있을테니까.
시큰하게 아파오는 심장이 알파의 자존심 때문인지 스스로의 감정인지도 알기 어려워져서 기분좋게 안겨들어오는 코코로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눈을 감았다.

"후후후. 그러면 미사키의 집에 방문 할 때는 나도 같이 가. 동생에게 미사키를 빼앗아서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니까."

"코코로가 빼앗았다니 원래 나는 물건이 아니라고. 뭐, 조금 질투해준다면 기쁠것같긴 한데. ..미리 양모펠트 만들어서 달래야겠다."

"우-. 그렇다면 내것도 만들어!"

"네, 네-. 그래도 동생것이 먼저니까 그건 용서해줘. 미셸인형이면 되는 거지?"

안된다고 해봤자 어차피 만들게 될테니까 순순히 항복하고 시일을 늦춰주길 부탁했다.
어차피 코코로의 각인상대로 신변보호를 위해 아르바이트도 그만둔 지금은 의도치않게 취미생활이든 뭐든 마음껏이라서 차라리 아무생각도 없이 양모펠트에 집중하는것도 좋은 방법같다고 생각했다.

"미셸은 이미 있으니까 미사키의 인형이 가지고 싶어! 이왕이면 내 인형도 만들어서 방에 장식해두고 싶네."

"그래. 하로하피멤버 다 만들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는걸."

과연 모두와 함께를 강조하시는 코코로답게 미셸의 곁에 다른 인형들도 늘어놓고 싶은 기분인가보다.
갑자기 생겨버린 여유시간을 활용하기에 딱 좋은 코코로의 어리광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양모펠트의 재료는.. 되도록이면 안쓰려고 했지만 코코로에게 하는 선물이고 받은 카드를 쓰면 되겠지.

"그런데 미사키 목덜미 아프지 않아? 상처 남을지도 모른다고 들었는데."

코코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얀붕대로 가려져있는 내 목덜미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지쳐서 잠든 사이에 이미 처치가 끝난 후여서 얼마나 다쳤는지 모르니까 더 걱정되는걸까.
원래는 이러면 안돼겠지만 지금은 코코로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들어주고 싶은 바보같은 알파라고 스스로도 알고있으니까 용서해줬으면 좋겠다.

스르륵 풀어내린 붕대가 흘러내려 드러난 목덜미를 빤히 응시하는 코코로의 시선에 촉감이 있을리도 없는데 따갑게 느껴진다.
정말 마음껏 사양하지 않고 물렸으니까 실제로보면 꽤 징그럽지 않을까싶지만 코코로의 고른 치열이 그대로 남았다고 생각하면 부끄럽게 느껴졌다.

할짝하고 물기어린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목덜미를 손으로 감쌌다.

"뭘 하는거야 코코로!"

"으음.. 피의 맛이 날까 하고 생각했는데 쓰기만하네."

"그야 약을 발라뒀으니까 그렇지! 하아.. 호기심이 너무 강하다고.."

얼굴을 온통 찡그린 코코로에게 얼른 입을 헹구라고 보내버렸다.
도대체 어째서 사람의 상처를 핥는 기행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평소부터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을 자주 하니까 그것의 연장선일까.

오소소 소름이 돋아난 팔을 쓸어내리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부터 당분간 언젠가 코코로에게 진정한 특별한 사람이 나타날때까지 옆에서 지키기로했는데 첫날부터 금새 지쳐버렸다.

하지만 그런것도 싫지 않다고 말하는건 나의 어느 부분인지 알수없어서 어느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어차피 다가올 미래에 내 의지는 상관없으니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여튼 본능이든 이성이든 구분을 못할 정도로 이미 코코로에게 빠져있었으니까 이 마음은 거짓이 아니겠지.

"아.. 혼자 목에 붕대 감는거 어떻게 하라는거야.. 윽.. 상처가 스쳐서 아파.."

코코로가 말하는것을 필사적으로 들어주려고 하는 내 자신에 한심함을 느끼면서 붕대 감는 법을 스마트폰에 검색하고 낑낑 어떻게든 묶으려고 해보지만 성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문 밖에 대기하는 SP에게 부탁해도 되겠지만 자업자득인 일로 폐를 끼치는건 좀.. 사양하고 싶다.

츠루마키가의 의향이라고 나도 피해자 취급이지만 일단 이성을 통제하지 못한 것은 나였고 언젠가 나간다고 생각하면 츠루마키저택은 도저히 이제부터 내가 살 집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서 의지하기 꺼려졌다.

벌컥 문을 열고 코코로가 다시 방에 들어왔다.
안절부절 못하는 나와 다르게 진정한 방의 주인이라선지 호화스러운 가구들 사이에서도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미사키 붕대가 풀렸잖아. 잘 안묶이는거야?"

"하아.. 손목이라던가 발목에 압박붕대는 한적이 있어도 목은 잘 안보여서.. 역시 그냥 부탁해야하나."

"이리줘봐! 내가 해줄게."

"...또 핥지는마. 도대체.. 왜 그런짓을 한거야?"

다른 사람도 이해할 이유가 튀어나온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아무말도 안하기엔 내 처지가 너무 억울해서 답이 돌아온다는 기대도 하지 않고 물어봤다.
억지로 묶어놔서 구겨진 붕대를 풀어내더니 어느새 한손에 새로운 붕대를 들고 있는 코코로가 숨결이 느껴질만큼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원래도 꽤 퍼스널스페이스가 좁은편이었지만 전에 비해서도 상당히 밀착해오는것은 역시 이제 같은 집에서 살게 되서 그런걸까.
어제 그렇게 호되게 곤욕을 치뤘으면서도 여전히 무방비한것에 화를 내야할지 상냥한 말로 설득해야할지 고민하다가 어차피 바뀌지 않을거라고 포기했다.

"그냥 미사키의 목덜미의 상처를 보니까 그러고 싶어졌어. 어째서일까?"

"나한테 그런걸 물어봐도.."

코코로의 손가락이 상처의 근처 아슬아슬한 부분을 스윽 쓸어서 윽 목졸린 소리를 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코코로는 상처를 뚫어지게 보면서 붕대를 묶을 생각도 안하는것 같았다.
어차피 이미 풀어버린것 만족할때까지 내버려두기로 했다.

뭐, 이런 상처를 본 일이 없다던가 자기가 낸 상처에 미안해하고 있던가 그 근처의 감정이 아닐까?
그래도 돌연 핥는다는 기상천외한 행동은 평소의 코코로 같아서 오히려 안심했다.
내가 저지른짓은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할테지만 적어도 코코로가 바뀌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강해서 다행이다.

"이거랑 똑같이 내 목에도 미사키가 문 자국이 남는걸까?"

"으음.. 의사가 말하기론 코코로의 목에는 상흔은 남지 않을거라던데. 다행이지?"

"우-. 페어가 아니잖아."

이상한데서 볼을 부풀리며 삐진 모습에 어떻게 달래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걸까?
몸의 깊은곳까지 접했다고해도 여전히 코코로의 마음은 알 수 없어서 공연히 스스로가 한심해진다.
이대로면 지키긴커녕 그전과 다름없이 언제나처럼 휘둘릴 뿐이 아닌가.

역시 나에게 알파는 어울리지 않는것 같은데.
오히려 코코로가 재력이든 권력이든, 자신감까지 전부 알파에 어울리는것 같은데 어째서 나같은게 알파인건지.
반대였다면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텐데..

고민해도 소용없는것을 항상 생각하는건 나쁜버릇이라고 항상 지적당하는데도 또 반복하는 내가 불만인건지 고민하느라 찌푸린 미간에 키스했다.

"으악! 무..무슨짓을 하는 거야!"

"후후. 미사키가 또 걱정이 많은 얼굴을 하길래 효과가 좋은 방법을 사용했어. 어제도 많이 괴로워보이는 얼굴에 키스해줬더니 금새 기뻐하는것 같았으니까."

"아-. 네. 그렇습니까.. 하아. 그래도 아무한테나 그 방법 쓰면 안되니까. 듣고 있어 코코로? 으윽.. 상처 덧나니까 그만 만지고 대답 좀 해줄래.."

물론 내가 하지말란것을 들어준적이 없는 코코로이니까 멈춰주진 않았지만 정말 앞날이 걱정되는 스타트였다.
Posted by 백오판다
,


이제 내가 반항할 기분이 사라졌다고 믿는건지 코코로는 그대로 콧노래를 부르며 다가왔다.
정말 옛날로 돌아간것처럼 미셸의 배에 포옹을 한 뒤에 손을 잡고는 고개를 갸웃하고 수갑은 내던졌다.
아직도 코코로는 내 인형탈을 벗길 생각은 없는것 같았다.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코코로의 안에서는 계속되고 있는걸까.

"그럼, 가볼까 미셸! 카논도 하구미도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모두도 하로하피의 라이브를 바라고 있을 거야. 세상 모두를 웃음으로 하자고 했던것 잊지 않았겠지?"

"그래, 잊지 않았어. 하지만 코코로 우리가 웃음 짓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웃을 수 없다고 한거. 잊은건 오히려 코코로겠지."

"..뭐라고 했어 미셸?"

내 손을 잡고 달러가려던 코코로가 뒤돌아보았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나에겐 완전히 인형같이 꾸며진 얼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셸의 폭신한 손이 우그러질만큼 힘이 들어간 코코로의 손이 지금 심정을 대변하는 걸까.

"코코로 지금 너는 아무도 웃게 만들 수 없어. 옛날로 돌아가려는 너는 절대로 앞으로 못나아가니까."

"무슨 소리야 미셸! 미셸은 그렇게 환하게 웃고 있고, 나도 웃고 있잖아. 다른 사람도 분명 우리를 보고 웃어줄거야."

먼지투성이 분홍곰과 인형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새빨간 드레스의 여성.
이런것을 보고 웃는건 희극적인 서커스에서나 일어날 일이었다.

만나면 감정에 휘둘려 다시 또 코코로에게 실컷 말려들어가 나도 옛날처럼 되돌아가진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히려 차갑게 이성적인 내가 있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아직도 남아있는 연정이 그럼에도 강하게 쳐낼수는 없게 만든다.
도와주고 싶지만 네 말대로 한다면 또 되풀이 할 뿐이야.

진정한 의미로 너에게 히어로가 되고 싶어졌다.

"코코로 너는 옛날에 집착하느라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어. 반짝반짝 빛나던것도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아무것도 남은게 없다면 내가 너에게 나눠줄게."

세계 여기저기에 보물이 흩어져 있다고 하던 그때 너의 기분을 되찾아줄게.
옛날만을 추억하며 붙잡아두려고 하기에 세상은 너무나도 아름답다고 알려줄게.

옛날부터 네가 모르는걸 가르쳐주는게 내 역할이었지?

"..지금은 그런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면? 미셸도 인형옷을 입는 사람도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건 아니겠지?"

표변한 분위기 이것이 네가 미소의 가면 뒤에 숨긴 바뀐 너일까.

아니, 오히려 코코로만이 하나도 바뀌지 못한걸지도 모른다.
아직껏 옛날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얻는것이 없기에 서서히 깍여나가서 마모된 빈껍질이 보여왔다.
내가 자신의 말에 따라주지 않는것에 인내심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걸까.

"아니. 코코로 너는 그렇게 하게 될거야. 왜냐하면 너 스스로 내 말을 들을 수 밖에 없게 만들었으니까. 그렇지? 코코로. 넌 미셸의 말이라면 들어주잖아?"

한참을 서로 응시하며 한치의 양보도 보이지 않다가 돌연 코코로가 한숨을 푹 쉬었다.

"..좋아. 네가 어딜가든 이제 내 손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그래, 미셸 내가 어떻게 하길 바래? 교실과 교탁을 준비할까? 나에게 반짝반짝을 가르쳐주려는 것이겠지."

다시 활짝 웃으면서 빙글 돌아 나에게서 조금 떨어진 코코로가 뒷짐을 진채 상반신만을 쑥 내밀어 즐거워서 못참겠다는 억양으로 말해왔다.
지금 상황과 극렬히 대비되는 모습에 안타까움이 몰려온다.

"그래. 코코로 가르쳐줄테지만 지금 여기서는 아니야. 반짝반짝은 어디에나 있지만 얼어버린 네가 녹을 정도로 빛을 발하려면 어울리는 장소가 있지. 너도 잘 아는곳이야. 받아. 그곳에서 만나자."

욱하면 저지르는 나의 못된 버릇이 또 튀어나와서 나는 어느새 리미에게 받았던 라이브 티켓을 건내고 있었다.
뒷일을 생각하면 가시투성이 고생길인걸 뻔히 알면서도 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면 나는 외면 할 수 없었다.
지금 미셸을 걸치고 있어서 더 그럴지도 모르지만..

라이브티켓을 휙 낚아채면서 훅 다가와 내밀고 있었던 한쪽 팔을 포옹한채로 코코로는 흥미진진하게 티켓을 살펴보았다.

"흐음.. 걸즈파티 라이브티켓? 인형옷을 입는 사람은 가끔 대담해서 놀란다니까. 라이브를 할 장소가 필요한거라면 나에게 맡기는 쉬운 방법도 있을 텐데.. 그런 면은 여전하구나."

"그래서는 의미가 없을것 같으니까. 알고있잖아."

"후후후.. 기대되지만 그렇게 쉽게 내가 넘어갈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줘. 당신이 떠난 몇년간 나는 이렇게 바뀔 정도로 괴로웠으니까. 직시하지도 못하고 아예 잊어버리지도 못해서 뒤틀린것, 반드시 책임을 물을거니까."

그대로 포옹을 풀고 탁 뒤로 물러서 한바퀴 휙 돌고는 오늘 본 코코로의 웃음 중에서는 최고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일순간 정말로 옛날로 돌아간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럼, 기대할게 미사키!"





코코로가 검은옷 군단을 물러서게 하고 양손을 흔들어 힘껏 인사하고 있다.
방금까지의 진지함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작곡 때문에 코코로의 저택에 묵고 집에 돌아가던때처럼 느껴져서 무심코 나도 한손을 흔들었다.

다각다각

그런데 여기에 더욱 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까 모르는 사람인척 하고 싶은 인물이 다가왔다.
그것도 하얀말을 탄 채로.

"이런, 미셸이라고 부르는게 좋니 미사키라고 부르는게 좋니? 오랜만이구나 아기고양이."

"그냥 미사키라고 불러주실래요. 드디어 알아줬다는 감동을 느끼고 싶으니까."

그러고보니 돌아와서 미셸을 입은 나를 보고 처음으로 미사키라고 불러준 사람이 된건가 카오루씨..
실비라고 했던가.. 이런 하얀말을 타고 오지만 않았어도 성실하게 고맙다고 말 할 생각이 들었을텐데..

"구하러 온 거지만.. 아쉽게도 오늘의 미사키는 공주님이 아니라 기사였구나. 참으로..덧없군."

"대학도 졸업했는데 아직도 왕자역이에요? 아니면 코코로 따라서 옛날로 돌아가고 싶으시다거나.. 지금 완전히 지쳐서 솔직히 당장 쓰러져 자고 싶은데요.. 다른데 가서 해주시면 안될까요."

"음. 그럼 적당히 하도록 할까. 구하러 올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지만 도와주러 왔어 미사키. 공주님을 구하는 길에 동료는 많을수록 좋은거겠지? 언제나처럼 세상을 웃음으로 만드는 마법을 알려줘."

"하아.. 뭐. 내일까지 혼자서 설득이랄까 가능할거 같지 않았으니.. 카오루씨 한명이라도 도움이 되서 다행이네요."

얼마나 코코로의 방에 묶여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벌써 석양이 지고 있었다.
원래 목적인 하로하피 현상황을 파악하는건 달성했는데 그보다 더 힘든 과제가 나와버렸다.

하.. 정말 카오루씨라도 도와준다니 다행이야..
이사람 이러니 저러니해도 의지가 되는 사람이니까..

"이런, 기사님이 공주님을 구하러가는데 초라하게 동료 한명일리가 없지. 하지만 조금 겁을 먹은 모양이로군. 미사키 네가 달래주면 어떨까? 어떤 동화에서도 영웅이란 적의 잘못을 감싸 동료로 만드는 미담 하나 정도는 가지지않는가."

희극적으로 한팔을 늘려 가르킨곳에서는 안절부절 전봇대 위에 숨어서 이쪽을 살피는 카논씨와 당장이라도 뛰어나오려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하구미가 있었다.

그렇게 냉정하게 화만 내고 나와버렸는데도 내가 걱정되서 여기까지 찾아와준걸까.
여전히 상냥한 사람들이다.

"카논씨~. 거기 숨어있는거 다 보여요. 으억! 하구미!! 달려들면 위험하다고 말했잖아!"

오랜만의 몸통박치기에 비틀비틀 중심을 잃을뻔했지만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그러고보니 이런 먼지투성이에 햇빛에 말리지도 못한채 방치된 인형옷에 달라붙어봤자 안는 기분은 둘째치고 냄새가 나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하구미도 코코로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것 같다.

역시 하로하피에 미셸은 정말 소중하고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였겠지.
하지만 그러니까 이렇게 먼지가 쌓인 상태로 누구도 그 방에 들어간 흔적이 없었다는게 신경쓰였다.

코코로는 한마디의 말만으로도 이 인형옷을 보살필 인력도 재력도 있었음에도 긴세월동안 보지도 않았다는 소리이니까.

"카논씨 그렇게 울지 않아도 되요. 일부런 그런건 아닌거 아니까. 지금의 코코로가 카논씨가 말렸다고해서 그만둘거 같지도 않고 오히려 미셸의 말을 순순히 들었다는게 이상 할 정도인데.."

하로하피를 무척 소중히 여겼던 예전이라면 몰라도 방치된 미셸과 중지된 활동을 보면 신기할 정도로 쉽게 미셸의 말을 들었다.
솔직히 내가 코코로의 생각을 전부 이해 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어도 작곡하면서 나름 점점 알 수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원하는게 무엇인지 잘모르겠다.

"코코로짱은 나에게 미사키짱이 돌아올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어.. 그래도 겁을 먹을지 모르니까 상담해달라고 해서.."

그래서 정말 나에게 전화가 왔을때는 시라사기선배와의 약속도 취소하고 달려왔는데 도중에 내가 보낸 카페위치를 보고 돌연 코코로에게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야 고등학교시절 코코로가 억지를 부려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항상 어울려주는 나를 아니까 자신감이 없는 카논씨라면 자기가 실패해도 코코로가 있다면 설득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겠지.
어디서 어디까지 일부러 한 행동이고 우연일 뿐인지 구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맞아떨어져간다.

혹시 몇년동안 내가 미국에 있을 수 있었던것도 신뢰를 잃은 검은옷의 사람들이 몰랐을뿐 코코로가 계획한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구미는 뭔가 아는거 없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하구미도 중요한 지금의 코코로에 대한 조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의도한건지 모르겠지만 코코로는 하나씩 하나씩 내 앞에서 알아달라는듯 흔적을 남겨주고 있으니까.

"으~응.. 코코롱이 미-군이 돌아온다는 말은 해줬지만.. 다른건 들은 기억이 없을지도.. 아! 하지만 코코롱 하로하피에 대해서 이야기했을때 전혀 즐거운표정이 아니어서 조금 무서웠어. 미군이 돌아온다고 했을때까지는 웃었던거 같은데. 왜일까?"

"내가 돌아오는건 반겼는데.. 하로하피는 실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면 뭔가 다른게 있는 걸까."

즐거운 표정이 아니라고 했던 하구미는 다시 생각났는지 두려워하고 있었다 상당히 무서운 얼굴이었던걸까?

"이런, 이런. 공주님의 심정을 파악하는건 기사의 역할이긴 하지만 지금은 우선 서둘어야하지 않겠니? 시간이 지나면 마법이 풀려 다시 성에 갇혀버릴지도 모르잖아."

말은 어디에 두고 왔는지 곁으로 다가온 카오루씨는 울음을 그친 카논씨에게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을 하는게 대단한점이지만 혼자서 태연한것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오루씨, 자연스럽게 합류하긴 했는데 이 구출작전을 알고 있었다는건 제가 잡힐지도 모른다고 알았던거죠? 검은옷의 사람들이랑 서로 협력하는것 같던데.. 왜 미리 안알려준거에요?"

검은옷의 사람들은 내 연락처를 알고 있었다.
나도 다른사람들은 다 지웠어도 검은옷의 사람이 준 번호는 아직 남아있었으니 카오루씨가 연락을 하려면 할 수 있었을것이다.

"그건.. 사실 나도 카논과 같이 처음에는 공주님과 미사키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돕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래서는 진정한 의미로 공주님이 구해지지 않는다는걸 알기에 눈물을 삼키고 돌아선거야."

쓸데없이 멋진 얼굴로 눈물을 띄운 카오루씨는 여전히 연기에 심취해있는지 그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항상 연기하는 사람이기에 무언가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하아.. 일단 라이브티켓을 줘버렸으니까 걸즈밴드파티 멤버들에게 조금씩 시간을 양보해주도록 부탁해봐야겠네. 카논씨, 시라사기선배에게 연락부탁해도 돼?"

"으..응! 맡겨줘! 코코로짱과 미사키짱을 위해 힘내볼게!"

카논씨에게 약한편인 시라사기선배는 파스파레에서 영향력이 큰 편이었으니까 설득하면 문제 없을것이다.
아이돌밴드로 몇번이나 라이브를 해왔으니 시간조정도 여러번 해 본 일이겠지.

"하구미는 토야마씨한테 연락해줘. 1,2분이라도 좋으니까 양보해줄 수 있는지. 아마, 허락해줄거라고 생각하는데.."

"응! 얼른 전화해볼게! 미-군이 사라지고 슬퍼한 코코롱을 잘 아니까. 알겠다고 해줄거야."

하구미는 자신에게도 의지해준게 기쁜지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밝은걸보니 부정적인 반응은 아닌것 같았다.

"카오루씨.. 이건. 카오루씨의 상냥함에는 반하는걸지도 모르겠는데요.."

솔직히 부탁할지 말아야할지 엄청 고민될 정도로 야비한 수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면에서 부탁하기에는 시간이 급박했다.
그 밴드의 분위기를 보면 이유를 설명하면 받아들여줄거라고 생각하지만..

"우에하라씨에게 부탁해주실 수 있나요? 에프터글로우의 리더니까 우에하라씨가 도와준다면 다른 멤버들의 양해도 구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흐음..확실히 귀여운 아기고양이의 마음을 이용하는건 내키지않지만.. 사정을 설명해도 된다면 이해해주겠지. 다들 상냥하니까 말이야. 그럼, 미사키. 네가 로젤리아를 설득하러 가는 건가?"

"네.. 조금 자신없긴하지만.. 어떻게든 해내는거 자주 했던 일이니까요. 리미한테 리사씨 전화번호 물어봐야겠네.."

아마 밴드 상관없이 여기저기 상냥한 리사씨의 전화번호라면 리미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느새 능숙하게 예전처럼 교섭할 준비를 시작하는걸 보니 나는 지금도 코코로를 위해서 행동하는걸 좋아하는것 같다.

"헤헷. 그럴때가 아니지만 지금 꼭 원래의 하로하피같은 기분이야. ..미군 코코롱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다시 미국으로 가버리는거야?"

하구미가 불안해하며 물어보는 질문의 답을 나는 아직 가지고 있지 않았다.
코코로가 이대로 과거만 보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옆에 내가 있어도 좋을지는 알 수 없는것이다.

내가 코코로를 저렇게 만들정도로 소중한 인물이란 것은 기쁘지만 지금은 그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때에 가장 영향력이 컷었던 나를 요구하는걸지도 모르고.. 애초에 사랑한다던가 좋아한다던가를 구별하고 있는 걸까?
그냥 어린 소유욕의 발현인것일까..

이런걸 고민할때가 아니지.

"그건 아직 모르겠지만.. 지금은 코코로를 돕고싶다는 생각밖에 안들어서 다를걸 신경쓸 겨를이 없다랄까.. 응. 우선 코코로가 웃게 된다면 그때 고민해볼게."

바로 부정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것만으로 만족하는지 카논씨와 하구미는 밝게 웃음지었고 카오루씨는 여전히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것은 이제 연기를 넘어서서 일상에 배어든 수준이므로 사실은 카논씨나 하구미처럼 기뻐해주고 있는 걸까.

리미에게 답장으로 알게된 리사씨의 전화번호로 통화를 하니 확답은 얻지 못했지만 지금 모여서 라이브 전 마지막 연습을 하고 있는 장소를 가르쳐받았다.

모두에게 잘부탁한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뛰어가는 도중에 만약 일본에 돌아오려고 한다면 대학교는 어떻하지라던가 아르바이트의 매니저씨껜 미안하게 됐다는걸 생각하는 자신을 알아채고 실패할 경우같은건 전혀 고려하지 않는구나하고 조금 웃어버렸다.

코코로와 내가 바뀌어버린것 같았다.




스튜디오의 연습실에 도착했을때 오랜만에 보는 면면이지만 여전히 실력파 밴드인만큼 진지한 얼굴로 연주하고 있는 로젤리아가 보였다.
한창 연주중인 곡이 중간에 끊기면 안좋을테니 나는 얌전하게 챙겨온 장비를 옆에 놔두었다.

"오랜만이네, 미셸..의 속에 있던 오쿠사와씨지?"

연주가 끝나자마자 미나토씨가 말을 걸어왔다.
냉정한 얼굴을 보니 설득이 통할까 걱정이 되어서 긴장감이 늘어난다.

하지만 실력파를 지향하는 이 밴드이기 때문에 나는 어쩌면 말을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네. 사정은 설명한데로이고.. 라이브에서 조금만 시간을 양보해받고 싶은데요. 딱 1분이라도 좋으니까 부탁할 수 있을까요?"

긴장감에 꿀꺽 침을 삼킨다.
사실 다른 세 밴드를 설득하기만해도 내가 한곡을 연주하는데는 문제가 없었겠지만 코코로를 웃게한다는 의도를 가진 이상 막무가내로 누군가의 의견을 굽히는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흠..1분이면 그다지 영향이 크진 않겠지만 핼로, 해피월드는 활동을 중지한지 오래 된걸로 알고있는데 우리의 시간을 쓰는거니까 그만큼의 실력은 보여줘야겠는데?"

의외로 바로 거절당하지 않은 것에 놀랐지만 뒤에서 웃고 있는 리사씨가 먼저 도와주려고 애쓴 결과일것이다.

하지만 그 말대로 핼로, 해피월드가 내일 라이브에 나올 수 있을리가 없다.
모두 개인 연습으로 실력이 녹슬지는 않게끔 한 모양이지만 그정도로 로젤리아가 만족할리가 없다.

"이번 라이브는 핼로, 해피월드의 미셸로 라이브가 아니에요. 핼로, 해피월드를 위한 라이브죠."

미카엘의 가면을 꺼내들며 나는 싱긋 웃었다.
Posted by 백오판다
,
예상 밖으로 매우 훈훈하게 끝났던 여객선의 사건으로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것이다.
그날 이후로 처음의 연습일,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너는 태연하게 내 기대와 예상을 부숴버렸다.

"안~녕! 코코로! 오늘도 열심히 세상을 미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

"아니, 아니. 그렇게 감동적으로 끝났는데 도대체 왜 또 미셸이야!"

연습일 제일 먼저 도착해있던 미사키는 여전히 분홍곰 미셸이었다.
정말 저 끊질기게 고집하는 인형옷을 어떻게하라는 말인가.

"아하하! 깜짝 놀라는 코코로의 얼굴 너무 귀여워! 표정변화가 화려해서 질릴틈이 없는걸. 다른 사람들도 보면 전부 웃음 지을 텐데!"

"그거 이상한표정이란 말을 돌려 말한거지..? 하여튼, 무슨 불만이 있어서 아직도 미셸을 고집하는 거야?"

"응? 딱히 고집하는거 아니지만? 미셸은 하로하피의 멤버이니까 연습일날 미셸이 오는건 당연하잖아."

뭐가 이상하지?하며 한손으로 고민하는 포즈를 취하는 미셸이 얄미울 정도로 어울려서 내 노력은 대체 어디로 가버렸냐고 따질수도 없었다.

"아하하. 미안. 그런 울거같은 표정 짓지 말아줘. 자."

돌연 영원히 벗을거 같지 않던 미셸의 인형탈을 미사키가 번쩍 들어서 옆구리에 꼈다.
그 속에 숨겨진 얼굴은 정말 활짝 웃고 있어서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탱크톱에 조금 땀을 흘린 피부는 상기되어 있지만 무리하고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활짝 웃는 얼굴은 거짓의 가면같은것보다 훨씬 강력한 마법처럼 보고 있는 나마저도 웃게 만드는 힘이 있는것 같았다.

"후후후. 그렇게 감동받은 얼굴을 하면 조금 쑥스러운데. 이제 가면 속에서 울거나 하지 않아 단지 미셸도 중요할 뿐이야. 내가 미셸을 관두면 슬퍼할 아이들도 있고."

슥슥 조심스레 한손으로 미셸 인형탈의 머리부분을 쓰다듬는 손길에는 애정이 담겨있어서 미사키에게도 미셸은 소중한 존재라는게 느껴졌다.
아마 진짜로 이젠 필요해서 쓸 수 밖에 없는게 아니라 미셸이란 존재가 소중해서 함께 하로하피 활동을 하고 싶은거겠지.

"그래. 미셸도 미사키와 함께 좀 더 세상을 웃음으로 채우는 활동에 동참하고 싶을 거야."

"흐음.. 그런 말을 하는건.. 코코로도 마찬가지라서?"

장난스런 미소로 이쪽을 바라보는 미사키에게서 눈을 떼고 정말 하나도 이긴 기분이 들지 않는데 후련했다.
어쩌면 나는 미사키에게 지는건 싫지 않은것 같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너랑 어울리면서 지루하진 않은것 같으니까. 네가 세상을 모두 웃음으로 만든다는 터무니없는 꿈을 접을때까지만 어울려줄 생각이야."

"그럼 평~생 같이 즐거운것을 찾을 수 밖에 없겠네! 아.. 혹시 프로포즈?"

능글능글 웃는 얼굴이 얄미워서 코코로는 미사키의 볼을 꼬집어 주었다.
그래도 힘이 들어가지 않은 그 보복은 오히려 미사키를 유쾌하게 만들었는지 푸하하 웃으면서 미셸의 탈을 써버렸다.

다시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분명 웃는 얼굴일거라고 확신 할 정도로 기분이 좋은 목소리로 미사키는 내 이름을 불렀다.
어쩔 수 없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을 만큼 참견해버린걸 이제와서 후회 할 생각도 못하고 어느덧 나도 웃고있는것 같았다.

왜냐하면 미사키가 저렇게 기뻐하는건 마주보는 상대가 웃는 얼굴일때 뿐이니까.

"안녕, 카논! 오늘은 해매지 않았구나."

"후에에. 미사키짱 아직도 인형탈은 안벗는거야?"

이미 속에 들어있는게 미사키란걸 들통난 이상 내가 아니라도 모두 이런 반응일것이다.
하지만 카논씨는 허탈하단 느낌보단 단순히 놀란 얼굴인걸보니 카논씨에게도 미셸은 소중한 존재여서 어쩌면 오늘 미셸이 오지 않았다면 아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제서야 나는 미사키가 오늘 미셸을 입고 온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 한 것 같았다.
역시 언제나처럼 상대를 이해시키는 일은 하지 않을 생각같아서 앞으로도 내가 미사키를 이해하려면 이렇게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거겠지.

"미셸은 아이들에게 인기만점이니까. 라이브에서 이 모습으로 활동하려면 연습때부터 요령을 익혀야하니까. 그래도 이젠 하로하피회의 같은건 미사키로 잘부탁해."

"응! 그렇구나. 미셸도 미사키짱도 하로하피의 멤버니까. 하지만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무리하지 않기로 약속하자. 미사키짱이 말해주지 않으면 모두 인형탈속은 모르는걸."

"으응. 무리하면 슬퍼하는 사람을 알아버렸으니까. 그건 매우 곤란한걸. 나도 웃지 않으면 세상 모두가 웃는다고 할 수 없으니까 그때는 공주님과 용사들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할게. 다시 웃게해주는거지?"

"물론이지. 다들 미사키짱도 웃었으면하니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두명을 감싸고있는것 같아서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제일 늦게 하로하피에 합류한 나는 내가 없었던때에는 어떤 분위기였는지 알지못한다.

미셸속에 있던 미사키를 혼자서는 구할 수 없었겠지.
하여튼 하로하피에 들어오기 전까지 나는 타인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끼치는걸 꺼려했으니까.
지금은 전부 달라졌는가 물어본다면 역시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미사키를 가면속에서 꺼내기를 주저하지 않을것이다.

"이런, 아기고양이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을걸. 무언가 고민이 있니?"

"안녕하세요 카오루씨. 그냥.. 제가 갑자기 예전이랑 너무 달라진거 같아서 어째서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던거 뿐이에요."

불쑥불쑥 나타나기로는 미셸이랑 막상막하인 카오루씨가 나타났다.

"셰익스피어가 말하길 사랑은 그저 미친짓이라고 하지. 누군가에게 푹빠져 상대밖에 생각하지 못하면 변하는건 당연한일이 아닐까."

맞는 인용인듯 아닌듯 애매하지만 언제나의 카오루씨라는 느낌이든다.
말하고 싶은게 뭔지 어렴풋이 느껴지지만 그 내용이 내 신경을 건드리는것 같았다.

"그러니까 제가 미사키를 좋아해서 바뀌었단 의미인가요? 말도 안돼.. 제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한지 며칠되지도 않았고 저런 인형탈을 쓰고 밴드권유라던지 디제잉을 한다던지 이상한 행동 투성이라고요?"

"그런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 지금도 미사키가 하는게 전부 이상하다고 생각하니?"

"그런건.. 아니지만."

처음에는 당장 도망가야 한다던가 밴드에 들어갈 생각도 없었지만 어느새 미사키를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누구라도 저런 타인의 웃음을 위해 희생까지 하려고 하는 바보같은 사람을 보면 조금 정도는 감화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감동적인 영화의 절정부분이라던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게 되는 구출극처럼 누구라도 혼자서 큰벽에 직면하려는 사람을 방치 할 수 없는것 뿐이다.

내가 아니더라도 카논씨나 카오루씨 하구미도 모두 미셸이란 이상한 분홍곰이 하자는대로 누군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을 웃게하려고 밴드같은걸 하고 있으니까 나만 다를리가 없다.

"제가 아니더라도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 안하잖아요? 돕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하잖아요.. 저도 그런거랑 똑같은거에요. 뭐, 우정이라면 모르겠지만.."

"코코로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거겠지. 미셸이 부르는거같은데 가볼까?"

더이상 아무말도 더 하지 않고 카오루씨는 미사키에게 가버렸다.
좀 더 물어봐주길 바란건 아니지만 저렇게 순순히 가버린것도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도대체 나에게 저런말을 해서 어떤 반응을 바란걸까.
혹은 진짜 아무 의미도 없다던가?

언제나 셰익스피어의 말을 자랑스레 인용하지만 상황에 맞지 않을때도 있고 과장된 왕자님을 연기하는 카오루씨이니까 이번것도 아무 의미도 없는걸까.
그런것치곤 진지한 표정이었던게 마음에 걸리지만 설명해 달라고해도 해주지 않을거란건 이해했다.

"하구미는 오늘도 늦네. 요새 자주 늦는건 대회시즌인걸까?"

"소프트볼 연습도 바쁘겠지만.. 카논씨도 아르바이트가 있고 미사키라도 테니스부에서 열심히 활동하잖아? 적어도 약속한 시간은 지켜달라고 말해야할거 같은데."

미셸의 모습인채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미사키는 행동은 강행으로 보이지만 다른 멤버의 일정을 침해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하구미의 일정도 제대로 고려한 뒤에 이 시간, 이 날에 연습하려고 스튜디오의 연습실을 빌린것이다.

연습실을 빌리는데에는 돈도 들고 이렇게 주말에 빌리는건 경쟁도 치열하다니까 연습 한번을 하는데에도 미사키는 온갖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여러차례 늦는 하구미에게 화도 나지 않는걸까.

"늦어서 미안해! 소프트볼팀에 일이 있어서.."

달려들어온 하구미는 급하게 뛰어왔는지 무한하게 보이던 체력에도 불구하고 허억허억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미사키는 오늘도 하구미에게 아무 지적도 없이 숨을 고르게하고 연습을 시작했다.




돌아가는 시간이 되자 미사키는 미셸 인형탈을 벗었다.
지금까지 인형탈을 입은채로 사라졌으니까 연습후의 모습을 보는건 처음이었다.

땀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타올로 슥슥 문질러 닦는 손길은 익숙해보이지만 다소 거칠었다.
역시 폭신폭신한만큼 두께가 있는 인형옷이라 안은 푹푹 찌는지 검은 이너차림의 미사키는 물통을 단숨에 반이나 비워버렸다.

"그렇게 빤히 바라보면 나라도 조금 부끄러운데.."

"앗. 미안! 그냥 인형탈 안은 많이 더운건가 신경쓰여서.."

"뭐, 보는대로 땀투성이가 될 정도로 덥긴한데 지금은 적응되서 버틸만해. 움직이는데도 요령이 생겼고. 여름때 대책은 세워놔야겠지만."

나름대로 미셸로 활동하는 고충이 많은지 미사키의 입에서 개선해야 할 점이라던가 지금까지 해 본 방법같은것들이 쏟아져나왔다.
인형탈이라는 관심도 없던 주제지만 미사키가 이야기하면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하지만 미사키가 스스로 선택한 방법이라지만 너무 힘든길을 택한건 아닌가 신경쓰이기도 했다.
..이렇게 땀으로 푹 젖어있으면 내가 아닌 누구라도 걱정할것이다.

"인형옷말이야. 항상 빌리기는 힘들잖아? 괜찮다면 내가 준비해줄까."

"응? 아니, 밴드에 들어와준것도 고마운데 그것까진 아니지. 괜찮아. 힘든 아르바이트라선가 다른사람들이 모집되지 않아서 관대하시거든."

"그냥 내가 해주고 싶어서 하는 거야. 카논씨나 카오루씨, 하구미도 네가 밴드에 대해서 전부 부담하는거 걱정하고 있으니까. 네가 생각하는것보다 우리는 하로하피에 대해서 정말 좋아하니까."

억지로 어울려주고 있다고 빚으로 느끼는것을 다르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처음은 어쨋든 지금은 나도 자의로 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하로하피나 미사키를 좋아해주고 있는데 모른다니.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거절하지도 못하잖아. 그럼 대신 이번에 같이 외출할래? 답례로 밥이라도 살게. 음.. 코코로가 만족할만큼 비싼곳은 못가겠지만."

쑥스러운듯 평소랑은 달리 눈썹을 내리고 소극적으로 웃는 모습에 무심결에 침을 꿀꺽 삼키고 나는 이유도 모르는 긴장을 한채로 미사키의 제안을 수락했다.
Posted by 백오판다
,
 " 코코로짱, 생각해 둔 건 있어? "
 " 아니, 없어. "
 " ... 엑? "
 " 그치만, 그 녀석이 어떤 거에 약한지 잘 알고 있으니까 문제없는 걸. "

츠루마키 코코로는 자존심이 강했다. 실패는 용납할 수 없고, 지는 건 더더욱 참을 수 없다.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고, 나름의 평범함을 좋아하지만 한 번 마음먹은 걸 밀고나가 끝내 이루도록 교육받았다.

그러니까, 코코로는 멈출 수 없었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내 목표는 결국 너의 웃음임을 인정했다.



.




커다란 문이 열리고 거대한 호화 극장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화려한 무대 위에서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미카엘은 그저 서 있었다. 마왕을 토벌하러 가는 것처럼 위풍당당한 옷을 껴입은 우리들을 보았을 텐데도 미카엘은 미동도 없었다.

 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까만 곰 가면 속에서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거야?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에 가까이 다가섰을 때 미카엘은 고개를 들어 이쪽을 주시했다. 어설픈 곰 가면이 웃고 있었다.

한참을 이쪽을 주시하던 미카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슬아슬히 걸쳐진 삐에로 모자가 기울었으나, 솜털 장갑이 요령좋게 캐치해 제 자리로 돌려 놓는다.

이번에야말로 내 턴이야, 미사키.

 "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인 걸, 미카엘. "

 " ... 응. 공주님은 나한테 도망쳐서 무사히 안전귀가 했잖아? 그런데 왜 다시 온거야? 모두의 품으로 돌아갔으니까 해피엔드ㅡ일텐데. "

 " 이상한 소문을 들었거든. "

 이곳은 화려한 스테이지,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동화같은 이야기, 주연은 이 곳에 있는 모두가 주연, 오로지 주연들을 위한 관객 없는 공연.

연극은 스테이지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 이 스마일 호에 잠입해 나를 납치해 모두를 놀라게 한 극악무도한 마왕이, 의문의 저주를 받아 마왕으로 변해버린 사람이었다는 말이야. "

 " 헤? ...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 걸~. 나는 처음부터 마왕이었어! "

 " 하지만, 하구미도 들었는걸! 미카엘이 사실 나랑 동갑의 여자아이였다는 거! "

하구미의 말에 미카엘은 그 어떤 대꾸도 못했다. 코코로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코코로는 알았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오쿠사와 미사키는 갑작스러운 애드리브에 약했다. 당신이 지난 3일동안 코스프레 카페에서 하염없이 카운터만 봤던 걸 모를리가.

 " 만약에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해도, 대체 어쩌려고? 난 지금 이렇게나 흉악하고 사납고 포악해. "

가면의 입모양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린 미카엘이 끝내 입꼬리 끝을 점찍었다.

코코로가 한 발짝 내딛었다. 붉은 드레스가 허공을 나부꼈다. 미카엘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하얀 천조각이 발걸음을 따라 구겨졌다.
어떠한 감정에 물든 금안이 빛처럼 반짝였다. 그건 의지였고, 목표였으며, 그녀 그 자체였다.

 " 저주를 풀거야. "

 " ... ... "

 " 우리만 해피엔드인 이야기는 마음에 안 들어.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해피엔드 이야긴 이제 신물날 만큼 많이 들었어. 지금부터 이어나갈 이야기는... 그래, 배멀미가 심한 우리들의 동료가 말하는 모두가 웃음으로- 같은 이야기가 좋겠어. "

그러니,

 " 그런 엉망진창 겉모습을 벗는 것부터야! "

미카엘은 움직이지 않았다. 코코로는 그 사이 몇 걸음 더 움직였다. 한 발짝, 두 발짝.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멈춰서서 자신감 있게 웃고 있었다. 가면 속 안개낀 하늘이 격렬히 흔들렸다. 미카엘은 두툼한 솜털장갑으로 무장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 싫어. "
 " 어머나, 마왕님. 당신의 거부가 소용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더없이 단호한 어조였다. 코코로는 손을 뻗었다. 얼굴을 감싸는 손을 잡아 내려 단호히 눈을 마주쳤다.
 " 저주를 푸는 방법은 사랑의 고백이야. 납치되고 도망쳐서 동료들을 모아 당신에게 닿아. 이젠 깨달을 때가 됬지 않았을까나? 용사들이 마왕을 무찌르고 행복해졌습니다ㅡ 같은 구질구질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야. "

장르는, 이미 달라진지 오래라고.



그녀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선명히 닿아왔다. 미사키는 자신이 한 방 먹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마일 호의 공주님이 너무 눈부셔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직접적인 선전포고에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팔목을 잡고 있는 손이 뜨거워서 화상을 입을 것 같아. 도망치고 싶어. 그렇지만 이대로 도망쳐서, 당신들이 실망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 자, 마왕. 당신의 저주를 풀 시간이야. "

그녀의 연기는 뜨겁게 타오르다 부드러운 바람처럼 변칙적이었다. 타오르고 있던 것 같은 손목이 놓아져, 살짝 비켜선 코코로를 대신해 그 자리를 하구미가 차고 들어선다.

안녕, 우리의 스마일 캡틴.
하구미는 긴장한 기색으로 굳어진 얼굴로 솜과 천따위로 무장한 손을 꼭 잡아왔다.

 " 저기, 하구미 이런 거 해본 적 없어서 어색하지만! 마왕군이 웃어준다면 계속 할 수 있어! 하구미, 당신을 무척 좋아해!! 저주가 풀리면 같이 놀자. 무척 즐거울 거야! "

 세상 모두에게 전염시킬 정도로 환하고 맑은 너의 웃음을 나도 좋아해. 무한한 신뢰는 우리에게 힘이 되고 깨끗한 마음은 나아가는 용기가 되어.

앗, 하는 사이 하구미의 손으로 인해 가볍게 장갑이 빠져버렸다. 저항하지도 못했다.

땀에 절어 쭈글거리는 손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이곳저곳 굳은살에 생채기가 잔뜩 새겨진 손은 가면처럼 엉망이다. 무서워보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더니 하구미는 제 손마저 잡아왔다.

 " 와!! 마왕군의 손, 어른의 손이구나! "

파문이었다.

카오루씨에게 등이 떠밀리듯 하구미 옆에 선 카논씨는 얼굴이 새빨게진 채 우물쭈물 했다. 미사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뇌는 움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아무리 해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망연했다.

 " 미, 미사... 미카엘짱. 다, 당신을... 조, 조, 좋아합니다...!! "

카논씨는 계속 손에 쥐고 있는, 그녀가 선택했던 웃는 얼굴의 가면의 뒤로 부끄러운 듯 숨어버렸다.

 " 흐, 흐에에... "

 " 자, 카논. 더 할 말이 있겠지? "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카오루씨가 카논씨의 어깨를 짚으며 앞으로 나왔다. 시야의 세 명이 들어찼다. 그들만의 색채로 가득찬다.

 카논씨는 얼굴을 가리던 가면을 내렸다. 물빛 머리카락 아래로 잔뜩 붉어진 얼굴로, 카논씨는 간신히 귀를 기울여야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 무슨 옷을 입던, 어떤 얼굴을 하던... 미카엘짱의 노력은 퇴색되지 않아. 전해준 용기는 사라지지 않아. 힘들거나 어려울 때, 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항상 힘을 보태고 싶어. "

 ... 당신은 그 자체로 위안이 되요. 카논씨의 안정된 특별함을 좋아해요. 주변을 살피는 눈은 모두의 웃는 얼굴에 더욱 가까이 할 수 있게 해주고 있어요.

카논씨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재빠르게 다가와 이젠 그저 두르고만 있는 하얀 천을 벗겨갔다.

딱히 신경쓰지 않은 후줄근한 후드티와 반바지가 드러났다. 잡아당긴 작용으로 한바퀴 빙글 돈 미사키는 혼란스러웠다. 카논씨의 말이 머릿속을 징징 울렸다. 무슨 옷을 입던, 어떤 얼굴을 하던.

 잔잔한 물결 위의 파문에 돌덩이 하나가 던져진다.

 " 셰익스피어는 말했지. 정직만큼 풍요로운 것은 없다... 라고. "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카오루씨는 휘청이던 몸을 잡아주고, 삐에로 모자에 엉킨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풀어주었다.

번거로울텐데도 상냥한 손길은 변하지 않는다. 풀어지는 머리카락이 단정히 아래로 내려앉았다. 카오루씨는 완전히 저와 분리된 삐에로 모자를 가슴에 품었다.
.
 " 아, 얼마나 덧없는가. 아기고양이, 이런 우스꽝스런 모자 없이도 충분히 아름답구나. 그 어떤 꽃들도 그대만큼 가녀린 동시에 강직하지 못할거야. 꾸며낸 거짓말들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어 결국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았구나. "

 카오루씨, 당신의 배려와 화려함을 사랑하고 있어.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외모는 내 시선마저 끌어들이고 앞으로도 화려하게 빛날 걸 장담해.

돌덩이의 울렁임이 어느순간 파도가 된다.
 진심이 아닌 것들이 없어서, 저주가 점점 풀려가 이내 가면만 남았다. 그리고 손목이 잡혀 몸이 돌려진다. 뜨거워.

태양의 표면처럼 그녀의 눈은 울퉁불퉁히 빛이 났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순식간에 다가온 코코로는 가면의 옆면을 잡아채 웃고있는 가면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눈앞에 별이 튀어, 그대로 일렁이는 파도는 해일이 되어 저를 덮었다.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 했던 말들이 어지러히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진심이 담긴 사랑의 고백은 말없는 행위로도 충분한 듯 가면은 손쉽게 벗겨졌다.

드러난 미사키의 얼굴은 곤란함이 가득한 채 일그러져 있었다. 항상 생각했던 것들이 토해낼듯 가득해졌다.


모두를 웃는 얼굴로 만들자.
모두가 즐거워 웃는다면 울지 않아도 돼.
서글픈 일은 떨쳐내고 일어날 수 있을거야.
세상 모두가 히어로니까.
용기를 나눠줄테니 하고 싶은 걸 해줘.
세상은 이렇게나 반짝이는 것들로 넘치고 있어.
당신들도 이렇게나 반짝이는 걸.


 - 이 사실을 전달하려면, 나부터 웃지 않으면 안되겠네. -

 " 자, 저주가 풀렸어. 마왕님. "

 " ... ... "

 " 네 웃는 얼굴을 보고싶어. "

 " ... ... "

 " ... 미사키? "

 " 잠시만. 잠시만, 아주 잠시만 기다려줘. "

화려한 스마일 호의 아름다운 공주님과 용사들, 모두의 마법에 의해 사람으로 변한 오쿠사와 미사키는 그 얼굴 그대로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찬란한 눈을 가려버리고 말았다.

코코로는 벗긴 가면을 들고 가만히 있었다. 그게 꼭 마네킹 같아서, 미사키는 무심코 앞으로 흘러내린 옆머리를 손가락만으로 모양 좋은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귓바퀴에 스친 손가락에 코코로의 몸이 흠칫 떨린다. 아, 넌 내 앞에 살아있어.

막연한 느낌에서 깨어나 굳은살이 박힌 손으로 생채기가 날까 조심스럽게 닫힌 눈꺼풀을 쓸었다. 이상하게 목이 막혔다. 하고 싶은 말이 식도에 꽉 걸려 튀어나오지를 않았다. 해일이 덮친 탓이었다. 덕분에 숨까지 막혔다.

당신은 여름이고, 너무 뜨거워서 정신을 차릴 수 없어. 해일이 내 몸을 식혀주면 좋으련만.

어디서부터인가 존재했던 충동이 몸을 가득 부풀려 곧 터져버릴 것 같았다. 미사키는, 더 이상 그걸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코코로의 엷은 눈을 닫아 제 엄지 위로 입을 맞췄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목마른 자의 우물처럼 환희와 절망이 동시에 차올랐다.

나의 여름, 나의 태양, 나의 광활한 해바라기 꽃밭. 가장 강렬히 타올랐다 밤이 되듯 숨어버리는 겁쟁이 아가씨.

미사키는 깨달았다. 그 순간 막아둔 댐이 터지듯 눈물이 났다. 일그러져 있던 얼굴엔 엉망인 웃음도 났다. 무대의 나무바닥 색이 변하는 동시에 미사키의 구름도 걷혔다. 짙푸른 청색의 눈이 선명히 그들을 시야에 담는다.

모두가 웃고 있었다. 네 덕분이야.

 " 공주님, 당신이 나를 구해주었어. "

모두가 특별한 세상 속, 내게 가장 특별한 북두칠성.


-----------
여우공책(@Fox_nullnote)님께서 써주셨습니다.
Posted by 백오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