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가 반항할 기분이 사라졌다고 믿는건지 코코로는 그대로 콧노래를 부르며 다가왔다.
정말 옛날로 돌아간것처럼 미셸의 배에 포옹을 한 뒤에 손을 잡고는 고개를 갸웃하고 수갑은 내던졌다.
아직도 코코로는 내 인형탈을 벗길 생각은 없는것 같았다.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코코로의 안에서는 계속되고 있는걸까.

"그럼, 가볼까 미셸! 카논도 하구미도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모두도 하로하피의 라이브를 바라고 있을 거야. 세상 모두를 웃음으로 하자고 했던것 잊지 않았겠지?"

"그래, 잊지 않았어. 하지만 코코로 우리가 웃음 짓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웃을 수 없다고 한거. 잊은건 오히려 코코로겠지."

"..뭐라고 했어 미셸?"

내 손을 잡고 달러가려던 코코로가 뒤돌아보았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나에겐 완전히 인형같이 꾸며진 얼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셸의 폭신한 손이 우그러질만큼 힘이 들어간 코코로의 손이 지금 심정을 대변하는 걸까.

"코코로 지금 너는 아무도 웃게 만들 수 없어. 옛날로 돌아가려는 너는 절대로 앞으로 못나아가니까."

"무슨 소리야 미셸! 미셸은 그렇게 환하게 웃고 있고, 나도 웃고 있잖아. 다른 사람도 분명 우리를 보고 웃어줄거야."

먼지투성이 분홍곰과 인형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새빨간 드레스의 여성.
이런것을 보고 웃는건 희극적인 서커스에서나 일어날 일이었다.

만나면 감정에 휘둘려 다시 또 코코로에게 실컷 말려들어가 나도 옛날처럼 되돌아가진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히려 차갑게 이성적인 내가 있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아직도 남아있는 연정이 그럼에도 강하게 쳐낼수는 없게 만든다.
도와주고 싶지만 네 말대로 한다면 또 되풀이 할 뿐이야.

진정한 의미로 너에게 히어로가 되고 싶어졌다.

"코코로 너는 옛날에 집착하느라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어. 반짝반짝 빛나던것도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아무것도 남은게 없다면 내가 너에게 나눠줄게."

세계 여기저기에 보물이 흩어져 있다고 하던 그때 너의 기분을 되찾아줄게.
옛날만을 추억하며 붙잡아두려고 하기에 세상은 너무나도 아름답다고 알려줄게.

옛날부터 네가 모르는걸 가르쳐주는게 내 역할이었지?

"..지금은 그런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면? 미셸도 인형옷을 입는 사람도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건 아니겠지?"

표변한 분위기 이것이 네가 미소의 가면 뒤에 숨긴 바뀐 너일까.

아니, 오히려 코코로만이 하나도 바뀌지 못한걸지도 모른다.
아직껏 옛날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얻는것이 없기에 서서히 깍여나가서 마모된 빈껍질이 보여왔다.
내가 자신의 말에 따라주지 않는것에 인내심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걸까.

"아니. 코코로 너는 그렇게 하게 될거야. 왜냐하면 너 스스로 내 말을 들을 수 밖에 없게 만들었으니까. 그렇지? 코코로. 넌 미셸의 말이라면 들어주잖아?"

한참을 서로 응시하며 한치의 양보도 보이지 않다가 돌연 코코로가 한숨을 푹 쉬었다.

"..좋아. 네가 어딜가든 이제 내 손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그래, 미셸 내가 어떻게 하길 바래? 교실과 교탁을 준비할까? 나에게 반짝반짝을 가르쳐주려는 것이겠지."

다시 활짝 웃으면서 빙글 돌아 나에게서 조금 떨어진 코코로가 뒷짐을 진채 상반신만을 쑥 내밀어 즐거워서 못참겠다는 억양으로 말해왔다.
지금 상황과 극렬히 대비되는 모습에 안타까움이 몰려온다.

"그래. 코코로 가르쳐줄테지만 지금 여기서는 아니야. 반짝반짝은 어디에나 있지만 얼어버린 네가 녹을 정도로 빛을 발하려면 어울리는 장소가 있지. 너도 잘 아는곳이야. 받아. 그곳에서 만나자."

욱하면 저지르는 나의 못된 버릇이 또 튀어나와서 나는 어느새 리미에게 받았던 라이브 티켓을 건내고 있었다.
뒷일을 생각하면 가시투성이 고생길인걸 뻔히 알면서도 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면 나는 외면 할 수 없었다.
지금 미셸을 걸치고 있어서 더 그럴지도 모르지만..

라이브티켓을 휙 낚아채면서 훅 다가와 내밀고 있었던 한쪽 팔을 포옹한채로 코코로는 흥미진진하게 티켓을 살펴보았다.

"흐음.. 걸즈파티 라이브티켓? 인형옷을 입는 사람은 가끔 대담해서 놀란다니까. 라이브를 할 장소가 필요한거라면 나에게 맡기는 쉬운 방법도 있을 텐데.. 그런 면은 여전하구나."

"그래서는 의미가 없을것 같으니까. 알고있잖아."

"후후후.. 기대되지만 그렇게 쉽게 내가 넘어갈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줘. 당신이 떠난 몇년간 나는 이렇게 바뀔 정도로 괴로웠으니까. 직시하지도 못하고 아예 잊어버리지도 못해서 뒤틀린것, 반드시 책임을 물을거니까."

그대로 포옹을 풀고 탁 뒤로 물러서 한바퀴 휙 돌고는 오늘 본 코코로의 웃음 중에서는 최고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일순간 정말로 옛날로 돌아간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럼, 기대할게 미사키!"





코코로가 검은옷 군단을 물러서게 하고 양손을 흔들어 힘껏 인사하고 있다.
방금까지의 진지함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작곡 때문에 코코로의 저택에 묵고 집에 돌아가던때처럼 느껴져서 무심코 나도 한손을 흔들었다.

다각다각

그런데 여기에 더욱 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까 모르는 사람인척 하고 싶은 인물이 다가왔다.
그것도 하얀말을 탄 채로.

"이런, 미셸이라고 부르는게 좋니 미사키라고 부르는게 좋니? 오랜만이구나 아기고양이."

"그냥 미사키라고 불러주실래요. 드디어 알아줬다는 감동을 느끼고 싶으니까."

그러고보니 돌아와서 미셸을 입은 나를 보고 처음으로 미사키라고 불러준 사람이 된건가 카오루씨..
실비라고 했던가.. 이런 하얀말을 타고 오지만 않았어도 성실하게 고맙다고 말 할 생각이 들었을텐데..

"구하러 온 거지만.. 아쉽게도 오늘의 미사키는 공주님이 아니라 기사였구나. 참으로..덧없군."

"대학도 졸업했는데 아직도 왕자역이에요? 아니면 코코로 따라서 옛날로 돌아가고 싶으시다거나.. 지금 완전히 지쳐서 솔직히 당장 쓰러져 자고 싶은데요.. 다른데 가서 해주시면 안될까요."

"음. 그럼 적당히 하도록 할까. 구하러 올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지만 도와주러 왔어 미사키. 공주님을 구하는 길에 동료는 많을수록 좋은거겠지? 언제나처럼 세상을 웃음으로 만드는 마법을 알려줘."

"하아.. 뭐. 내일까지 혼자서 설득이랄까 가능할거 같지 않았으니.. 카오루씨 한명이라도 도움이 되서 다행이네요."

얼마나 코코로의 방에 묶여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벌써 석양이 지고 있었다.
원래 목적인 하로하피 현상황을 파악하는건 달성했는데 그보다 더 힘든 과제가 나와버렸다.

하.. 정말 카오루씨라도 도와준다니 다행이야..
이사람 이러니 저러니해도 의지가 되는 사람이니까..

"이런, 기사님이 공주님을 구하러가는데 초라하게 동료 한명일리가 없지. 하지만 조금 겁을 먹은 모양이로군. 미사키 네가 달래주면 어떨까? 어떤 동화에서도 영웅이란 적의 잘못을 감싸 동료로 만드는 미담 하나 정도는 가지지않는가."

희극적으로 한팔을 늘려 가르킨곳에서는 안절부절 전봇대 위에 숨어서 이쪽을 살피는 카논씨와 당장이라도 뛰어나오려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하구미가 있었다.

그렇게 냉정하게 화만 내고 나와버렸는데도 내가 걱정되서 여기까지 찾아와준걸까.
여전히 상냥한 사람들이다.

"카논씨~. 거기 숨어있는거 다 보여요. 으억! 하구미!! 달려들면 위험하다고 말했잖아!"

오랜만의 몸통박치기에 비틀비틀 중심을 잃을뻔했지만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그러고보니 이런 먼지투성이에 햇빛에 말리지도 못한채 방치된 인형옷에 달라붙어봤자 안는 기분은 둘째치고 냄새가 나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하구미도 코코로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것 같다.

역시 하로하피에 미셸은 정말 소중하고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였겠지.
하지만 그러니까 이렇게 먼지가 쌓인 상태로 누구도 그 방에 들어간 흔적이 없었다는게 신경쓰였다.

코코로는 한마디의 말만으로도 이 인형옷을 보살필 인력도 재력도 있었음에도 긴세월동안 보지도 않았다는 소리이니까.

"카논씨 그렇게 울지 않아도 되요. 일부런 그런건 아닌거 아니까. 지금의 코코로가 카논씨가 말렸다고해서 그만둘거 같지도 않고 오히려 미셸의 말을 순순히 들었다는게 이상 할 정도인데.."

하로하피를 무척 소중히 여겼던 예전이라면 몰라도 방치된 미셸과 중지된 활동을 보면 신기할 정도로 쉽게 미셸의 말을 들었다.
솔직히 내가 코코로의 생각을 전부 이해 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어도 작곡하면서 나름 점점 알 수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원하는게 무엇인지 잘모르겠다.

"코코로짱은 나에게 미사키짱이 돌아올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어.. 그래도 겁을 먹을지 모르니까 상담해달라고 해서.."

그래서 정말 나에게 전화가 왔을때는 시라사기선배와의 약속도 취소하고 달려왔는데 도중에 내가 보낸 카페위치를 보고 돌연 코코로에게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야 고등학교시절 코코로가 억지를 부려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항상 어울려주는 나를 아니까 자신감이 없는 카논씨라면 자기가 실패해도 코코로가 있다면 설득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겠지.
어디서 어디까지 일부러 한 행동이고 우연일 뿐인지 구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맞아떨어져간다.

혹시 몇년동안 내가 미국에 있을 수 있었던것도 신뢰를 잃은 검은옷의 사람들이 몰랐을뿐 코코로가 계획한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구미는 뭔가 아는거 없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하구미도 중요한 지금의 코코로에 대한 조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의도한건지 모르겠지만 코코로는 하나씩 하나씩 내 앞에서 알아달라는듯 흔적을 남겨주고 있으니까.

"으~응.. 코코롱이 미-군이 돌아온다는 말은 해줬지만.. 다른건 들은 기억이 없을지도.. 아! 하지만 코코롱 하로하피에 대해서 이야기했을때 전혀 즐거운표정이 아니어서 조금 무서웠어. 미군이 돌아온다고 했을때까지는 웃었던거 같은데. 왜일까?"

"내가 돌아오는건 반겼는데.. 하로하피는 실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면 뭔가 다른게 있는 걸까."

즐거운 표정이 아니라고 했던 하구미는 다시 생각났는지 두려워하고 있었다 상당히 무서운 얼굴이었던걸까?

"이런, 이런. 공주님의 심정을 파악하는건 기사의 역할이긴 하지만 지금은 우선 서둘어야하지 않겠니? 시간이 지나면 마법이 풀려 다시 성에 갇혀버릴지도 모르잖아."

말은 어디에 두고 왔는지 곁으로 다가온 카오루씨는 울음을 그친 카논씨에게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을 하는게 대단한점이지만 혼자서 태연한것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오루씨, 자연스럽게 합류하긴 했는데 이 구출작전을 알고 있었다는건 제가 잡힐지도 모른다고 알았던거죠? 검은옷의 사람들이랑 서로 협력하는것 같던데.. 왜 미리 안알려준거에요?"

검은옷의 사람들은 내 연락처를 알고 있었다.
나도 다른사람들은 다 지웠어도 검은옷의 사람이 준 번호는 아직 남아있었으니 카오루씨가 연락을 하려면 할 수 있었을것이다.

"그건.. 사실 나도 카논과 같이 처음에는 공주님과 미사키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돕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래서는 진정한 의미로 공주님이 구해지지 않는다는걸 알기에 눈물을 삼키고 돌아선거야."

쓸데없이 멋진 얼굴로 눈물을 띄운 카오루씨는 여전히 연기에 심취해있는지 그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항상 연기하는 사람이기에 무언가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하아.. 일단 라이브티켓을 줘버렸으니까 걸즈밴드파티 멤버들에게 조금씩 시간을 양보해주도록 부탁해봐야겠네. 카논씨, 시라사기선배에게 연락부탁해도 돼?"

"으..응! 맡겨줘! 코코로짱과 미사키짱을 위해 힘내볼게!"

카논씨에게 약한편인 시라사기선배는 파스파레에서 영향력이 큰 편이었으니까 설득하면 문제 없을것이다.
아이돌밴드로 몇번이나 라이브를 해왔으니 시간조정도 여러번 해 본 일이겠지.

"하구미는 토야마씨한테 연락해줘. 1,2분이라도 좋으니까 양보해줄 수 있는지. 아마, 허락해줄거라고 생각하는데.."

"응! 얼른 전화해볼게! 미-군이 사라지고 슬퍼한 코코롱을 잘 아니까. 알겠다고 해줄거야."

하구미는 자신에게도 의지해준게 기쁜지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밝은걸보니 부정적인 반응은 아닌것 같았다.

"카오루씨.. 이건. 카오루씨의 상냥함에는 반하는걸지도 모르겠는데요.."

솔직히 부탁할지 말아야할지 엄청 고민될 정도로 야비한 수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면에서 부탁하기에는 시간이 급박했다.
그 밴드의 분위기를 보면 이유를 설명하면 받아들여줄거라고 생각하지만..

"우에하라씨에게 부탁해주실 수 있나요? 에프터글로우의 리더니까 우에하라씨가 도와준다면 다른 멤버들의 양해도 구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흐음..확실히 귀여운 아기고양이의 마음을 이용하는건 내키지않지만.. 사정을 설명해도 된다면 이해해주겠지. 다들 상냥하니까 말이야. 그럼, 미사키. 네가 로젤리아를 설득하러 가는 건가?"

"네.. 조금 자신없긴하지만.. 어떻게든 해내는거 자주 했던 일이니까요. 리미한테 리사씨 전화번호 물어봐야겠네.."

아마 밴드 상관없이 여기저기 상냥한 리사씨의 전화번호라면 리미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느새 능숙하게 예전처럼 교섭할 준비를 시작하는걸 보니 나는 지금도 코코로를 위해서 행동하는걸 좋아하는것 같다.

"헤헷. 그럴때가 아니지만 지금 꼭 원래의 하로하피같은 기분이야. ..미군 코코롱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다시 미국으로 가버리는거야?"

하구미가 불안해하며 물어보는 질문의 답을 나는 아직 가지고 있지 않았다.
코코로가 이대로 과거만 보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옆에 내가 있어도 좋을지는 알 수 없는것이다.

내가 코코로를 저렇게 만들정도로 소중한 인물이란 것은 기쁘지만 지금은 그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때에 가장 영향력이 컷었던 나를 요구하는걸지도 모르고.. 애초에 사랑한다던가 좋아한다던가를 구별하고 있는 걸까?
그냥 어린 소유욕의 발현인것일까..

이런걸 고민할때가 아니지.

"그건 아직 모르겠지만.. 지금은 코코로를 돕고싶다는 생각밖에 안들어서 다를걸 신경쓸 겨를이 없다랄까.. 응. 우선 코코로가 웃게 된다면 그때 고민해볼게."

바로 부정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것만으로 만족하는지 카논씨와 하구미는 밝게 웃음지었고 카오루씨는 여전히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것은 이제 연기를 넘어서서 일상에 배어든 수준이므로 사실은 카논씨나 하구미처럼 기뻐해주고 있는 걸까.

리미에게 답장으로 알게된 리사씨의 전화번호로 통화를 하니 확답은 얻지 못했지만 지금 모여서 라이브 전 마지막 연습을 하고 있는 장소를 가르쳐받았다.

모두에게 잘부탁한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뛰어가는 도중에 만약 일본에 돌아오려고 한다면 대학교는 어떻하지라던가 아르바이트의 매니저씨껜 미안하게 됐다는걸 생각하는 자신을 알아채고 실패할 경우같은건 전혀 고려하지 않는구나하고 조금 웃어버렸다.

코코로와 내가 바뀌어버린것 같았다.




스튜디오의 연습실에 도착했을때 오랜만에 보는 면면이지만 여전히 실력파 밴드인만큼 진지한 얼굴로 연주하고 있는 로젤리아가 보였다.
한창 연주중인 곡이 중간에 끊기면 안좋을테니 나는 얌전하게 챙겨온 장비를 옆에 놔두었다.

"오랜만이네, 미셸..의 속에 있던 오쿠사와씨지?"

연주가 끝나자마자 미나토씨가 말을 걸어왔다.
냉정한 얼굴을 보니 설득이 통할까 걱정이 되어서 긴장감이 늘어난다.

하지만 실력파를 지향하는 이 밴드이기 때문에 나는 어쩌면 말을 들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네. 사정은 설명한데로이고.. 라이브에서 조금만 시간을 양보해받고 싶은데요. 딱 1분이라도 좋으니까 부탁할 수 있을까요?"

긴장감에 꿀꺽 침을 삼킨다.
사실 다른 세 밴드를 설득하기만해도 내가 한곡을 연주하는데는 문제가 없었겠지만 코코로를 웃게한다는 의도를 가진 이상 막무가내로 누군가의 의견을 굽히는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흠..1분이면 그다지 영향이 크진 않겠지만 핼로, 해피월드는 활동을 중지한지 오래 된걸로 알고있는데 우리의 시간을 쓰는거니까 그만큼의 실력은 보여줘야겠는데?"

의외로 바로 거절당하지 않은 것에 놀랐지만 뒤에서 웃고 있는 리사씨가 먼저 도와주려고 애쓴 결과일것이다.

하지만 그 말대로 핼로, 해피월드가 내일 라이브에 나올 수 있을리가 없다.
모두 개인 연습으로 실력이 녹슬지는 않게끔 한 모양이지만 그정도로 로젤리아가 만족할리가 없다.

"이번 라이브는 핼로, 해피월드의 미셸로 라이브가 아니에요. 핼로, 해피월드를 위한 라이브죠."

미카엘의 가면을 꺼내들며 나는 싱긋 웃었다.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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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밖으로 매우 훈훈하게 끝났던 여객선의 사건으로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것이다.
그날 이후로 처음의 연습일,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너는 태연하게 내 기대와 예상을 부숴버렸다.

"안~녕! 코코로! 오늘도 열심히 세상을 미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

"아니, 아니. 그렇게 감동적으로 끝났는데 도대체 왜 또 미셸이야!"

연습일 제일 먼저 도착해있던 미사키는 여전히 분홍곰 미셸이었다.
정말 저 끊질기게 고집하는 인형옷을 어떻게하라는 말인가.

"아하하! 깜짝 놀라는 코코로의 얼굴 너무 귀여워! 표정변화가 화려해서 질릴틈이 없는걸. 다른 사람들도 보면 전부 웃음 지을 텐데!"

"그거 이상한표정이란 말을 돌려 말한거지..? 하여튼, 무슨 불만이 있어서 아직도 미셸을 고집하는 거야?"

"응? 딱히 고집하는거 아니지만? 미셸은 하로하피의 멤버이니까 연습일날 미셸이 오는건 당연하잖아."

뭐가 이상하지?하며 한손으로 고민하는 포즈를 취하는 미셸이 얄미울 정도로 어울려서 내 노력은 대체 어디로 가버렸냐고 따질수도 없었다.

"아하하. 미안. 그런 울거같은 표정 짓지 말아줘. 자."

돌연 영원히 벗을거 같지 않던 미셸의 인형탈을 미사키가 번쩍 들어서 옆구리에 꼈다.
그 속에 숨겨진 얼굴은 정말 활짝 웃고 있어서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탱크톱에 조금 땀을 흘린 피부는 상기되어 있지만 무리하고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활짝 웃는 얼굴은 거짓의 가면같은것보다 훨씬 강력한 마법처럼 보고 있는 나마저도 웃게 만드는 힘이 있는것 같았다.

"후후후. 그렇게 감동받은 얼굴을 하면 조금 쑥스러운데. 이제 가면 속에서 울거나 하지 않아 단지 미셸도 중요할 뿐이야. 내가 미셸을 관두면 슬퍼할 아이들도 있고."

슥슥 조심스레 한손으로 미셸 인형탈의 머리부분을 쓰다듬는 손길에는 애정이 담겨있어서 미사키에게도 미셸은 소중한 존재라는게 느껴졌다.
아마 진짜로 이젠 필요해서 쓸 수 밖에 없는게 아니라 미셸이란 존재가 소중해서 함께 하로하피 활동을 하고 싶은거겠지.

"그래. 미셸도 미사키와 함께 좀 더 세상을 웃음으로 채우는 활동에 동참하고 싶을 거야."

"흐음.. 그런 말을 하는건.. 코코로도 마찬가지라서?"

장난스런 미소로 이쪽을 바라보는 미사키에게서 눈을 떼고 정말 하나도 이긴 기분이 들지 않는데 후련했다.
어쩌면 나는 미사키에게 지는건 싫지 않은것 같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너랑 어울리면서 지루하진 않은것 같으니까. 네가 세상을 모두 웃음으로 만든다는 터무니없는 꿈을 접을때까지만 어울려줄 생각이야."

"그럼 평~생 같이 즐거운것을 찾을 수 밖에 없겠네! 아.. 혹시 프로포즈?"

능글능글 웃는 얼굴이 얄미워서 코코로는 미사키의 볼을 꼬집어 주었다.
그래도 힘이 들어가지 않은 그 보복은 오히려 미사키를 유쾌하게 만들었는지 푸하하 웃으면서 미셸의 탈을 써버렸다.

다시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분명 웃는 얼굴일거라고 확신 할 정도로 기분이 좋은 목소리로 미사키는 내 이름을 불렀다.
어쩔 수 없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을 만큼 참견해버린걸 이제와서 후회 할 생각도 못하고 어느덧 나도 웃고있는것 같았다.

왜냐하면 미사키가 저렇게 기뻐하는건 마주보는 상대가 웃는 얼굴일때 뿐이니까.

"안녕, 카논! 오늘은 해매지 않았구나."

"후에에. 미사키짱 아직도 인형탈은 안벗는거야?"

이미 속에 들어있는게 미사키란걸 들통난 이상 내가 아니라도 모두 이런 반응일것이다.
하지만 카논씨는 허탈하단 느낌보단 단순히 놀란 얼굴인걸보니 카논씨에게도 미셸은 소중한 존재여서 어쩌면 오늘 미셸이 오지 않았다면 아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제서야 나는 미사키가 오늘 미셸을 입고 온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 한 것 같았다.
역시 언제나처럼 상대를 이해시키는 일은 하지 않을 생각같아서 앞으로도 내가 미사키를 이해하려면 이렇게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거겠지.

"미셸은 아이들에게 인기만점이니까. 라이브에서 이 모습으로 활동하려면 연습때부터 요령을 익혀야하니까. 그래도 이젠 하로하피회의 같은건 미사키로 잘부탁해."

"응! 그렇구나. 미셸도 미사키짱도 하로하피의 멤버니까. 하지만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무리하지 않기로 약속하자. 미사키짱이 말해주지 않으면 모두 인형탈속은 모르는걸."

"으응. 무리하면 슬퍼하는 사람을 알아버렸으니까. 그건 매우 곤란한걸. 나도 웃지 않으면 세상 모두가 웃는다고 할 수 없으니까 그때는 공주님과 용사들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할게. 다시 웃게해주는거지?"

"물론이지. 다들 미사키짱도 웃었으면하니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두명을 감싸고있는것 같아서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제일 늦게 하로하피에 합류한 나는 내가 없었던때에는 어떤 분위기였는지 알지못한다.

미셸속에 있던 미사키를 혼자서는 구할 수 없었겠지.
하여튼 하로하피에 들어오기 전까지 나는 타인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끼치는걸 꺼려했으니까.
지금은 전부 달라졌는가 물어본다면 역시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미사키를 가면속에서 꺼내기를 주저하지 않을것이다.

"이런, 아기고양이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을걸. 무언가 고민이 있니?"

"안녕하세요 카오루씨. 그냥.. 제가 갑자기 예전이랑 너무 달라진거 같아서 어째서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던거 뿐이에요."

불쑥불쑥 나타나기로는 미셸이랑 막상막하인 카오루씨가 나타났다.

"셰익스피어가 말하길 사랑은 그저 미친짓이라고 하지. 누군가에게 푹빠져 상대밖에 생각하지 못하면 변하는건 당연한일이 아닐까."

맞는 인용인듯 아닌듯 애매하지만 언제나의 카오루씨라는 느낌이든다.
말하고 싶은게 뭔지 어렴풋이 느껴지지만 그 내용이 내 신경을 건드리는것 같았다.

"그러니까 제가 미사키를 좋아해서 바뀌었단 의미인가요? 말도 안돼.. 제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한지 며칠되지도 않았고 저런 인형탈을 쓰고 밴드권유라던지 디제잉을 한다던지 이상한 행동 투성이라고요?"

"그런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 지금도 미사키가 하는게 전부 이상하다고 생각하니?"

"그런건.. 아니지만."

처음에는 당장 도망가야 한다던가 밴드에 들어갈 생각도 없었지만 어느새 미사키를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누구라도 저런 타인의 웃음을 위해 희생까지 하려고 하는 바보같은 사람을 보면 조금 정도는 감화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감동적인 영화의 절정부분이라던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게 되는 구출극처럼 누구라도 혼자서 큰벽에 직면하려는 사람을 방치 할 수 없는것 뿐이다.

내가 아니더라도 카논씨나 카오루씨 하구미도 모두 미셸이란 이상한 분홍곰이 하자는대로 누군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을 웃게하려고 밴드같은걸 하고 있으니까 나만 다를리가 없다.

"제가 아니더라도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 안하잖아요? 돕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하잖아요.. 저도 그런거랑 똑같은거에요. 뭐, 우정이라면 모르겠지만.."

"코코로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거겠지. 미셸이 부르는거같은데 가볼까?"

더이상 아무말도 더 하지 않고 카오루씨는 미사키에게 가버렸다.
좀 더 물어봐주길 바란건 아니지만 저렇게 순순히 가버린것도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도대체 나에게 저런말을 해서 어떤 반응을 바란걸까.
혹은 진짜 아무 의미도 없다던가?

언제나 셰익스피어의 말을 자랑스레 인용하지만 상황에 맞지 않을때도 있고 과장된 왕자님을 연기하는 카오루씨이니까 이번것도 아무 의미도 없는걸까.
그런것치곤 진지한 표정이었던게 마음에 걸리지만 설명해 달라고해도 해주지 않을거란건 이해했다.

"하구미는 오늘도 늦네. 요새 자주 늦는건 대회시즌인걸까?"

"소프트볼 연습도 바쁘겠지만.. 카논씨도 아르바이트가 있고 미사키라도 테니스부에서 열심히 활동하잖아? 적어도 약속한 시간은 지켜달라고 말해야할거 같은데."

미셸의 모습인채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미사키는 행동은 강행으로 보이지만 다른 멤버의 일정을 침해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하구미의 일정도 제대로 고려한 뒤에 이 시간, 이 날에 연습하려고 스튜디오의 연습실을 빌린것이다.

연습실을 빌리는데에는 돈도 들고 이렇게 주말에 빌리는건 경쟁도 치열하다니까 연습 한번을 하는데에도 미사키는 온갖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여러차례 늦는 하구미에게 화도 나지 않는걸까.

"늦어서 미안해! 소프트볼팀에 일이 있어서.."

달려들어온 하구미는 급하게 뛰어왔는지 무한하게 보이던 체력에도 불구하고 허억허억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미사키는 오늘도 하구미에게 아무 지적도 없이 숨을 고르게하고 연습을 시작했다.




돌아가는 시간이 되자 미사키는 미셸 인형탈을 벗었다.
지금까지 인형탈을 입은채로 사라졌으니까 연습후의 모습을 보는건 처음이었다.

땀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타올로 슥슥 문질러 닦는 손길은 익숙해보이지만 다소 거칠었다.
역시 폭신폭신한만큼 두께가 있는 인형옷이라 안은 푹푹 찌는지 검은 이너차림의 미사키는 물통을 단숨에 반이나 비워버렸다.

"그렇게 빤히 바라보면 나라도 조금 부끄러운데.."

"앗. 미안! 그냥 인형탈 안은 많이 더운건가 신경쓰여서.."

"뭐, 보는대로 땀투성이가 될 정도로 덥긴한데 지금은 적응되서 버틸만해. 움직이는데도 요령이 생겼고. 여름때 대책은 세워놔야겠지만."

나름대로 미셸로 활동하는 고충이 많은지 미사키의 입에서 개선해야 할 점이라던가 지금까지 해 본 방법같은것들이 쏟아져나왔다.
인형탈이라는 관심도 없던 주제지만 미사키가 이야기하면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하지만 미사키가 스스로 선택한 방법이라지만 너무 힘든길을 택한건 아닌가 신경쓰이기도 했다.
..이렇게 땀으로 푹 젖어있으면 내가 아닌 누구라도 걱정할것이다.

"인형옷말이야. 항상 빌리기는 힘들잖아? 괜찮다면 내가 준비해줄까."

"응? 아니, 밴드에 들어와준것도 고마운데 그것까진 아니지. 괜찮아. 힘든 아르바이트라선가 다른사람들이 모집되지 않아서 관대하시거든."

"그냥 내가 해주고 싶어서 하는 거야. 카논씨나 카오루씨, 하구미도 네가 밴드에 대해서 전부 부담하는거 걱정하고 있으니까. 네가 생각하는것보다 우리는 하로하피에 대해서 정말 좋아하니까."

억지로 어울려주고 있다고 빚으로 느끼는것을 다르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처음은 어쨋든 지금은 나도 자의로 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하로하피나 미사키를 좋아해주고 있는데 모른다니.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거절하지도 못하잖아. 그럼 대신 이번에 같이 외출할래? 답례로 밥이라도 살게. 음.. 코코로가 만족할만큼 비싼곳은 못가겠지만."

쑥스러운듯 평소랑은 달리 눈썹을 내리고 소극적으로 웃는 모습에 무심결에 침을 꿀꺽 삼키고 나는 이유도 모르는 긴장을 한채로 미사키의 제안을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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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코로짱, 생각해 둔 건 있어? "
 " 아니, 없어. "
 " ... 엑? "
 " 그치만, 그 녀석이 어떤 거에 약한지 잘 알고 있으니까 문제없는 걸. "

츠루마키 코코로는 자존심이 강했다. 실패는 용납할 수 없고, 지는 건 더더욱 참을 수 없다.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고, 나름의 평범함을 좋아하지만 한 번 마음먹은 걸 밀고나가 끝내 이루도록 교육받았다.

그러니까, 코코로는 멈출 수 없었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내 목표는 결국 너의 웃음임을 인정했다.



.




커다란 문이 열리고 거대한 호화 극장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화려한 무대 위에서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미카엘은 그저 서 있었다. 마왕을 토벌하러 가는 것처럼 위풍당당한 옷을 껴입은 우리들을 보았을 텐데도 미카엘은 미동도 없었다.

 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까만 곰 가면 속에서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거야?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에 가까이 다가섰을 때 미카엘은 고개를 들어 이쪽을 주시했다. 어설픈 곰 가면이 웃고 있었다.

한참을 이쪽을 주시하던 미카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슬아슬히 걸쳐진 삐에로 모자가 기울었으나, 솜털 장갑이 요령좋게 캐치해 제 자리로 돌려 놓는다.

이번에야말로 내 턴이야, 미사키.

 "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인 걸, 미카엘. "

 " ... 응. 공주님은 나한테 도망쳐서 무사히 안전귀가 했잖아? 그런데 왜 다시 온거야? 모두의 품으로 돌아갔으니까 해피엔드ㅡ일텐데. "

 " 이상한 소문을 들었거든. "

 이곳은 화려한 스테이지,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동화같은 이야기, 주연은 이 곳에 있는 모두가 주연, 오로지 주연들을 위한 관객 없는 공연.

연극은 스테이지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 이 스마일 호에 잠입해 나를 납치해 모두를 놀라게 한 극악무도한 마왕이, 의문의 저주를 받아 마왕으로 변해버린 사람이었다는 말이야. "

 " 헤? ...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 걸~. 나는 처음부터 마왕이었어! "

 " 하지만, 하구미도 들었는걸! 미카엘이 사실 나랑 동갑의 여자아이였다는 거! "

하구미의 말에 미카엘은 그 어떤 대꾸도 못했다. 코코로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코코로는 알았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오쿠사와 미사키는 갑작스러운 애드리브에 약했다. 당신이 지난 3일동안 코스프레 카페에서 하염없이 카운터만 봤던 걸 모를리가.

 " 만약에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해도, 대체 어쩌려고? 난 지금 이렇게나 흉악하고 사납고 포악해. "

가면의 입모양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린 미카엘이 끝내 입꼬리 끝을 점찍었다.

코코로가 한 발짝 내딛었다. 붉은 드레스가 허공을 나부꼈다. 미카엘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하얀 천조각이 발걸음을 따라 구겨졌다.
어떠한 감정에 물든 금안이 빛처럼 반짝였다. 그건 의지였고, 목표였으며, 그녀 그 자체였다.

 " 저주를 풀거야. "

 " ... ... "

 " 우리만 해피엔드인 이야기는 마음에 안 들어.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해피엔드 이야긴 이제 신물날 만큼 많이 들었어. 지금부터 이어나갈 이야기는... 그래, 배멀미가 심한 우리들의 동료가 말하는 모두가 웃음으로- 같은 이야기가 좋겠어. "

그러니,

 " 그런 엉망진창 겉모습을 벗는 것부터야! "

미카엘은 움직이지 않았다. 코코로는 그 사이 몇 걸음 더 움직였다. 한 발짝, 두 발짝.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멈춰서서 자신감 있게 웃고 있었다. 가면 속 안개낀 하늘이 격렬히 흔들렸다. 미카엘은 두툼한 솜털장갑으로 무장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 싫어. "
 " 어머나, 마왕님. 당신의 거부가 소용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더없이 단호한 어조였다. 코코로는 손을 뻗었다. 얼굴을 감싸는 손을 잡아 내려 단호히 눈을 마주쳤다.
 " 저주를 푸는 방법은 사랑의 고백이야. 납치되고 도망쳐서 동료들을 모아 당신에게 닿아. 이젠 깨달을 때가 됬지 않았을까나? 용사들이 마왕을 무찌르고 행복해졌습니다ㅡ 같은 구질구질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야. "

장르는, 이미 달라진지 오래라고.



그녀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선명히 닿아왔다. 미사키는 자신이 한 방 먹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마일 호의 공주님이 너무 눈부셔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직접적인 선전포고에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팔목을 잡고 있는 손이 뜨거워서 화상을 입을 것 같아. 도망치고 싶어. 그렇지만 이대로 도망쳐서, 당신들이 실망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 자, 마왕. 당신의 저주를 풀 시간이야. "

그녀의 연기는 뜨겁게 타오르다 부드러운 바람처럼 변칙적이었다. 타오르고 있던 것 같은 손목이 놓아져, 살짝 비켜선 코코로를 대신해 그 자리를 하구미가 차고 들어선다.

안녕, 우리의 스마일 캡틴.
하구미는 긴장한 기색으로 굳어진 얼굴로 솜과 천따위로 무장한 손을 꼭 잡아왔다.

 " 저기, 하구미 이런 거 해본 적 없어서 어색하지만! 마왕군이 웃어준다면 계속 할 수 있어! 하구미, 당신을 무척 좋아해!! 저주가 풀리면 같이 놀자. 무척 즐거울 거야! "

 세상 모두에게 전염시킬 정도로 환하고 맑은 너의 웃음을 나도 좋아해. 무한한 신뢰는 우리에게 힘이 되고 깨끗한 마음은 나아가는 용기가 되어.

앗, 하는 사이 하구미의 손으로 인해 가볍게 장갑이 빠져버렸다. 저항하지도 못했다.

땀에 절어 쭈글거리는 손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이곳저곳 굳은살에 생채기가 잔뜩 새겨진 손은 가면처럼 엉망이다. 무서워보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더니 하구미는 제 손마저 잡아왔다.

 " 와!! 마왕군의 손, 어른의 손이구나! "

파문이었다.

카오루씨에게 등이 떠밀리듯 하구미 옆에 선 카논씨는 얼굴이 새빨게진 채 우물쭈물 했다. 미사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뇌는 움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아무리 해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망연했다.

 " 미, 미사... 미카엘짱. 다, 당신을... 조, 조, 좋아합니다...!! "

카논씨는 계속 손에 쥐고 있는, 그녀가 선택했던 웃는 얼굴의 가면의 뒤로 부끄러운 듯 숨어버렸다.

 " 흐, 흐에에... "

 " 자, 카논. 더 할 말이 있겠지? "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카오루씨가 카논씨의 어깨를 짚으며 앞으로 나왔다. 시야의 세 명이 들어찼다. 그들만의 색채로 가득찬다.

 카논씨는 얼굴을 가리던 가면을 내렸다. 물빛 머리카락 아래로 잔뜩 붉어진 얼굴로, 카논씨는 간신히 귀를 기울여야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 무슨 옷을 입던, 어떤 얼굴을 하던... 미카엘짱의 노력은 퇴색되지 않아. 전해준 용기는 사라지지 않아. 힘들거나 어려울 때, 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항상 힘을 보태고 싶어. "

 ... 당신은 그 자체로 위안이 되요. 카논씨의 안정된 특별함을 좋아해요. 주변을 살피는 눈은 모두의 웃는 얼굴에 더욱 가까이 할 수 있게 해주고 있어요.

카논씨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재빠르게 다가와 이젠 그저 두르고만 있는 하얀 천을 벗겨갔다.

딱히 신경쓰지 않은 후줄근한 후드티와 반바지가 드러났다. 잡아당긴 작용으로 한바퀴 빙글 돈 미사키는 혼란스러웠다. 카논씨의 말이 머릿속을 징징 울렸다. 무슨 옷을 입던, 어떤 얼굴을 하던.

 잔잔한 물결 위의 파문에 돌덩이 하나가 던져진다.

 " 셰익스피어는 말했지. 정직만큼 풍요로운 것은 없다... 라고. "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카오루씨는 휘청이던 몸을 잡아주고, 삐에로 모자에 엉킨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풀어주었다.

번거로울텐데도 상냥한 손길은 변하지 않는다. 풀어지는 머리카락이 단정히 아래로 내려앉았다. 카오루씨는 완전히 저와 분리된 삐에로 모자를 가슴에 품었다.
.
 " 아, 얼마나 덧없는가. 아기고양이, 이런 우스꽝스런 모자 없이도 충분히 아름답구나. 그 어떤 꽃들도 그대만큼 가녀린 동시에 강직하지 못할거야. 꾸며낸 거짓말들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어 결국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았구나. "

 카오루씨, 당신의 배려와 화려함을 사랑하고 있어.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외모는 내 시선마저 끌어들이고 앞으로도 화려하게 빛날 걸 장담해.

돌덩이의 울렁임이 어느순간 파도가 된다.
 진심이 아닌 것들이 없어서, 저주가 점점 풀려가 이내 가면만 남았다. 그리고 손목이 잡혀 몸이 돌려진다. 뜨거워.

태양의 표면처럼 그녀의 눈은 울퉁불퉁히 빛이 났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순식간에 다가온 코코로는 가면의 옆면을 잡아채 웃고있는 가면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눈앞에 별이 튀어, 그대로 일렁이는 파도는 해일이 되어 저를 덮었다.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 했던 말들이 어지러히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진심이 담긴 사랑의 고백은 말없는 행위로도 충분한 듯 가면은 손쉽게 벗겨졌다.

드러난 미사키의 얼굴은 곤란함이 가득한 채 일그러져 있었다. 항상 생각했던 것들이 토해낼듯 가득해졌다.


모두를 웃는 얼굴로 만들자.
모두가 즐거워 웃는다면 울지 않아도 돼.
서글픈 일은 떨쳐내고 일어날 수 있을거야.
세상 모두가 히어로니까.
용기를 나눠줄테니 하고 싶은 걸 해줘.
세상은 이렇게나 반짝이는 것들로 넘치고 있어.
당신들도 이렇게나 반짝이는 걸.


 - 이 사실을 전달하려면, 나부터 웃지 않으면 안되겠네. -

 " 자, 저주가 풀렸어. 마왕님. "

 " ... ... "

 " 네 웃는 얼굴을 보고싶어. "

 " ... ... "

 " ... 미사키? "

 " 잠시만. 잠시만, 아주 잠시만 기다려줘. "

화려한 스마일 호의 아름다운 공주님과 용사들, 모두의 마법에 의해 사람으로 변한 오쿠사와 미사키는 그 얼굴 그대로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찬란한 눈을 가려버리고 말았다.

코코로는 벗긴 가면을 들고 가만히 있었다. 그게 꼭 마네킹 같아서, 미사키는 무심코 앞으로 흘러내린 옆머리를 손가락만으로 모양 좋은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귓바퀴에 스친 손가락에 코코로의 몸이 흠칫 떨린다. 아, 넌 내 앞에 살아있어.

막연한 느낌에서 깨어나 굳은살이 박힌 손으로 생채기가 날까 조심스럽게 닫힌 눈꺼풀을 쓸었다. 이상하게 목이 막혔다. 하고 싶은 말이 식도에 꽉 걸려 튀어나오지를 않았다. 해일이 덮친 탓이었다. 덕분에 숨까지 막혔다.

당신은 여름이고, 너무 뜨거워서 정신을 차릴 수 없어. 해일이 내 몸을 식혀주면 좋으련만.

어디서부터인가 존재했던 충동이 몸을 가득 부풀려 곧 터져버릴 것 같았다. 미사키는, 더 이상 그걸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코코로의 엷은 눈을 닫아 제 엄지 위로 입을 맞췄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목마른 자의 우물처럼 환희와 절망이 동시에 차올랐다.

나의 여름, 나의 태양, 나의 광활한 해바라기 꽃밭. 가장 강렬히 타올랐다 밤이 되듯 숨어버리는 겁쟁이 아가씨.

미사키는 깨달았다. 그 순간 막아둔 댐이 터지듯 눈물이 났다. 일그러져 있던 얼굴엔 엉망인 웃음도 났다. 무대의 나무바닥 색이 변하는 동시에 미사키의 구름도 걷혔다. 짙푸른 청색의 눈이 선명히 그들을 시야에 담는다.

모두가 웃고 있었다. 네 덕분이야.

 " 공주님, 당신이 나를 구해주었어. "

모두가 특별한 세상 속, 내게 가장 특별한 북두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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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공책(@Fox_nullnote)님께서 써주셨습니다.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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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전부 특별하고 모두 1등이라고 생각해왔다.
미셸도 하구미도 카논도 카오루도 미사키도 다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인걸, 다른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야.
누구든 히어로가 될 수 있어.
모두 웃는 세상을 만들 수 있어.

하지만 누구나가 그렇게 생각하는건 아니라고 너는 동경하는 얼굴로 포기하고 있었으니까.
너를 웃는 얼굴로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숙여서 둥글어진 등에 비해 곧은 눈으로 현실을 직시하는 네가 나에게는 너무나도 냉정하고 차가운 사실로 다가와서 그만 잊어버리고 싶어졌어.

잘못하고 있다는걸 알고 있어.

내가 이름을 잊을 때마다 아픈 얼굴을 하는걸 알고 있어.

누구나가 공평하게 특별하다면서 어째서 너에게만은 억지을 부리고 싶은 걸까.

네가 아니라도 괜찮다면 곰인형 속에 누가 들어있든 신경쓰지 않아도 될텐데.

하지만 아무도 이런 기분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으니까 나는 당신이 가르쳐주기를 기다릴뿐.

"모두가 특별하다면 사실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거 아니야?"

방과후 억지로 어울리게 한 즐거운것을 찾는 모험의 끝에 지쳐서 강둑에 들어앉아버린 네가 그런 말을 했을때.
나는 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지금이 너무 즐거워서 왜 즐거운지 이유 따위는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앞으로도 즐거울거라고 의심치 않았으니까.

"하지만 모두가 히어로인걸. 특별하지 않은건 없잖아?"

내가 그렇게 대답했을때 노을이 비치는 강물을 응시하는 네 얼굴은 역광으로 보이지 않아서.
나는 분명히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이렇게 즐거우니 당신도 즐거울거라고 생각했는걸.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만 항상 눈썹을 찡그리며 살풋 웃는 얼굴이 이제는 당신 나름의 힘껏인 웃음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안심하고 뛰쳐나갈 수 있다는걸 당신은 알고 있겠지.
왜냐하면 언제든 내가 모르는걸 알려주는 마법사이니까.

"그래, 누구나 히어로가 될 수 있구나. 꼭 나일 필요는 없겠지.."

"응? 미사키, 방금 무슨 말을 했어?"

강둑을 따라 스산한 가을 바람이 불어 네 말을 가려버렸을때에 내가 좀 더 뒤를 돌아볼줄 알았다면 잃기 전에 손을 잡을 수 있었을텐데.

"아무것도 아니야. 슬슬 저녁 날씨도 추워지네. 이제 슬슬 집에 가자, 코코로."

"응! 미사키! 저기까지 달리기경주 하자!"

"아,아. 정말.. 난 안뛸거니까."

거절하는 당신의 말에도 불구하고 뛰쳐나가는 나를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고민도 하지 않았다.
늦어도 따라와줄거라고 의심치 않았으니까.


졸업식과 함께 뚝 끊긴 연락에도 당신이 어디선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다시 만날 날은 정해져있으니까 나는 다음의 즐거운것을 찾을 뿐.

"좋아! 다음의 곡은 이런식으로 하자! 미사키는 언제쯤 연락해줄까? 라이브를 위해서 신곡을 만들어야하는데."

종이 위에는 색색깔의 크레파스로 그려진 곰인형의 당신과 웃는 얼굴의 나.
여러가지 즐거운것들과 반짝반짝 예쁘고 귀여운것들.
저절로 솟아오르는 행복감에 흥얼거리는 콧노래를 얼른 들려주고 싶은데.

그런데 어째서 와주지 않는 거야?

녹음된 허밍과 방치된 종이로 만들어진 이제는 어떤 마음으로 불렀는지 기억이 안나는 곡을 받아들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당신을 생각해.

당신이 빠진 회의에서 모두가 의욕에 넘쳐 생각해낸 평소라면 반대에 무너졌을 화려한 연출도 순조롭게 준비된 라이브의 무대도.

전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게 된것은 왜일까?
분명 그렇게 즐거운 기분으로 달려가던 길이 지금은 어떻게 보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저 살랑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아스팔트의 아지랑이, 구름 한점 없는 여름날의 햇볕도 특별함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서 그제서야 나는 특별이 무엇인지 알아채버렸어.

"인형옷을 입는 사람은 어디로 가버린거야?"

괴롭고 슬퍼서 가슴이 쓰라려서 다시 이름을 잊어버렸어.
분명 방과후에 당신이 양모펠트를 할때 떨어뜨린 바늘이 내 심장을 찔러버린거야.
하지만 선물할 상대를 생각하며 소중히 한땀 한땀 노력하는 당신의 고요한 미소가 너무 아름다웠으니까 없어져버린 지금에서야 눈치채버린거야.

그러니까 이것은 이런 위험한것을 방치한 당신에게로의 짖궃음.
빨리 돌아와서 없애주지 않으면 겨우 기억했던 이름을 영원히 다시 잊어버릴지도 모른다구?

"오쿠사와님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없어도 내 주위는 너무나도 순조롭게 풀려가.
라이브의 당일에도 나타나지 않은 당신에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 미셸이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경종을 치는것 같았어.

슬픈 얼굴의 카논도 필사적으로 대기실을 뒤지는 하구미도 모두가 모르는걸 알아챈듯이 조용히 고개를 숙인 카오루조차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채 다음 라이브의 일정이라고 쓰인 종이를 건내는 미셸의 폭신한 손을 거부해버리고 말았어.

"아..아. 미셸, 미안해.."

괜찮다는듯 손사레를 치는 미셸의 얼굴은 여전히 웃는표정에서 전혀 바뀌지 않아서 무서워졌어.
카논의 울것같은 얼굴도, 하구미의 숙인 고개도, 뒤돌아버린 카오루의 등도 직시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워서, 무서워서 손을 올려 쓸어본 내 얼굴은 흐르는 눈물로 질척질척 젖어있었어.

세상 모두를 웃는 얼굴로 만들자고 했을때 질릴때까지 어울려준다고 했었잖아.
나라면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당신은 말했었지만 웃음으로 만들수있는 방법을 모르는걸.

"웃음을 잃었을때..어떻게 해야 하더라..?"

나는 당신에게 항상 겁쟁이라고 했지만 특별이란것이 이렇게 중요하다고 알았다면 잃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해했을지도 몰랐는데.
특별이 가장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세상이 온통 반짝반짝 빛나서 눈이 부셔 잃어버릴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나에게 가장 특별한것이 이미 나를 떠나버렸다는것을.



진로에 대해서 물을때조차 당연히 같은곳을 향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하구미의 걱정에 찬 메시지도 확인하지 않은채 어둑한 방의 천개로 가린 침대위에서 무엇을 잘못했을까 몇번이고 회상한다.

"같이 가자고 했을때 알았다고 대답해줬었는데. 도대체 언제부터 나는 잘못하고 있었던거지."

배개 옆의 미셸 양모펠트 인형이 아직도 모르겠냐는듯 비웃는 얼굴로 보여서 침대 밖으로 던져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을때 항상 내게 가르쳐주던 사람은 자신이 떠나는 이유는 알려주지 않아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나의 억지로 이 방에서 함께 잠들때조차 떠난다는 기색은 하나도 없이 정말 행복한 웃음을 보여줬었는데.
당신은 겁쟁이지만 그래도 여러가지 이유를 붙여서 내 옆을 떠나지 않았었는데.

"억지로 미셸을 입게 한것이 힘들었어?"

하지만 이제는 미셸도 중요하다고 말해줬잖아.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던게 싫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제대로 부르는걸. 아, 지금은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네.

"제발.. 알려줘. 어떻게하면 돌아오는거야?"

무릎을 굽히고 등을 말고 팔로 감싸 안아 세상과 단절하고 자문자답을 반복해도 답은 발견되지 않고 더이상 뭘 해야할지도 모르는채 시간만이 흘러간다.
침대 아래로 떨어져 굴러가 옆으로 쓰러져있는 미셸 인형의 텅빈 눈동자가 자꾸 나를 책망하는것 같았다.

인형옷을 입는 사람은 걱정이 많으니까 내가 이렇게 될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이것은 벌인건가?
내가 반성하면, 무언가를 고치면 돌아와주는건가.

"아가씨, 오쿠사와님을 찾는것은 그만두라는 당주님의 전언입니다."

"하지만 아직 인형옷을 입는 사람은 발견되지 않았어. 츠루마키의 힘이라면 그정도는 간단하겠지?"

"...오쿠사와님은 돌아오시지 않을 겁니다."

그순간 나는 알아채버렸어.
당신은 돌아오지 않는게 아니라 돌아오지 못하는거라고.
그리고 아마 쫓아버린것은 검은옷과 아버님.

나로는 맞서지 못 할 거대한 벽에 마주쳐버린거 같아서 일순간 굳었지만 드디어 답을 찾아낸거 같아서 정말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어.
장애물이라던가 실패라던가 전부 헤쳐나갈 수 있다고 줄곧 생각해왔는걸.
그것이 이번엔 타인이 아닌 내 앞에 나타났을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캄캄한 길에 다시 별이 반짝이며 비추는것 같았다.

조금씩 이어받아가던 사업들은 한동안 방안에서 나가지도 않았던 사이에 전부 원위치, 다시 신뢰를 얻는 과정은 힘들테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다시 노력해서 미사키가 떠나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마련하면 그때는..

"미사키,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않을테니까."

그때까지만 내 옆에 없는걸 용서해줄게.



다른곳에는 신경도 쓸 수 없을 만큼 바쁜 매일이 지나갔다.
지금도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는 미사키를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빨리 되찾아야 한다는 초조함에 주변을 신경 쓸 시간도 없었다.

세상을 모두 웃음으로 만들자던 꿈도 특별함을 알아채기도 전에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것에 비어버린 가슴이 너무 아파서 스스로조차 웃음으로 될 수 없게 되자 빛을 잃었다.
단하나 눈앞에 보이는 길을 걸으면서 방해가 되는건 하나씩 옆으로 치우고 버려버린다.

조금씩 가벼워지는 발걸음이 미사키에게 가까워져서 나머지 한걸음의 전에서 돌아올 미사키를 위한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는걸 생각해냈다.
장애물이 없어졌어도 내가 바라는건 미사키가 다시는 내 옆을 떠나지 않을 확신이니까.

"코코로짱. 하로하피를 부활시키고 싶다는건 다들 찬성할것 같지만.. 미셸은 어떻게 할거야?"

"물론 미셸은 하로하피에서 떼어놓을 수 없어! 미사키는 돌아올거니까."

이미 변질된 하로하피의 존재이유를 알지 못하는 카논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물어왔다.
하로하피를 위해 미셸이 필요한게 아닌 미셸을 위해 하로하피가 필요하다고 하면 카논은 어떤 얼굴을 하는 걸까?

겁쟁이인 미사키는 여전히 가면을 쓰고 DJ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을때, 아직 미사키가 나와의 추억을 소중히 아끼고 있다는걸 알았으니까 나는 미사키가 바라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서 구석으로 치워버린 하로하피를 부활시키기로 했던 것이다.

"미사키짱 돌아오는거야?! 좋은소식이네. 모두에게 알려야할까!"

미사키가 비행기표를 예매할때까지 간접적으로 유도하는건 꽤 힘든 일이었지만 미사키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봉투를 건네자 미사키가 일하는 펍의 매니저는 꽤 흔쾌히 받아들여줬다.

나는 미사키가 없으면 안돼는데 미사키는 내가 없어도 이렇게 주위에 소중한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니 속상했지만 어차피 곧 미사키는 내 옆에 있게 될테니까.
웃으며 언제나 어딘가 어두운 얼굴을 할때의 미사키가 걱정됐다고 말하는 남자의 말에 따끔따끔 타오르는것 같은 이름모를 감정을 느낀다.

그래봤자 미사키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거라고 공연히 외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미사키, 솔직하지 않으니까 지금의 하로하피를 보면 무서워져 도망가버릴지도 몰라. 카논에게는 의지하는것 같으니까 부탁해도 될까?"

확신을 가지고 싶어진다.
미사키가 정말로 내 옆을 떠나지 않을거라는 보장을 받고 싶다.

이때까지 눈을 피했던 미사키는 내가 싫어서 떠났지 않을까라는 의심이 피어오른다.
어째서 날 떠나서도 넌 그렇게 웃을 수 있어?

"응! 얼마든지. 고민상담 정도밖에 못하겠지만.."

"미사키는 나에게는 그런 이야기 하지 않으니까. 카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구?"

절대 너는 나에게 고민이나 스스로의 기분같은걸 말해주지 않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말 할 수 있다는것도 거슬린다.
너에게 다른 특별이 있다는게 못견딜정도로 거무칙칙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하지만 이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는 나는 점점 더 쌓아갈수 밖에 없다.

"그런데 미셸이 미사키라는거 사실 코코로짱은 알고 있었구나. 지금까지 미사키에게 모르는척 한 이유가 뭐야?"

"흐음.. 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해?"

"후에에.. 미사키짱이 미셸을 벗으면.. 하로하피에서 떠나버릴지도 몰라서..? 부끄러움이 많기도 하고, 미셸이 아니라면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

미셸이 아니게 되면 미사키는 하로하피에 남지 않았을거라는 카논의 말이 계속 떠돈다.
보고 싶지 않았던것들을 알게되는 느낌이 달갑지 않았다.
그것도 미사키의 말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말에서 알게되는 내가 모르는 너의 이야기는 더더욱.

하로하피의 마지막 라이브 이후 지금까지도 방치되어있는 미셸의 방이 생각난다.
아무도 들어가게 하지 않았지만 나도 들어갈 수 없었던채로 과거에 머물러있을 여러가지 추억들이 포르말린 절임같이 생기없이 박제되어 있을 방은 하로하피를 부활시키기로 한 지금도 들어가보지 않았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럼, 카논 잘부탁할게!"

미셸의 방을 열었을때 거기에 남아있는걸 보고 내가 어떤 기분을 느낄지 알고 싶지 않았다.

미사키가 떠나버리는 결과를 만든 과거를 직시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미사키와 함께였던 추억이 담긴 과거를 잊고 싶지도 않아서 결국 한켠에 꼭꼭 숨겨버렸다.

"그래! 좋은 생각이 났어.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거야. 잘못됐던것을 처음부터 새로 바꿔서 새로운 결말을 쓰자."

브레멘에 도착하기 전 각자의 행복을 찾아가버린 동물들을 끌어모아서 다시 브레멘으로 떠나는거야!

잘못된 선택도 어쩔 수 없는 현실도 지금은 전부 없애버릴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떠날 수 밖에 없었던 미사키도 자책하던 카논도 엉엉 울던 하구미도 아무말 없이 사라진 카오루도 웃게 되겠지.

그리고 네가 돌아온다면 다시 나는 세상 모두를 미소로 만들자는 꿈을 다시 믿을 수 있게 될거야.
그러면 다시 모두가 행복했던, 네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해도 언제나 내 뒤를 따라와주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어.

내가 질릴때까지 어울려주겠다고 했던 그 약속을 이번에야말로 지켜줄거지?


하지만 하구미를 만나 분노하고 카논을 만나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인형옷을 입는 사람은 여전히 내 즐거운 계획은 전부 반대할것같아.

내가 인형옷을 입는 사람을 붙잡고 싶은 이유는 특별함 딱 한가지인데 인형옷을 입는 사람이 날 떠나고 싶은 이유는 저렇게 한가득이라니 너무너무 아파서 숨을 쉬지 못할것 같았어.

"미안해. 미사키."

그렇지만 단 한가지의 이유가 지금 내 삶의 전부이니까 상냥한 미사키는 용서해줄거지?
언제나 그래왔듯이 난처해하는 웃음으로 결국엔 허락해줄거지?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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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V화면이 비추는 사람들의 웃음에 둘러싸인 반면에 고요한 정적이 가득한 방의 푹신한 카페트 위에서 짖눌러 오는 몸은 몹시 가벼워서 미사키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세상을 웃음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 여러가지 노력해왔다고 자부하는 미사키는 자신의 손이 그만큼 투박하고 거칠거칠해서 남을 간단히 상처 입힐수도 있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웃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처주지 않는것에도 세심히 신경을 기울여야한다는걸 잘 알고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실패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것처럼 찡그려진 코코로의 얼굴을 보고 생각했다.

타인을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름대로 노력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전부 알수는 없으니까.
결국 세상을 웃음으로 만드는건 전부 나의 욕심.

"코코로는 나를 여객선에 초대해서 무엇을 하고 싶었던거야?"

흐르지 않고 맺혀서 반짝반짝 빛을 반사하는 눈물을 폭신한 손가락으로 슥 닦아낸다.
물기가 그렁그렁한 눈은 별조각처럼 황홀하지만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쏟아지는 유성처럼 심장 깊숙이 박혀들어 숨이 막혔다.

다 알고있는척 하지만 사람들은 절대 서로 전부를 이해하는게 불가능하다고, 설령 알 수 있다고해도 직시하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알아버린 나는 이해받기를 위해 쓸 시간도 노력도 전부 모두를 웃음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기로 정했다.

아무도 동참해주지 않는 길은 외롭고 험하다는걸 알아도 내 꿈이 얼마나 크고 다가서기 어려운지 알고 있으니까.
그런 보답받을지 모르는 무거운짐을 다른사람에게 지워서 혹시 웃음을 잃을지도 모르니까.

힘들고 상처받은 웃음을 잃은 얼굴도 땀흘려 한숨을 쉬는 얼굴도 전부 웃는 얼굴의 가면으로 가려서 모두를 웃게 만들어 해피월드가 된다면 언젠가 나를 웃음으로 만들어줄 히어로도 나타나주지 않을까.
세상은 모두가 히어로이니까 나의 히어로도 어딘가에는 있는지도 모른다.

"그야. 선상파티를 하기로 했잖아?"

"코코로, 내가 그 말에 정말로 속아넘어갔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

자신의 감정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알아채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감정이라든가 타인의 시선에 언제나 신경쓰는 코코로가 미사키가 숨긴다고 전부 알아채지 못하진 않을거라는걸 이미 알고있었다.

다만 그 속까지 파고들만큼의 용기는 없다는것도 알고 있을뿐이다.
자신보다 타인을 이해 할 수 있는 코코로는 상대가 상처입을지도 모르니까 간섭할 수 없다.
코코로보다 타인을 이해 할 수 없는 미사키는 자기판단만을 근거로 상대를 즐겁게하려고 움직인다.

수 많은 실패와 경험을 근거로 쌓아올려도 미사키는 눈앞의 코코로가 왜 즐겁지 않은지 이해 할 수 없는데 제대로 교류를 하게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코코로는 미사키가 여태껏 숨기려고 가면을 씌워 둔 것을 용이하게 파괴하고 들춰내려고 한다.

"...미사키를 더 알고 싶었어. 어째서 우리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거야?"

"코코로, 그런 표면적인 이유를 묻는게 아니야."

도르륵

결국 결괘한 눈물이 폭포수처럼 와르륵 내 볼품없는 가면에 쏟아져 내렸을때.
가면속 남에게 보일리 없는 내 얼굴도 처참하게 일그러져 역시 나에게 이 한꺼풀의 가죽은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고 자각당한다.

마주보는 코코로의 얼굴은 눈물에 젖었지만 외면하지 못 할 정도로 곧은 시선으로 나를 직시 하고 있었다.
항상 나를 부담스럽다는듯 옆으로 비껴나가는 코코로였는데 지금은 도저히 나를 놓쳐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미사키는 슬쩍 팔을 들어올렸다가 부들부들 떨리는 코코로의 가녀린 팔을 보고 다시 스르륵 바닥에 내려둘 수 밖에 없었다.

이대로 힘으로 코코로를 옆으로 치우는건 간단하지만 거기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코코로는 결국 무슨 이유를 붙여서라도 솔직해질 수 없었고 그저 시간을 끌 뿐의 회피하는 행동을 하고있다.
나는 결국 코코로를 미소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고 또 하나 실패를 쌓아 가면을 견고하게 했다.

"나를 어떻게 하고 싶어? 나는 지금 코코로에게 아무것도 못하니까. 손을 뻣기만해도 가면을 벗길 수 있을텐데. 왜 하지 않는 거야?"

"..."

"그만두고 싶고 피하고 싶은데 어째서 나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거야?"

"그만해.."

"제발, 알려줘. 어떻게 하면 코코로는 웃을 수 있어? 널 웃게 만들어주고 싶은데 나로는 안돼는거야?"

"이제...그만해.."

대답하지 못할거라고 알면서도 묻는 나에게 코코로는 역시 하나도 답을 내놓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잔인한 질문을 하는 나를 비참한것이라도 보는 표정으로 코코로는 스륵 뒤로 물러서버렸다.
어디가 아픈걸까? 무엇에 슬퍼하는거야?
묵묵히 답하지 않는 코코로가 걱정되어서 얼굴을 보려고 몸을 일으켰을때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가면 너머가 아닌 안쪽에서 흐르는 눈물 한줄기를.




아무말도 하지 않고 일어서서 사라져버린 미사키를 잡지 못하고 나는 그대로 카페트 위에 앉아있었다.
어설프게 만들어진 가면 사이로 미사키의 본심이 흘러들어오는게 아직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하는 나에겐 벅찬 감정들이어서 내려보는것은 나였는데 왠지 미사키가 나를 덮쳐 누르는것 같은 위압감을 느꼈다.

하지만 겁쟁이인 나라도 한가지 알 수 있는건 가면 너머의 미사키가 항상 웃는 얼굴은 아니라는것이다.
간절하게 애원하며 구제를 바라는 아이같은 불안한 표정이 아직도 눈 앞을 아른거렸다.

세상 모두를 웃음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꾸는 분홍곰의 껍질 속의 작은 아이를 마주했을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이 알고싶어야.. 알아도 뭘 어떻게 할 자신도 없으면서.."

손을 내밀어 눈물을 닦아준 상대에게 나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는게 너무 분했다.
내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존재가 된 거 같아서 애꿋은 바닥만 주먹으로 내리쳤다.

CCTV화면에서는 카논이 웃는 얼굴의 가면을 들고 수줍게 웃고 있었다.
그 장면이 너무나도 지금의 자신과 미사키와 교차되어서 한층 더 무력감을 휩싸였다.
결국 미사키가 가면을 쓰는게 옳은 일이라고 자신을 설득해오는 느낌이었다.
무슨 다른 방법이라도 있다는거야?

웃는 얼굴의 가면과 미셸, 어설픈 완성도의 곰가면이 빙글빙글 돌며 낄낄낄 웃어대는것 같다.

"아가씨, 다음은 극장으로 가셔야 합니다."

"안갈거야. 더 어울려줄 생각은 없어."

벌떡 일어나서 CCTV화면들의 앞에 다가갔다.
자신을 내버려두고 미사키는 혼자 아무도 없는 극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코코로가 없으면 곤란할텐데 아무말도 하지 않고 사라진 미사키가 어떻게 할지 조금 궁금했지만 어차피 네가 바꿀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만이 다가올 결과를 보게 될것같았다.

"..조를 부탁했어요. 코코로가 이미 굉장한 이벤트를 준비했지만, 거기엔... 코코로는 들어가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코코로도 즐거울 수 있도록 돌발 이벤트에요!"

활기찬 미사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곳에 이미 있을리가 없는건 극장에 홀로 서 있는 미사키를 계속 지켜보고 있는 내가 제일 잘 알고있다.
아직 조명도 켜져있지 않은 넓은 극장에서 아무도 앉아있지 않은 객석을 보면서 미사키는 누군가를 웃음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는 고독한 세상에서 흘리는 눈물과 땀방울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서 고통은 혼자 감내하면서 웃음은 나누려고 한다면.
이 얼마나 이타적인 이기심인지..

"그걸 나에게 들려주는 이유는 뭐야? 일개 SP였을텐데 이런 행동은 월권이 아니었나."

"전부 아가씨께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한 일입니다만 공연한 참견이었으면 이후에 시말서를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뒤돌아본 검은옷의 사람은 아무 표정변화도 없고 내 행동을 강제하지도 충고하지도 않았지만 저런 미사키의 말을 일부러 들려준 행동에 잘못된게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정말로 전부 나에게 필요하다고 내가 필요로한다고 생각해서 하는 일들이겠지.
나도 모르는 나를 알고있는 사람들이 있다는건 이렇게 부끄러우면서도 마음이 든든한 일이었다는걸 처음으로 알았다.

미사키가 하로하피에 이끌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것 투성이였지만 그전대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역시 나는 망설일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많이 변한것이 아닐까.

"원래 하려던것들은 여전히 준비되어 있겠지? 급하게 준비한 복장을 보면 미사키랑 미리부터 공모한것은 아닌거 같으니까."

"네, 여객선 앞에서 모두 집합하기 직전에 제안을 하셨습니다."

왠지 미사키의 입장에서 여객선이란 즐거운일이었을텐데 약속시간 빠듯이 맞춰서 와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계획을 준비하느라 마지막에 등장한걸까.
미셸일때 언제나 라이브날이나 연습일에 기뻐서 일찍부터 왔다고 제일 먼저 대기실에 있으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완전히 틀어졌지만 그런것정도는 억지로 붙잡아 이으면 되겠지. 나한테 그럴 마음을 들게 해두고서 못한다는 말은 용서하지 않을거니까. 얼른 가서 극장으로 이동하는 3명부터 잡아."

내가 준비한 이벤트에 감히 클레임을 걸었던 이유가 코코로는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라면 너야말로 네가 준비한 이벤트에 너의 미소는 상정되어 있지 않잖아.

게다가 세상 모두를 미소로 만들겠다는 사람치고 선택한 동화가 해피엔딩이 아니라니 미사키도 나름 갑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고싶다는 사람이 나타난것에 동요한것일까.
용사가 공주를 구하고 마왕을 물리치는 이야기에서 유일한 악역에 자신을 대입한것은 무의식적인 선택인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

"게다가 얌전히 붙잡혀줄만큼 나는 얌전한 성격이 아니니까."

붙잡혀서 구해주기만을 바래야하는 공주가 오히려 마왕을 웃게하려고 하다니 최고의 희극이 아닌가.
동화에 어울릴만큼 행복하고 즐거움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코코로는 마왕을 무찌르려는 용사들을 설득하러 마중을 나가기로했다.

문을 열고 뒤돌아 바라본 CCTV에는 어둑한 극장에 서 있는 미사키의 등뒤가 보였다.
여전히 그 얼굴은 어설픈 솜씨의 곰가면이 가리고 있어서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극장으로 향하는 길에 갑자기 나타난 여러명의 검은옷의 사람들이 먼저 가야 할 장소가 있다고 안내했을때 카오루는 무척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코코로의 웃음을 위한다는 계획은 마음에 들었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모두가 미소가 되는 방법은 없어서 카오루는 상냥하고 외로워보이는 아기고양이도 웃을 수 있는 해결책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본심을 숨기는 자신으로써는 자신조차 희생해서 남을 위하는 상대에게 진심을 전하기란 어려운일이어서 그저 아기고양이의 소망을 이뤄주는 수 밖에 없었다.

상처받는게 두려워 무언가의 뒤에 숨는 자신과 달리 모두를 미소로 만들기 위해서 자신을 가리는 미사키는 가면에 집착 할 필요는 없을텐데 결국 붙잡혀 있는 것은 다름없다.

그래도 역시 스스로 벗지 못해도 누군가가 가면을 벗겨 주기를 바라고, 기다리고 있는 미사키가 자신보다는 더 강한 사람이겠지 하고 생각한다.
그런 미사키를 구하려는 공주님은 스스로에게도 솔직 할 수 없어 도망칠만큼 겁쟁이이지만 마왕을 위해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졌기도 했다.

"마왕을 구하는 공주님이라니..참으로, 덧없는 이야기군. 그렇지않니 카논?"

구해질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을 마왕이 과연 극장에서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기대되었다.

거짓이어도 상관없다고 단언한 카논은 억지로 미사키의 탈을 빼앗자는 이야기였다면 반대했겠지만 단지 혼자 노력하려는 미사키도 웃을 수 있는 즐거운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코코로의 얼굴이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간절해 보였으니까 돕기로 했다.

원래 진행되었을 계획을 들었을때는 조금 화낼뻔하기도 했지만 코코로의 목적은 본인은 부정하더라도 지극히 하로하피의 멤버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카논도 긴장되서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 이것은 미사키를 위한 일이라고 다짐했다.

사실 카논은 제일 빨리 하로하피에 들어왔는데도 미셸의 안에 있는 사람이 미소가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오히려 공주를 구하려는 용사에 가깝지 않을까.."

혹은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을 스스로 부숴버리는게 무서워서 모른척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우리는 용사의 동료인거네! 코코롱도 갑자기 도망쳐나와서 마왕도 웃음으로 만들자고 하다니 대단해! 하구미는 물리치는것 밖에 생각하지 못했는데."

하구미는 가장 순수하게 상대도 자신도 웃을 수 있는걸 바라고 있다.
미카엘이 바라는게 있다고 했을때 제일 먼저 자신에게 가진게 없다고 말한것은 그걸로 마왕이 만족한다면 줘버리려고 했던것이다.

미셸이 하구미를 하로하피에 영입한것은 이런 자신의 꿈과 닮은부분을 하구미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난처해하거나 어쩔 수 없는 동참이라거나 똑같안 가면의 동지가 아니더라도 이해해주는 동료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용사라던가.. 나에게 어울리는 역할은 아닌거 같은데. 마왕을 만들어버린게 나니까 오히려 마신? 악마? 그런게 아닐까."

입고있는 옷도 피와 같은 진홍색이라니 도저히 용사라고는 볼 수 없는 복장이다.
다른 사람들은 드레스 코드라고 나눠준 그야말로 정의의편이라는 상징과 미카엘의 어두운색조에 대비되게 밝은색 계열인걸 생각하면 나는 오히려 마왕의편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고 있는 행동도 마왕을 구하자고 용사일행을 구슬리는거니까 희대의 악녀역일지도 모른다.

"아가씨, 미카엘님이 너무 늦는게 아닌지 물으셨다고 합니다. 더이상의 시간지체는 계획에 차질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고.."

마지막으로 검은옷의 사람들까지 대동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수하를 부리는 마녀라도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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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한 손님이 전부 모인 여객선은 커다란 소리를 내며 출발했고,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는 동안 내려가던 석양 또한 사라져 밤하늘을 비춘지 꽤 시간이 지났다.
코코로는 결단을 내렸다.
 
카오루씨, 카논씨. 미안해. 이제와 무르기는 무리야.
 
돌발적인 여객선 이벤트엔 카오루씨가 가장 할 일이 많으니 이미 자리를 비운지 꽤 오래됬다. 카논씨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옆에 있지만, 곧 마왕에게 납치된 공주님처럼 화려하게 사라질 예정이었다. 제 목적을 위해 이 사람들을 괜한 일에 끌어들인 건 아닐까- 시간이 초 단위로 지날수록 코코로의 갈등은 심화 되었지만,

 " 아, 미-군. 종종 테니스 치는 거 본 적 있어! "
 
 " 그야 테니스부니까. 하구미는 소프트볼부지? 하구미 목소리, 테니스 코트까지 들리니까 항상 에너지 받고 있었어. "
 
 " 에헤헤, 어머니는 항상 조용히 하라 하시지만. "
 
 " 난 그대로도 좋은걸. 멋지다고 생각해. "

 저렇게 아무것도 몰랐던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걸 보고 있자면, 심화된 갈등도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죄책감도 실컷 옅여진다.
의외로 철면피? 혹시 연기쪽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던가. 카오루씨와도 하구미와도 순식간에 사이 좋아져서 도란도란 요비스테까지도 무난히 클리어. 카논씨는 생각보다 더 자연스럽게 모른 척 하는 미사키에게 당황한 것 같다.

 " 와~! 미-군, 미군미군!! 밖을 봐! "
 
 " 어디어디. "

기분이 들뜬건지 넓은 회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하구미의 목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었을텐데 짜증 하나 없이 밖을 본 미사키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 코코로, 카논씨. 야경이 정말 예뻐요. "

 그 얼굴은 한없이 순진무구하고 이 순간이 정말 즐겁다는 웃음이라 코코로에 심적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엄청 나쁜짓을 하려는 것 같잖아.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코코로는 눈을 꾹 감았다 떳다. 안돼, 이러다가 미루고 미뤄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할거야. 그냥 시작해 버리자. 한 손을 등뒤로 가져가,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린다. 어디선가 보고 있을 SP들에게 전해질 신호였다. 그녀들은 철저하니까 단번에 발견했겠지.
 
마지막으로. 미사키의 말에 곧바로 배 바깥을 보고 있는 카논씨의 어깨를 툭 건드린 코코로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 죄송해요, 카논씨. "
 
 " 에, 응? 뭐라고 했어 코코... "

그리고, 정전.

5성 호텔의 로비만큼 호화롭게 꾸며진 여객선 속 연회장의 조명이 전부 꺼진다. 바깥의 야경만으로는 시야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깜깜하다. 당황한 하구미의 목소리와, 그런 하구미를 진정시키는 카오루씨의 목소리. 옆에 있던 카논씨의 짧은 단발마마저.
 
코코로의 머릿속에 한줄기 싸늘함이 지나갔다. 잠깐, 카오루씨? 생각 이상으로 한동안 불은 켜지지 않고, 어둠에 익숙해져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불은 다시 들어왔다.

 " 이 호화 여객선, '스마일 호'에 온 걸 환영합니다, 사랑스러운 아가씨들~! "

 한껏 호화스럽게 꾸며진 연회장의 중앙, 스포트라이트를 집중 받고 있는 인물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악동의 표본이었다. 멋드러진 하얀 망토는 반짝이라도 뿌린걸까 싶을 정도로 반짝거려서 모두의 이목을 집중 시켰고, 수상하고 미심쩍은 사악하게 웃고 있는 곰 가면은 야리꾸리한 가면 무도회장을 벌인걸까 착각했을 정도였다. 삐에로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있는 건 차라리 우습게도 보였다.

 " 나는 마왕... ... '미카엘'. 오늘밤, 아가씨들에게서 아주 중요한 걸 받으러 왔어! 기꺼이 내어주지 않으려나~. "
 
 " 마, 마왕!! "
 
 " 후후, 덧없구나... "
 
 " 후에에....? "

 삐에로 모자가 기울어지다 못해 떨어지는 걸 고쳐쓰는, 그래... '미카엘'.
코코로는 빠르게 주변을 스캔했다. 정말로 마왕이 있었던 거였냐며 놀라는 하구미, 평소처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카오루씨, 갑작스런 상황에 대처방법을 잊은 카논씨. 역시나 한 명이 없었다.

오쿠사와 미사키. 이 이벤트에 동료였을.

 " 저기 뭘 받아가겠다는거야? 하구미, 가지고 있는 게 없는 걸. "
 
 " Oh, Nono! "

 과장되게 손가락을 들어올려 츳츳, 하며 좌우로 까딱인다. 그래봤자 이상한 솜장갑 끼고 있으니까 어느 손가락인지도 모르지만. 검은 곰가면 위로 나오는 기세는 밝게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 먼저 알려주면 재미없잖아~? 아가씨들에게 시련을 줄거야. 그 시련을 모두 통과하면 알려줄게. 무척 어려울거라구? 도중에 포기하고 싶을지도 몰라? "

 그러니까ㅡ. 말꼬리를 길게 늘어트린 그녀의 망토가 펄럭였다. 다리를 움직이는데로 따라오는 스포트라이트의 빛을 받으며 우스꽝스레 한 바퀴 빙글 돌기도 하고, 짝다리를 짚으며 다가오는 모습은 우스꽝스런 춤사위였다. 미셸. 투영되는 인형탈의 모습이 화가났다. 전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또 숨을 생각이야? 기어코 그렇게 코코로에게 가까이 다가왔을 때, 코코로는 그 가면을 벗기고자 손을 뻗었다.

 " 으차차, 이 스마일 호의 아가씨를 인질로 잡겠어. "
 
 " 앗, 아아...? "
 
 " 코코로짱?!! "

휘청이는 모션으로 손을 피해버린 미카엘은 코코로를 공주님처럼 안아들었다. 한 줌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은 것처럼 굳건히 안아든 팔. 갑작스런 시야의 전환에 놀란 코코로는 문득 가면 안 속 짙푸른 눈을 볼 수 있었다. 미약하게 떨리는. 코코로는 그 눈을 본 순간 바둥거리기를 멈췄다.

 " 걱정마, 걱정마. 스마일호의 공주님에겐 아무짓도 하지 않아. 물론 아가씨들이 포기하지 않을 경우. "
 
 " 포, 포기할 경우 무슨 짓을 할 셈이야? "
 
 " 으~음... 이렇고 저렇고, 요~런 짓이라던가? "

능글능글 대답한 미카엘은 쿡쿡 낮게 웃고는 한 손을 높게 들어올렸다. 코코로를 안고 있는 팔엔 흔들림 없이 솜과 천으로 덮힌 손이 신호를 보냈다. 불이 꺼진다. 연회장에서 과하게 어조를 꺾은 목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렸다.

 " 그럼 카지노에서 봐! 첫번째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거야!! "
 
 
 
 
.
 
 
 
" 왜 이런 짓을 벌이는거야, 미사키? "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혀져서, 설치된 CCTV를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자기 편으로 포섭을 한 건지 화려한 카지노 안에서 검은옷 사람과 도둑잡기 중인 하구미네. 물론 어느정도 깨닫고 있었다. 포섭되지 않았다면 미사키의 행동은 눈치채지도 못하게 정지 되었겠지. 코코로는 소파의 팔걸이 부분을 꽉 잡아 검은 가면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바깥과 마찬가지로 호화스럽게 꾸며진 관제실에 천연가죽으로 덧댄 넓은 의자. 꼭, 모든 걸 지켜봐야만 하는 납치된 성의 공주님 같은 포지션이 아닌가.
 
오쿠사와 미사키는 아무런 계획 없이 이런 일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었다. 그치만 질문에도 미동없는 뒷모습은, 역시, 화가, 난다고.
 
" 대답해, 미사키. "
" ...내 이름은 미카엘이라구. "
" 좋아, 미카엘. 얼른 대답해. "
" 으응...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는 걸, 공주님. "
 
검은 곰 가면이 삐에로 모자를 고쳐썻다.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이 얼기섞여 있는게 보였다. CCTV 화면을 보고 있던 곰 가면은 코코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빨이 삐죽삐죽, 그러나 눈만은 반달 모양으로 웃고 있는 가면은, 어디까지 이 얘가 미셸에 의지하고 있는지 깨달아버려서 숨이 막혔다.

 " 좋아좋아, 알았어. 이런 걸 주웠어. "
 
망토 안을 우스꽝스럽게 뒤적인 그녀가 메모장 하나를 꺼냈다. 노란색의. 그게 뭐길래, 하고 물으려던 코코로는 익숙한 메모장을 다시 한번 보고 깨달았다. 아. 여객선 이벤트 계획이 전부 적혀진 메모장이었다. 카오루씨와 하구미, 카논씨와 미사키의 이름이 잔뜩 들어갔을. 어느샌가 넓다란 집 안에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망연히 메모장을 보던 코코로는 문득 미사키를 살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그랬었다는 평이한 어조였다.
 
 야심차게 준비한 계획은, 잃어버린 걸 가벼히 지나쳤을 때부터 일그러졌다. 언제? 심지어 자세히 살핀 미사키는 모든 게 엉망이었다. 시장의 장난감 가게에서나 구입한 것 같은 낡은 삐에로 모자며, 가까이서 보니 하얀 천에 반짝이 가루를 잔뜩 뿌린 망토라고 걸친 무언가, 민 무늬 가면에 솜을 붙여 검은색을 물감을 뿌린 게 티가 났다. 멀리서 보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럴듯한. 그 틈새로 보인 망토 안은 그녀가 배에 입고온 그대로, 집앞 패션이라서 한숨마저 튀어나올 것 같다.
 
 " ... ... 그렇게, 엉망이었어? "
 
 " 에? "
 
 언제부터 계획했는지 몰라도 그새에 그 속까지 준비할 시간은 없었겠지. 그러나 그 시간만으로도 이렇게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코코로는, 이쪽을 그저 주시하고 있는 검은 가면에게 달려들었다. 제법 빠르게 달려 들어 가면에 손을 뻗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옆으로 물러서는 것만으로도 피한다. 가면 위로 곤란한 기운이 넘실거려서 짜증이 났다. 한 번 더 손을 뻗으니 허리를 뒤로 접는 것만으로도 피한다. 열받아. 이유 모를 화가 났다.
 
사실, 알고 있다.
 
 " 아... 정말!! "
 
알고 있어, 터무니 없는 화풀이라는 건.
 
 CCTV에선 도둑잡기가 끝난 건지 화기애애하게 통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검은옷의 사람이 미소 짓고 있는 것도 보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계획한건지 짐작도 할 수 없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복장과 다르게 완벽히 진행되는 그녀가 준비한 이벤트. 그 때문에 츠루마키 코코로는 화가 났다. 속으로 삭히려다 분에 못이겨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척이나 화가났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참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 어, 어라. 아가씨...? "
 
 천천히, 쭈뼛쭈뼛 다가오는 발걸음에 싸늘한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무릎을 굽히는 것을 보았을 때, 코코로는 믿기지 않게도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생각하고 있는 건 이 친절함의 배반이었다. 그렇지만. 코코로는 걱정어린 손길을 뻗어오는 미사키의 팔목을 잡아챘다. 흠칫, 하고 떨리는 몸. 어깨를 잡고 밀어 붉은 융단 위로 눕혀 위에 올라탔다. 입고 있는 붉은 드레스가 마치 카펫에 섞여 흘러가는 것 같았다.
 
 당신의 엉성한 가면이 서럽고, 이 상황이 억울하고, 모른 척 하는 모양새가 원통하고, 화가 나는 내가 경멸스러웠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단 말이야. 치졸한 어린애의 시기심이었다. 모자라고 철없는 어리광이다. 그러나 코코로는 스스로를 조절할 수 없었다. 가면 속 사정없이 흔들리는 짙푸름에 들어간 내 자신이 역겨워서, 한없이 추악해서. 결국, 결국에. 결국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너에게 휘둘리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오쿠사와 미사키가, 내 계획 그 자체로 당황스러운 일에 휘말려 마지막엔 즐거워 하는 걸 보고 싶었어.
 
근데 나는 그것조차 못하고,
 
  결국 너를 이렇게까지 해버린 내가 너무 싫어.
 
 
 
.
 
 
 
세타 카오루는, 그녀의 흐린 미소를 떠올렸다.
 
기억 속에 없는 얼굴, 정적인 몸짓, 제 아름다움에 이끌려 다가오는 귀여운 아기고양이란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웃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듣기 전까진. 가슴을 따스하게 만드는 목표와 얇은 입술에서 나오는 사랑스러운 생각들. 카오루는 처음 보는 그녀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하구미의 웃음은 전염시키는 힘이 있어요. 아, 도둑잡기를 잘해요, 노력하는 만큼  따라주는 운도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기적같이 당첨만 피해가거든요. 그러니까, 조커 말이에요.
 
화려한 카지노. 마왕의 부하처럼 담담히 나타나 첫번째 시련이라고 내어주는 건 도둑잡기의 승부.
 
" 아, 하구미! 이겼어!! "
" 다행이다...! "
 
손에 든 두 장의 카드를 던지듯 내려 놓으며 하구미가 웃었다. 카논도 안심한 듯 두손을 가슴께로 끌어모아 웃고 있었다.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항상 무표정이었던 검은옷의 여자가 승자의 웃음이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선글라스 아래로 자연스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 축하드립니다. 첫번째 시련을 무사히 통과하셨군요. "
 
정말 이상한 일이지, 전부 네 말대로 되고 있구나.
 
 - 카논씨는... 자신감이 없어서 쉽게 움츠러들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을 잘 헤아려 주고 생각이 깊어요. 조금만 등을 밀어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에요.
 
없는 게 없을 정도로 온갖 것이 가득한 기프트 샾. 마왕의 두번째 부하는 "진심이 될 때 필요한 것"에 맞는 단 하나의 물건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다.
 
" 뭐하고 있지, 카논? "
 
" 카오루... 진심이 될 때 필요한 걸, 생각해 보고 있었어. 진심이 된다는 건 솔직해진다는 거니까 수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하고. "
 
카논의 시선을 따라가면, 그곳엔 웃는 얼굴의 가면이 있었다.
 
" 나는 웃는 얼굴에 용기를 받았어. 그게 꾸며진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의지는 가득 전해져왔으니까. "
 
" 심판이 끝나도 진실은 진실이다... 덧없구나... "
 
" 에, 아, 미, 미안해. 내 할 말만 했네. "
 
" 아니, 훌륭하다. 카논이 고른 걸로 하지. "
 
에, 그래도 돼?
두 눈이 동그랗게 커져 의아해는 얼굴에 고개를 끄덕인다. 인형 코너를 두리번 거리던 하구미를 데리고 와 웃는 얼굴의 가면을 건네면 검은옷의 부하가 잠시 침묵하더니 길을 열어주었다.
 
" 진실이 필요할 때, 때론 부끄러움을 가면 속에 숨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요. 마왕님은 극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 예에!! 카논짱 선배, 멋있어! 그런 뜻이 있었다니! "
 
" 후에에... 아, 아니... "
 
" 아아- 카논, 그대의 혜안은 내 마음을 울리는군. "
 
카논은 새빨개진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 얼른 코코롱을 구하러 가자! 분명 덜덜 떨고 있을거야! "
 
카오루는 멋드러진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모두가 웃는 얼굴을 원해요. 흐리게 미소짓던 얼굴이 계속 생각났다. 곧 그 얼굴은 검은 가면에 의해 가려졌더랬다. 짠- 만들어왔어요. 밝게 높힌 목소리가 조금 어색했었다. 조금 목울림이 어눌했던 건, 원래의 습관인가 피로의 탓인가. 그것까진 카오루조차 알 수 없었다.
 
 - 미리 검은옷 분들에게도 협조를 부탁했어요. 코코로가 이미 굉장한 이벤트를 준비했지만, 거기엔... 코코로는 들어가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코코로도 즐거울 수 있도록 돌발 이벤트에요!
 
 - 그 멋진 이벤트를 내게 미리 알려주는 이유는 뭐지, 아기고양이?
 
 - 카오루씨, 엉뚱한 말 잔뜩이지만 믿음직하니까요. 그리고 시선을 끌어주었으면 해요. 하구미라면 몰라도 카논씨라면 절 찾을지도 모르니까요. 화려하게 반짝이는 카오루씨라면 분명 모두의 시선을 한꺼번에 사로잡을 수 있겠죠.
 
카오루는 눈을 감았다.
 
 - 부탁해요, 카오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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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공책(@Fox_nullnote)님이 써주셨습니다.
Posted by 백오판다
,
4.

깨어나보니 몇년전엔 꽤 자주 초대받았던 코코로의 침실이었다.
무엇을 먹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커피에 들어있었을것이다.
커피의 향기나 쓴맛이 약의 냄새랑 맛을 쉽게 가려준다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을 실체험 할 줄은..

설마 내가 커피를 좋아하니까 처음부터 이럴 계획으로 카페에서 만나자고 한건 아니라고 생각하고싶다.

아직도 사지의 말단부가 저렸지만 일어서보려고 비틀비틀 한쪽 팔을 들어올렸더니 철컹이라는 무거운 쇠가 부딯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갑? 본격적이네. 카논씨가 길을 잃었다고 시간을 끌고 코코로를 부른건가..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거하게 뒤통수를 맞아 얼얼한 느낌이든다.
바뀌지않은 모습이 반가웠던것은 나만이었던가?
믿음을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그보다 이렇게 나를 묶어놔서 무엇을 할 생각일까.
졸업때는 그렇게 쉽게 나를 놓아줘 버리고서는 무슨 의도로 이렇게 약에 수갑같은 까딱이 아니라 대놓고 법에 시비를 거는것 같은 수단을 사용하다니.
의심을 하긴 했지만 이것으로 코코로도 그전과 매우 다를거라는 확신을 얻었다.

철커덕 철커덕 손목을 비틀어도 아무소용이 없는걸 보면 이 수갑은 어줍짢은 카피 제품은 아닌것 같은데 수갑을 소유하는것 만으로 범법이라던 사회통념은 여기서는 안통하겠지.
결국 모든것은 코코로의 손에 달려있는 그대로인것이다.

돌아오면서 가장 무서워했던 일이 벌어져버린 느낌이다.

"거기 있으시죠? 검은옷의 사람씨."

코코로는 아직 오지 않은것 같지만 타인을 이곳에 들여놓고서 아무도 지키지 않을 만큼 세큐리티가 엉망일리가 없다.
내가 고백해 볼 엄두도 못내본 대단한 집안의 아가씨가 쓰는 방인데.. 오히려 아무도 없이 나만 있으면 더 의심이되는 상황이었을것이다.

"오랜만입니다 오쿠사와님. 일단 죄송하다는 말부터 하게되서 유감이군요."

"풀어줄 수 없다는거 말 안해도 아니까요. 언제나 제 의사보다 코코로가 하는 말이 우선인거 어쩔 수 없다는건 잘 아니까. 그런데, 절 떨어뜨리는게 훨씬 낫다고 파악한게 아니었어요? 그 자리에 코코로가 나타나는거 미연에 방지 할 수 있었을텐데."

"...사실 오쿠사와님이 떠난후에 상황이 급격히 바뀌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예견해서 츠루마키가에서도 그다지 연줄이 없는 대학교를 소개해드렸습니다만.. 일본 내에서 츠루마키가의 손길을 피하기는 어려우니까요."

말하자면 일본에 돌아온 내 잘못이라는 것이다.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다는건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아마 코코로의 변화에 관계한 부분일테니 그저 고용된 입장인 검은옷의 사람이 말 할 수 없는 것일까.

힘의 차이를 강제로 맛보는것 같았다.
나는 그토록 고민하고 힘들어하며 간신히 너를 떼어놓았는데 너는 이토록 쉽게 나를 잡아서 묶어둘 수 있는데다가 주변은 전부 너의 편.
하구미는 모르겠지만 카논씨는 분명히 협력자겠지.

"...그래서 이후엔 어떻게 하실 예정으로? 저 같은게 코코로 옆에 붙어있어 봤자 결과는 뻔하니까 도망가는데 협력했던거죠."

"거기에 대해서는 오해가 있으신듯하여 제가 사정 설명을 하기 위해서 남았습니다만.. 저희는 그런 이유로 오쿠사와님이 떠나도록 도운게 아닙니다."

뜻밖의 사실이었다.
코코로에게 미칠 위험에 대해서 전부 제거해 온 SP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죄인을 처벌하도록 떠나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어떤 인식의 차이가 있다는 것일까.

"저희는.. 당신이 아가씨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며 사죄하였을때, 저희가 해버린 일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져버렸습니다. 고용된 SP의 의무도 잊고서 당신을 도울 정도로 그 당시의 오쿠사와님은 상처받아있었죠."

"죄책감? 무엇에 대해서죠? 지금까지 엄청나게 도와주셨으니까 미안한건 오히려 제가 아닌지.."

"오쿠사와님은 미성년자에 대가를 받는것도 아닌데 하기 싫다고 했던 의사도 무시하고 저희는 인형탈을 씌워 미셸이라는 굴레를 만들어버렸던 겁니다. 거기다가 당연한 서포트에도 전부 빚이라고 생각하셨죠. 이건 저희가 직업 때문에 한 일이라도 명백히 오쿠사와님을 괴롭게 했습니다."

그들 모두가 사죄하는 마음으로 일으킨 반역이 나의 도망에 대한 도움이었나보다.
그 일로 신뢰를 일부 잃은 검은옷의 사람들은 다른 일은 몰라도 나에 대해서는 믿음을 받지 못하고 개입하기는 어려웠다는 말과 함께 이번 일도 막지 못했던 사정이 설명되었다.

일단 내가 일본에 방문하는것 자체가 그들에겐 예상 밖이었다고 한다.
코코로의 명으로 나에 대해서 간섭 할 수 없었다던가.. 도대체 코코로는 나에게 어떤걸 바라고 있는건지 심히 의문이 든다.

지금 이렇게 묶여있는걸 보면 모른척 잊어버리던 코코로가 할 행동은 아니었다.
뭐, 모두를 웃게 한다는 꿈을 가진 코코로가 사람을 구속한다는것부터 보통이 아닌 일이지만..

"방문하는 타이밍이 너무 안좋았습니다. 오쿠사와님이 떠나버리고 대학 입학식에서 발견 할 수 없었던 아가씨는 그 길로 대학교도 자퇴하고 바로 후계자수업에 열중해서.. 최근 츠루마키가의 당주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이제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거죠."

"...부모님이라도? 당주를 넘겼다고 하지만 발언력이 전부 사라진건 아닐텐데. 저에 대해서 아무 보고도 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요."

"전당주님은. 아가씨의 변모에 오히려 당신을 반기는 기색이셨습니다. 아가씨는.. 당신이 사라지고 너무나 바뀌셨어요. 오쿠사와님이 떠난 후에 한번도 웃으신적이 없습니다."

웃지 않는 코코로를 상상해본적도 없는 나에게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누구나가 웃기를 바라면 자신부터 즐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코코로의 근본이 흔들릴만큼 내 부재가 충격적이었다는 것일까?

"..전당주님은 아가씨를 정말 아끼시니까요. 이제 오쿠사와님이 걱정하는 일은 없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고백하면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겠죠."

그런 미래를 꿈꾸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도망가는걸로 현실이 되다니 너무나도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철컹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노려보면서 다시한번 이끌어본다.
원목으로 만들어졌지만 굵은 침대 기둥은 꿈쩍도 안하고 수갑이 메인 손목만이 붉게 변했다.
이것도 바뀐점인가.. 코코로는 호화여객선처럼 납치극같은 즐거운 이벤트를 만들때 결코 누군가가 다치는 방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이대로 만나서 고백을 해도 그건 정말로 우리 둘을 위해서 좋은 일일까?
해피엔딩인 동화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은빛의 수갑과 수면제.
스릴러 액션영화에서나 나올 전개에 헛웃음이 나온다.

"지금 제 앞에 나타나신건 그런 시시콜콜한 사정설명 때문은 아니겠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얼른 해주세요. 언제 코코로가 들어올지도 모르고 들키면 저는 몰라도 검은옷의 사람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일이죠?"

"거기에 관해서 할 말이 있습니다. 다시 도망가고 싶으신가요? 도와드리겠습니다."

"에?"

"새로 들어온 다른 SP들과 달리 제일 오래 근무한 저는 아가씨의 손길이 닿지 않은 전당주님이 고용한 사람입니다. 제일 고참이니까 부하들에게 압력도 좀 넣어서 지금 여기 있기도 하고요. 오쿠사와님이 바라시는데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미국으로 떠나시겠습니까?"

주머니에서 슥 하고 꺼내 간단히 수갑을 풀어버린 검은옷의 사람이 비틀대며 일어나는 나를 부축하여 침대에 앉혔다.
당황해서 손목을 흔들어도 이대로 풀리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던 수갑은 덩그러니 저 바닥에 놓여서 이 갑작스런 전개가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분명히했다.

손을 쥐었다 폈다 팔을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하면서 몸상태를 점검해보니 세세한 작업은 무리이더라도 달리는데에는 문제가 없어보였다.
이 츠루마키대저택이 리모델링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몇년전이라도 일주일에 몇번이나 방문했으니까 출구까지의 길은 잘 알고있다.

"..아직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다 정리한것도 아니니까 돌아가야죠. 하지만 그 전에 들러야할 곳이 있어요."

약간의 반항심으로 솔직한 이유는 말하지 않고 둘러댄다.
저 이유들도 물론 없는건 아니지만 지금 코코로에게 붙잡히면 안될것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충동적인 감에 의지하는것은 코코로의 전매특허였지만 철저한 계획 아래에 납치된 내가 반대로 과거의 코코로 같은 행동을 한다니 아이러니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는 마음에 벌떡 일어서자 딱딱한 굽의 소리가 들린다.
분명 아침에 집을 나설때 오늘 많이 돌아다닐것이 분명하니 편한 복장을 입어서 운동화를 신었을텐데 내 발에 신겨져있는건 단화였다.
그것도 지극히 익숙한. 학생용 단화.

깜짝 놀라서 손으로 귀 끝을 더듬으니 어느새 피어스들이 사라져있었다.
왜 눈치채지 못했나 싶어서 살펴보니 옷도 갈아입혀진건지 졸업한지 몇년이나 지난 하나사키가와의 교복.
지금 나이에 입으면 코스프레 일직선이라고 하는데 부끄러운짓을 하게 만드는건 여전한건가..

"코코로 취향이 많이..매니악하네요.."

"아마..아니... 그런것은 아니라고..생각합니다만."

아니란것은 지금 둘 다 알지만 일순간 말을 잃었다.
심각한 상황을 다시금 일깨워진것 같았다.
정말로 이것은 잡혀선 쇄락이 되지 않을것 같다.

절대로 코코로는 그전대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억지로 되돌리고 싶어하는 터무니없는 에고를 펼치고 있다.
심지어 그것을 정말 해낼수 있는 권력까지 얻어버렸다는걸 아까 검은옷의 사람에게 들어버린 이상 나는 전심전력으로 도망가야한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기도 하다.




문을 열자마자 양 옆을 지키고 있던 검은옷 두명이 인사했다.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는것은 무리이지만 내 뒤에 서있는 사람까지 합해서 이 세명이 하로하피에 항상 따라다녀준 3명인걸까?
아군이 되면 정말 든든한 사람들이다.

"아가씨의 명으로 이 방근처의 고용인들은 이미 다 해체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하시려고 했는지는 파악 할 수 없었습니다만.."

사람의 눈에 보일 생각이 없는 짓을 저지르려고 했다는걸까..
왜 여기서 첩보물같은걸 찍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코코로는 완전히 변해버려서 자신이 바라는것에 철저히 계획을 짜서 실행하고 있는것 같다.
수갑도 약도 지금 이렇게 사람들을 해체하는것도 갑자기 떠오른 발상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코코로가 이미 배신한적이 있는 검은옷의 사람들을 온전히 믿었을까?
전의 코코로라면 확신을 가지고 그렇다고 대답 할 수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아직 내가 보지 못한 지금의 코코로는.. 어디까지 예상하고 있어?
어디에다가 함정을 준비했을것인가.

하지만 그런 너도 모르는게 있다.
이 몇년 사이에 나도 많이 바뀌었다는것을.

목적지의 문은 잠겨져있지 않았지만 한동안 사람이 들어왔던 흔적이 없었다.
관리가 철저한 츠루마키저택에 먼지라곤 본적이 없는데 이곳은 문조차 열린적이 없는지 문이 열리며 쓸린 그대로 먼지가 뭉쳐져 산이 쌓였다.

"아직도 괴로운데에서 눈을 돌리는 버릇은 낫지 않은것같네. 추억을 회상한다던가 그런 행동이 어울리지 않기는 했지. 항상 즐거운것을 찾아 달려나가니까.. 뒤는 보지 않는달까 달라지지 않은 부분도 역시 남아있구나."

검은옷의 사람은 용건을 끝마칠때까지 밖에서 망을 봐준다고해서 지금 이 방에 있는 것은 나뿐인데 나는 혼자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랜 파트너의 머리 위에 쌓인 먼지를 툭툭 털어낸다.
분홍색털도 열린채 방치되어있는 커튼 사이의 빛이 내리쬐서 바래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조금 먼지냄새가 나기는 하겠지만 지금 무엇을 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닌것은 알고 있었다.
또 여기에 들아가게 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하지만 지금은 라이브 스테이지의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두려워해 너의 뒤에 숨으려는게 아니라 마주보려고 하는 것이니까 용서해줘.
너도 이 방에만 갇혀서 쓸쓸했을테니까 마지막으로 산책에 교제하는 기분으로.

"아-. 하지만 방치되어서 그런가.. 이거 초기 미셸이랑 비슷할 정도로 더워.. 기능이 열화했다던가? 진짜 너무하잖아.. 코코로 이번 일은 쉽게 용서해주지 않을테니까."

모든걸 전부 통틀어서 사과하게 만들어줄테니까.
그러니까 이제 슬슬 깨달으라고.
세상은 즐거운것만으로 살 수 없어.
영원이란 존재하지 않는것만큼 당연한 사실을 나는 네가 상처입지 않길 바라면서 알려주지 않고 떠나버렸다.

결코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 책임이 아니란것도 알지만 난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바로 도망갈 수 있는 비밀통로를 선택하지 않고 우회했다.

코코로와 마주하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서.

"준비는 되셨습니까? 여기서부터는 일직선 게다가 다른 경비원도 많이 있습니다. 한시도 발을 멈춰서는 안돼요. 누가 말을 걸어도, 무엇을 봐도 출구까지 뛰어야합니다. 그럼 거기에 탈출을 도울 협력자가 있을겁니다."

"코코로는 어디 있는데요?"

"저희도 파악해보려고 했지만 당주가 되신 지금은 무단으로 위치 파악을 할 수가 없어서.."

"하아..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니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데요.."

"하지만 저택 어딘가에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직원 배치가 바뀌고 있어요. 오쿠사와님이 도망친걸 알아차린거 같군요."

아직 팔불출 기미가 빠지진 않았던건지 좀 자랑스러운 얼굴이다.
이럴때에 우리에게 위협적인 사실을 뿌듯해하는건 질타해야 마땅하지만 오랜만의 인형옷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는 나는 방치하기로 했다.

좁은 시야와 시간이 지날수록 올라오는 열기, 약을 먹은 부작용으로 아직도 비틀거리는 발걸음.
오기와 각오로 무장한채 막무가내로 발을 움직인다.
여기서 잡혀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일심으로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나아간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할 수 없다 포기하고 탈출시켜준다는 검은옷의 말조차 거절한채 수갑에 묶여 코코로를 방에서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또는 코코로를 마주하지 않은채 비밀통로를 통해서 도망가버렸을지도.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포기도 도피도 선택하지 못하고 위험하고 비효율적인 도박에 매달리니까 사람의 변화는 예상 할 수가 없다.

그래, 너만큼이나 나도 이 몇년 사이에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이제 우리는 과거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
지독히 꼬이고 얽매인 일방적인 관계는 결국 둘 다 상처입히는걸.

"오랜만이야 코코로. 못 본 사이에 많이 아름다워졌구나."

"어머, 미셸! 오랜만이야! 미셸도 못 본 사이 더 듬직해진거같네. 그런데, 인형옷을 입는 사람은 못봤니?"

호화 여객선에서 봤던 매혹적인 붉은 드레스.
평소에 입을 옷은 아니니까 일부러 지금의 체형에 맞춰 준비한 무대의상인것일까.

예상대로 과거로 되돌리고 싶어하는 코코로는 또다시 내 존재를 짖밟고 괴로운것에 눈감은채로 보고싶은것만을 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대로면 다시 똑같은 끝을 맞이 할 수 밖에 없는걸 너는 알고 있을텐데.

항상 어딘가 나보다 날카로웠던 네가 지금은 나조차 알고 있는 사실에 눈을 돌린다는게 슬펐다.

"인형옷을 입는 사람은 언제나 걱정이 많으니까. 오늘도 누군가를 도우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야. 이래봬도 꽤 유능하다구?"

"흐음.. 오늘은 꼭 만나고 싶어서 겁쟁이인 인형옷을 입는 사람을 위해서 비밀통로도 지키게 했는데 오지 않아서 기다렸어. 무엇이 문제였을까? 정말 많이 준비했는데 하나도 걸리지 않다니."

역시 비밀통로라던가 전부 알려져있었구나.
곳곳에 함정이 쳐져있다던가 갑자기 츠루마키저택이 몬스터하우스라도 된 것처럼 느껴져서 떨려온다.
이것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검은옷의 사람도 다소 당황한 기색. 자신이 의심받았을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코코로는 감으로 행동하고 충동적인데다가 터무니없는 발상을 하지만 원래부터 머리가 나쁜것은 아니었다.
그저 타인의 이해를 요구하기보다 자신의 감정이 앞서는것 뿐으로.
이런 일에는 오히려 제격이지 않았을까.

"인형옷을 입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하려고? 코코로는 이렇게까지해서 무엇을 하고 싶은 거야?"

"후후. 물론 즐거운것을 하는거야. 거기에 인형옷을 입는 사람도 미셸도 함께가 좋기 때문에! 카논도 찬성했어. 하로하피에는 두명이 꼭 필요하다고. 미셸도 그렇겠지? 하로하피를 소중히 생각한다고 말해줬잖아."

억지로 끌려서 하게 되었던 하로하피이지만 이제는 소중해졌다고 말했었을때 기뻐했던 모습 그대로 코코로는 나에게 계속 하자?하고 순진하게 웃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몹시 위화감이 넘쳐서 코코로의 웃음조차 일그러져보였다.

어째서 함께 즐거운것을 찾자고 하는데 눈은 웃지를 않는거지?
설득하듯이 말하고는 있지만 네 손에는 흉흉하게 빛나는 수갑. 절대 미셸의 두꺼운 털투성이 손목에는 맞지 않는 사이즈인데.

게다가 뒤에는 여러명의 건장한 SP라니.
정말 코코로답지 않았다.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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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햇살이란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란 바로 당신이 아닐까?

처음 라이브 스테이지에 서서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을때 등을 곧게 편채로 한껏 스테이지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사전협의로부터 어디서 구해온건지 모를 의상, 곡까지 전부 당신이 이 공간의 모두를 웃음으로 만들고 있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른다.

마치 모두를 평등하게 내리쬐는 햇살처럼 그 소중함을 대단함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노력 할 수가 있지?

샴페인골드의 머리카락과 호박색의 눈동자, 보장된 미래와 무엇을 하든 용서된 환경을 타고 난 나는 겉모습이야말로 당신보다 더 빛이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항상 실패하면 어떻하지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하고 그림자에 파고들려고 하는 나는 당신과는 너무나 달라서 모두를 웃음으로 만든다는 당신의 포부도 순수하게 믿을 수 없다.



"사람들은 어딘가 하나는 결여된 부분이 있다던데 미사키는 그런부분이 없는 걸까."

선상파티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다는 카논씨와 함께 카페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떠오른 화제를 말해 보았다.

3인방이 밴드연습때에 새로운 퍼포먼스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난리를 부릴 때마다 같이 말리다보니 친해진 카논씨는 이제는 미사키가 나랑 같은 반인것도 미셸이 미사키라는걸 나에게 부정하는것도 알고 있다.
알고서도 미셸에 대해서 화를 내거나 의심하지 않는 것을 보면 미셸 덕분에 웃게 됐다고 진심으로 고맙다고 생각하는것이겠지.

순수한 믿음이 눈부셨다.

방금까지 파티가 얼마나 화려할지 듣고서 너무 큰 스케일에 당황하고 있던 카논씨는 갑자기 바뀐 대화의 주제에 홍차를 한입 마시고 진정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덤벙되거나 심각한 길치이긴 하지만 카논씨는 제일 미셸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을 알면서 그 터무니없는 꿈에 따라가고 있으니까.

"미셰.. 그러니까 미사키짱이 우리를 모은것 말이야. 그건 혼자서는 세상 모두를 웃음으로 할 수 없다는걸 알아서가 아닐까? 그런데도 미사키짱은 결국 모두를 우리에게 말하진 않아."

"뭐, 그렇죠. 진짜 곰이라고 말하면서 정체를 숨긴다거나.."

"아니. 그런게 아니라.. 음... 이번 라이브 미사키짱이 갑자기 하자고 했었지? 무리라고 하는 코코로짱을 억지로 붙잡아다가 콧노래 부르게 시키고."

"하아.. 모두의 앞에서 콧노래 부르는거.. 정말 부끄러웠는데. 근데 그게 왜?"

연습날 조금 늦나 싶었는데 갑자기 문을 쾅 열고 나타난 미셸은 폭풍처럼 이리저리 그모습으로 물구나무를 서거나 하구미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더니 돌연 라이브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고서는 이왕이면 신곡을 만들자고 나에게 억지로 콧노래를 부르게 하더니 허둥지둥 사라져서 다음날 곡을 가지고 왔다.
학교에서 본 미사키의 눈 밑의 다크써클을 보자면 밤을 지세워서 작곡한걸까.

"그거 일부러 억지로 모두가 참여하게 만들었다는 상황을 연출한거라고 생각해. 라이브를 그냥 하자고 했으면 코코로짱이라던가 나는 절대로 수긍하지 않았을거잖아?"

"그렇죠.. 이유도 모르고 왜 갑자기 하게 됐는지 물어보지 않을까요?"

"그 공원에서 애들이 라이브 보고 흥분해서 멋졌다고 달려들었을때 들었는데 그중에 한명이 전학을 가게되어서 그것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기 힘들었다는거야. 미사키짱은 그걸 듣고 용기를 주겠다고 했나봐."

"...그런 이유로 하루만에 곡을 만들어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였다.
그 단 한명을 위해서 도대체 얼마나의 노력을 들여 라이브를 한 거지.
세상 모두를 웃음으로 하자고 하는 사람인데 꿈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비효율적이다.

"봐봐. 미사키짱이 억지로 이유 설명도 안하고 라이브를 하자고 한 이유. 이거야. 미사키짱은 모두를 웃음으로 만들자고하지만 다른 사람이 여기에 동의해줄거라고 생각하지 않는거 아닐까. 그러니까 설득하기보다 전부 자신이 억지로 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거지."

"아.. 혹시.."

"그래. 미사키짱, 사람을 믿을 용기가 없는걸지도. 아니면 지금까지 엄청 실패하고 이해받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네. 그래서 그렇게 교섭이라던가 노련한면이 있는걸지도.."

"카논씨 엄청나게 미셸을 잘 보고있네요."

나처럼 어쩔 수 없이 어울려주고 있는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린것을 주워서 이해하려고 하고 있었다.

"후에에.. 그런것은 아닌데..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니까. 그런걸지도 몰라. 다른 사람의 웃음을 위해서 무리하는 모습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지잖아?"

나는 그런 카논씨라면 이번에 미사키가 내 권유 한마디로 여태껏 해오던 일을 그만둔 이유를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두명과 달리 미셸이 제대로 사람이라고 인식하며 이해하고 그럼에도 세상을 웃음으로 하려는 활동에 동참하는 카논씨이니까.

"으으.. 그런걸 착하다고 하는 거라구요. 나는.. 아직도 바보같다고 생각해버리는데. 카논씨 미사키가 밴드활동 이외에도 아르바이트 하고 있다는거 알아?"

"인형탈 아르바이트를 했다는건 알고 있는데. 그걸 말하는건 아니지?"

"..내가 선상파티를 초대한것만으로 아르바이트처를 바꿨어. 못가겠다고 거절해도 상관없을텐데 왜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붙이는걸까."

식은 커피가 몹시 쓰게 느껴졌다.
타인이 자신때문에 바뀌는것은 무척 무서운 일이었다.
그것도 정말 아무탓도 하지 않고 당연하다는듯이 희생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모르고 무언가를 포기하게 만든다는건 내가 눈치채지 못했으면 영원히 그 희생을 몰랐을거라는게 너무 두려웠다.

나 때문에 미사키가 언젠가 웃음을 잃는다면 나는 참을 수 없을것이다.

"그것은 달라 코코로짱. 미사키짱은 코코로짱 때문에 희생한게 아니라 코코로짱을 위하서 바꾼거야. 웃기를 바래서 미사키짱이 원해서 한 일을 그렇게 깍아 내리면 안돼."

"네?"

"중요한 친구라고 했다고 했지? 친한 친구를 위해서 약속시간에 맞춰 스케쥴을 바꾸는건 순수한 호의지 희생이 아니잖아. 미사키짱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면 안돼."

"하지만.. 결과적으로 계속 해오던 아르바이트를 관둔것은 사실이잖아요. 저의 사정에 맞춰서."

게다가 인형탈을 빌리던 아르바이트처를 관둔것은 앞으로의 활동에 지장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미사키라면 어떻게든 할지도 모르지만 역시 부담을 준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미사키짱이 해준것이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큰 일이었으면 코코로짱이 해야 하는 것은 딱 하나뿐이 아닐까?"

"네? 음.. 인형옷을 준비해준다던가?"

"그런게 아니야! 아니.. 미사키짱의 부담이 줄어든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나는 반대하진 않는데.. 흠, 흠. 내가 말하는건 미사키짱한테 고맙다고 말하고 웃어주는거야. 그게 최고의 보상이 아닐까."

자신이 한 말이 딱 적절하다고 생각했는지 활짝 웃으며 스스로 끄덕끄덕 납득하는 카논씨는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미사키에게 한발자국 더 다가간것 같았다.

타인을 이해한다는것은 무척 어렵고 가끔은 자신의 주관을 굽혀야 할 때도 있다.
그것을 이렇게 태연히 해내는 카논씨는 실은 매우 용기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미사키는 어쩌면 자신에게 부족한것을 가진 사람들은 밴드에 불러모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미사키에게 부족한 부분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래도 미사키짱이 코코로짱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건 사실인것같네. 반애들 중에서 미사키짱이 미셸이라는 것을 아는건 코코로짱 뿐이지? 들킬 위험을 감수하고도 밴드를 같이 하자고 한거니까. 나름 의지하고 있는지도 몰라."

"하아.. 단순히 다른 애들이 절 피하니까 들키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거 아닐까요. 게다가 미사키의 말과 제 말이 다르면 애들은 전부 저쪽을 믿을거라고요."

"..진짜 미사키짱이 그렇게 행동할거라고 생각해? 코코로짱은 의외로 미사키짱을 보지 않는 모양이네."

카논씨는 통성명도 한지 얼마 안된 나랑 미사키의 사이가 도대체 얼마나 친했다고 생각한걸까?
꽤 당황했는지 다시 홍차를 한입 마신 카논씨는 조금 곤란한듯이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고서는 결심한듯 나를 직시해왔다.

"코코로짱이 진짜로 미사키짱을 알고싶다고 생각한다면 좀 더 미셸을 자세히 보는게 어떨까. 그것만으로 많은게 바뀔지도 몰라? 인형탈로 둘러싸였다고 미사키짱이 미사키짱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지금도 제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니, 코코로짱은 항상 연습실에 오면 멀리서 방관하고 있어. 자신은 그저 말려들었다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러니까 미사키짱이 아무리 코코로짱에게 웃음을 짓게 하고 싶다고 해도 똑바로 받아들이지 못하는거야."

무슨 의도인지.
왜 하필 나에게 그러는건지.
그런것만을 생각해서는 상대의 진심을 마주 볼 수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고서는 후에에하고 혹시 화나게한건 아니지? 하고 눈치를 살피는 카논씨에게 괜찮다고 달래고서 나는 내가 사실 미사키를 알고싶다고 생각하고선 실은 무서워서 피하고 있는건 아닌지 생각했다.

내리쬐는 햇살을 빗맞는건 따스하지만 뙤약볕에 정면으로 그슬리는건 뜨거워 화상을 입을지도 모르니까.
그럼에도 온기가 따뜻하니까 이유를 붙여 그늘로 되돌아가는길은 무시한다.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면 SP도 있으니까 밴드를 나가는걸 막아도 소용이 없을 텐데.
정말 미사키의 사정을 알고싶었다면 붙잡아서 강제로 인형탈을 벗겨 털어놓게 하면 될텐데.

하지만 그러면 의미가 없을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아직 이 밴드에 있는거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가까운 항구에 선 여객선은 나가 바란대로 아주 화려하고 호화로운  장식으로 가득했다.
그야말로 누구나가 상상 할 수 있는 영화속의 선상파티를 형상화한 모습은 이런 억지를 되도록 부리지 않으려고 해 온 나에게 약간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을 들게 했지만 이정도면 아무리 터무니없는 미사키라도 당황해서 스스로를 감추는걸 잊을지도 몰랐다.

이 배에 타는 순간 숨을 인형탈도 도망갈 공간도 없어지니까 이쪽이 바라는데로 어울려줄 수 밖에 없겠지.
속이는것 같아서 조금 거북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다시 기합을 넣는다.

싫다고 한 나를 하로하피에 집어넣은건 너니까 이정도는 상관없겠지?

"참으로.. 덧없어.. 밤하늘 아래에 이토록 멋진 무대라니. 초대해줘서 고맙군, 아기 고양이. 그 붉은 드레스도 선상파티에 정말 잘 어울리는걸."

"와! 이게 우리가 탈 배야? 정말 크다! 당장 달려가고 싶은데.. 코코롱 친구는 언제 온다고 했어?"

아무것도 모르는 카오루씨와 하구미는 그저 내가 말 한 선상파티에 대한 기대감이 큰지 어서 타고 싶어하는것 같다.

반면에 카논씨는 이번 여객선 초대에 대해서 의문을 품은 걸까.
아니면 저번에 카페에서 한 대화에서 의심갈만한 행동을 해버렸던건지도 모른다.
그저 친구를 놀기위해서 초대했다면 내가 그렇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을테니까.

사실 선상파티 초대를 취소할까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거절 할 수 없다는것을 알고 함정을 파서 네가 약점을 드러내길 바라기에는 이 며칠 너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아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런 이유를 솔직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용기도 없었으니까 나는 네가 무슨 이유를 대든 이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랬다.

"코코로짱. 미사키짱을 이 선상파티에 초대한거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서라는 말은 다 거짓말이지? 애초에 5명이든 4명이든 이 큰 여객선에 어울리지 않은 숫자잖아."

오히려 춤을 출 파트너를 맞춘다면 4명인 짝수가 맞는 일이었겠지.
저기 두명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홧김에 저질러버린 일에 개연성이 존재할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알아채도 상관없다는식의 거짓말.

"미셸로는 오지 못한다고 하니까요. 우리끼리만 놀면 미사키에게 미안하잖아요. 그러니까 초대한거에요. 안온다면 어쩔수없다고 생각하지만."

안올리가 없다고도 생각하지만.

"코코로짱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데 역시 5명이서 놀기에는 너무 큰 여객선이 아닐까? 후에에.. 길 잃어버릴거 같아.."

더 말해도 바뀔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카논씨도 여객선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미사키에게서 미셸을 떼어놓으려는 목적으로 장소를 준비한것은 좋지만 역시 너무 호화로운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후회하게 된다.

"안녕. 코코로. 진짜 화려한 여객선이네. 못찾으면 어떻할까 생각했는데 멀리서도 한번에 찾았어."

미사키가 약속시간에 딱 맞춰서 태연하게 나타나서 아까까지 역시 그만둘까하던 생각이 전부 날라갔다.
선상파티라고 했는데 어디 집 앞이라도 잠깐 나갈때 입을 법한 편한 복장에 모자.
검은곰 마스코트는 미셸이란거 사실 숨길 생각이 없는건가 싶을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카오루씨와 하구미에게 인사하고 통성명까지 하는 모습이 나에게 헛점을 보일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것 같아서 어느새 죄책감은 날라가버리고 각오를 다졌다.
절대로 당황하는 모습을 봐 줄 테다.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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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더 알고 싶다니, 무슨 의미야?

 세상 모든 황금을 가득 안고 있다고 생각했던 눈은 바닷가의 노을빛처럼 불그스름한 열망이 깃들어 있었다. 태양빛은 뜨거워. 자칫하면 눈이 멀어버릴지도 몰랐다. 마음이 술렁여, 눈 안에 들어있던 열화가 종이에마저 번진건지 쥐고있던 티켓마저 뜨거운 것 같았다.

 놓칠 것처럼 떨리는 손을 붙들었다.
 이따금, 아니 꽤 자주 코코로는 그러한 눈으로 자신을 보았다. 그 눈 안에 있는 제 자신이 불타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끔.

 그 눈을 가린다면 어떨까. 미사키는 종종 코코로의 눈을 제 손으로 가리고 싶었다. 가벼운 충동이었으며, 몹쓸 생각이기도 했다.

 우습게도. 있는지도 몰랐던, 마음 한구석 자리 잡은 욕심은 어느새 몸을 부풀려 어깨를 치며 지나가고 있었지만, 미사키는 그 제스쳐를 모른 채 했다.

 세상은 푸르른 봄날처럼 따스했는데, 갑작스러운 여름이었다. 난 오히려, 널 더 알고 싶어졌다.

 다른 이의 웃는 얼굴은 따사로운 봄이었고 소중한 사람들과 지내는 시간은 풍족한 가을이었고, 당신은 여름이었다.

 코코로, 당신만이 여름을 나타내는 그 모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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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르바이트? "

 한참 여객선을 단장하고 있어야할 검은옷 SP에게 통보처럼 들려온 말에 츠루마키 코코로는 이벤트를 짜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선글라스를 낀 검은옷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로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오쿠사와님이 주말 약속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평일로 조정했습니다. "
 " 아니, 아르바이트 한다는 소릴 처음, 듣는데? "

 조금 기막힌 심정으로 물어보면,

 " 인형탈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하루 뒤, 시간 제약 없이 주 3일 카페 아르바이트를 구한 걸로 확인되었습니다. "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 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머리 아파. 코코로는 미사키에게서, 아르바이트의 아-자도 들은 적이 없었다.

... 그러고보면 당연한가. 생각해보면 방과후에 만나는 건 항상 미셸이었다.

 미사키에게 이후 무엇을 할 거냐는 단순한 물음도 그 속을 알고 싶다는 생각에 가득 차 물어보지 않았다. 오늘의 전면승부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애프터 신청이었으며, 보통 때라면 교실에서 안녕하는 날이었을테지.

 알면 알수록 혼란스러웠다. 웃는인형탈 안에선 무슨 얼굴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째서 그렇게 무리하는거야?

 미사키는 밴드 활동날을 제외하고 가장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는 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 교실, 아니 학년 대부분이 곤란한 일이 있다면 미사키를 가장 먼저 찾았다.

 작곡도 작사도, 서클날짜 조정과 스테이지의 마련, 심지어 퍼포먼스 준비도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그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분홍 인형탈을 쓰고!

 그건 성실하다거나 근면하다는 단어와 멀었고, 헌신이나 희생에 근접했다. 정말로. 어쩌면 이번 파티의 초대도 미사키를 무리시켰던 게 아닐까 생각했더니, 절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쓸어내린 코코로는 기어이 펜을 놓아버렸다.

 미사키의 미소가 생각났다. 조금 숨이 막혔다. 흐릿하고, 희미하며, 어렴풋한 동시에 이 세상 모두가 사랑스럽다는 듯 다정한.

 " 조정된 아르바이트 날, 언제인거야? "
 " 내일 오후 7시부터입니다. "
 " ... 알아와줘서 고마워. "

 차라리 연기하고 있는거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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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일까?

 검은옷 사람들이 마련해준 GPS는 상점가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꼭 미행을 하는 것만 같아 가슴 한쪽이 쿡쿡 아팠지만 모두 미사키를 위해서야. 복잡미묘한 호기심이 양심을 짓누르고 승리한 것뿐이지만, 코코로는 그렇게 합리화를 마쳤다.

 기실 아침까지 이어졌던 망설임은 조회시간의 대화 이후로 말끔히 사라진지 오래였다.

 - 에, 오늘? 오늘은 딱히 별 일 없는데.

 알려주고 싶지 않은건지, 정말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코코로는 골목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풍스러운 건물 문 앞까지 와서야 밝히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을까? 같은 생각을 했지만 코코로는, 어쨌든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좋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저것 많은 변명을 다 떨궈내고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오쿠사와 미사키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코코로가 가장 처음 본 것은 깔끔한 인테리어였고, 아기자기한 소품들이었으며 굽이 낮은 구두였다.

 그리고 세련된 외안경, 핏이 그대로 살아난 어두운 연미복에 검은 나비 넥타이. 평소 하고 있던 단발과 달리 꽁지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오쿠사와 미사키.

 " 어서오세요, 주인ㄴ.... ... "

 눈이 마주친 순간 누가 먼저 어색한 얼굴을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미사키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일할 땐 언제나 냉정, 침착. 옷매무새를 빠르게 고친 미사키는 생각지도 못한 것을 본 얼굴을 한 코코로를 살폈다. 당당한 기색을 봐서 실수로 온 것 같지는 않고, 알고 찾아왔다기엔 많이 굳어있다. 사실 어느쪽이든 미사키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떨어지지 않는 시선은 조금 초조해지게끔 만들었다. 많이 이상한가? 답답함에 손을 들어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 숨통이 조금 트이는 느낌에 미사키는 어색한 얼굴을 싹 지웠다.

 " 처음 오신건가요, 주인님? "

 상냥한 미소, 부드러운 어조, 살짝 달큰한 목소리. 주인님. 퍼뜩 현실로 끌어내려진 코코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정갈히 울리는 낮은 구두굽 소리가 무척 낯설었다. 미사키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 걸어가는 코코로는 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미사키가 토끼귀를 장착하고 있었다면 정말로 동화속 체험이라 착각했으리라. 토끼 귀... 미셸처럼 곰 귀는 어떨까. 고양이, 개, 개구리, 종래엔 뱀의 귀가 있던가를 생각하던 코코로는 작은 방으로 안내받았다. 미사키마저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을 때, 멈춰있던 토끼의 시계는 째깍 돌아갔다.

 " ... 깜짝 놀랐네, 코코로가 아닌 줄 알았어. 이런데 오리라고 생각을 못했거든. "
 " 나 혹시 못 올 곳 온거야? "
 " ... ... 그런 건 아닌데. 내 또래는 이런 컨셉 카페에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어서... 이상하게 생각해. 그래서 코코로를 볼 수 있을 줄 몰랐어. "
 " 나,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 "

고마워.

한참이나 지나, 나직이 흘러나온 말에 코코로는 빤히 미사키를 바라보았다.

 " 미사키는 그래서 무슨 컨셉이야? "
 " 아 음... 집사, 려나. 그래서 카운터 보고 있었어. 평일엔 손님 없지만. "
 " 미사키, 나도 손님이야. "

 말문이 막힌 듯 우물우물.
 곤란한 시선으로 방 안을 살피던 미사키는 이내 포기한 기색으로 힘없이 웃었다. 코코로의 말은 손님처럼 대해달라는 뜻이었다.

 " 정말로? "
 " 컨셉 카페지? 그렇다면 상시 컨셉인거야. 우린 지금 다른 세상이고, 이 카페 밖을 나가면 화들짝 꿈에서 깨는 것처럼 현실로 돌아오는거지. "

 미사키의 눈이 느리게 꿈뻑였다. 어색하게 낮은 채도의 하늘빛이 또륵 굴러갔다. 어떡하면 좋지, 이 애를. 다른 세상란 단어를 혀속에서 굴려보던 미사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네 말이 맞아. 시간도 자유로 정할 수 있고, 시급도 일의 난이도에 비해 많은 아르바이트다. 그치만 미사키는 이 아르바이트에는 즐겁게 웃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하고 있었다.

 코코로의 눈엔 또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를 더 알고 싶다던 코코로의 목소리가 노래가락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것도 그 일환인걸까. 미사키는 눈치를 잘 살피는 사람이었고, 그 속에 강렬한 호기심이 들어있는 것도 알아챘다.

 그러나 여긴 네가 초대한 여객선도 아니고 날짜도 다르며 네가 생각한 상황도 정반대일텐데.

 뜻대로 되어있지 않은 어울림에 안타까움을 느낀다면 이상할까.

 " 난 지금, 코코로의 집사인거야. "

미사키는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잘 알았다.

 " 그러니까... 따로 붙어있는 설정은, 집사와 주인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이 다음은 애드리브라는 걸로. "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알았다.
코코로와 이런 걸 하게 될 줄 몰랐는데. 계속 소파에 푹 파묻혀 있는 코코로의 앞까지 다가가 등받이에 손을 짚어 구부렸다. 손에 닿은 푹신한 감각이 비현실적이었다. 허리를 숙여, 자칫하면 코끝이 닿을 정도로. 코코로의 숨결은 기묘한 환희와 함께 등줄기를 쭈뼛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다면, 전력을 다하자.

 " 주인님. "

 이곳이 현실인 것처럼.
 상대의 반응이 선명이 닿아온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고 속눈썹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당황한걸까, 찬란한 호박빛이 정처없이 흔들렸다.

 미사키는 주인밖에 모르는 집사였고, 그저 아주 가까이서 그 눈을 보고 싶었다.

 " 깨워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소파에서 주무시는 건 몸에 좋지 않기에. "

 나오는 말들은 연극대본을 읽듯 조금은 무감각하다. 본래라면 이쯤 떨어져야 했지만, 미사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나의 계절을 모두 모아 담아낸 눈은 제 자신마저 그 계절에 있는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아, 그나저나. 이건 위험하려나.

 코코로의 눈이 승부욕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계속 보고 있었으니 알 수 있어. 하지만 대체 어디서 저 성정을 건드렸지?

 이어지려는 생각을 멈추고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리려던 미사키는 돌연 목을 부드럽게 감싸와 끌어당기는 그녀에, 깨달을 새 없이 몸을 지탱하고 있던 팔에 꾹 힘을 줘 브레이크를 걸었다.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다행이라 생각했더니 머리카락 안쪽으로 손이 파고 들어와 꾹 누른다. 힘에 이길 수도 없이 가볍게 톡- 하고 이마가 부딪힌다. 목 언저리를 달랑거리던 넥타이가 기어코 떨어져 코코로의 무릎 위를 어지럽혔다. 시야가 전부 그녀의 색이었다.

 " 흐응... 이런 자세로, 그런 얼굴로. 안 일어났으면 뭘 하려고 했어, 미사키? "

 아주 작게 속삭여진 목소리는 꽃잎의 생기를 가득 머금고도 위험한 매력을 품고 있어서, 격정적인 멜로디로 변해 머릿속을 뛰어다닌다. 장난스러운 웃음을 걸친 그녀는 마치 새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천진해 보였다.

 그 속에 승리에 취한 우월감을 발견하는 건 무척 쉬워서.

 아~ 정말, 위험하다구요 코코로씨.
 입속을 마냥 맴도는 경고를 애써 삼킨 미사키는 숨을 살짝 멈췄다.

 저기,

 " ... 주인님의, 눈이 너무 예쁜 탓입니다. "

 이걸로 웃어준다면 좋겠어.

 모두를 웃게 하고 싶다는 자신만을 위한 포부는 한껏 비난 받고, 우스꽝스레 과장된 몸짓은 넘치게 비웃음 받았다. 누군가를 위한 행동은 이상한 취급 이상이 되지 않는 날들.

 고스란히 기억으로 남은 시간들.

 상처라기엔 가볍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기에는 몇 번이고 떠오르는.

 미사키의 짙푸른 눈이 침체되었다. 외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은 시리게 얼어붙어 일렁인다. 코코로는, 가면 속 오쿠사와 미사키의 편린을 엿본 기분이었다.

희극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오쿠사와 미사키는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최대한 과장되고, 불규칙한 높낮이로. 대중들에게 발표를 하듯.

 " 아, 그 어떤 보석을 가져와도 당신의 눈만큼 반짝이진 못할겁니다. 어떤 빛도 이만큼 찬란하지 못하다고 확신합니다. 꽃과 나무, 맑은 햇살과 유성우. 사막의 빗줄기마저 제겐 당신보다 더 가치있지 못해ㅡ요. "

 전력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장대한 찬사를 담담히 읊조리는 목소리에 무엇도 말하지 못한 채로 몸에 힘이 빠져버렸다. 너무하잖아, 정말. 심지어 마지막에 삑사리 났지? 계속 눈을 감은 미사키의 귓가가 붉었다.

  당신의 아르바이트, 이렇게 엉망이어도 계속 하게 해주는거야? 푸슬푸슬 작게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을 새 없이.

 힘을 주고 있던 손에서부터,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꽁지를 완성시켰던 고무줄이 손이 떨어짐과 동시에 땅으로 떨어진다. 검은 머리카락이 허공을 춤춰, 단정한 단발이 되었다.

 코코로의 손아귀에서 자유로워진 미사키는 금방 떨어졌고, 일정 거리 떨어진 미사키는 코코로의 웃음에 자기가 더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제야 코코로는 깨달았다. 둘만이 있던 하나의 세상이 웃음으로 막을 내렸다.

마치 마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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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공책님(@Fox_nullnote)이 이어주셨습니다
Posted by 백오판다
,
3.


전화를 받자마자 울음을 터뜨린 카논씨는 근처의 카페에서 기다리라고 말하더니 급히 전화를 끊었다.
어디 카페에 들어가는지 듣지도 않고 끊다니 여전한면이 보여서 살짝 기뻤다.
이래저래 내가 떠난 후 변한것들만을 봐서 좀 지친 모양이었다.
카페의 이름을 메시지로 보내 둔 후 나는 좋아하는 커피를 시키고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지금껏 일부러 보지 않았던 하로하피 어카운트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내가 운영할 당시의 어카운트는 모두의 사진이라든가가 자주 올라왔으니까 혹시 보고 그리움에 져서 돌아가버릴까봐 들어오지 않았는데 지금은 확인해야 한다는 마음이 커졌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로하피의 어카운트는 최악의 상정은 피했는지 사라지진 않았던것 같지만 갱신은 훨씬 전에 멈춰있었다.
돌연 뚝 끊긴 갱신의 마지막날짜는 내가 사라진후의 아마도 대학의 입학날짜.
확신할 정도로 기억은 안났지만 마지막 게시글이 하구미의 말투인데 대학교 입학식이 기대된다는 내용으로 끝나있었으니까.

대학생활로 너무 바빠져서 활동을 유지 할 수 없어졌다던가?
어카운트 운영 말고도 하로하피는 즐거운일을 찾기에도 시간을 써야하고 작곡과 작사, 라이브의 준비는 내가 빠진 자리를 당장 검은옷들에게 맡기진 않고 자신들끼리 해보자고 할것 같으니까..

[미군이 없어졌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라이브 회장도 준비되었고 프로의 작곡가가 곡도 줬다는 하구미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나는 하로하피의 이후의 활동에 최대한 지장이 안가게끔 준비를 하고 떠났었다.

바빠졌다던가 준비가 힘들었으니까 같은 물리적인 이유로 하로하피의 활동에 지장이 갈거라면 카오루씨와 카논씨가 대학에 들어갔을때 이미 하로하피는 해체됐어야했다.

"하하.. 설마. 내가 그렇게까지 영향이 큰인물은 아니지. 안된다던가 할 수 없다는 말만으로도 잊혀지는데 아예 떠나버리면 인형옷 입는 사람이 있었다는것조차 잊는게 당연하잖아."

가슴이 꾹 조이는 느낌만으로 이름을 잊히는것에 두려워서 최대한 코코로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신경썼던 과거가 생각났다.
혹시 잘못해서 부정적인 말을 했을 때는 황급히 코코로의 이름을 불러 내 이름을 기억하는지 확인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그토록 떠날때 다른사람은 걱정해도 코코로는 태연할거라고 생각했다.

하로하피가 해체할만큼 큰일이 일어났다면 분명 코코로와 관련된 일이었을거다.
진심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게 아닌가 싶었던 츠루마키가의 재력도 신앙하다싶이 믿었던 코코로의 행동력도 포함하여 멤버 모두가 작든 크든 코코로의 영향을 받아왔었다.

"...코코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나 같은 사람이 다시 나타나지 않게 검은옷의 사람들이 제약을 걸었다던가."

이제 미셸을 관두겠다는 말과 함께 절절한 코코로에 대한 감정을 털어놨을때 검은옷의 사람들은 참혹한것을 보는것만 같은 표정으로 알겠다며 뒷수습은 그쪽에서 맡아주겠다고 말했었다.
츠루마키가의 재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을 검은옷의 사람들에게 나는 배제해야 할 대상이며 또한 안타까운 아이이기도 했겠지.. 터무니없는것에 욕심을 내버린 가엾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을때에 미국 대학교의 팸플릿을 전해준것도 검은옷의 사람들이었다.
지금까지 코코로의 보필에 도움을 받은것에 대한 예우라며 전해준 팸플릿은 츠루마키가의 재력에 기대면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내 성격에 맞춰 아무 관여도 없이 순수하게 추천할만한 대학 커리큘럼의 정리자료여서 나름 감동을 받았었던 기억이있다.

그런 상냥한 사람들이 코코로에게 제약.. 좀 상상 할 수 없는데..

"그럼.. 역시 코코로의 자의로 하로하피의 활동이 중지됐다는건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답이 나오지 않은 물음에 수 많은 경우의 수를 내밀어보며 고개를 든 카페 창 밖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는 카논씨가 보여 무심코 손을 흔들었다.




갑자기 전화를 걸었는데도 망설임없이 달려온 카논씨는 길치인것은 아직  고치지 못한 것 같지만  도착해서 나를 확인하고 푸욱 한숨을 쉬며 안심하는 모습에서 어른의 성숙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내 한손을 꼭쥐어들고 다행이다면서 안심하는 모습에서 포근폭신한 성격은 변하지않은것 같아서 위안을 얻었지만..

"카페 이름도 듣지 않고 전화 끊어서 놀랐어 카논씨."

"아. 미사키짱이 갑자기 돌아왔다니까 놀라서.. 그래도 이근처 카페는 다 알고있으니까 길을 잃지 않을 자신은 있었는데.."

정말 초조했었는지 자리에 앉고도 안절부절 손을 쥐었다 폈다하며 긴장감을 풀지 못했다.
그럴만한 행동울 한 자각이 있는 미사키는 아무 말 없이 손을 꽉 쥐어줬다.

예전이라면 부끄러워서 이런 행동같은건 못했겠지만 지금은 이런 사소한 행동으로 상대가 안심한다던가 하는 영향력을 알았다.
하여튼 미카엘은 얼굴표정이 들어나는 다른 DJ보다 행동으로 웅변해서 대중의 기분을 들뜨게 하는 존재니까.

하로하피에 대해 갑자기 알게 된 여러 사실에 휘둘려 다시 전처럼 잃을까봐 불안해하고 소속감을 느끼지 못해서 항상 확인하려던 행동이 되살아날뻔 했다.
그런 조급한 치기어린 행동들이 남들에게 자신의 불안감을 감화해서 상처입게 한다는것을 알게되었는데도.

"미사키짱은.. 모습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는데 많이 바뀌었구나."

"네? 그런가요.. 마주치는 사람마다 저라고 알아보던데.."

"으음.. 뭐라고 해야할까. 이런거 말이야. 미사키짱 늘 곤란한 사람을 돕는것에 열중해서 멋졌지만 항상 걱장됐거든. 필사적인건 좋지만 미사키짱까지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미셸일때의 미사키는 항상 열심히와 과로의 아슬아슬한 선을 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매번 스스로에게 타일렀지만 밤새 작곡하고 연습을 하는 날이면 조금 봐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미셸이 미사키란 것을 모르는 3인방이 그것을 이해해주진 못했지만..

하지만 그런것이 아니더라도 미사키가 남을 도울때는 어느한켠에 실패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늘 자신을 채찍 쳐 온것은 사실이다.
이 모든것이 실패하면 곧 내 책임이고, 이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고, 하지만 내가 노력했다고 내보이는것은 부끄러우니까 숨기고.
그러면서 알아주지 않는것에 대해서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타지에서 혼자 살게 된 미사키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생활해 나가면서 자신감이 생기게 된 것 같았다.
무엇을 실패해도 타인의 실수까지 책임 질 필요는 없고 노력한만큼 결과를 스스로 느끼면서 채운 자존감이 미사키를 여유있고 당당하게 만들어준걸지도 모른다.

"이곳을 떠나서 미국에서 생활했는데요. 거기서 여러가지 깨달아서요. 디제잉도 하고 작곡도 계속 하고 여행도 다니면서 좀 여유가 생긴걸지도 모르겠네요. 다시 되돌아볼까 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로.."

여러사람의 응원도 받았던게 생각났다.
주말 약속이 있었던 대학의 친구는 가끔 네가 무언가 무서운 얼굴로 고민하던것이 그곳에 있냐고 약속은 미안해하지 않고 힘내라고 해줬고 금요일날의 디제잉 알바에 나오지 못해 미안하다는 미카엘 어카운트에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다음주에는 꼭 보자며 걱정과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성을 잃었던게 바보같을 정도로 마음이 편해졌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 선배는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힘이 있는것 같았다.

"미사키짱이 나를 부른것은 그 되돌아보기의 일환인거야? 하로하피의 일? 아니면.. 코코로짱의 일이려나.."

코코로의 말마따나 제일 용기가 있는 카논은 의외로 날카로운 부분도 있어서 이렇게 나를 놀래킬때가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점 때문에 늘 결국은 빗나가거나 내 거짓말에 넘어가버렸는데 오늘은 진검승부라고 써야 할 만큼 진지한 눈으로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무엇이 있어도 캐묻겠다는 자세는 미숙한 시선으로 오해투성이인 과거를 좀 더, 조금만 더 이해해보려는 소극적인 이번 방문에는 부담스러웠다.
나는 이것을 계기로 내가 나를 탓하는 부분을 고칠 발판을 만들기 원했다.
쉽게 해결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도망가지도 않았을것이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부분을 냉정히 직시해버리는 성격이 어영부영 넘어가는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하로하피의 일. 딱 그것까지에요. 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지는 않은 인간이거든요. 카논씨도 알고있잖아? 나는 겁쟁이에 거짓말쟁이. 자기보신에 달리는 사람이란것을."

"미사키짱! 그렇게 스스로를 나쁘게 말 할 것은 없잖아!"

"맞아. 카논씨. 나는 그냥 냉정히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을 뿐이야. 하지만 그 모든게 나쁜것이 아니란것은 여기서 떠나고 나서야 알 수 있었지. 여기서 나는 내가 제일 나쁘고 제일 한심한 인간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

카논씨는 생각나는 일이 있는지 입을 다물어버렸다.
떠오르는것이 한두가지는 아니었을것이다.
하여튼 나는 무엇을 말하든 부정당하는 입장이었으므로, 그게 내가 하로하피를 걱정해서든 아니든 곰인형탈을 써서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면 들으려해주지 않았으니까.

나는 모두가 실패해서 슬픈것이 보고 싶지 않았다.
모두가 웃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지 않았으니까 내 눈에 보이는 세계만으로도 울지 않았으면 하는게 겁쟁이 나름으로 세계를 웃음으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이해하고나면 그런 성격도 나쁘지 않은게 아닐까 인정하고 장점으로도 생각할 수 있게 됐다.

겁쟁이이니까 좀 더 철저해질수있고 거짓말쟁이이니까 상대를 덜 상처입힐 수 있었다.
자기보신이라고 말하지만 자신이 피해입지 않는 선에서 타인을 도우려고 하는 것을 나쁘다고 하진 않는다.
무모하게 도우려다 다치면 곧 주변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결과로 이어지니까.

"소극적이라도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면 나도 나쁘지 않은 인간이라고 알게 됐으니까.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좋아하는일도 잔뜩이고 친구도 많이 사귀었고 아직도 디제잉하는데 가면을 쓰지만 미카엘이라고 하는 검은곰인데 많이 사랑받고 있어서 내가 낳은 이 캐릭터를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어서.. 카논씨 우는 거야?"

모든 사람을 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건 아니지만 나름 상대를 잘 파악하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어느 부분이 카논씨를 울린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래 떨어져있어서 그 사이에 바뀐 카논씨를 내가 알지못하게 되었다면 슬픈일이지만 무언가의 트리거를 눌러버렸을지도 몰랐다.
연신 미안하다고 달래면서 등을 도닥여주었다.

식어가는 커피만큼 오랜시간이 흘러 훌쩍이는 카논씨의 눈물도 멎어 안심하고 다시 옆자리에 앉았다.
어느새 일어나서 꼬옥 끌어안아주고 있었다.
어릴때보다 이런부분에서 쑥쓰러움이 사라진건 스킨쉽이 많은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것일까?

"말하지 않으면 몰라. 카논씨, 나 미국에서 깨달은 중요한게 그거니까. 그거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되돌아왔어. 서로 말하지 않으면 오해만 가득하니까. 말하지 않고 이해하기를 바라는건 무척 어려운 일을 상대에게 강요하는거라고."

"..그것이 미사키짱이 여기를 떠난 이유야?"

"그건 아니지만.. 하나도 상관없다고는 할 수 없네. 하로하피의 모두는 중요한것은 말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뿐이잖아.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이해할거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지.. 나는 지속적으로 상처받아왔을지도 모른다고 최근 생각했지만 그건 물어보지 않은 내 잘못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기까지.. 미사키짱은 상처받았다는거네."

거짓말쟁이와 오랜 교제의 카논씨이다.
어설프게 돌려말해도 핵심을 쿡 찔러서 말해온다.
내 나쁜 버릇인 '결국 그것은 내 잘못이다'라는 것은 사실 너희도 잘못했지 않느냐는 원망도 담겨있다는걸 이미 알고 있겠지.

옛날일이 아니었으면 절대 말 할 수 없는 우회가득한 단어라도 본심인 말들.
탓하고 싶은것은 아니였는데, 상처입히고 싶지 않아서 여기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는 내가 저지른 행동으로 무슨 일이 벌어져있는지 알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나는 내가 떠나더라도 하로하피가 잘지냈으면 하고 바랬다.

"...이렇게 될까봐. 떠난거였어요. 더이상 여기 남아있어도 저는 모두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았거든요. 카논씨에게 이런 마음 들게하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이라도 이대로 헤어지는게 어떨까요? 전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모양인데.."

"아니. 미사키짱 이건 마땅히 미사키짱이 해야 할 말들이야. 우리가 모른척 떠넘긴 부담들을 스스로 떠안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것도 전부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어. 즐거운것만 찾고 부정적인것에 눈을 돌리면 그 부분이 사라지는것도 아닌데.."

"이미 끝난 일이잖아요. 묻어버리면 되죠. 카논씨가 부담 할 일이 아니에요."

"..내가 그렇게 의지가 안되는 사람이니? 미사키짱은 지금 그렇게 상처받았어도 날 배려하려고 하고 있어. 곤란해하면 난처해도 도우려고 달려들어 해내지 않고는 참을 수 없으면서 왜 그렇게 사람을 의지하지 않으려고해?"

대답 할 수 없었다.
나는 안전한길을 몇개도 준비해서 실패를 대비하는 성격이었다.
이것은 공적인 문제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카논씨처럼 진심으로 나를 도우려는 사람에게는 서운한 일이겠지.

지금이라면 말해도 되지 않을까?
옛날의 카논씨는 언제나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주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 주로 그 대상이 코코로인만큼 어떤 문제에서 결국은 코코로의 편을 들었다.

잠깐.. 그것은 오히려 떠난 근본의 이유라면 더 의지가 되지 않는가.
코코로를 사랑해서 코코로에게서 자신을 떼어내려고 했는데다가 거기에 확정된 미래란 존재하지 않고 츠루마키가의 후계자에겐 짐밖에 안되고.
애초에 코코로가 나를 좋아한다는 확신도 없고.
그래도 욕심을 내버리는 나는 카논씨에겐 용기를 나눠주는 구원자를 해치려드는 적이니까.
그러니까 믿을 수 있다.
내가 잘못된 길을 가려고하면 단칼에 내쳐주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왈칵 눈물과 함께 입이 트였다.

"세계 모두를 웃게 만든다고 하는거. 거기에 저는 포함되어 있었을까요? 괴롭다고 잊혀져버려서 필사적으로 이름을 기억해주기 위해 열사병 직전까지 인형탈속에 들어가고, 억지를 들어주기 위해서 밤을 새서 작곡하고. 거기에 보답을 바라는건 순수한 츠루마키가의 아가씨에게 무례한 일이었을까요."

갑자기 바뀐 분위기와 화제에 적응이 되지 않는지 놀란 얼굴을 하고서도 카논씨는 내 횡설수설한 말에서 중요한 본심을 주워보려고 필사적이었다.
나는 말하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검은감정에 짖눌려 상대에게 대한 배려라던가 주위의 시선이라던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은 전부 내팽개쳐버려서 뒷감당은 이미 머리밖이었다.

무서워하고 있던 일이 일어나버렸다.
제일 염려하던 상대도 아니고 사실 적당히 일부분만을 털어놓아 간을 보려던 상대에게 심장을 끌어내 내보이게 되버렸다.
물결치는 파도와 새소리, 높은 산의 메아리같은 아름다운것들로 감싸 묶어 희미하게 희석했던 감정들은 묵히고 묵혀져서 숙성되어 검붉게 곯아 터져나왔다.

"모른다던가, 이해하지 못한다던가 가르쳐주라는건 전부 나에게 떠맡기는거잖아. 괴로우니까 잊어버린다니 정말 타인을 생각하면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상처받아보지 않았으니까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진심으로 상대를 웃음으로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응, 응. 미사키짱 듣고 있어. 더 말해봐."

오열을 흐느끼는 내 등을 이번엔 카논씨가 다독이고 있었다.
포근한 품에 더 서러워져서 어미짐승에게 새끼가 그러하듯 팔을 돌려 끌어안아 더욱 파고들었다.
해묵은 감정이 실타래처럼 풀어내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감정을 털어낸다는것은 생각보다 훨씬 에너지를 쓰는 행동인지 속이 타는듯이 뜨거워져서 놓여있던 식은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사랑이란 감정을 이해하는지도 알 수 없고. 내 감정을 고백했을때 가르쳐줘라는 말을 들으면 전 어떻게해요? 거기서 나에게 맡기면 나는 언제까지나 죄책감을 가질텐데. 혹시 아무생각없이 즐겁겠다고 사귀자하면. 진심으로 사랑하는 저는 미래에 어떻게해요? 츠루마키가의 영애가 결혼하는것은 당연한 미래인데. 걸림돌일게 뻔한데 내가 붙들 수 있을리가 없잖아."

말하지 않고 없애버리려던 감정까지 토해냈을때 거의 탈진의 지경이던 나는 흐릿한 정신에 맡겨서 카논씨의 어깨에 체중을 맡겼다.
저보다 키도 크고 근육량도 많아 무거운 내가 기대자 휘청한 카논씨는 그래도 다부지게 넘어지지않고 받아들여줬다.

"미사키.. 미안해.."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 그런 목소리를 들은거 같았다.
Posted by 백오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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